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용의 형상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도마뱀[蜥蜴]을 이용한 기우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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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최종성 |
정의 | 용의 형상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도마뱀[蜥蜴]을 이용한 기우의례. | 정의 | 용의 형상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도마뱀[蜥蜴]을 이용한 기우의례. | 내용 | 석척기우는 용의 형상을 만들거나 그리지 않고 용을 대신하는 생물체(도마뱀, 도롱뇽)를 주술적으로 이용한 대룡기우(代龍祈雨)의 한 방식이다. 석척기우는 주로 연못가에 동자들을 모아 놓고 도마뱀이 들어 있는 독을 막대기로 두드리면서 주문을 외게 하는 기우의식이었다. 이것은 유사룡(類似龍)에게 소음과 주문을 반복적으로 가함으로써 연못에 거하는 부동의 잠룡을 일깨우기 위한 강요의례였다. 석척기우는 이미 중국 당대의 기록에서 확인된다.『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도롱뇽을 독에 넣고 밀봉한 다음, 10살 미만의 아동 10여 명에게 청죽(靑竹)으로 독을 주야로 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송대에는 청의(靑衣)를 입은 28명의 동자들에게 도마뱀이 들어 있는 독에 주문을 가하게 하는 석척기우법을 공식적으로 반포하였다. 조선 태종 7년 6월에 광연루에서 석척기우를 시행하였다. 이때 석척기우는 푸른 옷을 입은 20명의 동자들이 버드나무 [가지](/topic/가지)로 도마뱀이 든 두 개의 독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우는 방식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미 국가의례뿐만 아니라 지방의 기우제에서도 석척기우가 행해졌다. 조선 숙종 대에는 경회루(慶會樓), 모화루(慕華樓), 춘당대(春塘臺)의 연못가에 수십 명의 청의동자를 동원해 설행하는 석척기우를 국행기우제의 공식적인 절차로 정례화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모화루의 석척기우만이 국가의례에 남고 나머지는 폐지되기에 이른다. 석척기우의 주술적인 의도는 동자들이 외우는 주문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송사(宋史)』 권102「 예지」55 예5에 실려 있는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내라 비를 흥건히 내리게 하면 너를 돌려보내리라(蜥蜴蜥蜴 興雲吐霧 雨令滂霧 令汝歸去)”라는 주문은 석척기우문의 전형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내용은 용을 부리고 자극하는 의도를 숨김없이 보여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석척기우의 주문도 중국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태종실록』에 보이는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내라 비를 흥건히 내리게 하면 너를 돌아가게 놓아주리라(蜥蜴蜥蜴 興雲吐霧 興雨滂霧 放汝歸去)”라는석척기우문은 송대의 주문과 약간의 자구가 바뀌었을뿐 전체적인 주술의 문장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석척기우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즉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는 강요의례적 주문 내용이 비속하고 비윤리적이라고 비판되기에 이른 것이다. 영조 대에 이르러 석척기우문은 “도마뱀아 도마뱀아 안개를 토해내고 구름을 일으키라 비를 내려 흥건히 적시어 속타는 이 마음을 씻어 주어라(蜥蜴蜥蜴 吐霧興雲 降雨滂沱 滌此惔焚)”로 바뀐다. 이것은 영조가 숙종의 시문집에서 발굴한 석척기우문과 일치하는 것으로, 대룡(代龍)을 압박하기보다 대룡에게 기원하고 호소하는 분위기를 중시하는 의례경건주의적 맥락에서 주목받았다고 할 수 있다.『기우제등록』 5책 뒷표지 속면에 수록되어 있는 별도의 석척기우문도 내용상 영조대의 것과 일치한다. 석척기우는 기우제룡(祈雨祭龍)의 한 [유형](/topic/유형)으로서 입체적인 구조물이나 회화를 통해 용의 모습을 표현하기보다 용을 대신하는 [동물](/topic/동물)을 직접 이용해 용을 현존시키고 여기에 반복되는 소음과 주문을 가함으로써 강우의 효과를 극대화하려 한 대룡기우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일찍이 중국 당·송대에 보편화된 석척기우는 조선 초기에 시행된 이래 국가 및 지방의 기우의례로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국행기우제의 12제차에 경회루, 모화루, 춘당대의 석척기우가 공식화되었다. 모화루의 석척기우는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석척기우에 사용된 주문은 용신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도록 언어로 용을 압박하고 재촉하는 의례적인 수단이었다. 강요의례적 성격을 지니는 석척기우문은 가뭄에 처한 인간의 절박한 심정과 용신에 대한 호소를 담은 기원의례의 내용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 [석전·기우·[안택](/topic/안택)](/topic/석전·기우·안택) (조선총독부, 1938) 中國シャマニズムの硏究 (中村治兵衛, 刀水書房, 1992) 용부림과 용부림꾼-용과 기우제 (최종성, 민속학연구 6, 국립민속박물관, 1999) 祈雨祭謄錄, 『기우제등록』과 [기후](/topic/기후)의례 (최종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 내용 | 석척기우는 용의 형상을 만들거나 그리지 않고 용을 대신하는 생물체(도마뱀, 도롱뇽)를 주술적으로 이용한 대룡기우(代龍祈雨)의 한 방식이다. 