definition | 고려시대 개혁군주이면서도 불운한 개인사를 간직하고 있는 왕으로, 서울 종묘와 경상북도 안동시·봉화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모셔지고 있는 인물신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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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조정현 |
정의 | 고려시대 개혁군주이면서도 불운한 개인사를 간직하고 있는 왕으로, 서울 종묘와 경상북도 안동시·봉화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모셔지고 있는 인물신격. | 정의 | 고려시대 개혁군주이면서도 불운한 개인사를 간직하고 있는 왕으로, 서울 종묘와 경상북도 안동시·봉화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모셔지고 있는 인물신격. | 高丽时代的改革君主,一生极为不幸,供奉于首尔宗庙和庆尚北道安东市,奉化郡等多个地区的人神。 “恭愍王”是高丽第31代王(1351~1374在位), 1341 年在其 12 岁时,去往元朝并滞留十年,1351 年继忠定王之后即位。恭愍王有效利用元明交替这一大陆政治局势的变动,为高丽的中兴尝试进行多种改革。但因 1365 年其王妃“鲁国大长公主”去世,恭愍王陷入哀伤,将所有国事交由辛旽,疏于朝政,结果被臣子所弑。恭愍王不仅在安东地区得到人们敬拜,在全国范围内也均以神被供奉。“恭愍王神”虽然是巫俗中信仰的王神之一,但其成为神的由来并不明确。似乎是因为击退元朝欲收复国境地区这一点和作为王却被臣子所杀的事实引起民众共鸣,日后被敬拜为神。恭愍王尤其在与村庄祭相关的祭祀中受到崇拜。最具代表性的事例可以列举首尔麻浦区东幕,庆尚北道奉化郡明湖面的清凉山山城村,安东市丰山邑水洞。此外,首尔市钟路区卧龙洞宗庙中也有恭愍王神堂。在传统社会中,将特定的历史人物作为共同体的神进行供奉的事例屡见不鲜。以安东为例,不仅恭愍王本身,就连他的母亲和夫人,儿子和儿媳,女儿和女婿等大部分家庭成员也被神化,从这点来看可谓是十分特殊的事例。 | Gongminwang era un rey del reino Goryeo, un reformista con destino y fin trágicos, que ahora se adora como una deidad en Seúl, la provincia de Gyeongsang-do y muchas otras partes de Corea. Gongminwang gobernó el reino Goryeo desde 1351 hasta 1364, subió al trono como el trigésimo primer rey, a la edad de 21 años después de morir el rey anterior llamado Chungjeongwang, tras pasar una década en China. Durante el período de la caída de la dinastía Yuan y la fundación de la Ming, el rey Gongmin aprovechó el tiempo de transición y aplicó muchas reformas para recuperar la prosperidad del reino Goryeo. Sin embargo, tras la muerte de su esposa, la Reina Noguk en 1365, el rey cayó en la desesperanza y delegó asuntos estatales a su asesor llamado Sin Don, en fin, fue asesinado por uno de sus súbditos. Gongminwang es venerado como una deidad no solo en la ciudad de Andong, sino también en muchas otras partes de la nación. En el chamanismo coreano, Gongminwang es el objeto de la veneración como un rey divino, no obstante, el proceso de su deificación no se conoce claramente, solamente se especula que así fue debido a la voluntad del rey para luchar contra la dinastía Yuan y su muerte hecha por su propio súbdito. Como una divinidad, Gongminwang se relaciona estrechamente con los rituales aldeanos, incluyendo aquellos que tienen lugar en Dongmak de Seúl, aldea de Cheongnyangsan Sanseong de Bonghwa y Sudong de Andong, ambos se encuentran el la provincia de Gyeongsangbuk-do. En Jongmyo, el santuario real confucionista en Seúl, hay un santuario dedicado a Gongminwang. La adoración a las figuras históricas es un fenómeno común en la religión popular en Corea. Cabe destacar que en Andong, no solo Gongminwang, sino también la mayoría de los miembros de la familia real incluyendo reinas consortes, príncipes y princesas son los objetos de veneración como deidades. | Gongminwang was a king of Goryeo (918-1392), a reformminded ruler who led a tragic life, now worshipped as a deity in Seoul, Gyeongsang Province and many other parts of the country. Gongminwang reigned from 1351 to 1364, taking the throne as Goryeo’s 31st king at the age of 21 after spending a decade in China. During the shift in China from Yuan dynasty to Ming, King Gongmin took advantage of the changing times and attempted many reforms towards Goryeo’s revival. Following the death of his wife Queen Noguk in 1365, however, the king fell into great despair and