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돌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경기도 김포시에서 음력 시월 스무날에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 손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주사(舟師) 손돌공(孫乭公) 진혼제(鎭魂祭)’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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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에서 음력 시월 스무날에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 손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주사(舟師) 손돌공(孫乭公) 진혼제(鎭魂祭)’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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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식
정의경기도 김포시에서 음력 시월 스무날에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 손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주사(舟師) 손돌공(孫乭公) 진혼제(鎭魂祭)’라고도 한다.
정의경기도 김포시에서 음력 시월 스무날에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 손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주사(舟師) 손돌공(孫乭公) 진혼제(鎭魂祭)’라고도 한다.
기타손돌의 무덤 서쪽에 손돌의 충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 서 있다. 이 비석은 손돌 사후 제740주기를 맞아 묘를 중수하던 1977년 11월 30일에 문화재보호협회김포군지부장 박일양(朴一陽)의 협찬을 받아 김포군수 신영춘(辛榮春)이 건립하였다. 충절 비석의 앞면에는 라는 비명, 뒷면에는 ‘손돌고사’를 각각 새겼다. 손돌의 충절을 기려 비석에 담은 손돌고사는 다음과 같다. 이를 통해 전승집단의 인식이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잡혔는지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손돌목](/topic/손돌목)에 대하여 (박광성, 기전문화연구 9, 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 1978)
손돌전설의 변이유형 연구 (설성경, 설화, 민속학회편, 1989)
손돌목 전설의 현장분석 (이영수, 비교민속학 13, 비교민속학회, 1996)
인천의 지명유래 (인천광역시, 1998)
김포의 설화 (김포문화원, 1999)
손돌목 전설에 나타난 역사성과 민중성 (이영수, 설화와 역사, 집문당, 2000)
한국세시풍속[사전](/topic/사전)-겨울 (국립민속박물관, 2006)
기타손돌의 무덤 서쪽에 손돌의 충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 서 있다. 이 비석은 손돌 사후 제740주기를 맞아 묘를 중수하던 1977년 11월 30일에 문화재보호협회김포군지부장 박일양(朴一陽)의 협찬을 받아 김포군수 신영춘(辛榮春)이 건립하였다. 충절 비석의 앞면에는 라는 비명, 뒷면에는 ‘손돌고사’를 각각 새겼다. 손돌의 충절을 기려 비석에 담은 손돌고사는 다음과 같다. 이를 통해 전승집단의 인식이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잡혔는지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손돌목](/topic/손돌목)에 대하여 (박광성, 기전문화연구 9, 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 1978)
손돌전설의 변이유형 연구 (설성경, 설화, 민속학회편, 1989)
손돌목 전설의 현장분석 (이영수, 비교민속학 13, 비교민속학회, 1996)
인천의 지명유래 (인천광역시, 1998)
김포의 설화 (김포문화원, 1999)
손돌목 전설에 나타난 역사성과 민중성 (이영수, 설화와 역사, 집문당, 2000)
한국세시풍속[사전](/topic/사전)-겨울 (국립민속박물관, 2006)
내용주사 손돌공을 진혼하는 손돌제는 유교식 제차에 의해 진행되는 「손돌공진혼제」와 진혼무(鎭魂舞) [바라춤](/topic/바라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제차와 분정 : 손돌공진혼제는 일반적인 제차인 [참신](/topic/참신)례(參神禮)-[분향](/topic/분향)례(焚香禮)-강신례(降神禮)-[초헌](/topic/초헌)례(初獻禮)-[아헌](/topic/아헌)례(亞獻禮)-[종헌](/topic/종헌)례(終獻禮)-유식례(侑食禮)-진다례(進茶禮)-사신례(辭神禮)-[음복](/topic/음복)례(飮福禮) 순서로 진행된다. 이는 기제(忌祭)라는 측면에서 구성된 순서로 보인다.

