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방촌리석장승

한국무속신앙사전
장흥방촌리석장승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 소재한 한 쌍의 돌장승. 1999년 2월 26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6월 14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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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 소재한 한 쌍의 돌장승. 1999년 2월 26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6월 14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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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정의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 소재한 한 쌍의 돌장승. 1999년 2월 26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6월 14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 소재한 한 쌍의 돌장승. 1999년 2월 26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6월 14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내용방촌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마을](/topic/마을) 대동계(1768년 조직)가 주관하여 ‘토지신’에게 별신제를 거행한다. 제의에 앞서 장승에 [금줄](/topic/금줄)이 둘러쳐지고, 정월대보름이 되면 장승에서부터 매구(풍물)와 함께 별신제가 거행된다. 별신제는 토지신에게 마을의 질병 방지와 농사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이다. 제장은 마을회관 앞의 ‘뜸밭’으로 평지제단이며, 짚과 [한지](/topic/한지)로 만든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들을 논둑에 세워 놓고 제사를 지낸다. 방촌리 석장승은 마을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신체로서 마을 수호의 기능을 하고 있다. ‘벅수골’이란 땅이름(지명)도 전하고 있다.

별신제라는 말은 광주시와 전남 일대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몇 년에 한 번 모시는 형태의 마을제사도 없다. 유독 장흥 지역에서만 특이하게도 별신제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용산면 운주리, 관산읍 방촌리 등지에 그 유례가 보인다. 이들은 매년 모시는 전형적인 마을제사이면서도 명칭과 양식을 약간 달리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들 별신제가 보이는 양식의 공통성은 정형화된 관제(官祭)형식을 빌려 왔다는 것이다.

별신제 거행 기간에 [제관](/topic/제관)은 물론 마을 전 주민이 각종 금기를 지키고 근신을 한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은 집례, 음식을 장만하는 [화주](/topic/화주) 두 명, 축관, 삼헌관 등 모두 일곱 명이다. 이들은 정월 초사흗날 마을 어른들에 의해 선정된다. 선정 조건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부정이 없고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 등이다. 예전에는 득남을 원하거나 별도로 공을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자원해 맡기도 했다. 근래 들어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나 생기복덕에 따라 제관이 되어 제사를 지내곤 하지만 과거에는 마을 어른들이 [단골](/topic/단골)에게 제의절차를 진행하도록 맡겼다.

과거에는 방촌을 단골판 구역으로 하는 단골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밀양 박씨 성의 사람이 마을과 집안의 크고 작은 굿들을 맡았다. 단골은 방촌 사람들의 굿을 담당해 주고 봄과 가을에 식량을 얻어서 생활했다. 이 단골이 별신제를 맡아서 지내다가 일제강점기 중엽부터 일반 주민들이 맡아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제관은 제사 사흘전에 화주의 집으로 옮겨 제사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제사 하루 전에 제장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제장·석장승·화주([초헌](/topic/초헌)관이 화주가 된다) 집에 [황토](/topic/황토)를 깔고 왼새끼에 [창호지](/topic/창호지)를 끼운 금줄을 쳐 부정한 잡인의 접근을 금한다. 제를 준비하는 동안 미리 마을 주민들에게도 일체의 부정을 조심하고 [가축](/topic/가축)을 잡지 말라고 당부한다. 제장과 화주 집의 정화작업이 끝나면 제관들은 화주 집에 모여 허수아비를 제작한다.

허수아비는 짚, 창호지, 대나무로 만든다. 짚으로 허수아비의 형체와 제물을 담는 오쟁이를 만든다. [창호지](/topic/창호지)로는 만들어진 허수아비의 얼굴을 감싸고 손과 발가락을 표현한다. 대나무는 [제상](/topic/제상) 앞에 허수아비를 세워 두기 위한 것이다. 만들어진 한 쌍의 허수아비에 성별을 표현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경우 [먹물](/topic/먹물)로 [상투](/topic/상투)와 수염, 할머니의 경우 쪽진머리에 [비녀](/topic/비녀)를 각각 그린다.

