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입석 형태의 당산. 1969년 12월 6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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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나경수 |
정의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입석 형태의 당산. 1969년 12월 6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입석 형태의 당산. 1969년 12월 6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 상호참조 | [고창오거리당산제](/topic/고창오거리당산제)(74쪽) | 참고문헌 |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 상호참조 | [고창오거리당산제](/topic/고창오거리당산제)(74쪽) | 참고문헌 |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 내용 | 조선 후기인 정조 때 전라도 일대에 큰 홍수로 피해가 컸다. 홍수 후에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받았다. 이로 인해 빠르게 피해를 복구하고 환역(患疫)을 막을 방도를 찾으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지역의 아전들은 스스로 [화주](/topic/화주)(化主)를 자청하여 출연하였고, 민심 수습과 환란 극복을 위해 수구막이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고창읍의 중앙동, 중거리, 하거리 당산에 각각 석주를 세워 수구막이를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은 1803년에 완성되었다. 이처럼 인공으로 가공한 석주형 당산이 아니라 자연석이나 당산나무를 당산으로 삼은 것도 함께 있다. 현재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석주형 당산은 중앙당산, 중거리당산, 하거리당산의 세 곳에 있는 것으로, 이들 모두 인공적으로 다듬어 세웠다. 이 밖에도 자연석으로 된 입석이 더 있으며, 상거리당산과 교촌당산도 있다. 중앙당산을 중심으로 하여 고창읍의 동서남북에 배치된 당산들이다. 이들 다섯 곳의 당산에는 지금도 매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이들 당산에서는 단독이 아니라 가족 형태의 신격들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입석에는 매년 당산제를 지내면서 둘러놓은 [금줄](/topic/금줄)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중거리 할아버지당산에는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하고 나서 감아 놓은 줄이 걸려 있다. 1. 중앙당산 중앙동의 매일시장 안에 있으며, 주변에 숲이 우거져 있어서 당숲거리로 불리기도 했다. 중앙당산은 할아버지당산이다. 할아버지당산은 사각[기둥](/topic/기둥)형태로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위에는 원형의 [벙거지](/topic/벙거지)형 덮개돌이 씌워져 있다. 미륵당산, 석주당산, 할아버지미륵불이라고도 불린다. 높이는 375㎝, 개석은 직경 65㎝, 두께는 7㎝이다. 전면에는 “시주 김[양봉](/topic/양봉) 이명득 차도욱 신광득 화주 김성택 차도평 노귀연위단경철 가경팔년계 해윤이월초십일(施主 金陽鳳李明得 車道旭 申光得 化主 金聖澤 車道平 魯貴連韋段慶哲 嘉慶八年癸亥閏二月初十日)”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여러 사람이 시주를 하고 만들 때 공을 드린 것과 특히 1803년 음력 이월 [윤달](/topic/윤달) 초열흘날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중거리당산과 하거리당산의 석주는 모두 같은 해 3월로 되어 있는데 비해 이곳은 2월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에 먼저 석주를 세우고 남쪽과 서쪽의 석주를 한 달 뒤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당산은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말도 전한다. 2. 중거리당산 중앙동의 안거리 입구 길가에 할아버지당산, 여기에서 50m쯤 떨어진 [골목](/topic/골목)길에 할머니당산이 있다. 골목길 더 안쪽에 아들당산과 며느리당산이 수목 형태로 있었지만 새[마을](/topic/마을)사업을 하면서 베어내고 지금은 없다. 