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12령 새재성황사

한국무속신앙사전
보부상이나 이후 선질꾼들의 신앙 처소로서의 기능과 함께 세상을 뜬 보부상과 선질꾼들을 위한 재사(齋舍) 기능을 함께 하던 제당.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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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이나 이후 선질꾼들의 신앙 처소로서의 기능과 함께 세상을 뜬 보부상과 선질꾼들을 위한 재사(齋舍) 기능을 함께 하던 제당.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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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정의보부상이나 이후 선질꾼들의 신앙 처소로서의 기능과 함께 세상을 뜬 보부상과 선질꾼들을 위한 재사(齋舍) 기능을 함께 하던 제당.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있다.
정의보부상이나 이후 선질꾼들의 신앙 처소로서의 기능과 함께 세상을 뜬 보부상과 선질꾼들을 위한 재사(齋舍) 기능을 함께 하던 제당.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있다.
Seonghwangsa is the shrine for worshipping the village deity Seonghwang, serving as the venue for village rites and shamanic rituals.

Seonghwangsa was a state shrine that was built on major mountains around the country, starting in late Goryeo (918-1392). In Joseon (1392-1910), provincial officials continued to officiate rituals at these shrines, but eventually villagers took over the rituals. One of the few seonghwangsa from history that still remain include one at Daegwallyeong, a mountain pass in Gangwon Province, and one on the Twelve-Pass Mountain Route in Uljin, North Gyeongsang Province.

The Shrine for Seonghwang at Daegwallyeong is a wooden structure with a tiled roof, its Chinesecharacter signboard reading “城隍祠 (Seonghwangsa).” Inside is a tablet that reads “大關嶺國師城隍之神 (State Preceptor God of Daegwallyeong)” and a painting of the deity, depicted as a general on horseback, carrying a bow in his hand and a quiver on his back. A servant is holding the reins of the horse, and a pair of tigers guard the god at the side, their front legs stretched forward. The shrine is believed to be divine, with shamans from around the country still visiting everyday to hold rituals and to offer prayers.

The Shrine for Seonghwang at Uljin Twelve-Pass Mountain Route, located at the bottom of the mountain pass Joryeong (Saejae), is a wooden structure with a gabled roof, measuring 1 kan (6.6 m²) in area. This shrine served as a place of worship for peddlers traveling on this mountain route and also for enshrining the spirits of deceased peddlers. Inside the shrine stands a wooden tablet with the Chinese characters “鳥嶺城隍神位 (Tablet for Seonghwang Deity of Joryeong)” written in ink.

Worship services at seonghwangsa were held in spring and fall, officiated by a village elderly, the costs covered by harvest from communal rice paddies maintained for village rituals (widap). Sacrificial foods comprised wine, steamed rice, white rice cake, beef, and fruits, and the service was followed by the village ritual byeolsingut.
내용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선질꾼들이 주도하여 제물을 준비하여 제를 지냈으며, 선질꾼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빛내[마을](/topic/마을)에서 제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당 내부에는 정면과 좌우에 제단이 있다. 제당 내 정면에는 ‘조령성황신위(鳥嶺城隍神位)’라고 묵서한 나무 [위패](/topic/위패)가 있다. 제당 명칭과 위패로 보아 성황신을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topic/마루) 중에서 강원도에 있는 제당 명칭이 ‘○○山靈閣’이고, 모시는 신령 또한 산신 계통이 많다는 점과 비교하였을 때 성황신을 모시는 것은 큰 특징으로 볼 수도 있다. 행상단이 이곳을 지날 당시 제당 아래에 주막이 있었고, 소규모의 마을과 전답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마을 수호신의 역할과 함께 행상단을 위한 신앙의 처소로서의 기능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내부 벽에는 각종 중수기가 걸려 있다.

제당은 새재 고갯마루에 위치한다. 보부상들이 주로 다닌 울진 후포의 다투고개, 태백산 사길령, 원주 신림의 싸리재와 가라파, 봉화의 고치령, 태백의 건의령, 임계의 삽당령 등 대부분의 고갯마루에는 이들이 위한 제당들이 위치하고 있다.