손돌제의 의례는 지역의 정치와 유교적 관계망에서 분정(分定)되어 진행된다. 의례를 집행하기에 앞서 [제관](/topic/제관)을 미리 분정하여 소임을 맡은 사람들의 이름을 쓴 분정판을 걸었는데 여기에 적힌 인사들의 직책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삼헌관은 지역사회의 관리이다. 초헌관은 김포시장, 아헌관은 시의회 의장, 종헌관은 김포경찰서장이 각각 맡는다. 이는 손돌제를 중심으로 지역 정치의 핵심이 포진하고 이들의 역할을 통해 손돌제가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집례(執禮)는 통진향교 유도회장, 알자(謁者)는 김포문화원장, 대축(大祝)은 대포서원 원장이 각각 분담하여 진행한다. 이것은 손돌제가 유교적 가치를 기반으로 전승되는 의례임을 보여준다.

의례를 위한 상차림은 손돌제를 치제하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묘제](/topic/묘제)[진설도](/topic/진설도)(墓祭陳設圖)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제물](/topic/제물)은 손돌묘의 앞에 있는 상석 위에 진설한다. 집사자(執事者) 위주로 본 진설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때의 동(東)은 집사자의 오른쪽, 서(西)는 집사자의 왼쪽을 각각 가리킨다.

·생동숙서(生東熟西) : 날것은 동쪽, 익힌 것은 서쪽에 각각 진설한다.
·서두동미(西頭東尾) : 물고기의 경우 머리는 서쪽, 꼬리는 동쪽을 각각 향하게 한다.
·육서어동(肉西魚東) : 고기는 서쪽, 물고기는 동쪽에 각각 진설한다.
·좌포우혜(左脯右醯) : 육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에 각각 진설한다.
·홍동백서(紅東白西) : 과일의 경우 붉은 것은 동쪽, 흰 것은 서쪽에 각각 진설한다.

이런 원칙에 따라 다음의 진설도처럼 진설했으나 이 가운데 메(飯), 갱(羹), 면(麵)은 생략했다.

![[마을](/topic/마을)신앙 손돌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3805_t_.jpg)

[축문](/topic/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 十月 朔 二十日
金浦市長 金東植 敢昭告于
舟師 孫乭公之墓
氣序流易 時維孟冬 諱辰復臨
仰慕忠節 禮不敢忘 百世推仰
敢以淸酌庶羞 祗薦歲事 尙饗

2. 진혼무 바라춤 : 손돌제의 유교식 의례를 마치면 손돌을 진혼하는 바라춤을 춘다. 바라춤은 대곶중학교 남녀 학생 40여 명이 참가하여 바라를 들고 손돌공의 묘 앞에서 추는 춤이다. 이 바라춤으로 1983년 제2회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최우수상을 받고, 1984년 제25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출연하였다.
Sondolje is a ritual held in Gimpo, Gyeonggi Province, on the twentieth day of the tenth lunar month, for appeasing the soul of Sondol, a ferryman who met an unjust death. .

The full title of this ritual is Sondolgongjinhonje (Soul-Appeasing Ritual for Sir Sondol), a local tradition that was revived in contemporary times after discontinuing in late Joseon.

Sondolje has its roots in the oral legend of Sondol, a ferryman from Goryeo (918-1392) who was killed by King Gojong for suspicion of rowing the king’s boat off the water route on his way to Ganghwa Island to seek refuge. Upon his safe arrival, however, the king regretted the killing and held a ritual for the ferryman after dedicating his tomb. The sea channel where his death took place is still called [[Sondolmok](/topic/SondolStrait)](/topic/Sondolmok) (Sondol Strait) and the cold harsh winds that blow each year around the time of the ritual is called sondolbaram, and the accompanying cold spell sondolchuwi.