delegated state affairs to National Preceptor Sin Don, and was murdered in the end in the hands of his subjects. In Korean shamanism, Gongminwang is worshipped as a king deity, but the process of his deification is not clearly known, only speculated that it was due to the king’s attempts at fighting off Yuan China and also his death in the hands of his own subjects. As a deity, Gongminwang is closely related to village rituals, including those held in Dongmak of Seoul, Sanseong Village in Bonghwa, and Sudong in Andong, both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In the royal ancestral shrine Jongmyo in Seoul is a sanctum dedicated to King Gongmin. The worship of historical figures is a common phenomenon in Korean folk religion. It is notable that in Andong, not only Gongminwang but most of his royal family, including the queen consorts, princes and princesses, are worshipped as deities. | 상호참조 | [안동가송리동제](/topic/안동가송리동제)(592쪽) | 참고문헌 | 部落祭 (村山智順, 朝鮮總督府, 1937) 오봉산성 산신제와 당고사 (이남식, 한국민속학 16, 한국민속학회, 1983) 가송민속지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마실연구회, 1992) 안동의 동제 (안동민속박물관, 1994) 가사리 동제의 제물구성과 의미분석 (이숙희, 안동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6) 공민왕의 안동 몽진과 신격화 양상에 관한 연구 (권태훈,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공민왕 (종로문화원, 2000) 청량산일대 공민왕신앙의 분포와 성격 (한양명, 고려 공민왕과 임시수도 안동, 안동시·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2004) 안동지역 공민왕 관련 민속의 전승양상과 주민들의‘ 문화 읽기와 쓰기’ (조정현, 구비문학연구 30, 한국구비문학회, 2010) | 상호참조 | [안동가송리동제](/topic/안동가송리동제)(592쪽) | 참고문헌 | 部落祭 (村山智順, 朝鮮總督府, 1937) 오봉산성 산신제와 당고사 (이남식, 한국민속학 16, 한국민속학회, 1983) 가송민속지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마실연구회, 1992) 안동의 동제 (안동민속박물관, 1994) 가사리 동제의 제물구성과 의미분석 (이숙희, 안동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6) 공민왕의 안동 몽진과 신격화 양상에 관한 연구 (권태훈,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공민왕 (종로문화원, 2000) 청량산일대 공민왕신앙의 분포와 성격 (한양명, 고려 공민왕과 임시수도 안동, 안동시·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2004) 안동지역 공민왕 관련 민속의 전승양상과 주민들의‘ 문화 읽기와 쓰기’ (조정현, 구비문학연구 30, 한국구비문학회, 2010) | 내용 | 공민왕 또는 공민왕의 가족을 동신으로 모시는 [마을](/topic/마을)은 현재 안동 지역에만 9개이며, 봉화 지역에도 8개에 이른다. 경북 안동시 용상동, 예안면 신남리 구티미마을·정자골, 도산면 가송리·단천리·원천리, 풍천면 하회리, 풍산읍 수리 등 전체 49개 제당에서 동제(洞祭)를 지낸다. 대체로 청량산과 왕모산성 주변에 위치하며, 왕모는 바로 공민왕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공민왕뿐만 아니라 부인과 딸, 며느리, 사위까지 모두 섬겨지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제의를 지낸다. 전통사회에서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공동체의 신으로 모신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안동 지역에서 전승되는 공민왕의 신격화 양상은 왕은 물론 왕의 어머니와 부인,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등 가족 구성원 대부분을 신앙화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공민왕은 안동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에서 신격으로 모셔지고 있다. 공민왕신(恭愍王神)은 무속에서 신앙되는 왕신(王神)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공민왕이 신령으로 된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원나라를 물리치고 국경 지역을 회복하려한 점과 왕으로서 신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이 민중의 마음에 와 닿아 뒷날 신으로 모셔진 듯하다. 비슷한 예는 [사도세자](/topic/사도세자)(思悼世子)가 별상(別相)으로 받들어진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민왕은 특히 동제와 관련하여 숭배되었다. 서울 마포구 동막(東幕), 경북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청량산 산성마을, 안동시 풍산읍 수동(水洞)의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이밖에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종묘 안에도 공민왕 신당이 있다. 