1967년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제단 위에 마구 할매의 화상(畫像)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새재성황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당신도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868년에 만들어진 「조령성황사 중수기」에 따르면 ‘화공 황순기’가 제당을 중수하면서 당신도를 그려 [봉안](/topic/봉안)하였고, 1894년 중수기에 따르면 화공 이치윤이 성황당 당신도를 다시 그려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1962년에 조령성황사영정을 다시 봉안하였는데, 이를 그린 화사는 이택룡이다. 1967년 조사 자료에 기록된 마구 할매의 화상은 이 [영정](/topic/영정)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목(神木)은 제당 동쪽에 있는 높이 20m의 들미나무이며, 제당 둘레에는 파손된 [기와](/topic/기와)와 돌로 나지막한 [돌담](/topic/돌담)을 쌓았다. 그리고 제당에서 찬물내기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에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지나면서 돌을 던져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남아 있다. 인근의 안일왕 산성과 관련하여 아밀왕이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와 함께 제당 주변에 道光 22년 壬寅(1842년)에 세운 ‘이광전영세불망비(李光筌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새재성황사와 함께 이 불망비는 새재가 주요 교통로였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사는 1년 중 봄과 가을에 지냈다. [제관](/topic/제관)은 연장자로 선정하였으며, 제비(祭費)는 위답(位畓)에서 부담하였다고 한다. 준비한 제수는 술ㆍ메ㆍ백설기ㆍ쇠고기ㆍ과실이었으며, [고사](/topic/고사)를 지낸 후 [별신굿](/topic/별신굿)을 하였다고 한다. 두천리 주민들에 의하면 새재 [서낭당](/topic/서낭당)에서 3년에 한 번 정도 10월쯤에 좋은 날을 받아 굿을 하였다. 소요되는 경비는 위답(位畓)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소작](/topic/소작)료를 받아서 모으고, 찬조도 받았다. 하루 굿을 하였고, 무당 3~4명이 와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굿을 하면 인근에 있는 빛내ㆍ장평ㆍ홈교ㆍ소광 2리ㆍ찬물내기ㆍ소광 1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굿을 보러 왔으며, 선질꾼들은 여유 시간이 있으면 보고 갔으며, 일부는 [시주](/topic/시주)를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이 더 이상 12령을 다니지 않으면서 새재성황사 운영은 인근 마을인 소광 1~3리가 함께 하였고, 이 때 장평과 찬물내기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30여년 전에 더 이상 인근 마을 모두가 유지하기 어려워 빛내 마을(소광 3리)로 넘겨주었다. 원래 빛내마을 서낭당이 있었으나, 새재 서낭당을 큰서낭으로 모셨다. 그러나 지금은 빛내 서낭당은 없고 새재성황사 운영 또한 마을에서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Seonghwangsa is the shrine for worshipping the village deity Seonghwang, serving as the venue for village rites and shamanic rituals.

Seonghwangsa was a state shrine that was built on major mountains around the country, starting in late Goryeo (918-1392). In Joseon (1392-1910), provincial officials continued to officiate rituals at these shrines, but eventually villagers took over the rituals. One of the few seonghwangsa from history that still remain include one at Daegwallyeong, a mountain pass in Gangwon Province, and one on the Twelve-Pass Mountain Route in Uljin, North Gyeongsang Province.

The Shrine for Seonghwang at Daegwallyeong is a wooden structure with a tiled roof, its Chinesecharacter signboard reading “城隍祠 (Seonghwangsa).” Inside is a tablet that reads “大關嶺國師城隍之神 (State Preceptor God of Daegwallyeong)” and a painting of the deity, depicted as a general on horseback, carrying a bow in his hand and a quiver on his back. A servant is holding the reins of the horse, and a pair of tigers guard the god at the side, their front legs stretched forward. The shrine is believed to be divine, with shamans from around the country still visiting everyday to hold rituals and to offer prayers.

The Shrine for Seonghwang at Uljin Twelve-Pass Mountain Route, located at the bottom of the mountain pass Joryeong (Saejae), is a wooden structure with a gabled roof, measuring 1 kan (6.6 m²) in area. This shrine served as a place of worship for peddlers traveling on this mountain route and also for enshrining the spirits of deceased peddlers. Inside the shrine stands a wooden tablet with the Chinese characters “鳥嶺城隍神位 (Tablet for Seonghwang Deity of Joryeong)” written in ink.

