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제주지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자연석을 원통형(圓筒形)으로 쌓아 올린 설치물. 1995년 8월 26일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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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김동섭 |
정의 | 제주지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자연석을 원통형(圓筒形)으로 쌓아 올린 설치물. 1995년 8월 26일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제주지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자연석을 원통형(圓筒形)으로 쌓아 올린 설치물. 1995년 8월 26일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넓은 농경지를 중심지로 형성된 ‘알벵뒤’ 지경 안에 각각의 농경지를 잇는 농로(農路) 가까운 곳에 세워져 있다.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마을 안으로 악하고 나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주는 수호신으로 여기며, 이를 ‘거욱대’라고 부르고 있다. 원통형의 설치물 위에는 ‘[돌하르방](/topic/돌하르방)’처럼 생긴 돌[기둥](/topic/기둥)을 세워 놓았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는 대정고을의 중심마을로 제주도 서남부에 위치한다. ‘남문앞물’은 현성 축조 당시에 파게 되었다고 한다. 현성을 쌓을 때 노스님이 지나가다가 모슬봉에 화기가 있으니 그냥 두면 마을 사람들의 피해가 클 것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 대책으로 마을 남쪽에 물을 파서 방비하라고 하여 이 물통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물은 주로 우마들의 급수나 빨래에 이용하였다. 인성리는 중산간의 여느 마을처럼 주변에 모슬봉, 송악산, 단산, 당산봉 등 오름이 많이 있다. 전반적으로는 넓은 평원을 이루고 있는 대정읍 중심부이다. 제주시에나 서귀포시에서 대정읍으로 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한 인성리는 예부터 교통이 특히 발달했다. 주변에 대정성지, 추사적거지, 대정향교가 있다. 인성리 안길을 이용하여 단산으로 가다 보면 ‘개죽은 못’ 근처에 넓고 편평한 농경지가 나온다. 이를 마을 사람들은 ‘알벵뒤’라고 부른다. 단산과 모슬봉을 양쪽에 두고 중앙의 평탄한 곳에 자리 잡은 인성리는 농경지가 발달해 이웃 마을인 모슬포에까지 농경지가 이어진다. 지금은 방풍림(防風林)이 조성되거나 농경지 내에 비닐 하우스 등이 설치되어서 그리 넓지 않은 지역으로 보이지만 시설 재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만 해도 상당히 넓고 평탄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1416년에 대정현이 설촌되고 1418년에 축성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부터 인성리 마을도 형성되어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성리는 대정현의 중심 마을로서 마을 사람들도 별 탈 없이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00년(광무 4) 당시 이문사 존위가 행정책임자로 근무할 때 마을에 까닭 모를 이유로 집에 화재가 발생하고, 우마(牛馬)들도 질병에 걸려 죽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존위는 마을 사람들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화재와 질병의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마을 내에 글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찾아가 물어도 보고, 심방을 찾아가 문점도 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하루는 용하다는 ‘정시’를 찾아가 의논하게 되었다. 그는 “인성리는 마을의 남방(南方)인 모슬봉과 단산 사이가 너무 넓고 지대가 낮아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허(虛)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허한 곳으로 악운과 재앙이 들어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변고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높은 산이나 돌 등으로 막혀 있지 않아 방위가 허하고 약하다고 알려진 곳이다. 정시는 ‘거욱대’를 세워 방비(防備)할 것을 주문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몰려나와 협력하면서 ‘거욱대’를 세웠다. 지세가 허한 마을 남방의 넓고 평탄한 ‘알뱅뒤’에 거욱대 네 개를 세워 방비하게 되면서 마을에는 평안이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에게 찾아온 병과 화재도 잦아들게 되었고, 우마의 질병도 없어[지게](/topic/지게) 되었다. 주민들은 농경지 어느 곳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잡석을 이용하여 우선 눌급처럼 조금 큰 돌로 ‘굽’을 돌리고, 그 위에 차곡차곡 돌을 쌓았다. 사람 키의 1.5배 정도 높이로 거욱대 네 개를 틈이 생기지 않도록 쌓아 올렸다. 전체적으로 원추형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군](/topic/장군) 모습으로 마을을 지켜 줄 수호신의 얼굴로 돌을 다듬어 세웠다. 단산과 모슬봉 사이의 ‘알벵뒤’에 세워진 네 개의 거욱대 다운데 두 개는 1995년6월 28일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개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상태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는 오랜 세월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은 인성리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심하게 훼손된 두 개의 거욱대를 후대에 복구되면서 원형이 손상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마을에 전해 오는 네 개의 거욱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성리 1호 거욱대 인성리의 거욱대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다. 