석척기우는 주로 연못가에 동자들을 모아 놓고 도마뱀이 들어 있는 독을 막대기로 두드리면서 주문을 외게 하는 기우의식이었다. 이것은 유사룡(類似龍)에게 소음과 주문을 반복적으로 가함으로써 연못에 거하는 부동의 잠룡을 일깨우기 위한 강요의례였다. 석척기우는 이미 중국 당대의 기록에서 확인된다.『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도롱뇽을 독에 넣고 밀봉한 다음, 10살 미만의 아동 10여 명에게 청죽(靑竹)으로 독을 주야로 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송대에는 청의(靑衣)를 입은 28명의 동자들에게 도마뱀이 들어 있는 독에 주문을 가하게 하는 석척기우법을 공식적으로 반포하였다. 조선 태종 7년 6월에 광연루에서 석척기우를 시행하였다. 이때 석척기우는 푸른 옷을 입은 20명의 동자들이 버드나무 [가지](/topic/가지)로 도마뱀이 든 두 개의 독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우는 방식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미 국가의례뿐만 아니라 지방의 기우제에서도 석척기우가 행해졌다. 조선 숙종 대에는 경회루(慶會樓), 모화루(慕華樓), 춘당대(春塘臺)의 연못가에 수십 명의 청의동자를 동원해 설행하는 석척기우를 국행기우제의 공식적인 절차로 정례화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모화루의 석척기우만이 국가의례에 남고 나머지는 폐지되기에 이른다. 석척기우의 주술적인 의도는 동자들이 외우는 주문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송사(宋史)』 권102「 예지」55 예5에 실려 있는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내라 비를 흥건히 내리게 하면 너를 돌려보내리라(蜥蜴蜥蜴 興雲吐霧 雨令滂霧 令汝歸去)”라는 주문은 석척기우문의 전형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내용은 용을 부리고 자극하는 의도를 숨김없이 보여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석척기우의 주문도 중국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태종실록』에 보이는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내라 비를 흥건히 내리게 하면 너를 돌아가게 놓아주리라(蜥蜴蜥蜴 興雲吐霧 興雨滂霧 放汝歸去)”라는석척기우문은 송대의 주문과 약간의 자구가 바뀌었을뿐 전체적인 주술의 문장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석척기우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즉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는 강요의례적 주문 내용이 비속하고 비윤리적이라고 비판되기에 이른 것이다. 영조 대에 이르러 석척기우문은 “도마뱀아 도마뱀아 안개를 토해내고 구름을 일으키라 비를 내려 흥건히 적시어 속타는 이 마음을 씻어 주어라(蜥蜴蜥蜴 吐霧興雲 降雨滂沱 滌此惔焚)”로 바뀐다. 이것은 영조가 숙종의 시문집에서 발굴한 석척기우문과 일치하는 것으로, 대룡(代龍)을 압박하기보다 대룡에게 기원하고 호소하는 분위기를 중시하는 의례경건주의적 맥락에서 주목받았다고 할 수 있다.『기우제등록』 5책 뒷표지 속면에 수록되어 있는 별도의 석척기우문도 내용상 영조대의 것과 일치한다. 석척기우는 기우제룡(祈雨祭龍)의 한 [유형](/topic/유형)으로서 입체적인 구조물이나 회화를 통해 용의 모습을 표현하기보다 용을 대신하는 [동물](/topic/동물)을 직접 이용해 용을 현존시키고 여기에 반복되는 소음과 주문을 가함으로써 강우의 효과를 극대화하려 한 대룡기우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일찍이 중국 당·송대에 보편화된 석척기우는 조선 초기에 시행된 이래 국가 및 지방의 기우의례로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국행기우제의 12제차에 경회루, 모화루, 춘당대의 석척기우가 공식화되었다. 모화루의 석척기우는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석척기우에 사용된 주문은 용신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도록 언어로 용을 압박하고 재촉하는 의례적인 수단이었다. 강요의례적 성격을 지니는 석척기우문은 가뭄에 처한 인간의 절박한 심정과 용신에 대한 호소를 담은 기원의례의 내용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 [석전·기우·[안택](/topic/안택)](/topic/석전·기우·안택) (조선총독부, 1938) 中國シャマニズムの硏究 (中村治兵衛, 刀水書房, 1992) 용부림과 용부림꾼-용과 기우제 (최종성, 민속학연구 6, 국립민속박물관, 1999) 祈雨祭謄錄, 『기우제등록』과 [기후](/topic/기후)의례 (최종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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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 한국의 무속-서울·황해도 편 | 양종승 | 1999 | 집문당 | 황해도 무속의 지역성과 보편성 | 양종승 | 2000 | 국립민속박물관 | 무당 귀물 연구-「삼국유사」의 삼부인과 무당의 거울·칼·방울을 중심으로 | 양종승 | 2001 | 국립문화재연구소 | 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서울시·경기도·강원도 |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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