이 신당은 1395년(태조 4)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경복궁 및 종묘를 영건할 때 세워졌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종묘를 지을 때 북쪽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그와 함께 어떤 물건이 묘정(廟庭)에 떨어져 그것을 주워 보니 공민왕의 [영정](/topic/영정)이었다고 한다. 군신이 놀라 협의한 끝에 그 영정을 [봉안](/topic/봉안)하기 위하여 신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영정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그림으로, 공민왕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이밖에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그 뒤 매년 봄과 가을에 종묘 직원이 비공식적으로 제례를 드렸고, 이어 인근 주민들이 치성을 올렸으나 현재는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다. 이는 조선 초기에 왕실에서 공민왕을 인격신으로 모시는 전통이 민간에 전해져 마을신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내용 | 공민왕 또는 공민왕의 가족을 동신으로 모시는 [마을](/topic/마을)은 현재 안동 지역에만 9개이며, 봉화 지역에도 8개에 이른다. 경북 안동시 용상동, 예안면 신남리 구티미마을·정자골, 도산면 가송리·단천리·원천리, 풍천면 하회리, 풍산읍 수리 등 전체 49개 제당에서 동제(洞祭)를 지낸다. 대체로 청량산과 왕모산성 주변에 위치하며, 왕모는 바로 공민왕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공민왕뿐만 아니라 부인과 딸, 며느리, 사위까지 모두 섬겨지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제의를 지낸다. 전통사회에서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공동체의 신으로 모신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안동 지역에서 전승되는 공민왕의 신격화 양상은 왕은 물론 왕의 어머니와 부인,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등 가족 구성원 대부분을 신앙화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공민왕은 안동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에서 신격으로 모셔지고 있다. 공민왕신(恭愍王神)은 무속에서 신앙되는 왕신(王神)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공민왕이 신령으로 된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원나라를 물리치고 국경 지역을 회복하려한 점과 왕으로서 신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이 민중의 마음에 와 닿아 뒷날 신으로 모셔진 듯하다. 비슷한 예는 [사도세자](/topic/사도세자)(思悼世子)가 별상(別相)으로 받들어진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민왕은 특히 동제와 관련하여 숭배되었다. 서울 마포구 동막(東幕), 경북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청량산 산성마을, 안동시 풍산읍 수동(水洞)의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이밖에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종묘 안에도 공민왕 신당이 있다. 이 신당은 1395년(태조 4)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경복궁 및 종묘를 영건할 때 세워졌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종묘를 지을 때 북쪽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그와 함께 어떤 물건이 묘정(廟庭)에 떨어져 그것을 주워 보니 공민왕의 [영정](/topic/영정)이었다고 한다. 군신이 놀라 협의한 끝에 그 영정을 [봉안](/topic/봉안)하기 위하여 신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영정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그림으로, 공민왕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이밖에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그 뒤 매년 봄과 가을에 종묘 직원이 비공식적으로 제례를 드렸고, 이어 인근 주민들이 치성을 올렸으나 현재는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다. 이는 조선 초기에 왕실에서 공민왕을 인격신으로 모시는 전통이 민간에 전해져 마을신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역사 | 고려 31대 왕(재위, 1351~1374)으로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왕비는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공민왕은 12세가 되던 1341년에 원나라에 들어가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에 충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한 해인 1351년 11월 이제현, 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이듬해 1월에 몽골식의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을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였다. 공민왕과 신진사대부가 추진한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져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371년(공민왕 20)에 신돈이 제거되자 신돈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던 개혁정치도 중단되었다. 