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수역리 수역[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음력 유월 초하룻날에 [해충](/topic/해충) 퇴치를 위해 지내는 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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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나경수 |
정의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수역리 수역[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음력 유월 초하룻날에 [해충](/topic/해충) 퇴치를 위해 지내는 제사. | 정의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수역리 수역[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음력 유월 초하룻날에 [해충](/topic/해충) 퇴치를 위해 지내는 제사. | 내용 | 매년 음력으로 유월 초하룻날에 수역[마을](/topic/마을)에서는 충제를 지내 오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제사를 모시기 사나흘 전에 개발위원회를 소집하여 [제관](/topic/제관) 세 명을 선정한다. 집안에 산고(産故)가 들거나 초상이 난 사람이 아닌 유고 없는 사람을 뽑는다. 특히 축관을 중요시한다. 축관은 마을에 있는 칠성사(七星寺) 스님에게 의뢰하여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맞춰 뽑는다. 제수 비용으로는 2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요즈음은 제관으로 참여한 사람들에게 각 10만 원의 인건비를 지급하기 때문에 총 50만 원 정도가 든다. 이는 전액 마을자금으로 충당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사흘 동안 궂은 곳에 출입하지 않고, 추한 음식으로 간주되는 개고기도 먹지 않는다. 부부관계도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 역시 충제를 지내는 기간에는 매우 엄격하게 금기를 지킨다. 이때는 논밭에 나가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심지어 빨래를 해서도 안 된다. 특히 흰 빨래를 밖에 내걸면 크게 해를 입는다고 여긴다. 이러한 금기는 충제 때가 동제 때보다도 훨씬 엄격하게 지켜진다. 충제를 지내러 올라가는 산길이 험해 2007년에 굴착기로 산길을 닦았다. 예전에는 [지게](/topic/지게)를 이용해 제물을 날랐으나 2007년부터는 경운기를 이용한다. 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날에는 제단에까지 전기선을 연결한다. 제물은 재료를 준비해 가서 산에서 조리한다. 음력 유월 초하룻날 오전 5시에 제관들은 여러 [가지](/topic/가지) 준비를 하여 산에 오른다. 이른 시간에 산에 오르는 것은 혹시 궂은 것을 보거나 궂은 사람을 만날까 싶어서다. 산에 오르면 일단 차일을 치고, 가까운 샘물에서 목욕재계를 한다. 낮 시간에는 서로 담소를 나누거나 라디오를 듣기도 하면서 지낸다. 오후 4시쯤부터 제물을 준비한다. 제물은 메 한 그릇, 미역국 한 그릇, 콩나물․[녹두](/topic/녹두)나물․[오이](/topic/오이)나물 등의 세 가지 나물, [대추](/topic/대추)․밤․곶감․[참외](/topic/참외)․[수박](/topic/수박) 등 과일, 마른 명태, 수탉 한 마리, 막걸리 등이다. 수탉은 붉은 털이 있는 것을 쓴다. 밤 10시쯤 되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순서는 집안에서 제사를 모실 때와 같다. [축문](/topic/축문)은 아래와 같이 마을에 전해져 온다. 維歲次 (丙戌) 六月(丙戌)削初一日(丙戌) 幼學◯◯ 敢昭告于 昊天上帝 土地之神 香山神靈 四海龍王 五方神將 左右哲龍 合義同心 天生承民 惠降黃茂 時風時雨 揷秧季葱 芽稻空畓 採種空田 蝥噬食根 病虫埽滅 哀此下民 何怙何恃 別擇精人 沐浴香湯 酒果脯醞 仰祝無彊 時下思夜 敢願逐滅 神其保佑 拜首伏望 庶幾格思 俾無後難 謹以淸酌 庶着供伸 奠獻 尙饗 제사를 마치면 소지를 올린 뒤 [헌식](/topic/헌식)을 위해 [제상](/topic/제상)에 골고루 올린 제물 가운데 일부를 미리 준비한 [한지](/topic/한지)로 싼다. 이때 상에 올린 수탉도 머리를 떼어내고 함께 싸서 충제단 옆에 구덩이를 파고 묻는다. 간단히 [음복](/topic/음복)을 하고 새벽 5시쯤에 짐을 챙겨서 마을로 돌아온다. 제관들은 각자 집에서 쉬었다가 낮에 노인당으로 모인다. 마을 사람들 역시 노인당에 모여서 제사에 올린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마을 사람들은 충제를 지내면 농작물에 [해충](/topic/해충)이 싹 없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20여 년 전 어느 해에는 충제를 지냈는데도 병충해가 심해 날을 받아서 다시 제를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예전에 다섯 마을이 해마다 돌아가면서 충제를 지낼 때 수역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에서 제를 지냈으나 그해에 해충이 심하여 수역마을에서 다시 따로 충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충제는 기우제 성격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뭄이 극심한 때에 비가 오기를 기원하면서 충제를 지내고 나자 비가 내려 제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사람들이 비를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충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지내는 동제와 달리 부대행사 없이 매우 엄격하게 지낸다. 