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

한국무속신앙사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황신을 섬기던 기록을 적은 [현판](/topic/현판). 성황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1992년 전북 순창에서 발견되었으며 2000년 1월 13일에 ‘중요민속 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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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황신을 섬기던 기록을 적은 [현판](/topic/현판). 성황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1992년 전북 순창에서 발견되었으며 2000년 1월 13일에 ‘중요민속 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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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동
정의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황신을 섬기던 기록을 적은 [현판](/topic/현판). 성황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1992년 전북 순창에서 발견되었으며 2000년 1월 13일에 ‘중요민속 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정의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황신을 섬기던 기록을 적은 [현판](/topic/현판). 성황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1992년 전북 순창에서 발견되었으며 2000년 1월 13일에 ‘중요민속 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이 [현판](/topic/현판)은 순창의 옥천향토문화연구소(玉川鄕土文化硏究所) 고문이었던 조규동(曺圭東)에 의하여 순창 설씨 제각(祭閣)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순창읍 순화리 옥천동에 순창의 성황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헐리면서 설씨의 제각에 보관된 것 같다. 이 현판은 소나무로 된 송판 2장을 이어붙인 것으로 총 크기는 가로 180㎝, 세로 54㎝이다. 이 현판에는 총 73행 1,6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현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황대신사적(城隍大神事跡)고려 설공검은 추밀원부사 신의 아들이다. 신의 어머니 조씨는 네 번 출산하여 여덟 아들을 낳았다. 세 아들이 과거에 올라 국대부인에 봉해졌는데 신이 그중의 하나이다. 공검은 고종 때 과거에 올라 관직이 참리(參理)에 이르렀을 때 나이가 많아 물러가기를 비니 중찬(中贊)을 가직하여 치사(致仕)케 하였다. 그가 죽자 문량의 시호를 내리고 충렬왕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공검은 청렴하고 삼가며 정직하여 사물을 대할 적에 공손하였으며 검소함으로써 몸가짐을 삼았다. 조정의 6품 이상 관원이 친상(親喪)을 당하면 평소에 서로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반드시 소복을 입고 가서 조문하였다. 자기를 만나러 오는 자가 있으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신을 거꾸로 신고 급히 나가 맞이하였다. 일찍이 병이 들어 누워 있을 때 채홍철이 가서 진찰을 하였다. (공검이) 베 이불을 덮고 왕골 [자리](/topic/자리)에 거처하여 쓸쓸하기가 중이 사는 것과 같았다. 채홍철이 나와서 탄식하기를 우리 [무리](/topic/무리)와 공을 보면 이른바땅벌레가 황학에 비교되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사적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1214년(고종 원년)으로부터 가정(嘉靖) 42년(1563) 계해에 이르기까지는 350년이다.

[사당](/topic/사당)의 책임자에게 첩문을 보낸다. 전해온 왕지(王旨)에 준한 것임.

순창의 성황대왕

위의 첩문을 만들어 올리는 일은 지원(至元) 18년(1281) 정월 초 9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인 염승익(廉承益)이 왕지(王旨)를 입으로 전달받아 송악을 수위(首位)로 삼아 국내 명산대천의 봉작을 더하여야 한다는 교지에 의거하여 金紫光祿大夫 三韓功臣 門下侍…將軍 無量眷屬으로 결정하여 첩문을 보낸다. 첩이 이르거든 준행하라.

지원 18년 9월 일에 총랑 조산대부 조○○ (서명)

지원 신사년(1281)으로부터 가정 계해년(1563)에 이르기까지는 282년이다.

순창(淳昌) 성황대부(城隍大夫)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위의 첩문을 만들어 올리는 일은 원정(元貞) 2년(1296)에 왕지가 있었고 이를 다시 보고하여 대덕(大德) 원년(1297) 11월 초 9일…… 명산대천 신지들의 존호를 더 높게 하라는 교지가 있다는 전리총랑(典理摠郞) 임중원(林仲沅)의 보장(報狀)에 근거하여……

대덕 원년 정유년(1297)으로부터 가정 계해년에 이르기까지는 267년이다.