이처럼 공민왕대 마지막 개혁 시도인 신돈의 개혁도 중도에서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민왕은 원명 교체라는 대륙 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는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365년에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1371년에는 실정을 거듭하는 신돈마저 귀양 보내 사사(賜死)하였다. 공민왕은 1372년에 공신 및 고위 관직자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자제위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의 미소년 홍륜(洪倫)이 익비(益妃)와 통하여 익비가 임신하였다. 이를 환관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고하자 평소 후사가 없어서 고민하던 공민왕은 익비가 낳을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기 위해 홍륜 일파와 최만생을 모두 죽여 사실을 은폐하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만생이 먼저 홍륜, 권진, 홍관, 한안, 최선 등과 공모해 밤에 공민왕을 죽였다. 뒤에 이들은 이인임, 안사기, 경복흥 등에게 발각되어 효수(梟首)당하였다.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글씨에도 능한 공민왕은 특히 큰 글자에 뛰어났다.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千山大獵圖)」만이 전하고 있으며, 안동에 하사한「 안동웅부(安東雄府)」, 「영호루(映湖婁)」등 [현판](/topic/현판) 글씨가 남아 있다. 능은 현릉(玄陵)이다. | 역사 | 고려 31대 왕(재위, 1351~1374)으로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왕비는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공민왕은 12세가 되던 1341년에 원나라에 들어가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에 충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한 해인 1351년 11월 이제현, 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이듬해 1월에 몽골식의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을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였다. 공민왕과 신진사대부가 추진한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져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371년(공민왕 20)에 신돈이 제거되자 신돈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던 개혁정치도 중단되었다. 이처럼 공민왕대 마지막 개혁 시도인 신돈의 개혁도 중도에서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민왕은 원명 교체라는 대륙 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는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365년에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1371년에는 실정을 거듭하는 신돈마저 귀양 보내 사사(賜死)하였다. 공민왕은 1372년에 공신 및 고위 관직자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자제위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의 미소년 홍륜(洪倫)이 익비(益妃)와 통하여 익비가 임신하였다. 이를 환관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고하자 평소 후사가 없어서 고민하던 공민왕은 익비가 낳을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기 위해 홍륜 일파와 최만생을 모두 죽여 사실을 은폐하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만생이 먼저 홍륜, 권진, 홍관, 한안, 최선 등과 공모해 밤에 공민왕을 죽였다. 뒤에 이들은 이인임, 안사기, 경복흥 등에게 발각되어 효수(梟首)당하였다.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글씨에도 능한 공민왕은 특히 큰 글자에 뛰어났다.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千山大獵圖)」만이 전하고 있으며, 안동에 하사한「 안동웅부(安東雄府)」, 「영호루(映湖婁)」등 [현판](/topic/현판) 글씨가 남아 있다. 능은 현릉(玄陵)이다. | 지역사례 | 공민왕은 위대한 삶을 살았지만 믿었던 신하들에 의해 비극적 죽임을 당한 인물로서 무속에서는 왕신으로 모셔지며, [마을](/topic/마을) 단위 공동체에서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특히 안동 지역에서는 왕의 몽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신격화되어 있어 당신화를 통해 실제 역사적 경험과 신화적 상상력이 어떻게 신앙화의 과정에 투영되었는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안동 지역에는 풍산읍 수동의 국신당, 하회의 국신당[국[사당](/topic/사당), 중당], 청량산 산성의 공민왕당, 용상동의 공민당 등 직접적으로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신당 이외에도 청량산 일대의 부인당·딸당·며느리당 등 공민왕 가계의 신격을 모시는 마을이 산재하고 있다. 산성마을 공민왕당을 중심으로 여러 곳의 마을이 공민왕가계신(恭愍王家系神)을 모시고 있어 이 일대는 공민왕 신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공민왕이 안동에 몽진을 와서 남긴 여러 흔적 가운데에는 안동웅부나 영호루의 [현판](/topic/현판)과 같은 유형적인 부분이 상당수 전하고 있다. 