Worship services at seonghwangsa were held in spring and fall, officiated by a village elderly, the costs covered by harvest from communal rice paddies maintained for village rituals (widap). Sacrificial foods comprised wine, steamed rice, white rice cake, beef, and fruits, and the service was followed by the village ritual byeolsingut.
내용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선질꾼들이 주도하여 제물을 준비하여 제를 지냈으며, 선질꾼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빛내[마을](/topic/마을)에서 제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당 내부에는 정면과 좌우에 제단이 있다. 제당 내 정면에는 ‘조령성황신위(鳥嶺城隍神位)’라고 묵서한 나무 [위패](/topic/위패)가 있다. 제당 명칭과 위패로 보아 성황신을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topic/마루) 중에서 강원도에 있는 제당 명칭이 ‘○○山靈閣’이고, 모시는 신령 또한 산신 계통이 많다는 점과 비교하였을 때 성황신을 모시는 것은 큰 특징으로 볼 수도 있다. 행상단이 이곳을 지날 당시 제당 아래에 주막이 있었고, 소규모의 마을과 전답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마을 수호신의 역할과 함께 행상단을 위한 신앙의 처소로서의 기능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내부 벽에는 각종 중수기가 걸려 있다.

제당은 새재 고갯마루에 위치한다. 보부상들이 주로 다닌 울진 후포의 다투고개, 태백산 사길령, 원주 신림의 싸리재와 가라파, 봉화의 고치령, 태백의 건의령, 임계의 삽당령 등 대부분의 고갯마루에는 이들이 위한 제당들이 위치하고 있다.

1967년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제단 위에 마구 할매의 화상(畫像)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새재성황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당신도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868년에 만들어진 「조령성황사 중수기」에 따르면 ‘화공 황순기’가 제당을 중수하면서 당신도를 그려 [봉안](/topic/봉안)하였고, 1894년 중수기에 따르면 화공 이치윤이 성황당 당신도를 다시 그려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1962년에 조령성황사영정을 다시 봉안하였는데, 이를 그린 화사는 이택룡이다. 1967년 조사 자료에 기록된 마구 할매의 화상은 이 [영정](/topic/영정)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목(神木)은 제당 동쪽에 있는 높이 20m의 들미나무이며, 제당 둘레에는 파손된 [기와](/topic/기와)와 돌로 나지막한 [돌담](/topic/돌담)을 쌓았다. 그리고 제당에서 찬물내기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에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지나면서 돌을 던져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남아 있다. 인근의 안일왕 산성과 관련하여 아밀왕이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와 함께 제당 주변에 道光 22년 壬寅(1842년)에 세운 ‘이광전영세불망비(李光筌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새재성황사와 함께 이 불망비는 새재가 주요 교통로였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사는 1년 중 봄과 가을에 지냈다. [제관](/topic/제관)은 연장자로 선정하였으며, 제비(祭費)는 위답(位畓)에서 부담하였다고 한다. 