In the local community, this legend is considered history and Sondol as a real-life figure, the ritual in his honor observed as a major event. Ritual procedures comprise a Confucian rite and the soul-appeasing dance barachum.
阴历十月二十日京畿道金浦市为告慰冤死的艄公孙乭的灵魂而举行的祭祀。

“孙乭祭”又名“孙乭公镇魂祭”。据当地人称,“孙乭公镇魂祭”是在朝鲜王朝末期曾中断的孙乭祭祀基础上复原并发展起来的。

孙乭祭来源于口耳相传的孙乭传说。高丽王朝时代,元朝入侵,高丽王(高宗)逃向江华岛,途中其怀疑艄公孙乭把船划向死胡同,于是将其杀死。但之后却平安到达,因此王很后悔,为孙乭建墓,并为其祭祀。该航道的颈口被认为是孙乭的断头处,至今还被称为“孙乭颈口”。人们认为每年阴历十月二十日左右的风是因孙乭的冤魂所致,故称该狂风为“孙乭风”,另外当天袭来的严寒被称为“孙乭严寒”。该说法流传至今。

金浦人相信孙乭是真实存在过的人物,孙乭传说也是历史事实。所以为了纪念他,金浦人积极置办孙乭祭。孙乭祭由两部分构成:一是儒教式孙乭公镇魂祭,一是镇魂舞——铙钹舞。
Sondolje se refiere a un ritual que se lleva a cabo en la ciudad de Gimpo de la provincia de Gyeonggi-do el 20 de octubre del calendario lunar para sosegar al espíritu de Sondol, un barquero que murió de manera injusta.

El nombre completo del ritual es Sondolgongjinhonje que significa “Ritual para apaciguar al espíritu del señor Sondol”, una tradición que ha sido revivida en tiemposcontemporáneos después de haberse descontinuado a finales de la dinastía Joseon.

El sondolje tiene raíces en la leyenda verbal de Sondol, un barquero del reino Goryeo (918-1392) que fue asesinado por el rey Gojong, ya que el rey sospechó que Sondol había remado en el bote del rey hacia donde no existían rutas marítimas cuando el rey Gojong estaba yendo a la isla de Ganghwa para buscar refugio debido a la inviasión de la dinastía Yuan. Sin embargo, tras su llegada a la isla, el rey se arrepintió de matar a Sondol y realizó un ritual para el barquero después de haber creado una tumba para él. El estrecho donde se llevó a cabo su muerte se llama aún sondolmok que significa el “Estrecho de Sondol”, además, a los vientos fuertes que soplan cada año durante la celebración del sondolje el 20 de octubre se les llama sondolbaram que significa “viento de Sondol”, de la misma manera, el frío que acompaña a los vientos se llama sondolchuwi, este término también significa “frío de Sondol”.

En la comunidad loca, esta leyenda se considera como una historia basada en un hecho real y se cree que Sondol era una figura real, por lo tanto el sondolje se celebra como un evento importante de la ciudad de Gimpo. Y el ritual está formado por un rito confuciano y la danza llamada barachum que se efectúa para apaciguar al espíritu de Sondol.
내용주사 손돌공을 진혼하는 손돌제는 유교식 제차에 의해 진행되는 「손돌공진혼제」와 진혼무(鎭魂舞) [바라춤](/topic/바라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제차와 분정 : 손돌공진혼제는 일반적인 제차인 [참신](/topic/참신)례(參神禮)-[분향](/topic/분향)례(焚香禮)-강신례(降神禮)-[초헌](/topic/초헌)례(初獻禮)-[아헌](/topic/아헌)례(亞獻禮)-[종헌](/topic/종헌)례(終獻禮)-유식례(侑食禮)-진다례(進茶禮)-사신례(辭神禮)-[음복](/topic/음복)례(飮福禮) 순서로 진행된다. 이는 기제(忌祭)라는 측면에서 구성된 순서로 보인다.

손돌제의 의례는 지역의 정치와 유교적 관계망에서 분정(分定)되어 진행된다. 의례를 집행하기에 앞서 [제관](/topic/제관)을 미리 분정하여 소임을 맡은 사람들의 이름을 쓴 분정판을 걸었는데 여기에 적힌 인사들의 직책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삼헌관은 지역사회의 관리이다. 초헌관은 김포시장, 아헌관은 시의회 의장, 종헌관은 김포경찰서장이 각각 맡는다. 이는 손돌제를 중심으로 지역 정치의 핵심이 포진하고 이들의 역할을 통해 손돌제가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집례(執禮)는 통진향교 유도회장, 알자(謁者)는 김포문화원장, 대축(大祝)은 대포서원 원장이 각각 분담하여 진행한다. 이것은 손돌제가 유교적 가치를 기반으로 전승되는 의례임을 보여준다.

