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신(神)의 뿌리를 일컫는 무속용어. 부리는 조상의 영혼이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신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만신](/topic/만신)(萬神)부리’, ‘조상(祖上)부리’라는 용어를 무속에서는 종종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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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김명자 |
정의 | 신(神)의 뿌리를 일컫는 무속용어. 부리는 조상의 영혼이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신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만신](/topic/만신)(萬神)부리’, ‘조상(祖上)부리’라는 용어를 무속에서는 종종 사용한다. | 내용 | ‘만신부리’나 ‘조상부리’는 과거에 조상 중에서 무(巫)를 한 경우, 무당을 하다 숨진 사람의 혼(魂)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당이 내리는 것은 원인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무당의 혼이 있는 집안에서 그 혼이 내려 무당이 된다는 것이다. “무당 집에서 무당 난다.”는 말이 있다. 이 경우 만신부리라는 말이 적용된다. 무당은 느닷없이 되기보다는 조상 가운데 무당 또는 그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있는 경우 그 ‘부리’를 받아서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신부리’의 ‘부리’는 뿌리[根]에서 온 말로 볼 수 있다. 무당은 크게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로 나뉜다. 강신무는 신을 받은 무당을 말하며 세습무는 가계를 계승한 무당을 말한다. 강신무는 성무(成巫) 초기에 [신병](/topic/신병)을 체험하여 신의 영력(靈力)을 얻어 이 영력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반면 세습무는 영력과 관계없이 조상 대대로 혈통에 따라 무의 사제권이 세습되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제의를 통해 신께 기원하는 사제의 기능만을 하고 있다. 곧 조상의 무업(巫業)을 혈연 중심으로 제도적인 계승[세습]을 하는 무당이 세습무이다. 이러한 세습은 신부리와는 다르다. 무속에서 세습이란 보편적으로 사제권(司祭權)의 세습을 말한다. 무당 집에서 무당이 나오는 경우는 세습무에서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세습무의 세습은 부리를 이어 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며 제도적으로 무당이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강신무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신부리는 혈연 또는 인척관계로 이어진다. 조상부리를 이어받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역시 세습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근래에는 이를 각별히 영적세습(靈的世襲)이라고 하며 신부리의 근간을 이룬다. 신부리는 아들, 딸, 손자, 손녀, 조카, 형제 등과 같이 혈연관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가까운 인척관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반드시 무당이 아니어도 조상 가운데 역학을 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부리가 작용한다. 그리고 신부리는 어느 특정 지역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든지 나타나는 현상이다. 신부리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강재(여, 1991년 9월 기준 50세)씨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4남매 중 셋째다. 어머니가 아들 8형제를 낳았으나 여섯이 어려서 숨지고 오빠가 22세에 숨져 성인이 되어 남은 형제는 3녀 1남이다. 아버지는 전주(全州) 이씨(李氏) 집안의 완고한 분이었다. 이강재씨가 첫 혼인을 하던 20세에 친정어머니가 작고하여 아버지는 [재혼](/topic/재혼)을 했다. 6·25 전쟁 때 돌아가신 이강재씨의 증조할머니가 신을 모신 분으로 궁(宮)에 드나들었다. 신단을 [벽장](/topic/벽장)에 조그마하게 차려서 늘상 조용히 빌었지만 큰만신이었다. 이처럼 ‘무당 내력’이 있었던 탓에 이씨의 아버지는 딸이 신을 모시는 것을 꺼렸다. 딸이 어린시절부터 아픈 것은 신병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당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49세로 사망한 전 부인(이강재씨의 생모)도 신이 왔으나 받지 않아서 갑자기 세상을 떴다고 생각하지만 신을 받는 일은 절대로 꺼렸다. 8형제 중 여섯이 숨지고 나머지 두 아들 중 큰아들마저 성인이 되어 숨지자 점(占)을 보게 되었다. ‘묻는 곳’마다 신을 받지 않은 ‘벌전’이며 살고 있는 집도 흉가가 되었다고 했다. 이강재씨의 부친은 세 딸을 모두 출가시키고 막내아들 하나 남은 것마저 잃을까 두려워 포천을 떠나 서울 동[대문](/topic/대문)구 숭인동에 방 하나를 얻어서 [이사](/topic/이사)하였다. 아버지와 새 어머니는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으며, 이강재씨 집과도 가깝지만 왕래를 하지 않을 만큼 무당이 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강재씨 자신은 첫 남편을 졸지에 잃고 나중에는 맏딸마저 잃는 등 신을 받지 않아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사업도 실패를 거듭하고 건강도 나빠졌다. 30세에 재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가족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까지 부부와 1남 1녀이며, 39세에 정식으로 신을 받은 후에는 신의 거부로 남편과 4년에 걸쳐 별거를 한 적도 있다. 남편은 종종 산기도를 다니며 무속과 관련된 일을 한다. 