이제 위대하도다. 우리 성황은 본군(本郡) 설씨 가문의 어른으로 높고 높은 문벌의 씨족이다. 성품과 행동이 맑고 수려하여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였다. 청렴하고 정직하며 덕이 두루 미치고 인(仁)에 화협(和協)하여 관위가 1품에 이르러 삼한공신이 되었다. 성황신에 의탁하니 영험이 많아 국제(國祭)에까지 이르렀고 여러 번 봉작을 더하여 어인(御印)을 찍은 첩문을 받은 것이 많이 있다. 세월이 아주 오래되어 국제는 혁파되었으나 이후 온 경내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받들어 삼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스스로 이어져물이 흐르는 것과 같았고 길에 이어짐이 끝이 없다.

매년 5월 1일에서 5일까지 향리 5명을 번갈아 정하여 각자 그의 집에 당을 설치하여 대왕이 부인을 거느리게 하고 큰 깃발을 세워 표시하였다. 무격(巫覡)의 무리들이 어지럽게 무리지어 모이고 나열하여 재주를 부리며 순행하여 제사를 받드니 역시 지금껏 폐지되지 않은 것은 영신(靈神)의 덕이 사람들의 눈마다 엄숙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의 큰 은인(恩人)이신 능성 양씨(綾城 梁氏)는 본래 문벌 좋은 씨족으로 일찍이 생원시에 장원을 하였고 다음에 과거에 올랐다. 또 금시(金試)에 장원으로 올라 문명(文名)이 자자하였고 성품과 행동이 뛰어나고 우아한 한림학사이다. 올해 중춘(仲春)에 군수가 되어 대신(大神)을 모시는 실상을 살펴보니 무격의 무리들이 어지럽고 혼잡스러우며 [마을](/topic/마을)에 횡행하기에까지 이르러 그 폐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진실로 가히 부당하였다. 음사(淫祀)를 물리침과 더불어 어긋난 도(道)의 어지러움을 바르게 한 뒤에다만 초하루와 보름에만 제사를 거행하되 제물을 정결하게 준비하고 안전(眼前)에서 부리는 믿을 만한 아전을 보내어 제사지내는 전일에 [재계](/topic/재계)(齋戒)를 하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5월 초하룻날 또 이방 옹세언, 의생 오인호와 [축문](/topic/축문)을 맡은 공생 임대춘을 보내어 역시 의식대로 재계를 하고 지성으로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이방 옹세언이 전에 직첩(職牒)이 사우(祠宇)에 있다는 말을 듣고 꺼내오게 하여 열어 보니 과연 많았다. 그러나 좀이 먹어 파손되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많아 단지 몇 장만을 볼 수 있었다. 이에 현판에 기록하여 새기어 후세에 보여주는 것이니 무릇 대소 인원들은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산성(山城)의 대모(大母)가 원초(元初)에 그의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성터를 굳게 쌓아 군의 웅거(雄居)를 만들고 [곡물](/topic/곡물)을 많이 쌓아 두었다. 이어 관가에 귀속시켜서 나라의 곡식이 되게 하였다 하니 그 공이 막대(莫大)하다. 이에 영신(靈神)을 얻어 태수가 친히 나가 전을 드리니 그 세월이 오래되었다. 그러나 인하여 폐지하고대신 안전(眼前)의 통인(通引)을 보내어 매년 4월 그믐날 관대를 단정히 하고 말을 타고 가니 앞뒤에는 걸어서 따르는 무리들이 있고 사람들이 벌려 서서 재주를 부리기도 하였으니 지금까지 그대로 이를 지켜 행한다. 가물으면 비를 빌었으니 그 영신의 은덕이 또한 온 경내의 백성들에게 미쳤다. 아! 지극하도다. 이 역시 끝에 붙여 새긴다.이 첩문은 가정 계해년(1563) 여름에 호장 조인형, 이방 옹세언 등이 기록하고 임백이 쓴 것이다. 현판이 먼지에 파묻혀 새긴 글자가 희미해졌다. 호장 임명룡, 이방 최원립,유사 임경복이 힘써 다시 새겨 그 전하여 짐이 영원하게 하였다. 숭정(崇禎) 6년(1633) 계유 9월 하간(下澣, 下旬)에 옹효증이 쓰다.