준비한 제수는 술ㆍ메ㆍ백설기ㆍ쇠고기ㆍ과실이었으며, [고사](/topic/고사)를 지낸 후 [별신굿](/topic/별신굿)을 하였다고 한다. 두천리 주민들에 의하면 새재 [서낭당](/topic/서낭당)에서 3년에 한 번 정도 10월쯤에 좋은 날을 받아 굿을 하였다. 소요되는 경비는 위답(位畓)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소작](/topic/소작)료를 받아서 모으고, 찬조도 받았다. 하루 굿을 하였고, 무당 3~4명이 와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굿을 하면 인근에 있는 빛내ㆍ장평ㆍ홈교ㆍ소광 2리ㆍ찬물내기ㆍ소광 1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굿을 보러 왔으며, 선질꾼들은 여유 시간이 있으면 보고 갔으며, 일부는 [시주](/topic/시주)를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이 더 이상 12령을 다니지 않으면서 새재성황사 운영은 인근 마을인 소광 1~3리가 함께 하였고, 이 때 장평과 찬물내기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30여년 전에 더 이상 인근 마을 모두가 유지하기 어려워 빛내 마을(소광 3리)로 넘겨주었다. 원래 빛내마을 서낭당이 있었으나, 새재 서낭당을 큰서낭으로 모셨다. 그러나 지금은 빛내 서낭당은 없고 새재성황사 운영 또한 마을에서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역사12령 상에 있는 새재성황사를 중수하고, 이를 어떤 성격으로 운영하였는지 이를 운영한 주체는 언제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대한 사실들은 성황사 내에 있는 중수 [현판](/topic/현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현판 내용을 중심으로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령성황사 중수기(鳥嶺城隍祠 重修記)」에 따르면 새재성황사는 “上之 五年 戊辰 七月”로 1868년(고종 5)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68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戊寅 四月 日”이라는 문구를 통해 1878년에 새재성황사 [지붕](/topic/지붕) [기와](/topic/기와)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光緖十肆年 戊子”라고 하여 1888년(고종 25)에 성황사를 중수하였다. 이를 기록한 현판에는 중수에 참여한 보부상단의 직책과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을미년(1895년이나 그 이전으로 추측) 음력 10월 상순, 을해년(1935) 4월 20일, 무자년(1948) 4월 30일, 신축년(1961), 1983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1868년 중수 기록이 담긴 「조령성황사 중수기」에 [목수](/topic/목수)(木手)와 함께 ‘화공 황순기(畫工 黃順基)’가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중수하면서 당신도(堂神圖)를 그려 [봉안](/topic/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1894년에 성황당(城隍堂) 당신도를 바꾸었다. 이를 기록한 현판에 따르면 당시 화공 이치윤(李致潤)이 성황당 당신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1962년 10월 15일에 조령성황사영정(鳥嶺城隍祠影幀)을 봉안하였으며 화사(畫師) 이택룡(李澤龍)이 그렸다는 사실을 적은 현판이 있다.