남편의 부친인 이강재씨의 시아버지도 신을 경험한 역학인으로 특히 부적을 잘 썼다. 시아버지가 부적을 쓰려고 붓대를 잡으면 팔에서 ‘샥샥샥샥’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가 나지 않으면 부적을 쓰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이러한 일을 하는 것도 모르다가 이강재씨가 모시는 신이 알려주었으며 이씨 역시 ‘부적 할아버지’가 들어와서 조금씩 하고 있다. 이강재씨의 사촌언니도 30년간 무업(巫業)을 한 큰만신이었으나 1992년에 작고하여 진오기굿을 이강재씨가 해주었다. 이씨는 첫 남편이 세상을 떠난 데다 신까지 모시는 것이 ‘벌’이라 생각하여 그동안 친척도 만나지 않았었다. 사촌언니의 진오기굿을 하면서 이강재씨가 무녀라는 사실이 친척간에 알려질 정도였다. 특히 처녀 때 만나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육촌오빠에게는 ‘공수’까지 내려 그동안의 병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심지어 친언니의 남편마저 처제가 무녀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남동생 부부는 누이가 무녀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다가 사촌누이의 굿을 할 때에 여러 [가지](/topic/가지) 영험력을 보고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강재씨 자신은 ‘신을 모시고 불리는 일’을 하는 것도 벌이라며 스스로를 나무라기도 한다. 이강재 무녀의 신부리는 궁에 드나들었다는 큰 만신이었던 증조할머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친정어머니는 비록 신을 받지 않았지만 신을 체험했음에도 신을 거부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어머니에게 신이 왔는데 거부했다가 딸에게 가는 경우는 종종 있다. 심지어 시어머니가 거부하여 며느리에게 신이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강재무녀의 경우 사촌언니도 무당이었고 재혼한 남편 쪽에도 신부리가 있었다. 게다가 시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부적신이 내렸다. 이씨의 신부리는 기본적으로 친정 쪽이라 할 수 있으나 시가 쪽의 신부리 역시 전혀 무관하지 않다. 곧 친가와 외가 및 시가의 신부리가 모두 작용한 셈이다. 이처럼 신부리는 후손에게 거의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요소를 한껏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강재씨의 경우 혼인 전부터 신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기준으로 하면 일단 친정 쪽 신부리가 선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씨의 남편은 무당이 아니지만 종종 산에 수양(修養, 산기도)간다고 했다. 산에 수양(기도)가는 일은 무속인에게는 흔한 일이다. 이씨의 남편에게도 신줄이 있는데 아내가 신사(神事)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신을 받지 않은 대신 산기도라는 수양으로 대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큰 무당인 고 정대복무녀의 경우 외할머니가 큰 무당이었다. 외할머니가 집에서 크게 신당을 짓고 무신(巫神)을 모셨다. 정씨가 33세 되던 해 음력 5월 5일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15일 후인 5월 20일에 저절로 말문이 열려 “[옥황상제](/topic/옥황상제) 일월성신이다.”라고 소리를 쳤다. 정씨는 이것이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자기에게로 대를 물려 내린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신체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도 찾아다니고 약도 썼으며, 점도 쳐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이 몸이 더욱 아프기만 했는데 외할머니의 대를 물려 신이 내리고 말문이 열린 후로는 차츰 아픈 증상이 덜해지기 시작하였다. 역술인 하지송씨(남, 1992년 5월 기준 만 52세)는 함경남도 흥남시에서 출생하여 6·25 전쟁 때 월남하여 서울에서 신사(神事)를 하고 있다. 신병을 상당기간 앓았으며, 신점(神占)과 역점을 병행한다. 신을 받았지만 철학을 별도로 학습하여 신점복자(神占卜者)이며 아울러 역리점복자(易理占卜者)가 된 것이다. 하씨 역시 다른 무속인이나 신을 받은 역술인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신을 거부하다가 무수한 고난을 겪고 신을 받아 무속인이자 역술인이 되었는데 그에게도 깊은 신부리가 있다. 반드시 무당이 아니더라도 점을 보는 등 역학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학문을 한 경우에도 ‘신부리’처럼 작용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난다. 신내린 과정을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집안에 어떤 내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친 쪽으로는 큰아버지가 사주를 보던 분이었다. 신은 내리지 않았으나 육효(六爻)도 볼 줄 알았다. 아버지는 일찍이 부모를 여읜 고아가 되었는데 역시 사주보는 사촌 형님(하씨에게는 5촌 아저씨, 곧 당숙)이 데려다가 키웠다고 한다. 외가 쪽으로는 외할아버지가 신감(神感. 신가물. 신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면장을 지내고 학교 교장도 하던 유식한 분이었다. 외할머니는 무당이었는데 [평상](/topic/평상)시에 [무복](/topic/무복)을 만들어 놓고 [진적](/topic/진적)굿을 할 때면 무당옷을 입고 춤을 추곤 했다. 전주 이씨 [양반](/topic/양반)집인 탓으로 남의 눈에 보일까봐 막상 굴리지 못하고 대신에 여러 벌의 무복을 자기 몸주에 모셔 놓고서 굿판이 벌어질 때 끼어들어 풀어내곤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외할머니 쪽으로는 그 윗대에도 장구만 치고 다니던 분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멀리 선대부터 신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송씨에게는 우선 친가 쪽으로는 큰아버지, 외가 쪽으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신부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큰아버지를 기준으로 하면 하지송씨는 조카로서 신부리를 이어받은 셈이다. 