즉 단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인가가 밀집한 마을 안길을 벗어나 단산으로 넘어가는 곳에 펼쳐진 농경지 사이로 여러 개의 농로(農路)가 설치되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농업](/topic/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수로(水路)가 깊고 넓게 만들어져 있고, 그 수로를 경계로 하여 농경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특별하게 달리 불리는 명칭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거욱대’라고 한다. 이 거욱대는 위치만 알려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전승되어 오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보수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채 마을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이 거욱대는 대정읍 인성리 441[번지](/topic/번지)에 있다. 농경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석을 밑지름이 넓고 윗지름이 좁게 쌓아올려 전체적으로 원추형을 이루고 있다. 상부는 편평하게 마감한 다음 사람 모습의 두부(頭部)와 몸통으로 형상화하여 돌하르방처럼 깎은 석상(石像)을 올려놓았다. 이 석상은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내기 위해 남쪽을 향해 있고,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인성리 2호 거욱대 인성리의 거욱대 가운데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하고 있다. 인가가 밀집한 마을 안길을 벗어나 모슬포 방향으로 접어들면 오른쪽에 있다. 농경지의 밭담을 무단으로 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보존 상태가 다른 것보다 양호한 편이다. 인성리 방사탑 1호라고 명명되었지만 일반적으로 ‘거욱대’라고 한다. 1995년 8월 26일 제주도 민속자료 제8-1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주소는 대정읍 인성리 493(문화재 등록 497)번지이다. 농경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석을 주로 쌓았으나 아래쪽일수록 굵은 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밑이 넓고 위가 좁은 원추형이다. 거욱대는 높이가 220㎝ 정도로 사람 키보다 높다. 밑지름은 210㎝, 윗지름은 190㎝ 정도이다. 상부는 약간 동그랗게 정리한 다음 사람 모습의 두부와 몸통으로 형상화한 길쭉한 자연석을 올려놓았다. 상부의 자연석이 남쪽을 향하도록 하여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 주도록 기원한 마을 사람들의 바람을 반영하고 있다. 인성리 3호 거욱대 인성리의 거욱대 가운데 인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모슬봉 방향인 왼쪽 농경지의 밭담을 경계로 하여 농로로 이어진 밭 가운데에 있다. 인성리 방사탑 2호라고 명명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거욱대’라고 한다. 1995년 8월 26일 제주도 민속자료 제8-1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대정읍 인성리 490-1(62-1)번지가 주소이다. 농경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석을 주로 쌓아 올였으며, 밑지름이 넓고 윗지름이 좁은 원추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 높이가 220㎝ 정도로 사람 키보다 높다. 밑지름이 200㎝ 윗지름은 170㎝ 정도이다. 상부는 편평하게 한 다음 사람 모습의 두부와 몸통으로 형상화한 길쭉한 자연석을 올려놓았다. 이 상부의 자연석은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내도록 하기 위한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인성리 4호 거욱대 인성리의 거욱대 가운데 가장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즉 모슬봉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있어 모슬포로 이어지는 도로에 인접해 있다. 방풍을 위해 높게 쌓은 밭담을 넘어가야만 접근이 가능하다. 거욱대와 농경지 사이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깊고 넓게 만들어진 그 수로를 경계로 하여 농경지 바깥쪽에 있다. 주변에는 산담과 같이 거욱대를 보호하기 위해 장방형(長方形)의 홑담이 둘러쳐져 있다. 이 거욱대는 예전에 훼손되었다가 마을 사람들이 후대에 복원한 것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채 전승되고 있다. 주소는 대정읍 인성리 587-1번지이다. 농경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석이라기보다 석공들이 석축을 쌓기 위해 사용하는 각석에 가까운 돌로 쌓아 올렸다. 전체적으로 원통형이 되도록 밑지름이 넓고 윗지름이 좁다. 상부는 편평하게 한 다음, 사람의 모습을 두부와 몸통으로 형상화하여 돌하르방처럼 깎은 석상을 올려놓았다. 특히 현성과 가깝기 때문인지 수로 너머 농경지의 가장자리와 거욱대가 자리한 반대쪽의 공터에는 쉽게 옮길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각석들이 모여있다. 이로 미루어 현성을 쌓을 때 이용한 석재의 일부로 추정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모슬포에 군인들이 들어왔을 때 거욱대와 관련한 마을 사람들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군인들이 그냥 돌무더기로 보고 거욱대 두 개를 허물고 그 돌을 막사를 짓는 데 사용하였다. 당시 마을에는 훈련장으로 이용하면서 군인들이 임자 없는 거욱대의 돌 같은 것을 허문 것이 많았다. 2기만 남아 전해져 오다가 1961년에 거욱대 2기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마을에는 예전처럼 거욱대 4기가 남방의 허한 곳을 방비하게 되었다. 