공경히 생각건대 높으신 신명은 살았을 적에는 진신(縉紳)이었고 죽어서는 영령(英靈)이 되었다. 고려조(高麗朝) 이후로 책봉한 예가 높고 지극하였고 나라와 지방관아에서 제사를 지내었으니 다 기술할 수가 없다. 위에서 서술한 여러 [가지](/topic/가지)를 상고해 보면 남긴 자취가 밝게 드러나 높고 높은 성덕을 다 기록할 겨를이 없다. 중고(中古)로 내려오면서부터 의식이 중간에 방치되었으므로 바꾸어 전을 드리는 일을 처음으로 거행하게 되었다. 세월이 여러 해 흐르고 사우(祠宇)가 수차례 변고를 만나 고민하던 차에 경신년(1740)에 전 호장 임계욱이 개연히 새롭게 하고자 하여 무격의 무리들로 하여금 재물을 모아 감독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당의 모양, 방향 및 배치가 잘못되었으며 또한 자못 좁아서 신을 공경하고 길이 모실 곳이 못 되었다. 2년이 지나 계해년 여름에 전 천총 임대영·전호장 최덕겸·박영석 등이 옛 사당을 철거하고 바꾸어 이를 새롭게하였는데 옛 규모를 크게 늘리고 이어서 색깔을 칠하니 당우(堂宇)의 화려함은 모름지기 도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건곤(乾坤)의 신상을 공경히 고쳐 아름답게 하니 그 분칠한얼굴과 위엄 있는 모습이 살아 있는 것과 흡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씻고 보게 하였다. 일이 열흘을 넘자마자 완성하였음을 고하니 강개한 마음으로 일을 능란하게 잘 처리하고 정성으로 신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그렇게 되었겠는가. 대체로 우리 아전이 일을 맡은 이래로 향리들이 여기에 부지런히 한 것은 전후에 한결같았다.

이제 이 임대영은 곧 위에 말한 임명룡의 손자이고 최덕겸은 곧 최신의 형 최인의 5대손이고 임계욱은 곧 임백의 5대손이다. 이들이 선대의 업적을 이어 아름다운 일을 실천한 것은 가히 가상하다 하겠다. 옛 일을 더듬고 지금의 일에 감상하는 탄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격하고 간절하게 하니 이 또한 우리 고을이 이 신당에 정성을 두었다는 것을알겠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니 어찌 밝?은 사람은 한갓 헛되이 남의 공덕을 부러워하여 [어리](/topic/어리)석고 졸렬한 혐의를 까맣게 잊고 감히 거친 말로 남 대신 이 글을 지어 그 아름다운 일을 드러낼 뿐이니 인하여 뒤에 뜻있는 자가 있어 뒤를 이어 보수하기를 기다린다.

건륭 8년 계해년(1743) 단양절(端陽節)에 창령 조정옥은 참람히 짓고 호장 초계 최대겸은 삼가 쓰다.

가정 계해년(1563)으로부터 지금 계해년(1743)까지는 모두 181년이고 숭정 계유년(1633)으로부터 지금 계해년(1743)까지는 111년이다.

화사 임대영 최덕겸 임계욱 박영석
별좌 백광채
시임
호장 최대겸 이방 조하욱 부호장 최득배
부이방 임계욱 호방 이중배 예방 설창연
병방 조정옥 형방 주성록 조후영
공방 이중무 승발 김만제 도서원 이중성
미대동색 임계욱 목대동색 박영석
본창색 이계흥 영창색 박영석 포보색 최준겸
산성색 최득배 사창색 이중채 관청색 최중석
금승색 박성번 어영색 이중엽
통인 임세우 임계엽 [목수](/topic/목수) 이계학 김영
공향 승 심열 각수 승 만기 당한 김

계해년(1743)에 중수한 지가 지금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터가 꺼져 홀연히 신당이 무너졌다. 관가에 고하고 읍민에게 선포하여 힘을 합쳐 고쳐 세웠다.

건륭 19년 갑술년(1754) 10월 15일
호장 임계진 이방 최대겸 성조색 성득후

건륭 19년 갑술년 10월 일에 중건한 지 70년에 이르러 또 무너졌다. 각 관청이 서로 의논하여 재물을 내어 옛 재목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늘리어 새로 지었는데 향중에서 각 면의 향청에도 힘을 돕도록 하여 고쳐 지었다.