같은 환경 속에서는 같은 문화가 형성될 가능성이 짙다고 보는데 이는 단순히 환경이 같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하지송씨의 아버지가 사주를 보는 사촌형 슬하에서 성장하여 하씨가 그 영향을 받아 신기가 생길 수도 있었겠지만 애초 집안에 신부리가 있었다는 것 역시 크게 작용했으리라 본다. 친정에서는 무속이라는 것을 몰랐으나 시가에 와보니 신부리가 있었고 무당이 된 경우도 있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하여 신사(神事)를 하는 무녀 김임선(여, 1991년 기준 50세)씨의 경우 혼인 후 무당이 되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신병을 앓는 등, 신의 단련을 받았는데 신을 받지 않으려고 계속 신을 떼어내는 굿을 하여 재산을 탕진했다. 그러다가 신을 받고 모셔 놓았지만 손님을 받지는 않았다. 그 무렵 며느리인 김임선씨가 계속 신의 단련을 받았다. 결국 시어머니의 신과 합의시키는 ‘합의 굿’을 하여 며느리인 김임선씨에게 신이 완전히 와서 무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부리는 대체로 친가나 외가 쪽의 영향이 큰데 이밖에도 시어머니의 신부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 역시 종종 보인다. 그러나 친가나 외가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 이는 곧 혈연관계 쪽이 우세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도 어머니 쪽의 영향이 우세하다. 신을 거부하면 가족 가운데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경우도 나타날 만큼 신부리는 후손에게 강하게 작용한다. 무당으로 신사(神事)를 하는 대신 수양을 하거나 다른 종교로 대체하여 ‘종교인’으로 활동함으로써, 무당이 되지 않는 수도 있는데 이는 드문 경우이다. 말하자면 떼어낼 수 있는 신의 경우도 있는데 대개는 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당들은 신부리를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자랑은커녕 숨기고 싶어하고 꺼린다. 그러나 일종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무당이 사용하던 물건을 없애버리는 것에 대하여는 각기 다른 설이 있다. 우선 무당이 쓰던 물건은 “대를 물리거나, 물려줄 사람이 없으면” 불에 태우는데 쇠붙이는 땅에 묻는다는 것이다. 땅에 묻은 이런 무구들이 노출되어 산골짜기를 헤매고 다니는 강신체험자들에게 발견될 수도 있다. 반드시 눈에 띄지 않더라도 현몽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무당이 신비체험을 하고 성물을 습득하는 체험은 범속한 인간이 신권자(神權者)인 무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무구를 찾아내는 것을 [구애비](/topic/구애비)[鬼業]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신부리를 꺼려 무당이 쓰던 물건을 없애는 경우도 있다. 즉 “무당은 무당부리에서 나온다고 하는 강신무들은 후손으로 무당의 대가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였던 무구(巫具)를 땅에 묻거나 불태워버리는 관습을 가[지게](/topic/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구는 신이 내릴 예비무당이 현몽으로 찾아내기 때문에 무업의 종결은 무업의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곧 무구를 찾아내면 새로운 무당이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신부리는 인척관계보다 혈연관계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부계 쪽보다는 모계 쪽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을 논리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무속을 여성종교로 고착화하는 것은 상당히 도식화되고 경직된 논의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의대로라면 모계 쪽이 강한 요인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혹 남성과 여성의 역할분담의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종교와 관련된 일은 여성이 중심이 되고 이는 신부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측해 보는 것이다. 신부리는 인간심성을 지배하는 신 관념과 관련시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남성보다 여성 쪽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무속과 같은 맥락에 있는 가신신앙이 대체로 여성 중심의 신앙이라는 점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한국무속연구 (김태곤, 집문당, 1981) 서울민속대관 2-서울 무속편 (서울특별시 편, 1992) 무속과 영의 세계 (김태곤, 한울, 1993) 한국의 점복 (김태곤 외, 민속원, 1995) 무당의 [신병](/topic/신병)과 신들림 (양종승, 한국무속학 3, 2001) 무당과 신부리 (김명자, 한국무속학 5, 한국무속학회,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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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문당 | 한국무가집 3 | 김태곤 | 1978 | 태학사-영인 | 조선신가유편 | 손진태 | 1981 | 집문당 | 한국무속연구 | 김태곤 | 1981 | 집문당 | 한국의 무속신화 | 김태곤 | 1985 | 한국민속학회 | 궁상이 무가의 상징성 연구 | 배영희 | 1994 | 도서출판 창솔 | 한국민속문화대사전 | 김용덕 |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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