돌을 쌓고 그 위에 하르방을 세우는 이유는 높아야 위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쁜 것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하르방의 모습도 무섭고 장군처럼 만든 것이다. | 내용 | 넓은 농경지를 중심지로 형성된 ‘알벵뒤’ 지경 안에 각각의 농경지를 잇는 농로(農路) 가까운 곳에 세워져 있다.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마을 안으로 악하고 나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주는 수호신으로 여기며, 이를 ‘거욱대’라고 부르고 있다. 원통형의 설치물 위에는 ‘[돌하르방](/topic/돌하르방)’처럼 생긴 돌[기둥](/topic/기둥)을 세워 놓았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는 대정고을의 중심마을로 제주도 서남부에 위치한다. ‘남문앞물’은 현성 축조 당시에 파게 되었다고 한다. 현성을 쌓을 때 노스님이 지나가다가 모슬봉에 화기가 있으니 그냥 두면 마을 사람들의 피해가 클 것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 대책으로 마을 남쪽에 물을 파서 방비하라고 하여 이 물통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물은 주로 우마들의 급수나 빨래에 이용하였다. 인성리는 중산간의 여느 마을처럼 주변에 모슬봉, 송악산, 단산, 당산봉 등 오름이 많이 있다. 전반적으로는 넓은 평원을 이루고 있는 대정읍 중심부이다. 제주시에나 서귀포시에서 대정읍으로 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한 인성리는 예부터 교통이 특히 발달했다. 주변에 대정성지, 추사적거지, 대정향교가 있다. 인성리 안길을 이용하여 단산으로 가다 보면 ‘개죽은 못’ 근처에 넓고 편평한 농경지가 나온다. 이를 마을 사람들은 ‘알벵뒤’라고 부른다. 단산과 모슬봉을 양쪽에 두고 중앙의 평탄한 곳에 자리 잡은 인성리는 농경지가 발달해 이웃 마을인 모슬포에까지 농경지가 이어진다. 지금은 방풍림(防風林)이 조성되거나 농경지 내에 비닐 하우스 등이 설치되어서 그리 넓지 않은 지역으로 보이지만 시설 재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만 해도 상당히 넓고 평탄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1416년에 대정현이 설촌되고 1418년에 축성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부터 인성리 마을도 형성되어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성리는 대정현의 중심 마을로서 마을 사람들도 별 탈 없이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00년(광무 4) 당시 이문사 존위가 행정책임자로 근무할 때 마을에 까닭 모를 이유로 집에 화재가 발생하고, 우마(牛馬)들도 질병에 걸려 죽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존위는 마을 사람들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화재와 질병의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마을 내에 글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찾아가 물어도 보고, 심방을 찾아가 문점도 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하루는 용하다는 ‘정시’를 찾아가 의논하게 되었다. 그는 “인성리는 마을의 남방(南方)인 모슬봉과 단산 사이가 너무 넓고 지대가 낮아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허(虛)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허한 곳으로 악운과 재앙이 들어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변고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높은 산이나 돌 등으로 막혀 있지 않아 방위가 허하고 약하다고 알려진 곳이다. 정시는 ‘거욱대’를 세워 방비(防備)할 것을 주문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몰려나와 협력하면서 ‘거욱대’를 세웠다. 지세가 허한 마을 남방의 넓고 평탄한 ‘알뱅뒤’에 거욱대 네 개를 세워 방비하게 되면서 마을에는 평안이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에게 찾아온 병과 화재도 잦아들게 되었고, 우마의 질병도 없어[지게](/topic/지게) 되었다. 주민들은 농경지 어느 곳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잡석을 이용하여 우선 눌급처럼 조금 큰 돌로 ‘굽’을 돌리고, 그 위에 차곡차곡 돌을 쌓았다. 사람 키의 1.5배 정도 높이로 거욱대 네 개를 틈이 생기지 않도록 쌓아 올렸다. 전체적으로 원추형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군](/topic/장군) 모습으로 마을을 지켜 줄 수호신의 얼굴로 돌을 다듬어 세웠다. 단산과 모슬봉 사이의 ‘알벵뒤’에 세워진 네 개의 거욱대 다운데 두 개는 1995년6월 28일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개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상태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는 오랜 세월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은 인성리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심하게 훼손된 두 개의 거욱대를 후대에 복구되면서 원형이 손상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마을에 전해 오는 네 개의 거욱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성리 1호 거욱대 인성리의 거욱대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다. 즉 단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인가가 밀집한 마을 안길을 벗어나 단산으로 넘어가는 곳에 펼쳐진 농경지 사이로 여러 개의 농로(農路)가 설치되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농업](/topic/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수로(水路)가 깊고 넓게 만들어져 있고, 그 수로를 경계로 하여 농경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특별하게 달리 불리는 명칭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거욱대’라고 한다. 