사각기둥의 석간(石竿) 형태로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상층부에 탑의 옥개석(屋蓋石) 모양의 덮개돌을 씌우고 상륜부도 완연하다. 전체 높이는 328㎝, 상부 옥개석은 65×65㎝이다. 전면에 “千年頑骨 屹然鎭南 嘉慶八年癸亥 三月 日(천년세월 강한 몸체 우뚝 솟아 남쪽 진압 1803년 3월 일)”이라고 한문으로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민들이 줄다리기를 한 뒤 줄을 몸체에 감고 상륜부에 줄의 머리를 걸쳐 놓아 마치 용틀임의 모습을 보인다. 할머니당산은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세워 두었다. 골목길에 서 있는 할머니당산은 높이 160㎝, 두께 38㎝, 아래 폭 145㎝, 중간 폭 110㎝의 크기이다. 1950년대 말에 할머니당산이 있는 곳에 군청에 다니는 사람의 집이 있었다. 집 안을 조금 넓게 사용하기 위해 입석과 나란히 담을 내어 쌓았다고 한다. 그런 뒤로 집안에 우환이 많아서 결국 망하게 되었다. 가세가 기울자 내어 쌓은 담을 다시 뒤로 물려 새로 쌓았지만 가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살림을 정리하여 읍내에서 시골마을로 떠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을 건드려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으며,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3. 하거리당산 삼흥동의 서부리 숲정이에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아들당산이 있다. 본래는 숲이 우거져 있었지만 현재는 팽나무 한 그루만 남아 할머니당산으로 모셔지고 있다. 사각기둥의 석간 형태로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상층부에 탑의 옥개석 모양의 덮개돌을 씌우고 상륜부도 완연하다. 큰 돌의 가운데에 구멍을 내어 받침돌로 썼다. 하단부는 전체 높이가 645㎝에 달하며, 옥개석은 50×50㎝ 크기이다. 윗부분의 개석 때문에 갓당산, [삿갓](/topic/삿갓)비석, 또는 철륭으로도 불린다. 전면에 “진서화표 가경팔년계해 삼월 일(鎭西華表 嘉慶八年癸亥 三月 日)”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화표(華表)는 화표주(華表柱)의 준말로, [망주석](/topic/망주석)(望柱石)과 같은 의미이다. 서쪽을 진압하는 표석으로서 1803년 3월에 세웠다는 뜻이다. 할아버지당산 옆에는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것이 할머니당산이다. 허리 높이로 금줄이 둘러쳐져있다. 전에는 근처에 숲이 크게 우거져 있었지만 당산목만 남고 모두 벌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곳은 숲정이로 불리고 있다. 숲정이는 전라도에서 우거진 마을 숲을 부르는 말로, 숲쟁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사이에는 비석이 한 주 서있다. 이것이 아들당산이다. 전면에는 ‘고창읍내수구(高敞邑內水口)’라고 큰 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고창읍의 수구막이로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단부가 부러져서 시멘트로 이어놓은 흔적이 완연하다. 4. 상거리당산 고창읍의 동쪽에 위치하면서 동부리로도 불리는 지금의 천북동에 할아버지당산과 며느리당산, 모양동 큰길 가에 할머니당산이 각각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골목길에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으며, 약간의 손질을 한 흔적이 있는 화강암 직육면체 모양이다. 높이 180㎝, 너비 25㎝, 폭 75㎝이다. 며느리당산은 할아버지당산 바로 옆에 있는 개인집 [마당](/topic/마당)에 서 있는 자연석이다. 며느리당산 옆에는 역시 개인집 앞마당에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예전에는 이런 나무가 숲을 이루었으나 개인들이 집을 지으면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당산은 큰길 가에 있으며, 역시 예전에는 주변에 숲이 있었으나 지금은 [집들이](/topic/집들이) 들어서서 나무들이 모두 없어지고 자연석의 입석만 남았다. 높이 106㎝, 밑면 너비 140㎝, 두께 26㎝이다. 5. 교촌당산 군청에서 200여 m 되는 지점 길가에 할아버지당산이 서 있다. 본래는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아들당산이 있었지만 현재는 할아버지당산만 남아 있다. 