의례를 위한 상차림은 손돌제를 치제하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묘제](/topic/묘제)[진설도](/topic/진설도)(墓祭陳設圖)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제물](/topic/제물)은 손돌묘의 앞에 있는 상석 위에 진설한다. 집사자(執事者) 위주로 본 진설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때의 동(東)은 집사자의 오른쪽, 서(西)는 집사자의 왼쪽을 각각 가리킨다.

·생동숙서(生東熟西) : 날것은 동쪽, 익힌 것은 서쪽에 각각 진설한다.
·서두동미(西頭東尾) : 물고기의 경우 머리는 서쪽, 꼬리는 동쪽을 각각 향하게 한다.
·육서어동(肉西魚東) : 고기는 서쪽, 물고기는 동쪽에 각각 진설한다.
·좌포우혜(左脯右醯) : 육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에 각각 진설한다.
·홍동백서(紅東白西) : 과일의 경우 붉은 것은 동쪽, 흰 것은 서쪽에 각각 진설한다.

이런 원칙에 따라 다음의 진설도처럼 진설했으나 이 가운데 메(飯), 갱(羹), 면(麵)은 생략했다.

![[마을](/topic/마을)신앙 손돌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3805_t_.jpg)

[축문](/topic/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 十月 朔 二十日
金浦市長 金東植 敢昭告于
舟師 孫乭公之墓
氣序流易 時維孟冬 諱辰復臨
仰慕忠節 禮不敢忘 百世推仰
敢以淸酌庶羞 祗薦歲事 尙饗

2. 진혼무 바라춤 : 손돌제의 유교식 의례를 마치면 손돌을 진혼하는 바라춤을 춘다. 바라춤은 대곶중학교 남녀 학생 40여 명이 참가하여 바라를 들고 손돌공의 묘 앞에서 추는 춤이다. 이 바라춤으로 1983년 제2회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최우수상을 받고, 1984년 제25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출연하였다.
역사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파천(播遷)할 때 비롯되었다는 손돌의 죽음과 관련시켜 손돌이 원사(寃死)한 음력 시월 스무날을 주기(週忌)로 삼아 김포시의 문화 관계자와 지역 유지들이 매년 의례를 거행한다. 손돌의 묘는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3-1[번지](/topic/번지)에 있고, 주위는 사적으로 지정된 덕포진이다.

지역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손돌공진혼제는 조선 말엽에 중단된 손돌제사를 복원·계승한 것이다. 1970년 1월 21일 신안2리 [마을](/topic/마을)총회에서 묘소 복원을 결의하고, 그해 4월 연인원 120명을 동원하여 나흘 동안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전 김포문화원장 김기송이 주축이 되어 김포의 여러 기관과 사회단체 및 학생 등 4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첫 의례를봉행하였다.

1975년에 진혼제 행사 주권을 김포문화재보호노인회로 이관하고, 1977년에는 군비 70여 만 원을 지원받아 비석과 상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손돌공의 전설을 새겼다. 1984년 김포의 3대 ‘얼’로 손돌공의 충성심을 선정하여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1988년부터 매년 음력 시월 스무날에 손돌공진혼제를 김포문화원이 주관하여 봉행한다. 전 김포문화원장 김기송에 따르면 손돌제사는 조선 말엽까지 지속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없어졌으며, 손돌묘 앞에 [사당](/topic/사당)으로 추정되는 두 채의 건물이 있었다.
역사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파천(播遷)할 때 비롯되었다는 손돌의 죽음과 관련시켜 손돌이 원사(寃死)한 음력 시월 스무날을 주기(週忌)로 삼아 김포시의 문화 관계자와 지역 유지들이 매년 의례를 거행한다. 손돌의 묘는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3-1[번지](/topic/번지)에 있고, 주위는 사적으로 지정된 덕포진이다.

