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마을](/topic/마을)을 수호해 주는 동신(洞神)을 모시는 마을 제당으로서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성소(聖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西枝里) 서갓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1993년 8월 18일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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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김명자 |
정의 | [마을](/topic/마을)을 수호해 주는 동신(洞神)을 모시는 마을 제당으로서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성소(聖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西枝里) 서갓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1993년 8월 18일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마을](/topic/마을)을 수호해 주는 동신(洞神)을 모시는 마을 제당으로서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성소(聖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西枝里) 서갓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1993년 8월 18일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성황당의 신체는 돌무더기(누석단, 적석단)이고, 제의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자시(子時)에 유교식 동신제(洞神祭)를 올렸다. 돌무더기는 [마을](/topic/마을) 공동으로 섬기는 동신이 좌정하고 있는 동사(洞祠)로서의 기능을 한 것이다. 제사는 [제관](/topic/제관) 한 명과 유사 두 명이 정성껏 제물을 마련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고 전하나 1950년대를 전후하여 단절되었다. 조성된 시기는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지만 삼첩석과 이첩석은 같은 시기에 조성하고 돌무더기는 훨씬 후대에 추가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남긴 자료가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첩석과 이첩석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거석문화 유적으로 추정되며, 후대(後代)에 와서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허한 곳을 인위적으로 보완한다는 비보적 성격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 내용 | 성황당의 신체는 돌무더기(누석단, 적석단)이고, 제의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자시(子時)에 유교식 동신제(洞神祭)를 올렸다. 돌무더기는 [마을](/topic/마을) 공동으로 섬기는 동신이 좌정하고 있는 동사(洞祠)로서의 기능을 한 것이다. 제사는 [제관](/topic/제관) 한 명과 유사 두 명이 정성껏 제물을 마련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고 전하나 1950년대를 전후하여 단절되었다. 조성된 시기는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지만 삼첩석과 이첩석은 같은 시기에 조성하고 돌무더기는 훨씬 후대에 추가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남긴 자료가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첩석과 이첩석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거석문화 유적으로 추정되며, 후대(後代)에 와서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허한 곳을 인위적으로 보완한다는 비보적 성격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 형태 | 삼첩석이 자리 잡은 곳은 야트막한 야산이다. 숲이 울창하고, 접근하는 길도 인적의 왕래가 드문 한적한 곳으로, 신성영역임을 느끼게 한다. 그에 걸맞게 영역은 울창한 숲에가려서 가까이 [가지](/topic/가지) 않으면 쉽게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곳에는 커다란 자연석 세 개를 쌓아 올린 삼첩석 1기, 두 개를 쌓아 올린 이첩석 1기, 모자처럼 생긴 모관석(冒冠石) 1기, 주먹보다 큰 돌들을 모아 쌓아올린 돌무더기 1기가 66㎡ 남짓한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동신으로 받드는 신체는 돌무더기이다. 삼첩석의 크기는 맨 아랫돌의 지름 220㎝에 높이 110㎝ 정도이고, 가운데 돌은 지름 185㎝에 높이 110㎝이며, 가장 위에 올려진 돌은 지름 105㎝, 높이 35㎝ 등으로 전체 높이는 255㎝ 정도이다. 이첩석의 크기는 아랫돌이 지름 160㎝에 높이 70㎝이고, 윗돌은 지름 85㎝에 높이 70㎝ 등으로 전체 높이는 140㎝ 정도이다. 아랫돌은 약간 파손되어 옆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돌무더기는 아랫면의 지름이 280㎝에 높이 170㎝ 정도이고, 사람 머리 크기 정도의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돌무더기의 꼭대기에는 아랫면 40㎝, 높이 60㎝의 뾰족한 돌을 세웠다. | 형태 | 삼첩석이 자리 잡은 곳은 야트막한 야산이다. 숲이 울창하고, 접근하는 길도 인적의 왕래가 드문 한적한 곳으로, 신성영역임을 느끼게 한다. 그에 걸맞게 영역은 울창한 숲에가려서 가까이 [가지](/topic/가지) 않으면 쉽게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곳에는 커다란 자연석 세 개를 쌓아 올린 삼첩석 1기, 두 개를 쌓아 올린 이첩석 1기, 모자처럼 생긴 모관석(冒冠石) 1기, 주먹보다 큰 돌들을 모아 쌓아올린 돌무더기 1기가 66㎡ 남짓한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동신으로 받드는 신체는 돌무더기이다. 삼첩석의 크기는 맨 아랫돌의 지름 220㎝에 높이 110㎝ 정도이고, 가운데 돌은 지름 185㎝에 높이 110㎝이며, 가장 위에 올려진 돌은 지름 105㎝, 높이 35㎝ 등으로 전체 높이는 255㎝ 정도이다. 이첩석의 크기는 아랫돌이 지름 160㎝에 높이 70㎝이고, 윗돌은 지름 85㎝에 높이 70㎝ 등으로 전체 높이는 140㎝ 정도이다. 아랫돌은 약간 파손되어 옆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돌무더기는 아랫면의 지름이 280㎝에 높이 170㎝ 정도이고, 사람 머리 크기 정도의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돌무더기의 꼭대기에는 아랫면 40㎝, 높이 60㎝의 뾰족한 돌을 세웠다. | 의의 | 이 유적들은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 선사시대의 문화와 후대 민속신앙의 한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가 될 수 있으며, 고고학(考古學)과 민속학(民俗學)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가지](/topic/가지)』의 기록에 보이는 삼첩석, 모관석, 이첩석은 소실되어 지금은 찾을 길이 없지만 삼첩석과 이첩석을 건드리면 관재를 입는다든가 주맥을 누르기 위한 [풍수](/topic/풍수)적 요소에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민속신앙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네이버 백과[사전](/topic/사전) (100.naver.com) 안동군 지정 문화재편람 (안동문화원 편, 영남사, 1994) | 의의 | 이 유적들은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 선사시대의 문화와 후대 민속신앙의 한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가 될 수 있으며, 고고학(考古學)과 민속학(民俗學)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가지](/topic/가지)』의 기록에 보이는 삼첩석, 모관석, 이첩석은 소실되어 지금은 찾을 길이 없지만 삼첩석과 이첩석을 건드리면 관재를 입는다든가 주맥을 누르기 위한 [풍수](/topic/풍수)적 요소에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민속신앙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네이버 백과[사전](/topic/사전) (100.naver.com) 안동군 지정 문화재편람 (안동문화원 편, 영남사, 1994) | 유래 | 안동서지리성황당의 유래와 역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영[가지](/topic/가지)(永嘉誌)』의 기록으로 막연하나마 추정할 수 있다.