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영당지

한국무속신앙사전
[최영](/topic/최영), [이순신](/topic/이순신), 이대원, 정운 [장군](/topic/장군), 용왕신, 산신을 모시는 제당으로서 영당풍어굿의 제의 장소.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 30-4[번지](/topic/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2008년 12월 26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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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topic/최영), [이순신](/topic/이순신), 이대원, 정운 [장군](/topic/장군), 용왕신, 산신을 모시는 제당으로서 영당풍어굿의 제의 장소.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 30-4[번지](/topic/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2008년 12월 26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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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최영](/topic/최영), [이순신](/topic/이순신), 이대원, 정운 [장군](/topic/장군), 용왕신, 산신을 모시는 제당으로서 영당풍어굿의 제의 장소.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 30-4[번지](/topic/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2008년 12월 26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최영](/topic/최영), [이순신](/topic/이순신), 이대원, 정운 [장군](/topic/장군), 용왕신, 산신을 모시는 제당으로서 영당풍어굿의 제의 장소.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 30-4[번지](/topic/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2008년 12월 26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4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영당에서 행해진 풍어굿은 어업을 [생업](/topic/생업)으로 하고 살아 온 여수 지역 사람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의식이다. 풍어굿은 바다로 나가서 연등을 띄우는 등의 뒷전굿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굿거리가 영당을 중심으로 연행된다. 원래 영당풍어굿은 유림과 무당에 의해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큰굿으로 청신굿ㆍ오신굿ㆍ퇴신굿이 있으며 20여 개 작은 굿거리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영당풍어굿은 민속문화보존회가 주관하여 축제인 진남제의 한 행사로 해마다 행해지고 있다. 또한 1991년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전남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였다. 영당풍어굿은 매해 5월 6일에 진행된다. 해마다 5월 5ㆍ6일쯤에는 여수진남제가 행해지기 때문에 축제와 결합되어 축제의 한 행사로 연행되는 것이다. 축제와 연계된 영당풍어굿은 크게 풍어제, 풍어굿, 풍물굿(용왕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영당 [처마](/topic/처마)와 담 위로 지등을 줄지어 매달아 장식한다. 담에는 오색기를 줄지어 세워 놓고 영당 [마당](/topic/마당)에 곳대를 세웠다. 윗부분에는 [어사화](/topic/어사화) 같은 꽃을 달았고, 바로 밑에는 여러 개의 고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1. 풍어제 : 풍어제는 유교적인 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관](/topic/제관)은 삼헌관, 집사, 축관으로 구성되었다. [초헌](/topic/초헌)관은 여[수수](/topic/수수)산협동조합장이, [아헌](/topic/아헌)관은 여수시장, [종헌](/topic/종헌)관은 진남제전 위원장이 각각 역할을 맡는다. 홀기집사는 영당보존회 및 향토민속문화보존회장이 맡는다. 본당에 진설된 [제물](/topic/제물)을 보면 [제상](/topic/제상)은 크게 3상으로 구분된다. 정면에 모셔지는 4위의 신격에게 올려지는 [[장군](/topic/장군)상](/topic/장군상)이 있고, 양 측면의 산신상과 [용왕상](/topic/용왕상)이 있다. 각각의 제상에 올리는 제물은 가로로 5열을 구분해 순서대로 진설한다. 신위 앞 1열은 술ㆍ메ㆍ국ㆍ떡, 2열에는 육고기와 생선, 3열에는 부침개, 4열에는 나물, 5열에는 과일 등을 올린다. 물론 장군상에는 메를 네 그릇 올린다. 제물을 진설한 다음 제관들과 [삼현육각](/topic/삼현육각)을 연주할 [악사](/topic/악사)들이 자리를 잡아 앉고, 제사는 유교적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2. 풍어굿 : 제사가 끝나면 풍어굿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순서는 부정치기-제석굿-거리넋-[고풀이](/topic/고풀이)-길닦음으로 진행된다.

3. 풍물굿 : 풍어굿이 끝나면 풍물패가 [걸립굿](/topic/걸립굿), 어장굿, 오방굿 등을 연주하며 액맥이굿을 한다. 액맥이굿의 풍물패가 나가면 그 뒤에 무녀와 악사 및 참여자들이 따라가서 배를 탄다. 배에서는 풍물패가 뱃머리에 서고, 중앙에는 제물로 돼지머리가 놓이며, 제물 바로 뒤에는 무녀들이 앉고 그 주위에 연등이 놓인다. 배 옆에는 스님이 목탁을 들고 서 있다. 배 주위로는 참여자들이 구경하고, 배가 출항하기 전부터 풍물을 친다. 배가 항해하는 동안 풍물패는 연주를 하고, 스님은 목탁을 치며, 무녀들은 [합장](/topic/합장)하여 [비손](/topic/비손)을 한다. 그러다가 스님이 목탁을 치면 연등을 바[가지](/topic/가지)에 담아 바다에 띄워 보내고 돼지머리를 바다에 던진다. 그러고 나서 풍물패가 신명나게 연주하면서 배는 선착장으로 돌아온다.