지역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손돌공진혼제는 조선 말엽에 중단된 손돌제사를 복원·계승한 것이다. 1970년 1월 21일 신안2리 [마을](/topic/마을)총회에서 묘소 복원을 결의하고, 그해 4월 연인원 120명을 동원하여 나흘 동안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전 김포문화원장 김기송이 주축이 되어 김포의 여러 기관과 사회단체 및 학생 등 4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첫 의례를봉행하였다.

1975년에 진혼제 행사 주권을 김포문화재보호노인회로 이관하고, 1977년에는 군비 70여 만 원을 지원받아 비석과 상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손돌공의 전설을 새겼다. 1984년 김포의 3대 ‘얼’로 손돌공의 충성심을 선정하여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1988년부터 매년 음력 시월 스무날에 손돌공진혼제를 김포문화원이 주관하여 봉행한다. 전 김포문화원장 김기송에 따르면 손돌제사는 조선 말엽까지 지속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없어졌으며, 손돌묘 앞에 [사당](/topic/사당)으로 추정되는 두 채의 건물이 있었다.
Sondolje is a ritual held in Gimpo, Gyeonggi Province, on the twentieth day of the tenth lunar month, for appeasing the soul of Sondol, a ferryman who met an unjust death. .

The full title of this ritual is Sondolgongjinhonje (Soul-Appeasing Ritual for Sir Sondol), a local tradition that was revived in contemporary times after discontinuing in late Joseon.

Sondolje has its roots in the oral legend of Sondol, a ferryman from Goryeo (918-1392) who was killed by King Gojong for suspicion of rowing the king’s boat off the water route on his way to Ganghwa Island to seek refuge. Upon his safe arrival, however, the king regretted the killing and held a ritual for the ferryman after dedicating his tomb. The sea channel where his death took place is still called [[Sondolmok](/topic/SondolStrait)](/topic/Sondolmok) (Sondol Strait) and the cold harsh winds that blow each year around the time of the ritual is called sondolbaram, and the accompanying cold spell sondolchuwi.

In the local community, this legend is considered history and Sondol as a real-life figure, the ritual in his honor observed as a major event. Ritual procedures comprise a Confucian rite and the soul-appeasing dance barachum.
阴历十月二十日京畿道金浦市为告慰冤死的艄公孙乭的灵魂而举行的祭祀。

“孙乭祭”又名“孙乭公镇魂祭”。据当地人称,“孙乭公镇魂祭”是在朝鲜王朝末期曾中断的孙乭祭祀基础上复原并发展起来的。

孙乭祭来源于口耳相传的孙乭传说。高丽王朝时代,元朝入侵,高丽王(高宗)逃向江华岛,途中其怀疑艄公孙乭把船划向死胡同,于是将其杀死。但之后却平安到达,因此王很后悔,为孙乭建墓,并为其祭祀。该航道的颈口被认为是孙乭的断头处,至今还被称为“孙乭颈口”。人们认为每年阴历十月二十日左右的风是因孙乭的冤魂所致,故称该狂风为“孙乭风”,另外当天袭来的严寒被称为“孙乭严寒”。该说法流传至今。

金浦人相信孙乭是真实存在过的人物,孙乭传说也是历史事实。所以为了纪念他,金浦人积极置办孙乭祭。孙乭祭由两部分构成:一是儒教式孙乭公镇魂祭,一是镇魂舞——铙钹舞。
Sondolje se refiere a un ritual que se lleva a cabo en la ciudad de Gimpo de la provincia de Gyeonggi-do el 20 de octubre del calendario lunar para sosegar al espíritu de Sondol, un barquero que murió de manera injusta.

El nombre completo del ritual es Sondolgongjinhonje que significa “Ritual para apaciguar al espíritu del señor Sondol”, una tradición que ha sido revivida en tiemposcontemporáneos después de haberse descontinuado a finales de la dinastía Joseon.