하지만 안동 주민들의 역사적 기억 속에 새겨진 무형적인 의식에 대해서는 애써 조사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안동 지역에서 공민왕 관련 민속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공민왕 관련 민속은 현재까지도 제의적 연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청량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또 지금은 연행하지 않지만 공민왕과 관련된 제의적·놀이적 전통이 있던 풍산읍 수동, 풍천면 하회, 안동시 용상동 등과 놋다리 밟기를 연행해 온 안동시 구 성안·성밖 일대, 임하면 금소동 등지에서도 전승되었다. 또한 공민왕 관련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용상동 성황당토성, 남선면 신석산성, 도산면 선성산성과 왕모산성 등 산성 지역이나 삼태사묘와 청량산 청량사 등 기타 유적지에서도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풍산 류씨와 공민왕의 관계가 [사전](/topic/사전)(풍악서당의 토지 800 두락)을 하사할 정도로 밀접하였음과 공민왕의 몽진 경로를 이유로 들어 하회의 국신당도 원래는 공민왕을 모시는 당이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점차 고려왕에 대한 추모의 정이 약해지면서 지금처럼 국신당의 이름만 남게 되었다. 안동 지역에서 공민왕은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큰 손님의 위상에 있다. 공민왕의 안동 몽진은 안동 지역에 있어서 몇 안 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동시에 가장 영예로웠던 고려시대 안동의 역사를 증명하는 명확한 증거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안동과 고려의 인연은 고려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태조 왕건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견훤](/topic/견훤)과 싸우는 와중에 안동의 삼태사가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왕건을 도와 싸워 고려 건국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안동과 고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그러한 징표로서 안동은 도호부로 승격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동 출신 인물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현재 안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차전놀이 역시 이때 기원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삼태사를 시조로 하는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 등 3개 성씨는 여전히 이 지역의 주요 성씨로 자리 잡고 있다. 이후 안동은 고려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이러한 관계가 공민왕의 몽진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61년 12월 [혹한](/topic/혹한)의 강추위가 산하를 덮은 가운데 공민왕 일행은 안동으로 출발하였다. 공민왕이 개성에서 안동을 찾아 먼길을 떠나게 된 것은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수도를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왕이 수도를 떠나는 일을 극히 드문 일이다. 수도라는 개념은 대체로 왕이 기거하는 곳이라는 통념이 있었고, 이런 이유로 왕이 거처를 옮기는 곳이 임시수도로 결정되곤 하였다. 이처럼 왕이 수도를 떠나 타 지역으로 옮기는 예는 한국 역사에서 그리 많지 않다. 왕이 지역을 찾아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기에 특히 몇 달 정도를 머무르며 함께한 경험은 지역 주민들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던져줄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왕의 위상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대통령이 지역을 방문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문화적 충격을 던졌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국가적인 전란으로 인한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그 지역에 왕이 몽진하였다는 사실은 커다란 자부심과 함께 설화적 상상력을 높여 주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공민왕 때는 원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던 시기였고 이에 따라 고려 역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공민왕은 원나라와 이에 결탁된 권문세족들의 부정적인 면을 개혁하고자 노력한 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진사대부, 뒷날 성리학적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건국에 앞장선 인물들이 대체로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적 성향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적 성향은 여러 [가지](/topic/가지)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홍건적의 고려 침입이었다. 1차 홍건적의 난은 무사히 막아냈지만 홍건적은 다시 1361년 10월에 결빙된 압록강을 넘어 20만의 병력으로 2차 침입을 해 왔다. 1차 홍건적의 난에 공헌을 세운 이방실 등을 파견하여 홍건적에 대항하였으나 11월경에는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이른다. 이러한 위급한 시기에 공민왕은 여러 신하와 몽진을 가기로하고 그 목적지를 안동으로 잡는다. 