내용영당에서 행해진 풍어굿은 어업을 [생업](/topic/생업)으로 하고 살아 온 여수 지역 사람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의식이다. 풍어굿은 바다로 나가서 연등을 띄우는 등의 뒷전굿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굿거리가 영당을 중심으로 연행된다. 원래 영당풍어굿은 유림과 무당에 의해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큰굿으로 청신굿ㆍ오신굿ㆍ퇴신굿이 있으며 20여 개 작은 굿거리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영당풍어굿은 민속문화보존회가 주관하여 축제인 진남제의 한 행사로 해마다 행해지고 있다. 또한 1991년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전남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였다. 영당풍어굿은 매해 5월 6일에 진행된다. 해마다 5월 5ㆍ6일쯤에는 여수진남제가 행해지기 때문에 축제와 결합되어 축제의 한 행사로 연행되는 것이다. 축제와 연계된 영당풍어굿은 크게 풍어제, 풍어굿, 풍물굿(용왕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영당 [처마](/topic/처마)와 담 위로 지등을 줄지어 매달아 장식한다. 담에는 오색기를 줄지어 세워 놓고 영당 [마당](/topic/마당)에 곳대를 세웠다. 윗부분에는 [어사화](/topic/어사화) 같은 꽃을 달았고, 바로 밑에는 여러 개의 고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1. 풍어제 : 풍어제는 유교적인 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관](/topic/제관)은 삼헌관, 집사, 축관으로 구성되었다. [초헌](/topic/초헌)관은 여[수수](/topic/수수)산협동조합장이, [아헌](/topic/아헌)관은 여수시장, [종헌](/topic/종헌)관은 진남제전 위원장이 각각 역할을 맡는다. 홀기집사는 영당보존회 및 향토민속문화보존회장이 맡는다. 본당에 진설된 [제물](/topic/제물)을 보면 [제상](/topic/제상)은 크게 3상으로 구분된다. 정면에 모셔지는 4위의 신격에게 올려지는 [[장군](/topic/장군)상](/topic/장군상)이 있고, 양 측면의 산신상과 [용왕상](/topic/용왕상)이 있다. 각각의 제상에 올리는 제물은 가로로 5열을 구분해 순서대로 진설한다. 신위 앞 1열은 술ㆍ메ㆍ국ㆍ떡, 2열에는 육고기와 생선, 3열에는 부침개, 4열에는 나물, 5열에는 과일 등을 올린다. 물론 장군상에는 메를 네 그릇 올린다. 제물을 진설한 다음 제관들과 [삼현육각](/topic/삼현육각)을 연주할 [악사](/topic/악사)들이 자리를 잡아 앉고, 제사는 유교적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2. 풍어굿 : 제사가 끝나면 풍어굿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순서는 부정치기-제석굿-거리넋-[고풀이](/topic/고풀이)-길닦음으로 진행된다.

3. 풍물굿 : 풍어굿이 끝나면 풍물패가 [걸립굿](/topic/걸립굿), 어장굿, 오방굿 등을 연주하며 액맥이굿을 한다. 액맥이굿의 풍물패가 나가면 그 뒤에 무녀와 악사 및 참여자들이 따라가서 배를 탄다. 배에서는 풍물패가 뱃머리에 서고, 중앙에는 제물로 돼지머리가 놓이며, 제물 바로 뒤에는 무녀들이 앉고 그 주위에 연등이 놓인다. 배 옆에는 스님이 목탁을 들고 서 있다. 배 주위로는 참여자들이 구경하고, 배가 출항하기 전부터 풍물을 친다. 배가 항해하는 동안 풍물패는 연주를 하고, 스님은 목탁을 치며, 무녀들은 [합장](/topic/합장)하여 [비손](/topic/비손)을 한다. 그러다가 스님이 목탁을 치면 연등을 바[가지](/topic/가지)에 담아 바다에 띄워 보내고 돼지머리를 바다에 던진다. 그러고 나서 풍물패가 신명나게 연주하면서 배는 선착장으로 돌아온다.