제물은 화주 집에서 준비한다. 제일 하루 전에 대동계 공사원과 별유사가 관산장(3, 8일장)에 가서 돼지고기, 닭, 소의 간, 나물, 과일, 어류 등 제물을 구입한다. 이때 가격을 깎으면 정성이 부족해진다고 하여 흥정을 하지 않는다. 제물을 준비할 때 제관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음식에 머리카락이나 이물질이 들어[가지](/topic/가지) 않도록 조심한다. 제사에 필요한 비용은 제자(祭資)라 하여 마을 대동계 자금으로 충당되며, 매년 15만원 정도(1995년 기준) 소요된다.

제 당일 요즘엔 [덕석](/topic/덕석)기가 없지만 예전에는 제장에 덕석기를 꽂아 놓고, ‘벅수골’ 위의 샘에서 화주가 목욕후 장승에 금줄을 둘러쳤다고 한다. 작은 기(旗) 2개와 함께 세우는 덕석기를 잘못해 넘어뜨리게 되면 그 넘어진 쪽 마을의 사람이 죽는다 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다뤘다 한다.

별신제는 음력 정월대보름날 아침을 먹고 회관에 모이기 시작해 매구의 어우름 [마당](/topic/마당)으로 시작한다. 먼저 마을 진입로에 있는 진서대[장군](/topic/장군)과 미륵석불에 간단하게 제물을 차리고 화주가 제사를 지낸다. 이때 매구꾼들은 화주와 함께 인사를 드리고 매구를 친다. 화주는 장승에게 재액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달라고 기원한다. 장승 앞에서의 간단한 제의가 끝나면 화주와 매구꾼들은 화주집으로 돌아와 술과 음식을 먹으며 한바탕 논다. 이후 매구를 치며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마당밟이](/topic/마당밟이)를 한다.

대보름날 오후 반나절이 지난 뒤 아침 일찍 장승에서부터 시작하여 집집마다 돌며 치던 매구꾼이 마을 전체 마당밟이가 안 되더라도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제장인 마을회관 앞 ‘뜸밭’으로 돌아온다. 이어 제관들은 모두 [제복](/topic/제복)을 갖추고 별신제를 시작한다. 제는 진설, [분향](/topic/분향), 재배, 강신, 재배, [헌작](/topic/헌작), 재배, [독축](/topic/독축), 합동재배, [아헌](/topic/아헌), [종헌](/topic/종헌), [첨작](/topic/첨작), [분축](/topic/분축), 소지의 순으로 여느 [기제사](/topic/기제사)와 같은 절차로 진행된다.

제의가 끝나면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허수아비 등에 있는 오쟁이에 가득 담고, 나머지 제물은 제관 및 온 동네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음복](/topic/음복)을 한 뒤 마을 어귀에 있는 ‘허새비골’(산저마을 산밑 앞 개울)로 허수아비를 가져가서 [헌식](/topic/헌식)한다. 이 행위는 허수아비에 음식물을 주어 달래고, 마을의 온갖 액운을 허수아비 속으로 들여보내 마을 밖으로 내쫓는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을 안에는 마을주민을 괴롭히는 액운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이다.

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고려시대 후기에 성문장승으로 세워졌다가 후대에 이르러 마을공동체 신앙인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기능이 습합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먼저 고려시대의 치소와 관련된 공공기능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다음으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천연두의 창궐 등 질병과 재난으로부터 대응, 향촌 공동체의 제의 공간적 신체로서의 기능 등 시기적 변화를 통하여 기능도 습합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별신제는 조선 후기 이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민속의례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특히 장승이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참고문헌장흥읍지 (정묘지, 1747년)
향토문화유적조사-장흥 관산 방촌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5)
장흥군의 문화유적 (목[포대](/topic/포대)학교박물관․전라남도․장흥군, 1989)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남녘의 벅수 (이종철 외, 김향문화재단, 1990)
벅수와 장승 (김두하, 집문당, 1990)
전통문화[마을](/topic/마을) 장흥 방촌 (장흥군·방촌마을지편찬위원회, 1994)
전남지방의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6)
장흥 방촌리 석장승 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조경만·나승만, 전라남도, 1999)
마을 굿을 통해 본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의 지역적 특성 (이주승, 실천민속학 2, 2000)
내용방촌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마을](/topic/마을) 대동계(1768년 조직)가 주관하여 ‘토지신’에게 별신제를 거행한다. 제의에 앞서 장승에 [금줄](/topic/금줄)이 둘러쳐지고, 정월대보름이 되면 장승에서부터 매구(풍물)와 함께 별신제가 거행된다. 별신제는 토지신에게 마을의 질병 방지와 농사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이다. 제장은 마을회관 앞의 ‘뜸밭’으로 평지제단이며, 짚과 [한지](/topic/한지)로 만든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들을 논둑에 세워 놓고 제사를 지낸다. 방촌리 석장승은 마을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신체로서 마을 수호의 기능을 하고 있다. ‘벅수골’이란 땅이름(지명)도 전하고 있다.