『영가지』에 따르면 서갓[마을](/topic/마을)은 서가현촌이다가 나중에 서지로 불렸다. 고려 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남휘주(南暉珠,1326~1361)공이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고 그 뒤 직강(直講) 이봉춘(李逢春, 1542~1625)이 살았다고 전한다.『와룡면지(臥龍面誌)』에 따르면 직장(直長) 이한(李漢, 1499~?)공이 주촌(周村)에서 이곳으로 이거한 뒤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간서당(西澗書堂)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영가지』 권6 고적조에 삼첩석, 모관석, 이첩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첩석(三疊石)은 부사(府司)의 문 안에 있으며, 형태는 보릿짚 [삿갓](/topic/삿갓)과 같은데 세운본래의 뜻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단지 늙은 아전(衙前)들이 전하기를 관리들이 번성하고 쇠퇴하는 것을 위해 세웠다고 하며, 또한 부기(府基)의 주맥(主脈)을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이를 건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관재(官災)를 입는다고도 한다. 모관석(冒冠石)은 관청의 문 안에 있으며, 높이가 한 길이다. 윗부분은 관과 같으며, 그렇게 만든 뜻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대체로 부사 문 안에 있는 것과 같았을 것으로 보이며, 주맥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첩석(二疊石)은 관청의 서쪽 담 모서리에 있으며, 두 개의 돌을 갈아서 서로 맞추어 겹쳐 쌓았다. 만들어 둔 뜻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을 만지면 관재를 면하기 어렵다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영가지』의 기록에 보이는 삼첩석, 모관석, 이첩석은 소실되어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비슷한 형태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전하고 있다. 바로 서지리 서갓마을뒷산에 있는 유적 삼첩석이다. 삼첩석과 이첩석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거석문화 유적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후대에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허한 곳을 보완하는 비보적(裨補的) 성격이 추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 유래 | 안동서지리성황당의 유래와 역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영[가지](/topic/가지)(永嘉誌)』의 기록으로 막연하나마 추정할 수 있다.『영가지』에 따르면 서갓[마을](/topic/마을)은 서가현촌이다가 나중에 서지로 불렸다. 고려 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남휘주(南暉珠,1326~1361)공이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고 그 뒤 직강(直講) 이봉춘(李逢春, 1542~1625)이 살았다고 전한다.『와룡면지(臥龍面誌)』에 따르면 직장(直長) 이한(李漢, 1499~?)공이 주촌(周村)에서 이곳으로 이거한 뒤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간서당(西澗書堂)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영가지』 권6 고적조에 삼첩석, 모관석, 이첩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첩석(三疊石)은 부사(府司)의 문 안에 있으며, 형태는 보릿짚 [삿갓](/topic/삿갓)과 같은데 세운본래의 뜻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단지 늙은 아전(衙前)들이 전하기를 관리들이 번성하고 쇠퇴하는 것을 위해 세웠다고 하며, 또한 부기(府基)의 주맥(主脈)을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이를 건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관재(官災)를 입는다고도 한다. 모관석(冒冠石)은 관청의 문 안에 있으며, 높이가 한 길이다. 윗부분은 관과 같으며, 그렇게 만든 뜻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대체로 부사 문 안에 있는 것과 같았을 것으로 보이며, 주맥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첩석(二疊石)은 관청의 서쪽 담 모서리에 있으며, 두 개의 돌을 갈아서 서로 맞추어 겹쳐 쌓았다. 만들어 둔 뜻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을 만지면 관재를 면하기 어렵다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영가지』의 기록에 보이는 삼첩석, 모관석, 이첩석은 소실되어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비슷한 형태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전하고 있다. 바로 서지리 서갓마을뒷산에 있는 유적 삼첩석이다. 삼첩석과 이첩석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거석문화 유적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후대에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허한 곳을 보완하는 비보적(裨補的) 성격이 추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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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연구회 | 전라북도지 | 1960 | 문교부 | 관북지방무가 추가본 | 임석재ㆍ장주근 | 1966 |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서사무가연구-설화ㆍ소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서대석 | 1968 | 집문당 | 한국무가집 3 | 김태곤 | 1978 | 민족문화사 | 한국민속대사전 1 | 1991 | 한국민속학회 | 차사본풀이 유형 무가의 구조와 의미 | 최원오 |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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