도광(道光) 3년 계미년(1823) 5월 일
시임 호장 임준효
이방 조익환
감관 설경지
색리 최석후 신성욱

이 「성황대신사적」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고려시대에 존재했다고 하는 지원(至元) 18년(1281)의 공문과 대덕(大德) 원년의 기록에 이두(吏讀) 문자가 섞여 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는 각종 공문이나 금석문에 가끔씩 이두가 쓰인 예가 있다. 따라서 「성황대신사적」의 고려시대 공문에 이두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빙성이크다는 것을 방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 지원 18년의 공문은『 고려사』 충렬왕세가의 ‘중외의 성황과 명산대천으로 [사전](/topic/사전)(祀典)에 올라 있는 것은 다 덕호(德號)를 가하였다’라는 기록을 반영하고 있어 자료의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두 번째는 이 기록이 순천의 성황신앙에 대한 각기 다른 시기의 자료를 정리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연대순으로 되어 있지만 설공검에 대한 기록은 맨 앞에 배치하고있다. 물론 그것은 조선 후기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순창 성황신의 주신(主神)이 설공검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의 것을 참조하지 않고 조선시대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전재(轉載)하여 놓은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조선 후기 순창 지역 향리의 입장에서는 『고려사』를 구해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서두의 설공검 기사 뒤로는 모두 시대 순으로 정리함으로써 순창의 성황신앙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그 변천사를 살펴보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세 번째 특징은 성황신으로 남신과 여신 한 쌍의 신이 모셔졌다는 실증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는 남신인 대왕이 여신인 부인을 거느렸으며 건곤(乾坤)의 신상(神像)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신의 형태도 그림이 아닌 실제 모습과 같은 상(像)을 깎아 모셨다는 점도 특이하다. 기록에는 ‘건곤의 신상을 공경히 아름답게 하였는데 그 분칠한 얼굴과 모양이 살아 있는 모습과 흡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씻고 보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왜 이러한 두신이 모셔[지게](/topic/지게) 되었는지는 학자들이 규명할 일이다.

네 번째 특징은 성황신으로 무신이 아닌 문신이 모셔졌다는 점이다. 성황신의 본래 기능은 수호신이다. 따라서 기록을 보면 무신이나 [장군](/topic/장군)들이 모셔지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최영 장군이라든가 당나라의 장군이었던 소정방, 고려 태조의 휘하 장군이었던 신숭겸·김홍술 등이 성황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러나 순창의 성황신은 과거에도 합격하여 재상의 자리에 오른 문신 설공검이 모셔진 것이 독특하다.