할아버지당산도 본래는 향교 옆에 있었지만 차량에 훼손된 뒤 현재 위치에 고창오거리당산보존회가 주관하여 1984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정사면체에 머리 부분은 탑과 같은 옥개석으로 얹었다. 정면에 ‘진북화표(鎭北華表)’라고 한자로 음각되어 있고, 옆면에는 “일구팔사년시월 일 고창오거리당산보존위원회 입(一九八四年十月 日 高敞五距離堂山保存委員會 立)”이라고 역시 음각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220㎝, 비신은 160㎝, 비신의 두께는 31㎝, 옥개석 너비는 66㎝이다. | 내용 | 조선 후기인 정조 때 전라도 일대에 큰 홍수로 피해가 컸다. 홍수 후에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받았다. 이로 인해 빠르게 피해를 복구하고 환역(患疫)을 막을 방도를 찾으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지역의 아전들은 스스로 [화주](/topic/화주)(化主)를 자청하여 출연하였고, 민심 수습과 환란 극복을 위해 수구막이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고창읍의 중앙동, 중거리, 하거리 당산에 각각 석주를 세워 수구막이를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은 1803년에 완성되었다. 이처럼 인공으로 가공한 석주형 당산이 아니라 자연석이나 당산나무를 당산으로 삼은 것도 함께 있다. 현재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석주형 당산은 중앙당산, 중거리당산, 하거리당산의 세 곳에 있는 것으로, 이들 모두 인공적으로 다듬어 세웠다. 이 밖에도 자연석으로 된 입석이 더 있으며, 상거리당산과 교촌당산도 있다. 중앙당산을 중심으로 하여 고창읍의 동서남북에 배치된 당산들이다. 이들 다섯 곳의 당산에는 지금도 매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이들 당산에서는 단독이 아니라 가족 형태의 신격들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입석에는 매년 당산제를 지내면서 둘러놓은 [금줄](/topic/금줄)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중거리 할아버지당산에는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하고 나서 감아 놓은 줄이 걸려 있다. 1. 중앙당산 중앙동의 매일시장 안에 있으며, 주변에 숲이 우거져 있어서 당숲거리로 불리기도 했다. 중앙당산은 할아버지당산이다. 할아버지당산은 사각[기둥](/topic/기둥)형태로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위에는 원형의 [벙거지](/topic/벙거지)형 덮개돌이 씌워져 있다. 미륵당산, 석주당산, 할아버지미륵불이라고도 불린다. 높이는 375㎝, 개석은 직경 65㎝, 두께는 7㎝이다. 전면에는 “시주 김[양봉](/topic/양봉) 이명득 차도욱 신광득 화주 김성택 차도평 노귀연위단경철 가경팔년계 해윤이월초십일(施主 金陽鳳李明得 車道旭 申光得 化主 金聖澤 車道平 魯貴連韋段慶哲 嘉慶八年癸亥閏二月初十日)”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여러 사람이 시주를 하고 만들 때 공을 드린 것과 특히 1803년 음력 이월 [윤달](/topic/윤달) 초열흘날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중거리당산과 하거리당산의 석주는 모두 같은 해 3월로 되어 있는데 비해 이곳은 2월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에 먼저 석주를 세우고 남쪽과 서쪽의 석주를 한 달 뒤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당산은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말도 전한다. 2. 중거리당산 중앙동의 안거리 입구 길가에 할아버지당산, 여기에서 50m쯤 떨어진 [골목](/topic/골목)길에 할머니당산이 있다. 골목길 더 안쪽에 아들당산과 며느리당산이 수목 형태로 있었지만 새[마을](/topic/마을)사업을 하면서 베어내고 지금은 없다. 사각기둥의 석간(石竿) 형태로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상층부에 탑의 옥개석(屋蓋石) 모양의 덮개돌을 씌우고 상륜부도 완연하다. 전체 높이는 328㎝, 상부 옥개석은 65×65㎝이다. 전면에 “千年頑骨 屹然鎭南 嘉慶八年癸亥 三月 日(천년세월 강한 몸체 우뚝 솟아 남쪽 진압 1803년 3월 일)”이라고 한문으로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민들이 줄다리기를 한 뒤 줄을 몸체에 감고 상륜부에 줄의 머리를 걸쳐 놓아 마치 용틀임의 모습을 보인다. 할머니당산은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세워 두었다. 