별신제라는 말은 광주시와 전남 일대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몇 년에 한 번 모시는 형태의 마을제사도 없다. 유독 장흥 지역에서만 특이하게도 별신제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용산면 운주리, 관산읍 방촌리 등지에 그 유례가 보인다. 이들은 매년 모시는 전형적인 마을제사이면서도 명칭과 양식을 약간 달리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들 별신제가 보이는 양식의 공통성은 정형화된 관제(官祭)형식을 빌려 왔다는 것이다.

별신제 거행 기간에 [제관](/topic/제관)은 물론 마을 전 주민이 각종 금기를 지키고 근신을 한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은 집례, 음식을 장만하는 [화주](/topic/화주) 두 명, 축관, 삼헌관 등 모두 일곱 명이다. 이들은 정월 초사흗날 마을 어른들에 의해 선정된다. 선정 조건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부정이 없고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 등이다. 예전에는 득남을 원하거나 별도로 공을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자원해 맡기도 했다. 근래 들어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나 생기복덕에 따라 제관이 되어 제사를 지내곤 하지만 과거에는 마을 어른들이 [단골](/topic/단골)에게 제의절차를 진행하도록 맡겼다.

과거에는 방촌을 단골판 구역으로 하는 단골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밀양 박씨 성의 사람이 마을과 집안의 크고 작은 굿들을 맡았다. 단골은 방촌 사람들의 굿을 담당해 주고 봄과 가을에 식량을 얻어서 생활했다. 이 단골이 별신제를 맡아서 지내다가 일제강점기 중엽부터 일반 주민들이 맡아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제관은 제사 사흘전에 화주의 집으로 옮겨 제사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제사 하루 전에 제장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제장·석장승·화주([초헌](/topic/초헌)관이 화주가 된다) 집에 [황토](/topic/황토)를 깔고 왼새끼에 [창호지](/topic/창호지)를 끼운 금줄을 쳐 부정한 잡인의 접근을 금한다. 제를 준비하는 동안 미리 마을 주민들에게도 일체의 부정을 조심하고 [가축](/topic/가축)을 잡지 말라고 당부한다. 제장과 화주 집의 정화작업이 끝나면 제관들은 화주 집에 모여 허수아비를 제작한다.

허수아비는 짚, 창호지, 대나무로 만든다. 짚으로 허수아비의 형체와 제물을 담는 오쟁이를 만든다. [창호지](/topic/창호지)로는 만들어진 허수아비의 얼굴을 감싸고 손과 발가락을 표현한다. 대나무는 [제상](/topic/제상) 앞에 허수아비를 세워 두기 위한 것이다. 만들어진 한 쌍의 허수아비에 성별을 표현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경우 [먹물](/topic/먹물)로 [상투](/topic/상투)와 수염, 할머니의 경우 쪽진머리에 [비녀](/topic/비녀)를 각각 그린다.

제물은 화주 집에서 준비한다. 제일 하루 전에 대동계 공사원과 별유사가 관산장(3, 8일장)에 가서 돼지고기, 닭, 소의 간, 나물, 과일, 어류 등 제물을 구입한다. 이때 가격을 깎으면 정성이 부족해진다고 하여 흥정을 하지 않는다. 제물을 준비할 때 제관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음식에 머리카락이나 이물질이 들어[가지](/topic/가지) 않도록 조심한다. 제사에 필요한 비용은 제자(祭資)라 하여 마을 대동계 자금으로 충당되며, 매년 15만원 정도(1995년 기준) 소요된다.