El sondolje tiene raíces en la leyenda verbal de Sondol, un barquero del reino Goryeo (918-1392) que fue asesinado por el rey Gojong, ya que el rey sospechó que Sondol había remado en el bote del rey hacia donde no existían rutas marítimas cuando el rey Gojong estaba yendo a la isla de Ganghwa para buscar refugio debido a la inviasión de la dinastía Yuan. Sin embargo, tras su llegada a la isla, el rey se arrepintió de matar a Sondol y realizó un ritual para el barquero después de haber creado una tumba para él. El estrecho donde se llevó a cabo su muerte se llama aún sondolmok que significa el “Estrecho de Sondol”, además, a los vientos fuertes que soplan cada año durante la celebración del sondolje el 20 de octubre se les llama sondolbaram que significa “viento de Sondol”, de la misma manera, el frío que acompaña a los vientos se llama sondolchuwi, este término también significa “frío de Sondol”.

En la comunidad loca, esta leyenda se considera como una historia basada en un hecho real y se cree que Sondol era una figura real, por lo tanto el sondolje se celebra como un evento importante de la ciudad de Gimpo. Y el ritual está formado por un rito confuciano y la danza llamada barachum que se efectúa para apaciguar al espíritu de Sondol.
의의손돌제는 손돌전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전설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손돌추위라는 [기후](/topic/기후) 유래담이 결부되어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고, 손돌묘라는 증거물이 엄연하게 있으며, 손돌을 역사인물로 간주하고 그의 충절을 기리려는 집단의식이 분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손돌제가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의례인지 아닌지는 이미 큰 논란거리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손돌제가 지역민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강화하는 데 큰 구실을 하고 있고, 지역축제의 하나로 공인되어 재전통화(Retraditionalization)되고 민속화(Folklorization)되었다. 이는 손돌제가 축적한 민속적 의의이자 현대적전승 근거가 된다.
의의손돌제는 손돌전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전설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손돌추위라는 [기후](/topic/기후) 유래담이 결부되어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고, 손돌묘라는 증거물이 엄연하게 있으며, 손돌을 역사인물로 간주하고 그의 충절을 기리려는 집단의식이 분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손돌제가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의례인지 아닌지는 이미 큰 논란거리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손돌제가 지역민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강화하는 데 큰 구실을 하고 있고, 지역축제의 하나로 공인되어 재전통화(Retraditionalization)되고 민속화(Folklorization)되었다. 이는 손돌제가 축적한 민속적 의의이자 현대적전승 근거가 된다.
유래손돌제의 유래는 구전(口傳)하는 손돌전설에 근거를 둔다. 비록 손돌공 의례의 주도층이 주요 근거로 내세운 유래담이긴 하지만 손돌을 둘러싼 전승집단의 의지를 알 수 있는직접적인 자료는 ‘제770주기 주사 손돌공진혼제’ 안내 팸플릿이다. 이 내용을 전재(全載)하면 손돌전설은 다음과 같다.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1232년(고종 19)에 강화로 파천하게 되었다. 이때 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강화도로 입도할 때 손돌의 배를 타고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거쳐 강화도로 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 지금의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가 흐르는 목에 닿게 되었다.

이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곳이다. 파천하는 고종은 심기가 어지럽고 마음이 초조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배를 젓는 손돌이를 의심하여 수차에 걸쳐 뱃길을 바로잡도록 주의를 주었으나 그때마다 손돌은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하오나 좀 더 나아가면 길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유념하여 주옵소서 라고 진언했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이것은 자신을 해하려는 손돌의 흉계라고 의심하여 신하들에게 손돌을 참수하라고 명하기에 이르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topic/가지)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를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뢰고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일행은 험한 뱃길을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왕은 늦게야 그의 충의를 깨달아 손돌을 잘 장사 지내고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topic/사당)까지 세워 주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은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베었다 하여 손돌목 이라 하고, 매년 음력 시월 20일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여 이때의 거센바람을 손돌바람 이라고 하며, 또 이날의 추위를 손돌추위 라고 하여 전해온다.

이 전설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내용으로 김포문화원이 간행한『 김포의 설화』에 16편이 실려 있다. 책에 수록된 전설의 제목으로 ‘손돌추위’를 앞세운 것이 8편이다. 이는이야기 전승집단의 관심이 손돌의 죽음에 따라 발생한 ‘손돌추위’라는 자연현상에 있다는 뜻이 된다.