둘째, 새재성황사를 중수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제당의 기능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68년에 중수한 이래 1916년까지 작성된 중수 현판에는 조령성황사 또는 성황당을 중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1919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령성황보호금열명기(鳥嶺城隍保護金烈名記)」에 ‘재소창설발기인(齋所創設發起人)’ 즉 ‘재소(齋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이후 보부상 조직이 와해되면서 과거 보부상단에 속하였던 사람들끼리 새재성황사를 중심으로 결속을 다지면서 선대 보부상 조직원들을 추모하는 등의 처소로 활용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만들어진 중수 현판 가운데 1919년의 ‘재소중수발기인(齋所重修發起人)’과 1932년의 ‘조령성황재사중수시기부인방명록(鳥嶺城隍齋舍重修峕寄附人芳名錄)’에도 12령 새재성황사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행상단의 안전과 장사가 잘 되길 기원하면서 선대 보부상 등을 위한 [재실](/topic/재실)(齋室)을 겸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소(齋所)’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보부상단의 신앙 공간으로 이용되던 새재성황사가 일제강점기 이후 재실의 기능도 함께하였음을 보여 준다.

셋째, 중수를 주도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재성황사 운영 주체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1868년 이래 성황사를 중수한 것은 12령을 오가며 장사하면서 일정한 조직을 갖춘 행상 즉 보부상들이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직이 확대되고 좀 더 체계적인 조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에 의한 새재성황사 중수는 「시재기(施財記)」를 작성한 때까지였다. 1904년 이후 전국적으로 보부상단이 해체됨에 따라 이 지역의 보부상단도 해체되었고, 보부상을 이은 선질꾼들이 12령을 넘나들며 봉화와 울진 간의 상품 거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16년에 만든 현판인 「조령성황보호금열명기」에는 ‘전공사원(前公事員)ㆍ전장무원(前掌務員)’이라 하여 보부상 해체 이후의 상황을 알려주는 명칭이 보이며, 1935년에 중수하면서 게판(揭板)한 「조령성황재사중수시기부인방명록(鳥嶺城隍齋舍重修峕寄附人芳名錄)」, 「조령성황당중수시기부인방명록(鳥嶺城隍堂重修時寄附人芳名錄)」(1948), 「조령성황사중수임원급기증방명록(鳥嶺城隍祠重修任員及寄贈芳名錄)」, 「조령성황사 중수시(鳥嶺城隍祠 重修時)」(1961), 「조령성황사영정봉안시(鳥嶺城隍祠影幀奉安時)」(1962)를 통해서 중수를 주재한 직책이 ‘주무(主務)’와 ‘유사(有司)’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12령 상에 있는 새재성황사를 중수하고, 이를 어떤 성격으로 운영하였는지 이를 운영한 주체는 언제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대한 사실들은 성황사 내에 있는 중수 [현판](/topic/현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현판 내용을 중심으로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령성황사 중수기(鳥嶺城隍祠 重修記)」에 따르면 새재성황사는 “上之 五年 戊辰 七月”로 1868년(고종 5)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68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戊寅 四月 日”이라는 문구를 통해 1878년에 새재성황사 [지붕](/topic/지붕) [기와](/topic/기와)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光緖十肆年 戊子”라고 하여 1888년(고종 25)에 성황사를 중수하였다. 이를 기록한 현판에는 중수에 참여한 보부상단의 직책과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을미년(1895년이나 그 이전으로 추측) 음력 10월 상순, 을해년(1935) 4월 20일, 무자년(1948) 4월 30일, 신축년(1961), 1983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1868년 중수 기록이 담긴 「조령성황사 중수기」에 [목수](/topic/목수)(木手)와 함께 ‘화공 황순기(畫工 黃順基)’가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중수하면서 당신도(堂神圖)를 그려 [봉안](/topic/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1894년에 성황당(城隍堂) 당신도를 바꾸었다. 이를 기록한 현판에 따르면 당시 화공 이치윤(李致潤)이 성황당 당신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1962년 10월 15일에 조령성황사영정(鳥嶺城隍祠影幀)을 봉안하였으며 화사(畫師) 이택룡(李澤龍)이 그렸다는 사실을 적은 현판이 있다.