제 당일 요즘엔 [덕석](/topic/덕석)기가 없지만 예전에는 제장에 덕석기를 꽂아 놓고, ‘벅수골’ 위의 샘에서 화주가 목욕후 장승에 금줄을 둘러쳤다고 한다. 작은 기(旗) 2개와 함께 세우는 덕석기를 잘못해 넘어뜨리게 되면 그 넘어진 쪽 마을의 사람이 죽는다 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다뤘다 한다.

별신제는 음력 정월대보름날 아침을 먹고 회관에 모이기 시작해 매구의 어우름 [마당](/topic/마당)으로 시작한다. 먼저 마을 진입로에 있는 진서대[장군](/topic/장군)과 미륵석불에 간단하게 제물을 차리고 화주가 제사를 지낸다. 이때 매구꾼들은 화주와 함께 인사를 드리고 매구를 친다. 화주는 장승에게 재액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달라고 기원한다. 장승 앞에서의 간단한 제의가 끝나면 화주와 매구꾼들은 화주집으로 돌아와 술과 음식을 먹으며 한바탕 논다. 이후 매구를 치며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마당밟이](/topic/마당밟이)를 한다.

대보름날 오후 반나절이 지난 뒤 아침 일찍 장승에서부터 시작하여 집집마다 돌며 치던 매구꾼이 마을 전체 마당밟이가 안 되더라도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제장인 마을회관 앞 ‘뜸밭’으로 돌아온다. 이어 제관들은 모두 [제복](/topic/제복)을 갖추고 별신제를 시작한다. 제는 진설, [분향](/topic/분향), 재배, 강신, 재배, [헌작](/topic/헌작), 재배, [독축](/topic/독축), 합동재배, [아헌](/topic/아헌), [종헌](/topic/종헌), [첨작](/topic/첨작), [분축](/topic/분축), 소지의 순으로 여느 [기제사](/topic/기제사)와 같은 절차로 진행된다.

제의가 끝나면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허수아비 등에 있는 오쟁이에 가득 담고, 나머지 제물은 제관 및 온 동네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음복](/topic/음복)을 한 뒤 마을 어귀에 있는 ‘허새비골’(산저마을 산밑 앞 개울)로 허수아비를 가져가서 [헌식](/topic/헌식)한다. 이 행위는 허수아비에 음식물을 주어 달래고, 마을의 온갖 액운을 허수아비 속으로 들여보내 마을 밖으로 내쫓는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을 안에는 마을주민을 괴롭히는 액운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이다.

