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동해신묘지

한국무속신앙사전
나라에서 동해신에게 풍농풍어(豊農豊魚)와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곳.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2000년 1월 22일에 ‘강원도 기념물제7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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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동해신에게 풍농풍어(豊農豊魚)와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곳.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2000년 1월 22일에 ‘강원도 기념물제7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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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길
정의나라에서 동해신에게 풍농풍어(豊農豊魚)와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곳.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2000년 1월 22일에 ‘강원도 기념물제73호’로 지정되었다.
정의나라에서 동해신에게 풍농풍어(豊農豊魚)와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곳.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2000년 1월 22일에 ‘강원도 기념물제73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산천과 바다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였다. 특히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동해의 동해신묘(강원도 양양군)와 더불어, 서해의 서해신사(황해도 풍천), 남해의 남해신사(전라도 나주-현재 전라남도 영암)는 주요한 국가 제의의 장소로 매년 음력 이월과 팔월에 왕이 친히 향과 축을 보내 제사를 지낸 곳이다. 동해신묘는 조선시대 [사전](/topic/사전)(祀典)을 정비하는 과정에 중사(中祀)로 제정되었다. 동해신묘의 위치를 보면 서북쪽으로 대나무와 솔밭이 있고, 서쪽은 [민가](/topic/민가)와 접해 있다. 남쪽과 동쪽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높은 대지 위에 새로 지은 정전이 1동 있다. 정전의 서북쪽으로 와 가 있다. 면적은 1,316㎡이고, 소재지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339 외 1필지이다. 1993년에 복원할 당시 조산리 399[번지](/topic/번지)와 434-55번지의 1,058㎡를 옛 동해신묘지로 설정하고 토지를 매수하여 복원한 것이다.
동해신묘제를 복원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동해신묘에서 제향하고 있다. 양력 [1월 1일](/topic/1월1일) 오전 6시에 해맞이 행사의 일환으로 제향하고, 또 여름 해수욕장 개장시기인 양력 7월 10일을 전후하여 오전 10시쯤에 해변용왕제를 제향하고 있다. 이 두 행사 모두 양양군수가 [초헌](/topic/초헌)관이 되고, 양양군 의회 의장이 [아헌](/topic/아헌)관이 되어 진행한다. 해맞이행사는 1995년 제1회를 시작하였고, 해변용왕제는 1993년에 동해신묘를 복원한 다음부터 시작하였다. 해변용왕제는 동해신묘를 복원하기 전에는 바닷가에서 [병풍](/topic/병풍)을 쳐놓고 제향했던 것으로 그 역사는 오래되었다.
동해신묘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허균의 글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갑신년 7월 양양부 동산리에 사는 어부 지익복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중 바람이 그 배를 몰고 가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일주야를 달려 동쪽으로 한 섬에 닿았는데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인도하여 왕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왕궁에 나아가니 궁 뜰에는 창을 든 병사의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왕이라는 자가 보라색 옷을 입고 궁전에 앉아서 말하기를 내가 강릉에서 제사를 받아먹은 지 수천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에게 쫓기어 이곳으로 옮겨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제께 호소한 끝에 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으니 너의 힘을 빌려 관원에게 뜻을 전하고 옛 땅 내 집에 돌아가고자 하니 너는 목민관에게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몰아치게 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고는 바람을 몰아 돌려보내 주었는데 하루가 못 되어 동해로 돌아왔다. 어부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으나 감히 관가에 나아가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향임(鄕任) 이석림에게 말하여 관아에 보고하게 하였다.

이 설화 외에도 동해신묘에서 관우를 제향하였다는 설화도 양양군에서 전해온다.
우리나라에서 바다의 신에게 제향한 곳으로는 동해의 양양동해신묘 외에 남해의 남해신사(전라도 나주), 서해의 서해신사(황해도 풍천) 등이 있고, 육지와 접해 있는 북쪽에서는 두만강신사(함경북도 경원)와 압록강사(평안북도 의주) 등이 있다. 동해신묘는 조선 초기에 나라에서 제사를 정비하여 서해·남해와 함께 주관한 곳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동해묘에 관한 소고 (정영호, 청람사학 창간호, 한국교원대학교 청람사학회, 1997)
양양 동해신묘 (강릉대학교박물관, 1999)
동해신묘의 문화사적 고찰 (장정룡, 강원도민속연구, 국학자료원, 2002)
내용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산천과 바다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였다. 특히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동해의 동해신묘(강원도 양양군)와 더불어, 서해의 서해신사(황해도 풍천), 남해의 남해신사(전라도 나주-현재 전라남도 영암)는 주요한 국가 제의의 장소로 매년 음력 이월과 팔월에 왕이 친히 향과 축을 보내 제사를 지낸 곳이다. 동해신묘는 조선시대 [사전](/topic/사전)(祀典)을 정비하는 과정에 중사(中祀)로 제정되었다. 동해신묘의 위치를 보면 서북쪽으로 대나무와 솔밭이 있고, 서쪽은 [민가](/topic/민가)와 접해 있다. 남쪽과 동쪽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높은 대지 위에 새로 지은 정전이 1동 있다. 정전의 서북쪽으로 와 가 있다. 면적은 1,316㎡이고, 소재지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339 외 1필지이다. 1993년에 복원할 당시 조산리 399[번지](/topic/번지)와 434-55번지의 1,058㎡를 옛 동해신묘지로 설정하고 토지를 매수하여 복원한 것이다.
동해신묘제를 복원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동해신묘에서 제향하고 있다. 양력 [1월 1일](/topic/1월1일) 오전 6시에 해맞이 행사의 일환으로 제향하고, 또 여름 해수욕장 개장시기인 양력 7월 10일을 전후하여 오전 10시쯤에 해변용왕제를 제향하고 있다. 이 두 행사 모두 양양군수가 [초헌](/topic/초헌)관이 되고, 양양군 의회 의장이 [아헌](/topic/아헌)관이 되어 진행한다. 해맞이행사는 1995년 제1회를 시작하였고, 해변용왕제는 1993년에 동해신묘를 복원한 다음부터 시작하였다. 해변용왕제는 동해신묘를 복원하기 전에는 바닷가에서 [병풍](/topic/병풍)을 쳐놓고 제향했던 것으로 그 역사는 오래되었다.
동해신묘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허균의 글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갑신년 7월 양양부 동산리에 사는 어부 지익복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중 바람이 그 배를 몰고 가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일주야를 달려 동쪽으로 한 섬에 닿았는데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인도하여 왕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왕궁에 나아가니 궁 뜰에는 창을 든 병사의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왕이라는 자가 보라색 옷을 입고 궁전에 앉아서 말하기를 내가 강릉에서 제사를 받아먹은 지 수천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에게 쫓기어 이곳으로 옮겨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제께 호소한 끝에 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으니 너의 힘을 빌려 관원에게 뜻을 전하고 옛 땅 내 집에 돌아가고자 하니 너는 목민관에게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몰아치게 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고는 바람을 몰아 돌려보내 주었는데 하루가 못 되어 동해로 돌아왔다. 어부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으나 감히 관가에 나아가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향임(鄕任) 이석림에게 말하여 관아에 보고하게 하였다.

