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신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과 시월에 지내는 산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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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신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과 시월에 지내는 산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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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식
정의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신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과 시월에 지내는 산신제.
정의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신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과 시월에 지내는 산신제.
내용매년 음력 정월과 시월 초열흘날에 지내고 있다. 제일 당일 산신당의 사방에 네 [가지](/topic/가지) 색의 천을 매어 제장을 정비한다. [제물](/topic/제물)은 [제상](/topic/제상)의 뒤쪽으로 가운데에 월악산산신령대신위(月岳山山神靈大神位)라 쓴 [위패](/topic/위패)를 세우고 양쪽 끝 [촛대](/topic/촛대)에 촛불을 밝힌 다음 그 사이 좌우에 갱수와 생미를 놓는다. 그 앞으로 가운데에 용왕시루, 오른쪽에 고기, 왼쪽에 어포를 진설한다. 그 앞으로 왼쪽부터 황률, 배, 감, [대추](/topic/대추)를 놓고 맨 앞에 잔대를 갖춘 술잔을 세 개 놓는다. 제상 앞 향상에는 [향로](/topic/향로)와 [향합](/topic/향합)을 놓으며 제상 오른쪽의 주상에는 국자를 갖춘 술항아리에 술을 담아 놓는다. 당주(고양주)는 [마을](/topic/마을)에서 단정하고 깨끗한 집을 선정하여 제물을 준비한다.

![마을신앙 월악산신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4625_t_.jpg)

제상 [진설도](/topic/진설도)제관은 [초헌](/topic/초헌)관․[종헌](/topic/종헌)관․[아헌](/topic/아헌)관 각 한 명, 축관과 집례 각 한 명, 집사 두 명으로 구성된다. 산신제는 집례의 진행에 따라 초헌-축-아헌-종헌-소지-[음복](/topic/음복)의 순서로 진행된다.[축문](/topic/축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山神 祝文
維歲次 某年正月(十月)干支朔 初十日 干支
幼學 某人 敢昭告于
月岳山王神靈之神
寒水面民 年中平安 所望如意祈願
災害病疾 一令除去 人口蕃盛 白室安堵
雨順風調 五穀豐登 穰穰滿家
六畜蕃殖 無災無害 旣修多福 家戶笑滿
出人行路 災厄掃除
登山諸人 無事歸去 家族相逢 慈悲視祐
謹以脯肉 謹以虔告

산신 축문
유세차 모년정월 (간지) 삭 초열흘 (간지) 유학○○○는 고하나이다.
월악산왕 신령님. 한수주민들이 올해에도 평안하고 소원성취하기를 비옵니다. 모든 재해와 질병 일행에 제거하시어 인구가 번성하며 편안토록 하옵시고, 비가 순하고 바람이 고르게 불어 [오곡](/topic/오곡)이 풍년되어 곡식이 집안 가득토록 하옵시며, [가축](/topic/가축)들이 많이 늘고 재앙과 해악이 없이하여 다복한 가운데 집집마다 웃음이 가득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객지에 나가 있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횡액을 막아주시옵고, 산에 오르는 모든 사람들이 무사히 귀가하여 가족과 만나도록 자비스러움으로 보살펴 주시옵기를 삼가 포육을 올리고 공경을 다하여 고하나이다.
참고문헌高麗史, 東國輿地勝覽, 三國史記, 제천시지 하 (제천시, 2004)
한국 무형유산 대표목록 분류체계 및 [기초](/topic/기초)자료 연구 (한국민속학회, 2009)
내용매년 음력 정월과 시월 초열흘날에 지내고 있다. 제일 당일 산신당의 사방에 네 [가지](/topic/가지) 색의 천을 매어 제장을 정비한다. [제물](/topic/제물)은 [제상](/topic/제상)의 뒤쪽으로 가운데에 월악산산신령대신위(月岳山山神靈大神位)라 쓴 [위패](/topic/위패)를 세우고 양쪽 끝 [촛대](/topic/촛대)에 촛불을 밝힌 다음 그 사이 좌우에 갱수와 생미를 놓는다. 그 앞으로 가운데에 용왕시루, 오른쪽에 고기, 왼쪽에 어포를 진설한다. 그 앞으로 왼쪽부터 황률, 배, 감, [대추](/topic/대추)를 놓고 맨 앞에 잔대를 갖춘 술잔을 세 개 놓는다. 제상 앞 향상에는 [향로](/topic/향로)와 [향합](/topic/향합)을 놓으며 제상 오른쪽의 주상에는 국자를 갖춘 술항아리에 술을 담아 놓는다. 당주(고양주)는 [마을](/topic/마을)에서 단정하고 깨끗한 집을 선정하여 제물을 준비한다.