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고려시대 후기에 성문장승으로 세워졌다가 후대에 이르러 마을공동체 신앙인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기능이 습합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먼저 고려시대의 치소와 관련된 공공기능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다음으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천연두의 창궐 등 질병과 재난으로부터 대응, 향촌 공동체의 제의 공간적 신체로서의 기능 등 시기적 변화를 통하여 기능도 습합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별신제는 조선 후기 이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민속의례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특히 장승이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참고문헌장흥읍지 (정묘지, 1747년)
향토문화유적조사-장흥 관산 방촌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5)
장흥군의 문화유적 (목[포대](/topic/포대)학교박물관․전라남도․장흥군, 1989)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남녘의 벅수 (이종철 외, 김향문화재단, 1990)
벅수와 장승 (김두하, 집문당, 1990)
전통문화[마을](/topic/마을) 장흥 방촌 (장흥군·방촌마을지편찬위원회, 1994)
전남지방의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6)
장흥 방촌리 석장승 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조경만·나승만, 전라남도, 1999)
마을 굿을 통해 본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의 지역적 특성 (이주승, 실천민속학 2, 2000)
역사장흥 방촌리 석장승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몇 [가지](/topic/가지) 유래가 전한다. 방촌리 석장승은 건립 당시 성문을 수호하는 공공장승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1265년(고려 원종 6) 장흥부(長興府)가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 개칭되고『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장흥도호부 건치연혁조에는 회주목의 치소가 있던 방촌을 보강하고자 상잠산성(觴岑山城)과 회주고성(懷州古城)을 축조하면서 성문 부근의 둔군동(屯軍洞)에 남․여 장승을 세웠다고 전한다. 회주고성은 고려 말때 극심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치소를 지키고자 축조된 성으로, 방촌[마을](/topic/마을) 주변에 그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이 회주고성 읍성의 보허 진압(補虛 鎭壓) 및 수호를 위해 서문 밖에 이 장승을 세웠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창궐한 두창(痘瘡, 천연두)을 퇴치하기 위해 ‘진서대[장군](/topic/장군)’이라는 명문을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진서대장군’이란 명문을 놓고 “옛날 중국 황제들이 우리나라 고구려, 백제의 왕에게 봉한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등의 명칭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 강남에서 오는 두신(痘神)을 퇴치하기 위하여 오히려 중국 황제의 권위를 빌려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는 명문을 새김으로써 호귀(胡鬼)마마를 되돌아가게 하자는, 옛 선비들의 재치가 만들어 놓은 해학이 깃든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방촌리 석장승을 성문을 지키는 공공장승보다는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해 세운 장승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방촌리 석장승은 고려 말에 건립된 성문장승으로 보는 견해와 조선시대 후기(17∼18세기)에 창궐한 천연두를 퇴치하고자 건립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방촌리 석장승은 후대에 접어들어 마을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마을 수호의 기능이 가미되어 나타난다.
역사장흥 방촌리 석장승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몇 [가지](/topic/가지) 유래가 전한다. 방촌리 석장승은 건립 당시 성문을 수호하는 공공장승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1265년(고려 원종 6) 장흥부(長興府)가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 개칭되고『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장흥도호부 건치연혁조에는 회주목의 치소가 있던 방촌을 보강하고자 상잠산성(觴岑山城)과 회주고성(懷州古城)을 축조하면서 성문 부근의 둔군동(屯軍洞)에 남․여 장승을 세웠다고 전한다. 회주고성은 고려 말때 극심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치소를 지키고자 축조된 성으로, 방촌[마을](/topic/마을) 주변에 그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이 회주고성 읍성의 보허 진압(補虛 鎭壓) 및 수호를 위해 서문 밖에 이 장승을 세웠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창궐한 두창(痘瘡, 천연두)을 퇴치하기 위해 ‘진서대[장군](/topic/장군)’이라는 명문을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진서대장군’이란 명문을 놓고 “옛날 중국 황제들이 우리나라 고구려, 백제의 왕에게 봉한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등의 명칭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 강남에서 오는 두신(痘神)을 퇴치하기 위하여 오히려 중국 황제의 권위를 빌려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는 명문을 새김으로써 호귀(胡鬼)마마를 되돌아가게 하자는, 옛 선비들의 재치가 만들어 놓은 해학이 깃든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방촌리 석장승을 성문을 지키는 공공장승보다는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해 세운 장승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방촌리 석장승은 고려 말에 건립된 성문장승으로 보는 견해와 조선시대 후기(17∼18세기)에 창궐한 천연두를 퇴치하고자 건립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방촌리 석장승은 후대에 접어들어 마을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마을 수호의 기능이 가미되어 나타난다.
형태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성문 앞에 세운 공공장승이다. 질병을 방비하기 위한 기능 등 시기적으로 기능이 다르게 나타난다. 방촌리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마을](/topic/마을) 수호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 장흥 방촌리는 해안에 연하면서 천관산을 마주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이 300여 개 분포한다. 고려시대의 장흥부(회주목) 치소와 치소성, 조선시대 장흥(長興) 위씨(魏氏) 동족촌으로서 많은 문화재가 있다.

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관산읍에서 방촌으로 넘어드는 국도 23호선 도로변 좌우측에 서 있다. 화강석으로 된 2기의 석장승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장승은 ‘남장생’, ‘벅수’, 명문에 따라 ‘진서대[장군](/topic/장군)(鎭西大將軍)’(이하 ‘남장승’으로 표기)으로 불린다. 이 장승과 마주하는 동쪽의 장승은 ‘미륵석불’, ‘벅수’, ‘돌부처’, ‘여장생’ 등 다양하게 불리나 명문은 없다(이하 ‘여장승’으로 표기).

