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제주특별자치도에서 풍농을 기원하던 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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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Cnt | 0 |
wkorname | 고광민 |
정의 | 제주특별자치도에서 풍농을 기원하던 의례. | 정의 | 제주특별자치도에서 풍농을 기원하던 의례. | 내용 | 제주제석제는 자취를 감춘 지 제법 오래됐다. 제주도 여러 [마을](/topic/마을)에서는 ‘제석제’를 올린 장소만 하나의 지명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제주도의 제석제는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의 사례와 마을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발굴한 사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마을에서는 조와 [메밀](/topic/메밀) 농사에 [해충](/topic/해충)(害蟲) 없이 풍년이 들기는 바라는 목적에서 올리는 의례를 두고 ‘제석제’라고 하였다. [제일](/topic/제일)(祭日)은 조와 메밀을 파종하기 이전에 택일(擇日)하여 일 년에 두 차례 이루어졌다. 제장(祭場)은 이 마을 ‘제석동산’이었다. 마을의 하인(下人)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제석제를 지내겠습니다”라고 하면 집집마다 정해진 수량의 곡식을 내주었다. 이런 일을 ‘제물 받음’이라고 하였다. 하인은 모은 곡식으로 여러 [가지](/topic/가지) 제물을 마련하여 솥과 제물을 들고 ‘제석동산’으로 올라갔다. 하인은 ‘제석동산’에서 솥을 앉혀 메를 짓고 솥째로 제단에 올리고 나서 제석신에게 [분향](/topic/분향)․배례하였다.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고태완(1921년생)의 사례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는 음력 칠월 중에 택일하여 ‘제석동산’에서 ‘제석제’를 지냈다. 마을에서는 ‘제석제’를 주관할 한 사람을 선정하였다. 그 사람을 두고 ‘소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을의 하인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을 걷어 제비(祭費)를 마련하였다. ‘소임’과 ‘하인’은 제비로 제물을 마련하고 ‘제석동산’으로 가서 ‘제석제’를 지냈다. 가파도에서는 섬의 동남쪽에 있는 제단에서 음력 정월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하여 자시(子時)에 ‘포제(酺祭)’를 올렸다. 포제가 끝나면 다시 제단 옆에 제물을 진설하여 제의를 다시 올렸다. 이때의 제의를 두고 ‘제석제(帝釋祭)’라고 하였다. ‘제석제’는 [제관](/topic/제관)과 집사 두 사람만으로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제의를 올리는 동안에 제관은 제석신에게 “우순풍조(雨順風調)하게 하여 주시고, 소도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해치지 말게 하여 주시고, 잡충(雜蟲)도 농작물에 들지 못하게 잘 막아 풍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구송(口誦)하였다. | 참고문헌 | 민속자료조사보고서 39 [부락제](/topic/부락제)당 (이두현․장주근․현용준․최길성, 문화재관리국, 1969) 제주도부락지 3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0) 제주도의 무속과 그 주변 (현용준, 집문당, 2002) | 내용 | 제주제석제는 자취를 감춘 지 제법 오래됐다. 제주도 여러 [마을](/topic/마을)에서는 ‘제석제’를 올린 장소만 하나의 지명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제주도의 제석제는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의 사례와 마을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발굴한 사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마을에서는 조와 [메밀](/topic/메밀) 농사에 [해충](/topic/해충)(害蟲) 없이 풍년이 들기는 바라는 목적에서 올리는 의례를 두고 ‘제석제’라고 하였다. [제일](/topic/제일)(祭日)은 조와 메밀을 파종하기 이전에 택일(擇日)하여 일 년에 두 차례 이루어졌다. 제장(祭場)은 이 마을 ‘제석동산’이었다. 마을의 하인(下人)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제석제를 지내겠습니다”라고 하면 집집마다 정해진 수량의 곡식을 내주었다. 이런 일을 ‘제물 받음’이라고 하였다. 하인은 모은 곡식으로 여러 [가지](/topic/가지) 제물을 마련하여 솥과 제물을 들고 ‘제석동산’으로 올라갔다. 하인은 ‘제석동산’에서 솥을 앉혀 메를 짓고 솥째로 제단에 올리고 나서 제석신에게 [분향](/topic/분향)․배례하였다.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고태완(1921년생)의 사례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는 음력 칠월 중에 택일하여 ‘제석동산’에서 ‘제석제’를 지냈다. 마을에서는 ‘제석제’를 주관할 한 사람을 선정하였다. 그 사람을 두고 ‘소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을의 하인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을 걷어 제비(祭費)를 마련하였다. ‘소임’과 ‘하인’은 제비로 제물을 마련하고 ‘제석동산’으로 가서 ‘제석제’를 지냈다. 가파도에서는 섬의 동남쪽에 있는 제단에서 음력 정월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하여 자시(子時)에 ‘포제(酺祭)’를 올렸다. 포제가 끝나면 다시 제단 옆에 제물을 진설하여 제의를 다시 올렸다. 이때의 제의를 두고 ‘제석제(帝釋祭)’라고 하였다. ‘제석제’는 [제관](/topic/제관)과 집사 두 사람만으로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제의를 올리는 동안에 제관은 제석신에게 “우순풍조(雨順風調)하게 하여 주시고, 소도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해치지 말게 하여 주시고, 잡충(雜蟲)도 농작물에 들지 못하게 잘 막아 풍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구송(口誦)하였다. | 참고문헌 | 민속자료조사보고서 39 [부락제](/topic/부락제)당 (이두현․장주근․현용준․최길성, 문화재관리국, 1969) 제주도부락지 3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0) 제주도의 무속과 그 주변 (현용준, 집문당,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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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 | 을유문화사 | 조선 급 중국의 복화무 | 손진태 | 1948 | 형설출판사 | 한국 엑스타시 변천고 | 최길성 | 1982 | 한국무속학회 | 한국 무속사의 시대구분 | 서영대 |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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