![마을신앙 월악산신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4625_t_.jpg)

제상 [진설도](/topic/진설도)제관은 [초헌](/topic/초헌)관․[종헌](/topic/종헌)관․[아헌](/topic/아헌)관 각 한 명, 축관과 집례 각 한 명, 집사 두 명으로 구성된다. 산신제는 집례의 진행에 따라 초헌-축-아헌-종헌-소지-[음복](/topic/음복)의 순서로 진행된다.[축문](/topic/축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山神 祝文
維歲次 某年正月(十月)干支朔 初十日 干支
幼學 某人 敢昭告于
月岳山王神靈之神
寒水面民 年中平安 所望如意祈願
災害病疾 一令除去 人口蕃盛 白室安堵
雨順風調 五穀豐登 穰穰滿家
六畜蕃殖 無災無害 旣修多福 家戶笑滿
出人行路 災厄掃除
登山諸人 無事歸去 家族相逢 慈悲視祐
謹以脯肉 謹以虔告

산신 축문
유세차 모년정월 (간지) 삭 초열흘 (간지) 유학○○○는 고하나이다.
월악산왕 신령님. 한수주민들이 올해에도 평안하고 소원성취하기를 비옵니다. 모든 재해와 질병 일행에 제거하시어 인구가 번성하며 편안토록 하옵시고, 비가 순하고 바람이 고르게 불어 [오곡](/topic/오곡)이 풍년되어 곡식이 집안 가득토록 하옵시며, [가축](/topic/가축)들이 많이 늘고 재앙과 해악이 없이하여 다복한 가운데 집집마다 웃음이 가득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객지에 나가 있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횡액을 막아주시옵고, 산에 오르는 모든 사람들이 무사히 귀가하여 가족과 만나도록 자비스러움으로 보살펴 주시옵기를 삼가 포육을 올리고 공경을 다하여 고하나이다.
참고문헌高麗史, 東國輿地勝覽, 三國史記, 제천시지 하 (제천시, 2004)
한국 무형유산 대표목록 분류체계 및 [기초](/topic/기초)자료 연구 (한국민속학회, 2009)
역사월악산신제는 삼국시대 때부터 나라에서 거행한 제의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삼국시대에 월악산을 나라의 명산으로 여겨 신라에서 해마다 정기적으로 소사(小祀)로서 산신제를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254년(고종 41) 12월 월악산신을 조정의 신묘(神廟)에 [합사](/topic/합사)(合祀)하고, 1256년(고종 43)에 월악신사(月岳神祠)를 지어 국행제(國行祭)를 지냈다고 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을 현대어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고려 고종 41년 7월에 몽골의 장수 동정원수(東征元帥) 차라대(車羅大)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여 압록강을 건너와 그해 9월 충주성을 공략할 때 월악산신께서 풍우를 일으켜 원나라 군대가 정신을 못 차릴 때 성중에서 정예병을 뽑아 반격함으로써 차라대가 더 이상 충주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그냥 상주로 남하하였다. 이에 임금께서는 그해 12월 월악산천신기(月岳山川神祇)를 신묘(神廟)에 합사(合祀)하고 “월악산신대왕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없었나이다”라고 고(告)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고종 43년 4월에도 몽골군이 다시 침략하여 충주성을 공략, 입성하여 성민들을 도륙하였다. 관리와 노약자들은 항거하지 못하고 월악산신사로 피란하여 올랐다. 홀연히 안개와 구름이 끼고 비바람과 천둥번개를 일으켜 몽골군을 퇴각시킨 신의 도움이 있었다.