남장승은 전체적으로 간략하고 평면적이다. 얼굴이 있는 위쪽의 폭이 아래보다 조금 넓다. 얼굴에는 왕방울눈이 이중 선각으로 처리되었고, 주먹코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양옆 볼까지 찢어진 입을 보면 입술은 두텁고, 입꼬리는 귀밑으로 치켜 올라가 전체적으로 익살스럽게 활짝 웃는 형상이다. 목 밑에서 가슴의 명문 위쪽까지 역삼각형의 수염이 넓게 선각되어 있다. 수염 밑에서부터 좌대까지 ‘진서대장군’이라는 명문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크기는 높이 235㎝, 앞면 최대너비 54㎝, 두께 40㎝, 머리 높이 57㎝, 둘레 160㎝이다.

여장승은 남장승에 비해 풍만하면서도 조각이 깊고 무서운 인상을 하고 있다. 얼굴 반을 차지한 부리부리한 왕방울눈이 툭 튀어나와 있고, 우뚝 솟은 주먹코가 남은 얼굴 반을 차지하고 있다. 두터운 입술을 하고 있는 입은 직선에 가깝고 짤막하다. 이마에는 반원형으로 나란히 곡선이 선각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197㎝, 앞면 최대너비 48㎝, 두께 48㎝, 머리 높이 92㎝, 둘레 173㎝이다.
형태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성문 앞에 세운 공공장승이다. 질병을 방비하기 위한 기능 등 시기적으로 기능이 다르게 나타난다. 방촌리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마을](/topic/마을) 수호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 장흥 방촌리는 해안에 연하면서 천관산을 마주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이 300여 개 분포한다. 고려시대의 장흥부(회주목) 치소와 치소성, 조선시대 장흥(長興) 위씨(魏氏) 동족촌으로서 많은 문화재가 있다.

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관산읍에서 방촌으로 넘어드는 국도 23호선 도로변 좌우측에 서 있다. 화강석으로 된 2기의 석장승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장승은 ‘남장생’, ‘벅수’, 명문에 따라 ‘진서대[장군](/topic/장군)(鎭西大將軍)’(이하 ‘남장승’으로 표기)으로 불린다. 이 장승과 마주하는 동쪽의 장승은 ‘미륵석불’, ‘벅수’, ‘돌부처’, ‘여장생’ 등 다양하게 불리나 명문은 없다(이하 ‘여장승’으로 표기).

남장승은 전체적으로 간략하고 평면적이다. 얼굴이 있는 위쪽의 폭이 아래보다 조금 넓다. 얼굴에는 왕방울눈이 이중 선각으로 처리되었고, 주먹코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양옆 볼까지 찢어진 입을 보면 입술은 두텁고, 입꼬리는 귀밑으로 치켜 올라가 전체적으로 익살스럽게 활짝 웃는 형상이다. 목 밑에서 가슴의 명문 위쪽까지 역삼각형의 수염이 넓게 선각되어 있다. 수염 밑에서부터 좌대까지 ‘진서대장군’이라는 명문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크기는 높이 235㎝, 앞면 최대너비 54㎝, 두께 40㎝, 머리 높이 57㎝, 둘레 160㎝이다.

여장승은 남장승에 비해 풍만하면서도 조각이 깊고 무서운 인상을 하고 있다. 얼굴 반을 차지한 부리부리한 왕방울눈이 툭 튀어나와 있고, 우뚝 솟은 주먹코가 남은 얼굴 반을 차지하고 있다. 두터운 입술을 하고 있는 입은 직선에 가깝고 짤막하다. 이마에는 반원형으로 나란히 곡선이 선각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197㎝, 앞면 최대너비 48㎝, 두께 48㎝, 머리 높이 92㎝, 둘레 173㎝이다.
집문당한국 무속 연구김태곤1983
한국문화인류학회무속의 조상숭배장주근1986
한울무속과 영의 세계김태곤1993
한국비교민속학회무당문화의 전통양종승1995
서울대학교 박사힉위논문한국무속의 신관에 관한 연구이용범2001
한국샤머니즘학회한국 무속에 있어서 조상의 위치이용범2002
청년사한국무속의 신의 유형이용범2002
민속원서울굿 가망청배거리에서 ‘가망’의 의미 연구홍태한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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