형태1. 영당의 규모 : 영당은 현재 돌산대교 넘어가기 전 바로 오른쪽 아래편인 국동 어항단지 내에 위치하고 있다. 1982년에 복원된 목조건물 한 동(면적 35.19㎡)으로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전후 일퇴의 규모이다.

2. 배향된 신격 : 1994년에는 용왕신, 산신, [최영](/topic/최영), 이순신, 이대원, 정운 등의 6위의 [영정](/topic/영정)을 [봉안](/topic/봉안)하였다. 건물 내부 양 측면에 산신과 용왕신, 정면에는 왼쪽부터 정운ㆍ이순신ㆍ최영ㆍ이대원 [장군](/topic/장군) 순으로 총 여섯 개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순신은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하였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에 맞서 수많은 전공을 세우다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사후에 곧바로 여수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승려 옥형이 극진히 제사를 모셨으며 “바다에 경보할것이 있으면 이순신이 꿈에 나타나 기미를 알렸다”고 한다. 이것은 이순신이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적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어민들의 출어와 풍어를 관장하는 영당의 주신격으로 좌정하게 된 계기를 보인다. 최영은 조선 건국 세력에 의해 처형된 인물로, 백성들에게는 영웅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있어 전국 각지에서 지역수호신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많았다. 영당에서 최영을 신격으로 배향한 것도 이와 같은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대원은 1586년에 고흥 녹도만호가 되었고, 1587년에 고흥 앞바다 손죽도 인근 해상에서 왜구와 싸워 큰 전공을 올리고 그해 이월 열이렛날 왜구와 격전을 벌이다 포로가 되어 선상에서 사망하였다. 이대원은 여수 손죽도 이대원 [사당](/topic/사당)에 배향되었고, 영당에서도 신격으로 모셔졌다. 정운은 1591년에 녹도만호로 임명되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의 막하에서 옥포해전ㆍ당포해전ㆍ한산해전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다가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하여 이대원장 군사당에 배향되었고, 영당에서도 신격으로 모셔지고 있다. 산신은 영당 왼쪽에 모셔져 있고, 탱화는 산신이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용왕신은 영당 오른쪽에 모셔져 있고, 탱화는 용위에 올라 앉은 모습이다.
영당 복원 이후 진남제 기간에 영당풍어굿을 하고 있다
형태1. 영당의 규모 : 영당은 현재 돌산대교 넘어가기 전 바로 오른쪽 아래편인 국동 어항단지 내에 위치하고 있다. 1982년에 복원된 목조건물 한 동(면적 35.19㎡)으로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전후 일퇴의 규모이다.

2. 배향된 신격 : 1994년에는 용왕신, 산신, [최영](/topic/최영), 이순신, 이대원, 정운 등의 6위의 [영정](/topic/영정)을 [봉안](/topic/봉안)하였다. 건물 내부 양 측면에 산신과 용왕신, 정면에는 왼쪽부터 정운ㆍ이순신ㆍ최영ㆍ이대원 [장군](/topic/장군) 순으로 총 여섯 개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순신은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하였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에 맞서 수많은 전공을 세우다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사후에 곧바로 여수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승려 옥형이 극진히 제사를 모셨으며 “바다에 경보할것이 있으면 이순신이 꿈에 나타나 기미를 알렸다”고 한다. 이것은 이순신이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적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어민들의 출어와 풍어를 관장하는 영당의 주신격으로 좌정하게 된 계기를 보인다. 최영은 조선 건국 세력에 의해 처형된 인물로, 백성들에게는 영웅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있어 전국 각지에서 지역수호신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많았다. 영당에서 최영을 신격으로 배향한 것도 이와 같은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대원은 1586년에 고흥 녹도만호가 되었고, 1587년에 고흥 앞바다 손죽도 인근 해상에서 왜구와 싸워 큰 전공을 올리고 그해 이월 열이렛날 왜구와 격전을 벌이다 포로가 되어 선상에서 사망하였다. 이대원은 여수 손죽도 이대원 [사당](/topic/사당)에 배향되었고, 영당에서도 신격으로 모셔졌다. 정운은 1591년에 녹도만호로 임명되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의 막하에서 옥포해전ㆍ당포해전ㆍ한산해전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다가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하여 이대원장 군사당에 배향되었고, 영당에서도 신격으로 모셔지고 있다. 산신은 영당 왼쪽에 모셔져 있고, 탱화는 산신이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용왕신은 영당 오른쪽에 모셔져 있고, 탱화는 용위에 올라 앉은 모습이다.