다섯 번째 특징은 성황신을 언급하면서 대모산성(大母山城)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모를 여신으로 모신 데서 연유한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성황신앙의 본래 성격과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조선 후기나 현재의 시각으로 성황신 또는 [서낭신](/topic/서낭신)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없으나 성황신의 본래 성격을 알면 납득이 가는 문제다. 본래의 성황신은 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황신앙의 변천과정과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여섯 번째는 순창 성황사의 중수와 변천을 기록하면서 거기에 관련된 향리들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자료를 통하여 향리들이 지방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성황신에의 제사에는 어떻게 참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조선시대 지방 세력의 구조가 어떠했으며 시대에 따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고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글자가 틀린 부분이나 빠진 부분이 제법 발견된다는 점이다. 글자가 파손되어 알 수 없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명확하게 보이는 곳에도 틀린 부분이 많다. 특히 시대가 앞서는 기록에 많이 있다. 예컨대 3행의 마지막 부분에 ‘충렬왕묘정(忠烈王廟庭)’을 ‘충렬왕조정(忠烈王朝廷)’이라 한 것을 비롯하여 ‘왕지(王旨)’를‘왕지(王至)’, ‘삼한공신(三韓功臣)’을 ‘삼한공신(三韓公身)’,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경리총랑(京里摠郞)’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이 틀린 부분이 있는이유는 세월이 오래되어 좀먹고 파손된 부분을 수정하는 사람이 추측하여 보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처음 현판이 오래되어 다시 제작하는 과정에서 파손된 글자를 보충해 넣을 때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당대의 시대상황을 고찰하여 바로잡으면 될 부분이다.
참고문헌순창성황대신사적 [현판](/topic/현판)의 발견과 그 고찰 (양만정, 옥천문화 1, 옥천문화원, 1993)
순창성황당 현판에 대하여 (남풍현, 고문서연구 7, 한국고문서학회, 1995)
고려시대 순창의 지방세력과 성황신앙 (김갑동, 한국사연구 97, 한국사연구회, 1997)
성황당과 성황제 (한국종교사연구회 편, 민속원, 1998)
순창성황당 현판의 판독과 해석 (남풍현, 성황당과성황제, 민속원, 1998)
조선중기 전라도 순창군 성황 제의의 성격 (정승모,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순창 성황제의 변천과 주도세력 (이해준,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순창의 성황신과 성곽설화 (송화섭,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조선 시대의 성황제 (김철웅, 사학지 35, 단국사학회, 2002)
내용이 [현판](/topic/현판)은 순창의 옥천향토문화연구소(玉川鄕土文化硏究所) 고문이었던 조규동(曺圭東)에 의하여 순창 설씨 제각(祭閣)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순창읍 순화리 옥천동에 순창의 성황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헐리면서 설씨의 제각에 보관된 것 같다. 이 현판은 소나무로 된 송판 2장을 이어붙인 것으로 총 크기는 가로 180㎝, 세로 54㎝이다. 이 현판에는 총 73행 1,6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현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황대신사적(城隍大神事跡)고려 설공검은 추밀원부사 신의 아들이다. 신의 어머니 조씨는 네 번 출산하여 여덟 아들을 낳았다. 세 아들이 과거에 올라 국대부인에 봉해졌는데 신이 그중의 하나이다. 공검은 고종 때 과거에 올라 관직이 참리(參理)에 이르렀을 때 나이가 많아 물러가기를 비니 중찬(中贊)을 가직하여 치사(致仕)케 하였다. 그가 죽자 문량의 시호를 내리고 충렬왕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공검은 청렴하고 삼가며 정직하여 사물을 대할 적에 공손하였으며 검소함으로써 몸가짐을 삼았다. 조정의 6품 이상 관원이 친상(親喪)을 당하면 평소에 서로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반드시 소복을 입고 가서 조문하였다. 자기를 만나러 오는 자가 있으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신을 거꾸로 신고 급히 나가 맞이하였다. 일찍이 병이 들어 누워 있을 때 채홍철이 가서 진찰을 하였다. (공검이) 베 이불을 덮고 왕골 [자리](/topic/자리)에 거처하여 쓸쓸하기가 중이 사는 것과 같았다. 채홍철이 나와서 탄식하기를 우리 [무리](/topic/무리)와 공을 보면 이른바땅벌레가 황학에 비교되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사적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1214년(고종 원년)으로부터 가정(嘉靖) 42년(1563) 계해에 이르기까지는 350년이다.

[사당](/topic/사당)의 책임자에게 첩문을 보낸다. 전해온 왕지(王旨)에 준한 것임.

순창의 성황대왕

위의 첩문을 만들어 올리는 일은 지원(至元) 18년(1281) 정월 초 9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인 염승익(廉承益)이 왕지(王旨)를 입으로 전달받아 송악을 수위(首位)로 삼아 국내 명산대천의 봉작을 더하여야 한다는 교지에 의거하여 金紫光祿大夫 三韓功臣 門下侍…將軍 無量眷屬으로 결정하여 첩문을 보낸다. 첩이 이르거든 준행하라.

지원 18년 9월 일에 총랑 조산대부 조○○ (서명)

지원 신사년(1281)으로부터 가정 계해년(1563)에 이르기까지는 282년이다.

순창(淳昌) 성황대부(城隍大夫)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위의 첩문을 만들어 올리는 일은 원정(元貞) 2년(1296)에 왕지가 있었고 이를 다시 보고하여 대덕(大德) 원년(1297) 11월 초 9일…… 명산대천 신지들의 존호를 더 높게 하라는 교지가 있다는 전리총랑(典理摠郞) 임중원(林仲沅)의 보장(報狀)에 근거하여……

대덕 원년 정유년(1297)으로부터 가정 계해년에 이르기까지는 267년이다.

이제 위대하도다. 우리 성황은 본군(本郡) 설씨 가문의 어른으로 높고 높은 문벌의 씨족이다. 성품과 행동이 맑고 수려하여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였다. 청렴하고 정직하며 덕이 두루 미치고 인(仁)에 화협(和協)하여 관위가 1품에 이르러 삼한공신이 되었다. 성황신에 의탁하니 영험이 많아 국제(國祭)에까지 이르렀고 여러 번 봉작을 더하여 어인(御印)을 찍은 첩문을 받은 것이 많이 있다. 세월이 아주 오래되어 국제는 혁파되었으나 이후 온 경내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받들어 삼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스스로 이어져물이 흐르는 것과 같았고 길에 이어짐이 끝이 없다.