골목길에 서 있는 할머니당산은 높이 160㎝, 두께 38㎝, 아래 폭 145㎝, 중간 폭 110㎝의 크기이다. 1950년대 말에 할머니당산이 있는 곳에 군청에 다니는 사람의 집이 있었다. 집 안을 조금 넓게 사용하기 위해 입석과 나란히 담을 내어 쌓았다고 한다. 그런 뒤로 집안에 우환이 많아서 결국 망하게 되었다. 가세가 기울자 내어 쌓은 담을 다시 뒤로 물려 새로 쌓았지만 가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살림을 정리하여 읍내에서 시골마을로 떠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을 건드려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으며,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3. 하거리당산 삼흥동의 서부리 숲정이에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아들당산이 있다. 본래는 숲이 우거져 있었지만 현재는 팽나무 한 그루만 남아 할머니당산으로 모셔지고 있다. 사각기둥의 석간 형태로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상층부에 탑의 옥개석 모양의 덮개돌을 씌우고 상륜부도 완연하다. 큰 돌의 가운데에 구멍을 내어 받침돌로 썼다. 하단부는 전체 높이가 645㎝에 달하며, 옥개석은 50×50㎝ 크기이다. 윗부분의 개석 때문에 갓당산, [삿갓](/topic/삿갓)비석, 또는 철륭으로도 불린다. 전면에 “진서화표 가경팔년계해 삼월 일(鎭西華表 嘉慶八年癸亥 三月 日)”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화표(華表)는 화표주(華表柱)의 준말로, [망주석](/topic/망주석)(望柱石)과 같은 의미이다. 서쪽을 진압하는 표석으로서 1803년 3월에 세웠다는 뜻이다. 할아버지당산 옆에는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것이 할머니당산이다. 허리 높이로 금줄이 둘러쳐져있다. 전에는 근처에 숲이 크게 우거져 있었지만 당산목만 남고 모두 벌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곳은 숲정이로 불리고 있다. 숲정이는 전라도에서 우거진 마을 숲을 부르는 말로, 숲쟁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사이에는 비석이 한 주 서있다. 이것이 아들당산이다. 전면에는 ‘고창읍내수구(高敞邑內水口)’라고 큰 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고창읍의 수구막이로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단부가 부러져서 시멘트로 이어놓은 흔적이 완연하다. 4. 상거리당산 고창읍의 동쪽에 위치하면서 동부리로도 불리는 지금의 천북동에 할아버지당산과 며느리당산, 모양동 큰길 가에 할머니당산이 각각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골목길에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으며, 약간의 손질을 한 흔적이 있는 화강암 직육면체 모양이다. 높이 180㎝, 너비 25㎝, 폭 75㎝이다. 며느리당산은 할아버지당산 바로 옆에 있는 개인집 [마당](/topic/마당)에 서 있는 자연석이다. 며느리당산 옆에는 역시 개인집 앞마당에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예전에는 이런 나무가 숲을 이루었으나 개인들이 집을 지으면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당산은 큰길 가에 있으며, 역시 예전에는 주변에 숲이 있었으나 지금은 [집들이](/topic/집들이) 들어서서 나무들이 모두 없어지고 자연석의 입석만 남았다. 높이 106㎝, 밑면 너비 140㎝, 두께 26㎝이다. 5. 교촌당산 군청에서 200여 m 되는 지점 길가에 할아버지당산이 서 있다. 본래는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아들당산이 있었지만 현재는 할아버지당산만 남아 있다. 할아버지당산도 본래는 향교 옆에 있었지만 차량에 훼손된 뒤 현재 위치에 고창오거리당산보존회가 주관하여 1984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정사면체에 머리 부분은 탑과 같은 옥개석으로 얹었다. 정면에 ‘진북화표(鎭北華表)’라고 한자로 음각되어 있고, 옆면에는 “일구팔사년시월 일 고창오거리당산보존위원회 입(一九八四年十月 日 高敞五距離堂山保存委員會 立)”이라고 역시 음각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220㎝, 비신은 160㎝, 비신의 두께는 31㎝, 옥개석 너비는 66㎝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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