이 거욱대는 위치만 알려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전승되어 오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보수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채 마을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이 거욱대는 대정읍 인성리 441[번지](/topic/번지)에 있다. 농경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석을 밑지름이 넓고 윗지름이 좁게 쌓아올려 전체적으로 원추형을 이루고 있다. 상부는 편평하게 마감한 다음 사람 모습의 두부(頭部)와 몸통으로 형상화하여 돌하르방처럼 깎은 석상(石像)을 올려놓았다. 이 석상은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내기 위해 남쪽을 향해 있고,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인성리 2호 거욱대 인성리의 거욱대 가운데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하고 있다. 인가가 밀집한 마을 안길을 벗어나 모슬포 방향으로 접어들면 오른쪽에 있다. 농경지의 밭담을 무단으로 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보존 상태가 다른 것보다 양호한 편이다. 인성리 방사탑 1호라고 명명되었지만 일반적으로 ‘거욱대’라고 한다. 1995년 8월 26일 제주도 민속자료 제8-1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주소는 대정읍 인성리 493(문화재 등록 497)번지이다. 농경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석을 주로 쌓았으나 아래쪽일수록 굵은 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밑이 넓고 위가 좁은 원추형이다. 거욱대는 높이가 220㎝ 정도로 사람 키보다 높다. 밑지름은 210㎝, 윗지름은 190㎝ 정도이다. 상부는 약간 동그랗게 정리한 다음 사람 모습의 두부와 몸통으로 형상화한 길쭉한 자연석을 올려놓았다. 상부의 자연석이 남쪽을 향하도록 하여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 주도록 기원한 마을 사람들의 바람을 반영하고 있다. 인성리 3호 거욱대 인성리의 거욱대 가운데 인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모슬봉 방향인 왼쪽 농경지의 밭담을 경계로 하여 농로로 이어진 밭 가운데에 있다. 인성리 방사탑 2호라고 명명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거욱대’라고 한다. 1995년 8월 26일 제주도 민속자료 제8-1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대정읍 인성리 490-1(62-1)번지가 주소이다. 농경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석을 주로 쌓아 올였으며, 밑지름이 넓고 윗지름이 좁은 원추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 높이가 220㎝ 정도로 사람 키보다 높다. 밑지름이 200㎝ 윗지름은 170㎝ 정도이다. 상부는 편평하게 한 다음 사람 모습의 두부와 몸통으로 형상화한 길쭉한 자연석을 올려놓았다. 이 상부의 자연석은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내도록 하기 위한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인성리 4호 거욱대 인성리의 거욱대 가운데 가장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즉 모슬봉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있어 모슬포로 이어지는 도로에 인접해 있다. 방풍을 위해 높게 쌓은 밭담을 넘어가야만 접근이 가능하다. 거욱대와 농경지 사이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깊고 넓게 만들어진 그 수로를 경계로 하여 농경지 바깥쪽에 있다. 주변에는 산담과 같이 거욱대를 보호하기 위해 장방형(長方形)의 홑담이 둘러쳐져 있다. 이 거욱대는 예전에 훼손되었다가 마을 사람들이 후대에 복원한 것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채 전승되고 있다. 주소는 대정읍 인성리 587-1번지이다. 농경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석이라기보다 석공들이 석축을 쌓기 위해 사용하는 각석에 가까운 돌로 쌓아 올렸다. 전체적으로 원통형이 되도록 밑지름이 넓고 윗지름이 좁다. 상부는 편평하게 한 다음, 사람의 모습을 두부와 몸통으로 형상화하여 돌하르방처럼 깎은 석상을 올려놓았다. 특히 현성과 가깝기 때문인지 수로 너머 농경지의 가장자리와 거욱대가 자리한 반대쪽의 공터에는 쉽게 옮길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각석들이 모여있다. 이로 미루어 현성을 쌓을 때 이용한 석재의 일부로 추정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모슬포에 군인들이 들어왔을 때 거욱대와 관련한 마을 사람들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군인들이 그냥 돌무더기로 보고 거욱대 두 개를 허물고 그 돌을 막사를 짓는 데 사용하였다. 당시 마을에는 훈련장으로 이용하면서 군인들이 임자 없는 거욱대의 돌 같은 것을 허문 것이 많았다. 2기만 남아 전해져 오다가 1961년에 거욱대 2기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마을에는 예전처럼 거욱대 4기가 남방의 허한 곳을 방비하게 되었다. 돌을 쌓고 그 위에 하르방을 세우는 이유는 높아야 위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쁜 것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하르방의 모습도 무섭고 장군처럼 만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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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문당 | 한국무속연구 | 김태곤 | 1981 | 국립민속박물관 | 한국의 무속-서울 황해도편 | 양종승 | 1999 | 민속원 | 한국의 무가 1 | 홍태한 |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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