이 설화 외에도 동해신묘에서 관우를 제향하였다는 설화도 양양군에서 전해온다.
우리나라에서 바다의 신에게 제향한 곳으로는 동해의 양양동해신묘 외에 남해의 남해신사(전라도 나주), 서해의 서해신사(황해도 풍천) 등이 있고, 육지와 접해 있는 북쪽에서는 두만강신사(함경북도 경원)와 압록강사(평안북도 의주) 등이 있다. 동해신묘는 조선 초기에 나라에서 제사를 정비하여 서해·남해와 함께 주관한 곳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동해묘에 관한 소고 (정영호, 청람사학 창간호, 한국교원대학교 청람사학회, 1997)
양양 동해신묘 (강릉대학교박물관, 1999)
동해신묘의 문화사적 고찰 (장정룡, 강원도민속연구, 국학자료원, 2002)
역사동해신묘를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를 참조하면 고려시대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에 국가제사 가운데 중사(中祀) 장소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성소부부고』, 『여지도서』, 『관동읍지』, 『현산지』, 『동국문헌비고』, 『향토지』 등에기록이 전한다. 18세기 기록을 보면 동해신묘는 정전(正殿) 여섯 칸, 신문(神門) 세 칸, 존사청(尊祀廳) 두칸, 동재(東齋) 두 칸, 서재(西齋) 두 칸, 백천문(百川門) 한 칸 규모였다. 제향은 세수(歲首)에 별제(別祭)를 올리고, 춘추로 상제(常祭)가 있었다. 1722년(경종2)에 양양부사 채팽윤과 1752년(영조 28)에 양양부사 이성억이 중수하였다. 1800년(정조 24)에는 어사 권준의 상소에 따라 강원도관찰사 남공철 주관으로 중수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들어와 백천문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이전에 백천문은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1908년(융희 2) 12월 26일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하여 동해신묘는 철폐되었다. 당시 양양군수 최종락이 정부의 영에 따라 신위는 신묘 뒤편에 [매장](/topic/매장)하고 신묘를 철폐하였다는 기록이 양양군 『향토지』에 전해진다. 현재 동해신묘는 1993년부터 시작한 동해신묘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다. 1800년(정조 24)에 관찰사 남공철이 지은글인 와 1605년(선조 38)에 허균이 지은 도 복원되었다. 오석으로 되어 있는 는 높이는 35㎝, 둘레는 60㎝ 안팎으로 사면에 글씨가 석각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한 상태다.
역사동해신묘를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를 참조하면 고려시대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에 국가제사 가운데 중사(中祀) 장소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성소부부고』, 『여지도서』, 『관동읍지』, 『현산지』, 『동국문헌비고』, 『향토지』 등에기록이 전한다. 18세기 기록을 보면 동해신묘는 정전(正殿) 여섯 칸, 신문(神門) 세 칸, 존사청(尊祀廳) 두칸, 동재(東齋) 두 칸, 서재(西齋) 두 칸, 백천문(百川門) 한 칸 규모였다. 제향은 세수(歲首)에 별제(別祭)를 올리고, 춘추로 상제(常祭)가 있었다. 1722년(경종2)에 양양부사 채팽윤과 1752년(영조 28)에 양양부사 이성억이 중수하였다. 1800년(정조 24)에는 어사 권준의 상소에 따라 강원도관찰사 남공철 주관으로 중수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들어와 백천문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이전에 백천문은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1908년(융희 2) 12월 26일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하여 동해신묘는 철폐되었다. 당시 양양군수 최종락이 정부의 영에 따라 신위는 신묘 뒤편에 [매장](/topic/매장)하고 신묘를 철폐하였다는 기록이 양양군 『향토지』에 전해진다. 현재 동해신묘는 1993년부터 시작한 동해신묘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다. 1800년(정조 24)에 관찰사 남공철이 지은글인 와 1605년(선조 38)에 허균이 지은 도 복원되었다. 오석으로 되어 있는 는 높이는 35㎝, 둘레는 60㎝ 안팎으로 사면에 글씨가 석각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한 상태다.
아세아문화사한국무속의 연구최길성1978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경남·경북 동해안 무악 비교 연구장휘주2002
울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동해안 세습무 김영희의 무가 사설 연구김구한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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