또한 월악산신의 호국적 성격을 보여 주는 아래와 같은 설화들이 주변에서 구전과 기록으로 전승되고 있다.

몽골군이 월악산성에 물밀듯 쳐들어왔다. 별안간 안개가 끼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스럽게 일어나더니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공격하던 몽골군은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여 세찬 번개와 천둥에 넋을 잃고 [공포](/topic/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필시 월악산신이 노한 것이라고 생각한 몽골군은 겁을 먹고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문경 쪽으로 물러났다.

월악산신제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음력 정월과 시월에 관청에서 주도해 제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 그 후 [마을](/topic/마을) 주민들에 의해 동제로 명맥만 유지하였다. 산신제를 지내는 월악산신당은 원래 상․중으로 나뉘어 두 개의 당이 있었고, 당 안에는 여러 띠 [동물](/topic/동물) 모형의 조각품이 있었다. 그러나 1978년에 철거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1983년에 송계리 주민들이 상당의 산신당을 재건하여 동제를 지내왔으나 건물이 노후하여 철거하면서 다시 중단되었다. 2000년에 현재 하당의 산신당을 새롭게 신축하여 매년 정월과 시월에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평안을 위하여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역사월악산신제는 삼국시대 때부터 나라에서 거행한 제의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삼국시대에 월악산을 나라의 명산으로 여겨 신라에서 해마다 정기적으로 소사(小祀)로서 산신제를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254년(고종 41) 12월 월악산신을 조정의 신묘(神廟)에 [합사](/topic/합사)(合祀)하고, 1256년(고종 43)에 월악신사(月岳神祠)를 지어 국행제(國行祭)를 지냈다고 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을 현대어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고려 고종 41년 7월에 몽골의 장수 동정원수(東征元帥) 차라대(車羅大)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여 압록강을 건너와 그해 9월 충주성을 공략할 때 월악산신께서 풍우를 일으켜 원나라 군대가 정신을 못 차릴 때 성중에서 정예병을 뽑아 반격함으로써 차라대가 더 이상 충주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그냥 상주로 남하하였다. 이에 임금께서는 그해 12월 월악산천신기(月岳山川神祇)를 신묘(神廟)에 합사(合祀)하고 “월악산신대왕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없었나이다”라고 고(告)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고종 43년 4월에도 몽골군이 다시 침략하여 충주성을 공략, 입성하여 성민들을 도륙하였다. 관리와 노약자들은 항거하지 못하고 월악산신사로 피란하여 올랐다. 홀연히 안개와 구름이 끼고 비바람과 천둥번개를 일으켜 몽골군을 퇴각시킨 신의 도움이 있었다.

또한 월악산신의 호국적 성격을 보여 주는 아래와 같은 설화들이 주변에서 구전과 기록으로 전승되고 있다.

몽골군이 월악산성에 물밀듯 쳐들어왔다. 별안간 안개가 끼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스럽게 일어나더니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공격하던 몽골군은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여 세찬 번개와 천둥에 넋을 잃고 [공포](/topic/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필시 월악산신이 노한 것이라고 생각한 몽골군은 겁을 먹고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문경 쪽으로 물러났다.

월악산신제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음력 정월과 시월에 관청에서 주도해 제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 그 후 [마을](/topic/마을) 주민들에 의해 동제로 명맥만 유지하였다. 산신제를 지내는 월악산신당은 원래 상․중으로 나뉘어 두 개의 당이 있었고, 당 안에는 여러 띠 [동물](/topic/동물) 모형의 조각품이 있었다. 그러나 1978년에 철거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1983년에 송계리 주민들이 상당의 산신당을 재건하여 동제를 지내왔으나 건물이 노후하여 철거하면서 다시 중단되었다. 2000년에 현재 하당의 산신당을 새롭게 신축하여 매년 정월과 시월에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평안을 위하여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울산지방무가자료집박경신1993
국학자료원한국의 별신무가박경신1999
국립민속박물관한국세시풍속사전-겨울편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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