영당 복원 이후 진남제 기간에 영당풍어굿을 하고 있다
의의영당지는 역사적인 인물이 신격화되는 과정을 설명해 주는 제의적 공간으로서의 중요한 의미와 함께 지역 주민들의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신앙적 믿음의 형성 과정을 확인할수 있는 종교적 의미가 큰 곳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장군](/topic/장군)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이 지역의 실질적인 수호자로서 활동했고, 사후에 지역 주민들에 의해 고을수호신으로 신격화된 것은 이들의 신앙적 심리를 잘 보여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당지는 남해안 지역의 어로신앙 및 용왕신앙의 실상을 가늠할 수 있는 곳으로서 민속신앙적 의미가 크다. 영당은 본래 자연신을 모신 해신당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가운데 후대에 역사적 환경이 작용되어 인물신이 수용되었다는 것은 민속신앙의 통시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있다는 점에서 종교사적 가치가 크다. 영당지야말로 여수 남해안지역 민속신앙의 변화 양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민속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여수향토사 (김낙원, 향토문화사, 1962)
여수ㆍ여천향토지 (여수여천향토지편찬위원회, 1982)
여수시의 문화유적 (조선대학교박물관, 2000)
여수 아으 동동다리 (김준옥, 민속원, 2004)
여수 영당, 풍어굿, [악공청](/topic/악공청) (이경엽 외, 민속원, 2007)
의의영당지는 역사적인 인물이 신격화되는 과정을 설명해 주는 제의적 공간으로서의 중요한 의미와 함께 지역 주민들의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신앙적 믿음의 형성 과정을 확인할수 있는 종교적 의미가 큰 곳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장군](/topic/장군)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이 지역의 실질적인 수호자로서 활동했고, 사후에 지역 주민들에 의해 고을수호신으로 신격화된 것은 이들의 신앙적 심리를 잘 보여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당지는 남해안 지역의 어로신앙 및 용왕신앙의 실상을 가늠할 수 있는 곳으로서 민속신앙적 의미가 크다. 영당은 본래 자연신을 모신 해신당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가운데 후대에 역사적 환경이 작용되어 인물신이 수용되었다는 것은 민속신앙의 통시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있다는 점에서 종교사적 가치가 크다. 영당지야말로 여수 남해안지역 민속신앙의 변화 양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민속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여수향토사 (김낙원, 향토문화사, 1962)
여수ㆍ여천향토지 (여수여천향토지편찬위원회, 1982)
여수시의 문화유적 (조선대학교박물관, 2000)
여수 아으 동동다리 (김준옥, 민속원, 2004)
여수 영당, 풍어굿, [악공청](/topic/악공청) (이경엽 외, 민속원, 2007)
유래1. 민간신앙에서 중요한 종교적 공간으로서의 영당 : 영당은 본래 남산 산록에 있던 것으로 보아 동제당으로 세워진 것으로 보이지만 왜구들의 노략질이나 풍랑, 흉어로 인해적지 않은 고통을 당한 어촌 사람들이 바닷가로 옮겨와 용신당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영당이 위치한 당머리와 봉산리(남산동)ㆍ국포리(국동) 일대는 고기잡이를 주로 하는 어촌이며 이 지역 어민들이 어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당집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용왕신을 받들어 모신 것으로 추정되고, 나중에 역사적인 인물들이 배향된 것으로 판단된다.