매년 5월 1일에서 5일까지 향리 5명을 번갈아 정하여 각자 그의 집에 당을 설치하여 대왕이 부인을 거느리게 하고 큰 깃발을 세워 표시하였다. 무격(巫覡)의 무리들이 어지럽게 무리지어 모이고 나열하여 재주를 부리며 순행하여 제사를 받드니 역시 지금껏 폐지되지 않은 것은 영신(靈神)의 덕이 사람들의 눈마다 엄숙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의 큰 은인(恩人)이신 능성 양씨(綾城 梁氏)는 본래 문벌 좋은 씨족으로 일찍이 생원시에 장원을 하였고 다음에 과거에 올랐다. 또 금시(金試)에 장원으로 올라 문명(文名)이 자자하였고 성품과 행동이 뛰어나고 우아한 한림학사이다. 올해 중춘(仲春)에 군수가 되어 대신(大神)을 모시는 실상을 살펴보니 무격의 무리들이 어지럽고 혼잡스러우며 [마을](/topic/마을)에 횡행하기에까지 이르러 그 폐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진실로 가히 부당하였다. 음사(淫祀)를 물리침과 더불어 어긋난 도(道)의 어지러움을 바르게 한 뒤에다만 초하루와 보름에만 제사를 거행하되 제물을 정결하게 준비하고 안전(眼前)에서 부리는 믿을 만한 아전을 보내어 제사지내는 전일에 [재계](/topic/재계)(齋戒)를 하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5월 초하룻날 또 이방 옹세언, 의생 오인호와 [축문](/topic/축문)을 맡은 공생 임대춘을 보내어 역시 의식대로 재계를 하고 지성으로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이방 옹세언이 전에 직첩(職牒)이 사우(祠宇)에 있다는 말을 듣고 꺼내오게 하여 열어 보니 과연 많았다. 그러나 좀이 먹어 파손되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많아 단지 몇 장만을 볼 수 있었다. 이에 현판에 기록하여 새기어 후세에 보여주는 것이니 무릇 대소 인원들은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산성(山城)의 대모(大母)가 원초(元初)에 그의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성터를 굳게 쌓아 군의 웅거(雄居)를 만들고 [곡물](/topic/곡물)을 많이 쌓아 두었다. 이어 관가에 귀속시켜서 나라의 곡식이 되게 하였다 하니 그 공이 막대(莫大)하다. 이에 영신(靈神)을 얻어 태수가 친히 나가 전을 드리니 그 세월이 오래되었다. 그러나 인하여 폐지하고대신 안전(眼前)의 통인(通引)을 보내어 매년 4월 그믐날 관대를 단정히 하고 말을 타고 가니 앞뒤에는 걸어서 따르는 무리들이 있고 사람들이 벌려 서서 재주를 부리기도 하였으니 지금까지 그대로 이를 지켜 행한다. 가물으면 비를 빌었으니 그 영신의 은덕이 또한 온 경내의 백성들에게 미쳤다. 아! 지극하도다. 이 역시 끝에 붙여 새긴다.이 첩문은 가정 계해년(1563) 여름에 호장 조인형, 이방 옹세언 등이 기록하고 임백이 쓴 것이다. 현판이 먼지에 파묻혀 새긴 글자가 희미해졌다. 호장 임명룡, 이방 최원립,유사 임경복이 힘써 다시 새겨 그 전하여 짐이 영원하게 하였다. 숭정(崇禎) 6년(1633) 계유 9월 하간(下澣, 下旬)에 옹효증이 쓰다.