둘째, 새재성황사를 중수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제당의 기능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68년에 중수한 이래 1916년까지 작성된 중수 현판에는 조령성황사 또는 성황당을 중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1919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령성황보호금열명기(鳥嶺城隍保護金烈名記)」에 ‘재소창설발기인(齋所創設發起人)’ 즉 ‘재소(齋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이후 보부상 조직이 와해되면서 과거 보부상단에 속하였던 사람들끼리 새재성황사를 중심으로 결속을 다지면서 선대 보부상 조직원들을 추모하는 등의 처소로 활용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만들어진 중수 현판 가운데 1919년의 ‘재소중수발기인(齋所重修發起人)’과 1932년의 ‘조령성황재사중수시기부인방명록(鳥嶺城隍齋舍重修峕寄附人芳名錄)’에도 12령 새재성황사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행상단의 안전과 장사가 잘 되길 기원하면서 선대 보부상 등을 위한 [재실](/topic/재실)(齋室)을 겸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소(齋所)’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보부상단의 신앙 공간으로 이용되던 새재성황사가 일제강점기 이후 재실의 기능도 함께하였음을 보여 준다.

셋째, 중수를 주도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재성황사 운영 주체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1868년 이래 성황사를 중수한 것은 12령을 오가며 장사하면서 일정한 조직을 갖춘 행상 즉 보부상들이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직이 확대되고 좀 더 체계적인 조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에 의한 새재성황사 중수는 「시재기(施財記)」를 작성한 때까지였다. 1904년 이후 전국적으로 보부상단이 해체됨에 따라 이 지역의 보부상단도 해체되었고, 보부상을 이은 선질꾼들이 12령을 넘나들며 봉화와 울진 간의 상품 거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16년에 만든 현판인 「조령성황보호금열명기」에는 ‘전공사원(前公事員)ㆍ전장무원(前掌務員)’이라 하여 보부상 해체 이후의 상황을 알려주는 명칭이 보이며, 1935년에 중수하면서 게판(揭板)한 「조령성황재사중수시기부인방명록(鳥嶺城隍齋舍重修峕寄附人芳名錄)」, 「조령성황당중수시기부인방명록(鳥嶺城隍堂重修時寄附人芳名錄)」(1948), 「조령성황사중수임원급기증방명록(鳥嶺城隍祠重修任員及寄贈芳名錄)」, 「조령성황사 중수시(鳥嶺城隍祠 重修時)」(1961), 「조령성황사영정봉안시(鳥嶺城隍祠影幀奉安時)」(1962)를 통해서 중수를 주재한 직책이 ‘주무(主務)’와 ‘유사(有司)’였음을 알 수 있다.
형태울진과 봉화를 연결하는 12령 가운데 새재 바로 아래에 중수를 하여 반듯하게 유지되고 있는 새재성황사는 [기와](/topic/기와)를 얹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으로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제당이다. 소나무 판재를 이용하여 벽체를 만들었으며, 정면에는 좌우 [여닫이](/topic/여닫이)문을 달았다. 제당 정면 입구에는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라 쓴 [편액](/topic/편액)을 걸었다. 성황사 내부에는 중수와 관련한 [현판](/topic/현판)이 14개 걸려있어 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1868년 이후의 중수와 운영에 대한 현황을 잘 알 수 있다. 대관령 서낭을 받아 온 것으로 전해지는 이 성황사는 당 내부에 여자 화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형태울진과 봉화를 연결하는 12령 가운데 새재 바로 아래에 중수를 하여 반듯하게 유지되고 있는 새재성황사는 [기와](/topic/기와)를 얹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으로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제당이다. 소나무 판재를 이용하여 벽체를 만들었으며, 정면에는 좌우 [여닫이](/topic/여닫이)문을 달았다. 제당 정면 입구에는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라 쓴 [편액](/topic/편액)을 걸었다. 성황사 내부에는 중수와 관련한 [현판](/topic/현판)이 14개 걸려있어 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1868년 이후의 중수와 운영에 대한 현황을 잘 알 수 있다. 대관령 서낭을 받아 온 것으로 전해지는 이 성황사는 당 내부에 여자 화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의의새재성황사에서 모신 신령은 ‘조령성황신위’이다. 즉, ‘조령(鳥嶺)’을 비롯하여 고갯마루에서 일반적으로 산신을 모셔야하나 성황신을 모시고 있다.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에서 성황신을 모신 사례는 봉화의 박달재, 고직령, 강원도 임계에 있는 삽당령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달재에 있는 제당 명칭이 산령각이며, 고직령 또한 산령각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마을](/topic/마을)에서는 이들 제당을 성황각 또는 성황당이라 부르며, 이들 제당에서는 ‘산령각’이라는 제당 명칭과는 달리 성황신을 모신 것이다. 박달령에서는 후대에 만들어진 중수 [현판](/topic/현판)에 제당 명칭을 마을에서 부르는 ‘박달령 성황각’이라 하였다. 이에 비해 강원도 내의 고갯마루에 있는 산신당에서는 대부분 산신을 모신다.