2. 역사적인 인물신을 배향하는 공간으로서의 영당 : 이순신 [장군](/topic/장군)을 모시기 이전에 고려 충신 수사 [최영 장군](/topic/최영장군)을 모시다가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을 모시게 된 것은 그가 노량해전(1598년)에서 순국한 이후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순신을 주신으로 충신 정운, 이대원 양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곳 여수 앞바다를 수호한 장군이라는 점에서 지역에서는 당연히 수호신으로 받들 수 있는 역사적 명분이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역사적인 인물들을 제당에 안치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충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한 상황적 맥락이 작용되었으며, 이들이 자연스럽게 지역 수호신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민속종교적 심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흔히 무속에서 역사적인 인물을 무속신격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그처럼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이들은 유교적 이념을 중시하는 [사당](/topic/사당) 추존과 더불어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3. 바다 수호신을 받드는 공간으로서의 영당 : 영당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며, 영당 앞을 지나는 배들은 고사미를 내고 고사를 지낸 뒤에 출어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영당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다. 당시 영당에 모셔진 4위의 [영정](/topic/영정) 가운데 이대원의 화상만 남고 최영ㆍ정운 화상은 소실되었으며, 이순신 화상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60년에 여수 신청 사람들에 의해 영당이 재건되었다. 여기서 신청 사람들은 굿을 진행하는 무당, 굿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악사](/topic/악사), 무가 출신의 재인이나 예인 등을 말한다. 여수에는 [악공청](/topic/악공청)이 있다. 이들은 취고청에 소속되어 좌수영의 군사훈련이나 연희에서 음악을 담당했고, 충민사나 향교 및 영당제사 등 지역의 중요한 의례나 행사 때에도 역시 음악과 관련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악공청이 신청의 역할을 했을 것이고, 이들 집단이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영당을 후대에 재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5년에는 일제강점기 때 영당 대지 소유권을 획득한 이우헌이 대지를 여수시에 기부 체납하였다. 이우헌 이전에는 사사지(社寺地)로 1915년에 김청여와 장진황이 소유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1976년에는 어항단지 조성 계획에 따라 영당이 철거되었다. 그 후 1979년에 영당풍어굿 보존회가 창설되면서 풍어굿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단법인 향토민속문화보존회가 결성되어 정부에 영당 복원을 요청하였다. 1982년에 원양어업조합 협찬 2,000만원, 시비1,000만 원을 지원받아 현재의 영당을 복원하였다.
유래1. 민간신앙에서 중요한 종교적 공간으로서의 영당 : 영당은 본래 남산 산록에 있던 것으로 보아 동제당으로 세워진 것으로 보이지만 왜구들의 노략질이나 풍랑, 흉어로 인해적지 않은 고통을 당한 어촌 사람들이 바닷가로 옮겨와 용신당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영당이 위치한 당머리와 봉산리(남산동)ㆍ국포리(국동) 일대는 고기잡이를 주로 하는 어촌이며 이 지역 어민들이 어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당집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용왕신을 받들어 모신 것으로 추정되고, 나중에 역사적인 인물들이 배향된 것으로 판단된다.

2. 역사적인 인물신을 배향하는 공간으로서의 영당 : 이순신 [장군](/topic/장군)을 모시기 이전에 고려 충신 수사 [최영 장군](/topic/최영장군)을 모시다가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을 모시게 된 것은 그가 노량해전(1598년)에서 순국한 이후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순신을 주신으로 충신 정운, 이대원 양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곳 여수 앞바다를 수호한 장군이라는 점에서 지역에서는 당연히 수호신으로 받들 수 있는 역사적 명분이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역사적인 인물들을 제당에 안치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충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한 상황적 맥락이 작용되었으며, 이들이 자연스럽게 지역 수호신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민속종교적 심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흔히 무속에서 역사적인 인물을 무속신격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그처럼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이들은 유교적 이념을 중시하는 [사당](/topic/사당) 추존과 더불어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3. 바다 수호신을 받드는 공간으로서의 영당 : 영당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며, 영당 앞을 지나는 배들은 고사미를 내고 고사를 지낸 뒤에 출어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영당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다. 당시 영당에 모셔진 4위의 [영정](/topic/영정) 가운데 이대원의 화상만 남고 최영ㆍ정운 화상은 소실되었으며, 이순신 화상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60년에 여수 신청 사람들에 의해 영당이 재건되었다. 여기서 신청 사람들은 굿을 진행하는 무당, 굿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악사](/topic/악사), 무가 출신의 재인이나 예인 등을 말한다. 여수에는 [악공청](/topic/악공청)이 있다. 이들은 취고청에 소속되어 좌수영의 군사훈련이나 연희에서 음악을 담당했고, 충민사나 향교 및 영당제사 등 지역의 중요한 의례나 행사 때에도 역시 음악과 관련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악공청이 신청의 역할을 했을 것이고, 이들 집단이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영당을 후대에 재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5년에는 일제강점기 때 영당 대지 소유권을 획득한 이우헌이 대지를 여수시에 기부 체납하였다. 이우헌 이전에는 사사지(社寺地)로 1915년에 김청여와 장진황이 소유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1976년에는 어항단지 조성 계획에 따라 영당이 철거되었다. 그 후 1979년에 영당풍어굿 보존회가 창설되면서 풍어굿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단법인 향토민속문화보존회가 결성되어 정부에 영당 복원을 요청하였다. 1982년에 원양어업조합 협찬 2,000만원, 시비1,000만 원을 지원받아 현재의 영당을 복원하였다.
문화재관리국강릉단오제 실측조사보고서1994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동해안 굿의 전승과 변화윤동환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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