공경히 생각건대 높으신 신명은 살았을 적에는 진신(縉紳)이었고 죽어서는 영령(英靈)이 되었다. 고려조(高麗朝) 이후로 책봉한 예가 높고 지극하였고 나라와 지방관아에서 제사를 지내었으니 다 기술할 수가 없다. 위에서 서술한 여러 [가지](/topic/가지)를 상고해 보면 남긴 자취가 밝게 드러나 높고 높은 성덕을 다 기록할 겨를이 없다. 중고(中古)로 내려오면서부터 의식이 중간에 방치되었으므로 바꾸어 전을 드리는 일을 처음으로 거행하게 되었다. 세월이 여러 해 흐르고 사우(祠宇)가 수차례 변고를 만나 고민하던 차에 경신년(1740)에 전 호장 임계욱이 개연히 새롭게 하고자 하여 무격의 무리들로 하여금 재물을 모아 감독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당의 모양, 방향 및 배치가 잘못되었으며 또한 자못 좁아서 신을 공경하고 길이 모실 곳이 못 되었다. 2년이 지나 계해년 여름에 전 천총 임대영·전호장 최덕겸·박영석 등이 옛 사당을 철거하고 바꾸어 이를 새롭게하였는데 옛 규모를 크게 늘리고 이어서 색깔을 칠하니 당우(堂宇)의 화려함은 모름지기 도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건곤(乾坤)의 신상을 공경히 고쳐 아름답게 하니 그 분칠한얼굴과 위엄 있는 모습이 살아 있는 것과 흡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씻고 보게 하였다. 일이 열흘을 넘자마자 완성하였음을 고하니 강개한 마음으로 일을 능란하게 잘 처리하고 정성으로 신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그렇게 되었겠는가. 대체로 우리 아전이 일을 맡은 이래로 향리들이 여기에 부지런히 한 것은 전후에 한결같았다.

이제 이 임대영은 곧 위에 말한 임명룡의 손자이고 최덕겸은 곧 최신의 형 최인의 5대손이고 임계욱은 곧 임백의 5대손이다. 이들이 선대의 업적을 이어 아름다운 일을 실천한 것은 가히 가상하다 하겠다. 옛 일을 더듬고 지금의 일에 감상하는 탄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격하고 간절하게 하니 이 또한 우리 고을이 이 신당에 정성을 두었다는 것을알겠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니 어찌 밝?은 사람은 한갓 헛되이 남의 공덕을 부러워하여 [어리](/topic/어리)석고 졸렬한 혐의를 까맣게 잊고 감히 거친 말로 남 대신 이 글을 지어 그 아름다운 일을 드러낼 뿐이니 인하여 뒤에 뜻있는 자가 있어 뒤를 이어 보수하기를 기다린다.

건륭 8년 계해년(1743) 단양절(端陽節)에 창령 조정옥은 참람히 짓고 호장 초계 최대겸은 삼가 쓰다.

가정 계해년(1563)으로부터 지금 계해년(1743)까지는 모두 181년이고 숭정 계유년(1633)으로부터 지금 계해년(1743)까지는 111년이다.

화사 임대영 최덕겸 임계욱 박영석
별좌 백광채
시임
호장 최대겸 이방 조하욱 부호장 최득배
부이방 임계욱 호방 이중배 예방 설창연
병방 조정옥 형방 주성록 조후영
공방 이중무 승발 김만제 도서원 이중성
미대동색 임계욱 목대동색 박영석
본창색 이계흥 영창색 박영석 포보색 최준겸
산성색 최득배 사창색 이중채 관청색 최중석
금승색 박성번 어영색 이중엽
통인 임세우 임계엽 [목수](/topic/목수) 이계학 김영
공향 승 심열 각수 승 만기 당한 김

계해년(1743)에 중수한 지가 지금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터가 꺼져 홀연히 신당이 무너졌다. 관가에 고하고 읍민에게 선포하여 힘을 합쳐 고쳐 세웠다.

건륭 19년 갑술년(1754) 10월 15일
호장 임계진 이방 최대겸 성조색 성득후

건륭 19년 갑술년 10월 일에 중건한 지 70년에 이르러 또 무너졌다. 각 관청이 서로 의논하여 재물을 내어 옛 재목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늘리어 새로 지었는데 향중에서 각 면의 향청에도 힘을 돕도록 하여 고쳐 지었다.