즉 경상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대부분의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에서 모시는 신령은 ‘산이나 고개 이름 + 성황신’이라고 표기한 신령을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강원도에서는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에 모신 신령은 ‘○○ 산신령’인 예가 대부분이다. 이를 통해 경상도 지역에서 모시는 신령이 산신에서 성황신으로 변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치령에서 영월 방향의 자연마을에서 모시는 신령은 ‘태백산 성황신위’인 예가 있으며, 고치령에서 봉화 방향의 마을에 있는 마을 제당에서는 ‘[소백산](/topic/소백산) 성황신위’를 모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모시고 있는 신령이 산신에서 성황신으로 변화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신(神)’을 표현함에 있어 ‘산신’을 ‘성황’으로 하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산신의 성격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내면에는 산신의 영험에 의지하려는 측면이 계속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재성황사에서 모시는 ‘조령성황신’은 지역의 전통을 반영하여 산간이나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에서 모시는 신령이 ‘산신당의 산신-산신당의 성황-○○山[○○嶺]성황사의 성황’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대부분의 고갯마루에 있는 국시나 제당에는 이곳을 지나는 행상들이 안전과 상업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 개인적인 치성을 드리는 예가 대부분이나 새재성황사에서는 12령을 넘나들며 장사한 보부상과 그 뒤를 이은 선질꾼들이 지속적으로 제당 중수와 운영에 관여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인 구심체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였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함께 1919년의 「재소중수발기인」과 1935년의 「조령성황재사중수시기부인방명록」 현판을 보면 새재성황사를 마을제당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선배 보부상들을 위한 재소(齋所)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록 보부상단의 공식적인 조직은 와해되었어도, 새재성황사 중수와 유지 및 제사에 보부상단의 후예와 선질꾼으로 대표되는 행상단이 지속적으로 관여함으로써 과거 보부상단의 맥을 이어가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질꾼들이 더이상 12령을 다니지 않으면서 새재성황사 운영은 인근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함께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이 또한 여건이 어려워짐에 따라 빛내마을(소광 3리)에서 모셨다. 지금은 새재성황사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전통은 없어졌다. 보부상단이 운영하던 후포 다투고개 산신각,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원주 [치악산](/topic/치악산) 싸리재와 가리파 성황당도 이 지역을 오가며 장사한 상단들이 쇠퇴하면서 자연스럽게 인근 마을 주민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례와 비교하였을 때 새재성황사 운영의 변동 양상은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는 보부상단이 남겨둔 재산이 있어 이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제사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새재성황사에는 이러한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그 명맥이 끊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셋째, 1967년 조사 자료와 현지 조사 결과 새재성황사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성황제사를 지냈다. 제당 운영에 보부상들이 적극 참여한 울진 후포 산신각은 5월 6일에 제당을 처음 만들었기에 이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제는 매년 음력 사월 보름에 지내며, 태백시에 있는 느릎재에서는 매년 음력 사월 열엿샛날 산령제를 지낸다. 치악산 주변을 중심으로 활동한 보부상과 관련있는 싸리재와 가리파의 성황당에서는 매년 삼짇날과 중양절에 제를 지낸다. 대부분의 자연 마을에서 정월 초하루나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지내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다른 양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제당들이어서 겨울에 쌓인 눈 등으로 인해 겨울에는 이곳을 오가며 장사를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 고갯마루의 눈이 녹은 후 본격적인 상업 활동을 하기 전에 상단의 안전과 상업 활동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태백산 사길령 산령각제 연구 (신종원․노남호, 강원문화사연구 3,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98)
한국의 보부상 (이창식, 밀알, 2001)
울진 12령 넘나든 선질꾼들의 삶과 문화 (안동대 박물관 · 울진문화원, 2005)
보부상 집단의 신앙 결사와 후포 산신각 (천혜숙, 동해안 [마을](/topic/마을)의 신당과 제의, 민속원, 2007)
원주시 신림면의 마을신앙 연구 (이소래,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명단 [현판](/topic/현판), 無題 현판(1916), 城隍堂改像時(1894), 施財記(1800년대 중반 이후로 추정), 齋所重修發起人(1919), 鳥嶺城隍堂重修時寄附人芳名錄(1948), 鳥嶺城隍保護金烈名記(1919년 이전), 鳥嶺城隍祠 蓋瓦時(1878), 鳥嶺城隍祠 重修記(1868), 鳥嶺城隍祠 重修時(1961), 鳥嶺城隍祠(1895), 鳥嶺城隍祠影幀奉安時(1962), 鳥嶺城隍祠重修任員及寄贈芳名錄, 鳥嶺城隍齋舍重修峕寄附人芳名錄(1935), 重修 上樑文(1983), 重修記(1888), (강원도 영동 남부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 김도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문, 2009)
울진 12령 새재[鳥嶺] 성황사와 보부상단 (김도현, 실천민속학연구 16, 실천민속학회, 2010)
의의새재성황사에서 모신 신령은 ‘조령성황신위’이다. 즉, ‘조령(鳥嶺)’을 비롯하여 고갯마루에서 일반적으로 산신을 모셔야하나 성황신을 모시고 있다.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에서 성황신을 모신 사례는 봉화의 박달재, 고직령, 강원도 임계에 있는 삽당령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달재에 있는 제당 명칭이 산령각이며, 고직령 또한 산령각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마을](/topic/마을)에서는 이들 제당을 성황각 또는 성황당이라 부르며, 이들 제당에서는 ‘산령각’이라는 제당 명칭과는 달리 성황신을 모신 것이다. 박달령에서는 후대에 만들어진 중수 [현판](/topic/현판)에 제당 명칭을 마을에서 부르는 ‘박달령 성황각’이라 하였다. 이에 비해 강원도 내의 고갯마루에 있는 산신당에서는 대부분 산신을 모신다.