한편 공민왕이 난을 피하려 할 때 여러 고장 중 왜 안동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를 비롯해 공민왕 때 진출한 신진사대부의 상당수가 안동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주로 말을 사용하여 전투에 임한 홍건적의 주력부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산야가 많은 안동 지역의 지형이 유리했다는 점 역시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개경을 떠난 날짜는 1361년 음력 11월 병인일로 기록되어 있다. 병인일이면 음력으로 18일이 되므로, 이를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양력으로 계산하면 1361년 12월 15일이 된다. 즉 한참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개경을 출발한 것이다. 공민왕 일행과 함께한 사람은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와 두 번째 비인 이씨(노국공주에게 자식이 없어 이제현의 딸을 비로 맞이함),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와 28명의 신하들이었다. 왕의 행렬치고는 초라한 피란길이었다. 공민왕이 안동에 도착한 것은 1361년 음력 12월 임진일이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 안동으로 발길을 옮긴 공민왕 일행에게 전해진 개경 함락 소식과 피란길에서 겪은 백성의 외면은 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도착한 공민왕 일행을 안동은 열렬한 환대로 맞이한다. 놋다리밟기 전설은 안동주민들의 공민왕에 대한 충정을 잘 말해 준다. 전설에 따르면 공민왕 일행이 안동에 도착하여 개울을 건너게 되었을 때 안동부민들이 나와 등을 맞대어 사람 다리를 만들고 왕을 그 위로 건너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안동부민들이 얼마나 공민왕을 열렬하게 환대했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 高丽时代的改革君主,一生极为不幸,供奉于首尔宗庙和庆尚北道安东市,奉化郡等多个地区的人神。 “恭愍王”是高丽第31代王(1351~1374在位), 1341 年在其 12 岁时,去往元朝并滞留十年,1351 年继忠定王之后即位。恭愍王有效利用元明交替这一大陆政治局势的变动,为高丽的中兴尝试进行多种改革。但因 1365 年其王妃“鲁国大长公主”去世,恭愍王陷入哀伤,将所有国事交由辛旽,疏于朝政,结果被臣子所弑。恭愍王不仅在安东地区得到人们敬拜,在全国范围内也均以神被供奉。“恭愍王神”虽然是巫俗中信仰的王神之一,但其成为神的由来并不明确。似乎是因为击退元朝欲收复国境地区这一点和作为王却被臣子所杀的事实引起民众共鸣,日后被敬拜为神。恭愍王尤其在与村庄祭相关的祭祀中受到崇拜。最具代表性的事例可以列举首尔麻浦区东幕,庆尚北道奉化郡明湖面的清凉山山城村,安东市丰山邑水洞。此外,首尔市钟路区卧龙洞宗庙中也有恭愍王神堂。在传统社会中,将特定的历史人物作为共同体的神进行供奉的事例屡见不鲜。以安东为例,不仅恭愍王本身,就连他的母亲和夫人,儿子和儿媳,女儿和女婿等大部分家庭成员也被神化,从这点来看可谓是十分特殊的事例。 | Gongminwang era un rey del reino Goryeo, un reformista con destino y fin trágicos, que ahora se adora como una deidad en Seúl, la provincia de Gyeongsang-do y muchas otras partes de Corea. Gongminwang gobernó el reino Goryeo desde 1351 hasta 1364, subió al trono como el trigésimo primer rey, a la edad de 21 años después de morir el rey anterior llamado Chungjeongwang, tras pasar una década en China. Durante el período de la caída de la dinastía Yuan y la fundación de la Ming, el rey Gongmin aprovechó el tiempo de transición y aplicó muchas reformas para recuperar la prosperidad del reino Goryeo. Sin embargo, tras la muerte de su esposa, la Reina Noguk en 1365, el rey cayó en la desesperanza y delegó asuntos estatales a su asesor llamado Sin Don, en fin, fue asesinado por uno de sus súbditos. Gongminwang es venerado como una deidad no solo en la ciudad de Andong, sino también en muchas otras partes de la nación. En el chamanismo coreano, Gongminwang es el objeto de la veneración como un rey divino, no obstante, el proceso de su deificación no se conoce claramente, solamente se especula que así fue debido a la voluntad del rey para luchar contra la dinastía Yuan y su muerte hecha por su propio súbdito. Como una divinidad, Gongminwang se relaciona estrechamente con los rituales aldeanos, incluyendo aquellos que tienen lugar en Dongmak de Seúl, aldea de Cheongnyangsan Sanseong de Bonghwa y Sudong de Andong, ambos se encuentran el la provincia de Gyeongsangbuk-do. En Jongmyo, el santuario real confucionista en Seúl, hay un santuario dedicado a Gongminwang. La adoración a las figuras históricas es un fenómeno común en la religión popular en Corea. Cabe destacar que en Andong, no solo Gongminwang, sino también la mayoría de los miembros de la familia real incluyendo reinas consortes, príncipes y princesas son los objetos de veneración como deidades. | Gongminwang was a king of Goryeo (918-1392), a reformminded ruler who led a tragic life, now