도광(道光) 3년 계미년(1823) 5월 일
시임 호장 임준효
이방 조익환
감관 설경지
색리 최석후 신성욱

이 「성황대신사적」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고려시대에 존재했다고 하는 지원(至元) 18년(1281)의 공문과 대덕(大德) 원년의 기록에 이두(吏讀) 문자가 섞여 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는 각종 공문이나 금석문에 가끔씩 이두가 쓰인 예가 있다. 따라서 「성황대신사적」의 고려시대 공문에 이두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빙성이크다는 것을 방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 지원 18년의 공문은『 고려사』 충렬왕세가의 ‘중외의 성황과 명산대천으로 [사전](/topic/사전)(祀典)에 올라 있는 것은 다 덕호(德號)를 가하였다’라는 기록을 반영하고 있어 자료의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두 번째는 이 기록이 순천의 성황신앙에 대한 각기 다른 시기의 자료를 정리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연대순으로 되어 있지만 설공검에 대한 기록은 맨 앞에 배치하고있다. 물론 그것은 조선 후기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순창 성황신의 주신(主神)이 설공검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의 것을 참조하지 않고 조선시대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전재(轉載)하여 놓은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조선 후기 순창 지역 향리의 입장에서는 『고려사』를 구해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서두의 설공검 기사 뒤로는 모두 시대 순으로 정리함으로써 순창의 성황신앙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그 변천사를 살펴보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세 번째 특징은 성황신으로 남신과 여신 한 쌍의 신이 모셔졌다는 실증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는 남신인 대왕이 여신인 부인을 거느렸으며 건곤(乾坤)의 신상(神像)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신의 형태도 그림이 아닌 실제 모습과 같은 상(像)을 깎아 모셨다는 점도 특이하다. 기록에는 ‘건곤의 신상을 공경히 아름답게 하였는데 그 분칠한 얼굴과 모양이 살아 있는 모습과 흡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씻고 보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왜 이러한 두신이 모셔[지게](/topic/지게) 되었는지는 학자들이 규명할 일이다.

네 번째 특징은 성황신으로 무신이 아닌 문신이 모셔졌다는 점이다. 성황신의 본래 기능은 수호신이다. 따라서 기록을 보면 무신이나 [장군](/topic/장군)들이 모셔지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최영 장군이라든가 당나라의 장군이었던 소정방, 고려 태조의 휘하 장군이었던 신숭겸·김홍술 등이 성황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러나 순창의 성황신은 과거에도 합격하여 재상의 자리에 오른 문신 설공검이 모셔진 것이 독특하다.

다섯 번째 특징은 성황신을 언급하면서 대모산성(大母山城)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모를 여신으로 모신 데서 연유한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성황신앙의 본래 성격과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조선 후기나 현재의 시각으로 성황신 또는 [서낭신](/topic/서낭신)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없으나 성황신의 본래 성격을 알면 납득이 가는 문제다. 본래의 성황신은 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황신앙의 변천과정과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여섯 번째는 순창 성황사의 중수와 변천을 기록하면서 거기에 관련된 향리들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자료를 통하여 향리들이 지방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성황신에의 제사에는 어떻게 참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조선시대 지방 세력의 구조가 어떠했으며 시대에 따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고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글자가 틀린 부분이나 빠진 부분이 제법 발견된다는 점이다. 글자가 파손되어 알 수 없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명확하게 보이는 곳에도 틀린 부분이 많다. 특히 시대가 앞서는 기록에 많이 있다. 예컨대 3행의 마지막 부분에 ‘충렬왕묘정(忠烈王廟庭)’을 ‘충렬왕조정(忠烈王朝廷)’이라 한 것을 비롯하여 ‘왕지(王旨)’를‘왕지(王至)’, ‘삼한공신(三韓功臣)’을 ‘삼한공신(三韓公身)’,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경리총랑(京里摠郞)’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이 틀린 부분이 있는이유는 세월이 오래되어 좀먹고 파손된 부분을 수정하는 사람이 추측하여 보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처음 현판이 오래되어 다시 제작하는 과정에서 파손된 글자를 보충해 넣을 때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당대의 시대상황을 고찰하여 바로잡으면 될 부분이다.
참고문헌순창성황대신사적 [현판](/topic/현판)의 발견과 그 고찰 (양만정, 옥천문화 1, 옥천문화원, 1993)
순창성황당 현판에 대하여 (남풍현, 고문서연구 7, 한국고문서학회, 1995)
고려시대 순창의 지방세력과 성황신앙 (김갑동, 한국사연구 97, 한국사연구회, 1997)
성황당과 성황제 (한국종교사연구회 편, 민속원, 1998)
순창성황당 현판의 판독과 해석 (남풍현, 성황당과성황제, 민속원, 1998)
조선중기 전라도 순창군 성황 제의의 성격 (정승모,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순창 성황제의 변천과 주도세력 (이해준,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순창의 성황신과 성곽설화 (송화섭,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조선 시대의 성황제 (김철웅, 사학지 35, 단국사학회, 2002)
국립문화재연구소경기도 도당굿1999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명선 중2004
국립문화재연구소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서울시·경기도·강원도2005
경기도국악당경기굿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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