즉 경상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대부분의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에서 모시는 신령은 ‘산이나 고개 이름 + 성황신’이라고 표기한 신령을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강원도에서는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에 모신 신령은 ‘○○ 산신령’인 예가 대부분이다. 이를 통해 경상도 지역에서 모시는 신령이 산신에서 성황신으로 변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치령에서 영월 방향의 자연마을에서 모시는 신령은 ‘태백산 성황신위’인 예가 있으며, 고치령에서 봉화 방향의 마을에 있는 마을 제당에서는 ‘[소백산](/topic/소백산) 성황신위’를 모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모시고 있는 신령이 산신에서 성황신으로 변화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신(神)’을 표현함에 있어 ‘산신’을 ‘성황’으로 하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산신의 성격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내면에는 산신의 영험에 의지하려는 측면이 계속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재성황사에서 모시는 ‘조령성황신’은 지역의 전통을 반영하여 산간이나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에서 모시는 신령이 ‘산신당의 산신-산신당의 성황-○○山[○○嶺]성황사의 성황’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대부분의 고갯마루에 있는 국시나 제당에는 이곳을 지나는 행상들이 안전과 상업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 개인적인 치성을 드리는 예가 대부분이나 새재성황사에서는 12령을 넘나들며 장사한 보부상과 그 뒤를 이은 선질꾼들이 지속적으로 제당 중수와 운영에 관여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인 구심체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였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함께 1919년의 「재소중수발기인」과 1935년의 「조령성황재사중수시기부인방명록」 현판을 보면 새재성황사를 마을제당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선배 보부상들을 위한 재소(齋所)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록 보부상단의 공식적인 조직은 와해되었어도, 새재성황사 중수와 유지 및 제사에 보부상단의 후예와 선질꾼으로 대표되는 행상단이 지속적으로 관여함으로써 과거 보부상단의 맥을 이어가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질꾼들이 더이상 12령을 다니지 않으면서 새재성황사 운영은 인근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함께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이 또한 여건이 어려워짐에 따라 빛내마을(소광 3리)에서 모셨다. 지금은 새재성황사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전통은 없어졌다. 보부상단이 운영하던 후포 다투고개 산신각,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원주 [치악산](/topic/치악산) 싸리재와 가리파 성황당도 이 지역을 오가며 장사한 상단들이 쇠퇴하면서 자연스럽게 인근 마을 주민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례와 비교하였을 때 새재성황사 운영의 변동 양상은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는 보부상단이 남겨둔 재산이 있어 이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제사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새재성황사에는 이러한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그 명맥이 끊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셋째, 1967년 조사 자료와 현지 조사 결과 새재성황사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성황제사를 지냈다. 제당 운영에 보부상들이 적극 참여한 울진 후포 산신각은 5월 6일에 제당을 처음 만들었기에 이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제는 매년 음력 사월 보름에 지내며, 태백시에 있는 느릎재에서는 매년 음력 사월 열엿샛날 산령제를 지낸다. 치악산 주변을 중심으로 활동한 보부상과 관련있는 싸리재와 가리파의 성황당에서는 매년 삼짇날과 중양절에 제를 지낸다. 대부분의 자연 마을에서 정월 초하루나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지내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다른 양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제당들이어서 겨울에 쌓인 눈 등으로 인해 겨울에는 이곳을 오가며 장사를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 고갯마루의 눈이 녹은 후 본격적인 상업 활동을 하기 전에 상단의 안전과 상업 활동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태백산 사길령 산령각제 연구 (신종원․노남호, 강원문화사연구 3,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98)
한국의 보부상 (이창식, 밀알, 2001)
울진 12령 넘나든 선질꾼들의 삶과 문화 (안동대 박물관 · 울진문화원, 2005)
보부상 집단의 신앙 결사와 후포 산신각 (천혜숙, 동해안 [마을](/topic/마을)의 신당과 제의, 민속원, 2007)
원주시 신림면의 마을신앙 연구 (이소래,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명단 [현판](/topic/현판), 無題 현판(1916), 城隍堂改像時(1894), 施財記(1800년대 중반 이후로 추정), 齋所重修發起人(1919), 鳥嶺城隍堂重修時寄附人芳名錄(1948), 鳥嶺城隍保護金烈名記(1919년 이전), 鳥嶺城隍祠 蓋瓦時(1878), 鳥嶺城隍祠 重修記(1868), 鳥嶺城隍祠 重修時(1961), 鳥嶺城隍祠(1895), 鳥嶺城隍祠影幀奉安時(1962), 鳥嶺城隍祠重修任員及寄贈芳名錄, 鳥嶺城隍齋舍重修峕寄附人芳名錄(1935), 重修 上樑文(1983), 重修記(1888), (강원도 영동 남부지역 고을 및 마을신앙, 김도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문, 2009)
울진 12령 새재[鳥嶺] 성황사와 보부상단 (김도현, 실천민속학연구 16, 실천민속학회, 2010)
冽陽歲時記
東國歲時記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전남편1971
집문당한국무속연구김태곤1981
동문선조선무속의 연구赤松智城·秋葉隆, 심우성 역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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