worshipped as a deity in Seoul, Gyeongsang Province and many other parts of the country. Gongminwang reigned from 1351 to 1364, taking the throne as Goryeo’s 31st king at the age of 21 after spending a decade in China. During the shift in China from Yuan dynasty to Ming, King Gongmin took advantage of the changing times and attempted many reforms towards Goryeo’s revival. Following the death of his wife Queen Noguk in 1365, however, the king fell into great despair and delegated state affairs to National Preceptor Sin Don, and was murdered in the end in the hands of his subjects. In Korean shamanism, Gongminwang is worshipped as a king deity, but the process of his deification is not clearly known, only speculated that it was due to the king’s attempts at fighting off Yuan China and also his death in the hands of his own subjects. As a deity, Gongminwang is closely related to village rituals, including those held in Dongmak of Seoul, Sanseong Village in Bonghwa, and Sudong in Andong, both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In the royal ancestral shrine Jongmyo in Seoul is a sanctum dedicated to King Gongmin. The worship of historical figures is a common phenomenon in Korean folk religion. It is notable that in Andong, not only Gongminwang but most of his royal family, including the queen consorts, princes and princesses, are worshipped as deities. | 지역사례 | 공민왕은 위대한 삶을 살았지만 믿었던 신하들에 의해 비극적 죽임을 당한 인물로서 무속에서는 왕신으로 모셔지며, [마을](/topic/마을) 단위 공동체에서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특히 안동 지역에서는 왕의 몽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신격화되어 있어 당신화를 통해 실제 역사적 경험과 신화적 상상력이 어떻게 신앙화의 과정에 투영되었는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안동 지역에는 풍산읍 수동의 국신당, 하회의 국신당[국[사당](/topic/사당), 중당], 청량산 산성의 공민왕당, 용상동의 공민당 등 직접적으로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신당 이외에도 청량산 일대의 부인당·딸당·며느리당 등 공민왕 가계의 신격을 모시는 마을이 산재하고 있다. 산성마을 공민왕당을 중심으로 여러 곳의 마을이 공민왕가계신(恭愍王家系神)을 모시고 있어 이 일대는 공민왕 신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공민왕이 안동에 몽진을 와서 남긴 여러 흔적 가운데에는 안동웅부나 영호루의 [현판](/topic/현판)과 같은 유형적인 부분이 상당수 전하고 있다. 하지만 안동 주민들의 역사적 기억 속에 새겨진 무형적인 의식에 대해서는 애써 조사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안동 지역에서 공민왕 관련 민속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공민왕 관련 민속은 현재까지도 제의적 연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청량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또 지금은 연행하지 않지만 공민왕과 관련된 제의적·놀이적 전통이 있던 풍산읍 수동, 풍천면 하회, 안동시 용상동 등과 놋다리 밟기를 연행해 온 안동시 구 성안·성밖 일대, 임하면 금소동 등지에서도 전승되었다. 또한 공민왕 관련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용상동 성황당토성, 남선면 신석산성, 도산면 선성산성과 왕모산성 등 산성 지역이나 삼태사묘와 청량산 청량사 등 기타 유적지에서도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풍산 류씨와 공민왕의 관계가 [사전](/topic/사전)(풍악서당의 토지 800 두락)을 하사할 정도로 밀접하였음과 공민왕의 몽진 경로를 이유로 들어 하회의 국신당도 원래는 공민왕을 모시는 당이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점차 고려왕에 대한 추모의 정이 약해지면서 지금처럼 국신당의 이름만 남게 되었다. 안동 지역에서 공민왕은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큰 손님의 위상에 있다. 공민왕의 안동 몽진은 안동 지역에 있어서 몇 안 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동시에 가장 영예로웠던 고려시대 안동의 역사를 증명하는 명확한 증거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안동과 고려의 인연은 고려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태조 왕건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견훤](/topic/견훤)과 싸우는 와중에 안동의 삼태사가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왕건을 도와 싸워 고려 건국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안동과 고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그러한 징표로서 안동은 도호부로 승격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동 출신 인물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현재 안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차전놀이 역시 이때 기원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삼태사를 시조로 하는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 등 3개 성씨는 여전히 이 지역의 주요 성씨로 자리 잡고 있다. 