남자만 참여하는 것과 제의절차를 보면 유교적 성격이 강함을 느낄 수 있다. 충제를 지내면서 사용한 비용은 마을총회 때 일 년 사업을 결산하는 자리에서 보고한다. 이 마을 충제는 아직까지도 고형(古形)의 모습을 많이 갖추고 있다. 제관들이 1박 2일 동안 산에서 머물면서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관도 세 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주민들이 반촌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충제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있고, 아직까지도 충제의 효과에 대해 믿음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다른 마을에 비하면 전승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연령이 높고, 이러한 전통을 이어갈 젊은이가 거의 없다는 점은 전승 가능성을 불투명하게 한다. | 참고문헌 | 진도의 [마을](/topic/마을)굿 (나경수 외, 민속원, 2007) | 내용 | 매년 음력으로 유월 초하룻날에 수역[마을](/topic/마을)에서는 충제를 지내 오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제사를 모시기 사나흘 전에 개발위원회를 소집하여 [제관](/topic/제관) 세 명을 선정한다. 집안에 산고(産故)가 들거나 초상이 난 사람이 아닌 유고 없는 사람을 뽑는다. 특히 축관을 중요시한다. 축관은 마을에 있는 칠성사(七星寺) 스님에게 의뢰하여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맞춰 뽑는다. 제수 비용으로는 2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요즈음은 제관으로 참여한 사람들에게 각 10만 원의 인건비를 지급하기 때문에 총 50만 원 정도가 든다. 이는 전액 마을자금으로 충당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사흘 동안 궂은 곳에 출입하지 않고, 추한 음식으로 간주되는 개고기도 먹지 않는다. 부부관계도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 역시 충제를 지내는 기간에는 매우 엄격하게 금기를 지킨다. 이때는 논밭에 나가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심지어 빨래를 해서도 안 된다. 특히 흰 빨래를 밖에 내걸면 크게 해를 입는다고 여긴다. 이러한 금기는 충제 때가 동제 때보다도 훨씬 엄격하게 지켜진다. 충제를 지내러 올라가는 산길이 험해 2007년에 굴착기로 산길을 닦았다. 예전에는 [지게](/topic/지게)를 이용해 제물을 날랐으나 2007년부터는 경운기를 이용한다. 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날에는 제단에까지 전기선을 연결한다. 제물은 재료를 준비해 가서 산에서 조리한다. 음력 유월 초하룻날 오전 5시에 제관들은 여러 [가지](/topic/가지) 준비를 하여 산에 오른다. 이른 시간에 산에 오르는 것은 혹시 궂은 것을 보거나 궂은 사람을 만날까 싶어서다. 산에 오르면 일단 차일을 치고, 가까운 샘물에서 목욕재계를 한다. 낮 시간에는 서로 담소를 나누거나 라디오를 듣기도 하면서 지낸다. 오후 4시쯤부터 제물을 준비한다. 제물은 메 한 그릇, 미역국 한 그릇, 콩나물․[녹두](/topic/녹두)나물․[오이](/topic/오이)나물 등의 세 가지 나물, [대추](/topic/대추)․밤․곶감․[참외](/topic/참외)․[수박](/topic/수박) 등 과일, 마른 명태, 수탉 한 마리, 막걸리 등이다. 수탉은 붉은 털이 있는 것을 쓴다. 밤 10시쯤 되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순서는 집안에서 제사를 모실 때와 같다. [축문](/topic/축문)은 아래와 같이 마을에 전해져 온다. 維歲次 (丙戌) 六月(丙戌)削初一日(丙戌) 幼學◯◯ 敢昭告于 昊天上帝 土地之神 香山神靈 四海龍王 五方神將 左右哲龍 合義同心 天生承民 惠降黃茂 時風時雨 揷秧季葱 芽稻空畓 採種空田 蝥噬食根 病虫埽滅 哀此下民 何怙何恃 別擇精人 沐浴香湯 酒果脯醞 仰祝無彊 時下思夜 敢願逐滅 神其保佑 拜首伏望 庶幾格思 俾無後難 謹以淸酌 庶着供伸 奠獻 尙饗 제사를 마치면 소지를 올린 뒤 [헌식](/topic/헌식)을 위해 [제상](/topic/제상)에 골고루 올린 제물 가운데 일부를 미리 준비한 [한지](/topic/한지)로 싼다. 이때 상에 올린 수탉도 머리를 떼어내고 함께 싸서 충제단 옆에 구덩이를 파고 묻는다. 간단히 [음복](/topic/음복)을 하고 새벽 5시쯤에 짐을 챙겨서 마을로 돌아온다. 제관들은 각자 집에서 쉬었다가 낮에 노인당으로 모인다. 