이후 안동은 고려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이러한 관계가 공민왕의 몽진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61년 12월 [혹한](/topic/혹한)의 강추위가 산하를 덮은 가운데 공민왕 일행은 안동으로 출발하였다. 공민왕이 개성에서 안동을 찾아 먼길을 떠나게 된 것은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수도를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왕이 수도를 떠나는 일을 극히 드문 일이다. 수도라는 개념은 대체로 왕이 기거하는 곳이라는 통념이 있었고, 이런 이유로 왕이 거처를 옮기는 곳이 임시수도로 결정되곤 하였다. 이처럼 왕이 수도를 떠나 타 지역으로 옮기는 예는 한국 역사에서 그리 많지 않다. 왕이 지역을 찾아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기에 특히 몇 달 정도를 머무르며 함께한 경험은 지역 주민들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던져줄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왕의 위상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대통령이 지역을 방문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문화적 충격을 던졌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국가적인 전란으로 인한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그 지역에 왕이 몽진하였다는 사실은 커다란 자부심과 함께 설화적 상상력을 높여 주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공민왕 때는 원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던 시기였고 이에 따라 고려 역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공민왕은 원나라와 이에 결탁된 권문세족들의 부정적인 면을 개혁하고자 노력한 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진사대부, 뒷날 성리학적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건국에 앞장선 인물들이 대체로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적 성향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적 성향은 여러 [가지](/topic/가지)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홍건적의 고려 침입이었다. 1차 홍건적의 난은 무사히 막아냈지만 홍건적은 다시 1361년 10월에 결빙된 압록강을 넘어 20만의 병력으로 2차 침입을 해 왔다. 1차 홍건적의 난에 공헌을 세운 이방실 등을 파견하여 홍건적에 대항하였으나 11월경에는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이른다. 이러한 위급한 시기에 공민왕은 여러 신하와 몽진을 가기로하고 그 목적지를 안동으로 잡는다. 한편 공민왕이 난을 피하려 할 때 여러 고장 중 왜 안동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를 비롯해 공민왕 때 진출한 신진사대부의 상당수가 안동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주로 말을 사용하여 전투에 임한 홍건적의 주력부대에 맞서 싸우기에는 산야가 많은 안동 지역의 지형이 유리했다는 점 역시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개경을 떠난 날짜는 1361년 음력 11월 병인일로 기록되어 있다. 병인일이면 음력으로 18일이 되므로, 이를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양력으로 계산하면 1361년 12월 15일이 된다. 즉 한참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개경을 출발한 것이다. 공민왕 일행과 함께한 사람은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와 두 번째 비인 이씨(노국공주에게 자식이 없어 이제현의 딸을 비로 맞이함),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와 28명의 신하들이었다. 왕의 행렬치고는 초라한 피란길이었다. 공민왕이 안동에 도착한 것은 1361년 음력 12월 임진일이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 안동으로 발길을 옮긴 공민왕 일행에게 전해진 개경 함락 소식과 피란길에서 겪은 백성의 외면은 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도착한 공민왕 일행을 안동은 열렬한 환대로 맞이한다. 놋다리밟기 전설은 안동주민들의 공민왕에 대한 충정을 잘 말해 준다. 전설에 따르면 공민왕 일행이 안동에 도착하여 개울을 건너게 되었을 때 안동부민들이 나와 등을 맞대어 사람 다리를 만들고 왕을 그 위로 건너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안동부민들이 얼마나 공민왕을 열렬하게 환대했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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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영정 | 3318 공민왕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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