마을 사람들 역시 노인당에 모여서 제사에 올린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마을 사람들은 충제를 지내면 농작물에 [해충](/topic/해충)이 싹 없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20여 년 전 어느 해에는 충제를 지냈는데도 병충해가 심해 날을 받아서 다시 제를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예전에 다섯 마을이 해마다 돌아가면서 충제를 지낼 때 수역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에서 제를 지냈으나 그해에 해충이 심하여 수역마을에서 다시 따로 충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충제는 기우제 성격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뭄이 극심한 때에 비가 오기를 기원하면서 충제를 지내고 나자 비가 내려 제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사람들이 비를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충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지내는 동제와 달리 부대행사 없이 매우 엄격하게 지낸다. 남자만 참여하는 것과 제의절차를 보면 유교적 성격이 강함을 느낄 수 있다. 충제를 지내면서 사용한 비용은 마을총회 때 일 년 사업을 결산하는 자리에서 보고한다. 이 마을 충제는 아직까지도 고형(古形)의 모습을 많이 갖추고 있다. 제관들이 1박 2일 동안 산에서 머물면서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관도 세 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주민들이 반촌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충제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있고, 아직까지도 충제의 효과에 대해 믿음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다른 마을에 비하면 전승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연령이 높고, 이러한 전통을 이어갈 젊은이가 거의 없다는 점은 전승 가능성을 불투명하게 한다. | 참고문헌 | 진도의 [마을](/topic/마을)굿 (나경수 외, 민속원, 2007) | 유래 | 수역[마을](/topic/마을) 뒷산 정상 부근에 큰 소나무가 서 있다. 그 앞에서 충제(蟲祭)를 지낸다. 충제를 모시는 사람은 세 명으로, 미리 마을에서 가려 뽑는다. [헌작](/topic/헌작)(獻酌)과 [독축](/topic/독축)(讀祝) 등 유교식 제사 방식을 따라 충제를 지낸다. 충제는 여름에 농작물 병충해가 많기 때문에 이를 [방제](/topic/방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가 오지 않는 때에도 충제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충제는 [농신제](/topic/농신제)(農神祭) 성격이 짙다. 현재는 수역마을에서 충제를 주관하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수역리에 속하는 수역마을, 매향마을, 신흥마을, 월평마을, 북치마을 등 다섯 개 마을이 공동으로 제사 비용을 마련하여 지냈다. 제비는 공동으로 염출하지만 제사는 다섯 개 마을이 매년 돌아가면서 지냈기 때문에 각 마을은 5년에 한 번 제사를 주관했다. 다섯 개 마을 가운데 수역마을이 반촌(班村)이라 하여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다른 마을은 일절 충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다섯 마을 가운데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수역마을만 매년 충제를 모시고 있다. | 유래 | 수역[마을](/topic/마을) 뒷산 정상 부근에 큰 소나무가 서 있다. 그 앞에서 충제(蟲祭)를 지낸다. 충제를 모시는 사람은 세 명으로, 미리 마을에서 가려 뽑는다. [헌작](/topic/헌작)(獻酌)과 [독축](/topic/독축)(讀祝) 등 유교식 제사 방식을 따라 충제를 지낸다. 충제는 여름에 농작물 병충해가 많기 때문에 이를 [방제](/topic/방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가 오지 않는 때에도 충제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충제는 [농신제](/topic/농신제)(農神祭) 성격이 짙다. 현재는 수역마을에서 충제를 주관하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수역리에 속하는 수역마을, 매향마을, 신흥마을, 월평마을, 북치마을 등 다섯 개 마을이 공동으로 제사 비용을 마련하여 지냈다. 제비는 공동으로 염출하지만 제사는 다섯 개 마을이 매년 돌아가면서 지냈기 때문에 각 마을은 5년에 한 번 제사를 주관했다. 다섯 개 마을 가운데 수역마을이 반촌(班村)이라 하여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다른 마을은 일절 충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다섯 마을 가운데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수역마을만 매년 충제를 모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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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무속·불교·유교를 통해서 본 식생활문화 및 그 의식절차에 대한 연구 | 김상보 | 1975 | 국립문화재연구소 | 무·굿과 음식 3 |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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