[각편](/topic/각편)(各篇)마다 내용의 편차를 보이는데 대체적인 주지(主旨)는 “몽진(蒙塵)을 하던 왕이 뱃사공의 행동을 의심하여 죽이고 나중에 후회하여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이 사건 이후 손돌의 원혼 때문에 이날이 몹시 추워졌다”는 내용이다. ‘[손돌목](/topic/손돌목)’이라는 지명 유래담과 ‘손돌추위’라는 [기후](/topic/기후) 유래담을 담고 있다.

손돌제사와 관련된 손돌추위 전설은 두 개의 의미 단락을 갖는다. 하나는 왕이 피란 갈 때 억울하게 죽었다는 손돌전설의 정형성을 보이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시월 스무날이 되어도 날씨가 춥지 않은 것을 손돌의 혼이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특히 두 번째 내용은 이야기를 전승하는 화자(話者)의 개인적 설명으로 돌릴 수 없다. 각편 「선돌목과 추위」에서는 ‘손돌의 혼이 뱀으로 변하여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갔다’는 언급과 함께 ‘그 후부터 손돌목의 울림현상도 없어졌고 추위도 없어졌다’는 설명이 부가되어 있다. 이는 물론 손돌전설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부언이지만 손돌전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의미 있는 설명이라 할 수 있다.

각편 16편의 편차는 ‘① 시기 ② 등장인물과 배경 ③ 권력자의 이동 이유’에서 주로 나타난다.

첫째, 사건의 시기를 ‘고려’로 설정한 설화보다 막연한 시기를 뜻하는 ‘옛날’로 나타나는 설화가 반이나 되고, 임진왜란을 포함한 조선시대로 설정한 설화가 네 편이다.반면에 고려시대로 설정한 설화는 두 편뿐이다. 이 점은 ‘고려 고종 대를 반영하고 있는 손돌고사’가 이야기 구조상 불안하다는 뜻이다. 설화의 형성과 배경 사이에 어긋남이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고려 고종은 개경을 떠나 손돌목을 통과하지 않았다.

둘째, 등장인물은 사건의 시기만큼 큰 편차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건의 시기와 맞물려 일정한 관련을 맺는다. 가해자가 모티브의 속성상 ‘임금’인 것은 크게 어긋나지 않고, 피해자인 손돌이 ‘손돌’ 또는 ‘선돌’로 나타나는 것 역시 발음상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등장인물의 편차는 크지 않다. 하지만 뱃사공의 이름이 ‘손돌’이고 ‘선돌’이 틀리다는 단정은 어렵다.

이야기의 배경지인 손돌목은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인 염하(鹽河)에 있다. 염하는 바다라기보다 강이라고 할 정도로 좁으며, 물길이 험하여 지방의 세곡을 실어 나르던 세곡선이 가장 힘든 뱃길로 여기던 곳이다. 손돌목은 바로 이 염하의 한가운데에 있는 곳으로, 곳곳에 암초와 돌섬이 있어 물이 굽이쳐 흐르는 수로이다. 이런 지리적 여건에서‘선돌이 있는 목’이라는 뜻의 ‘선돌목’이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뱃사람’이라는 뜻으로 ‘선돌(船乭)’이라는이름이 부회되었고, 마침내 ‘손돌’로 굳어졌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돌(乭)’은 ‘돌쇠’라는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흔히 다른 말 뒤에 붙이는 사내아이의 비칭(卑稱)이며, ‘손돌’은 ‘성(손)+명(돌)’으로 분석되어 ‘돌’이라는 홑이름으로 쓰인다는 것은 다소 불합리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뱃사공 이름이 ‘손돌’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손돌전설을 향유하고 있는 현지인의 발음에 등장하는‘선돌’이라는 것 사이의 편차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름 측면에서도 손돌전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보는 데 어려움이 있다.

셋째, 임금의 몽진 경로도 여러 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손돌전설에 나타나는 고려 고종은 개경에서 강화로 몽진한다. 그러나 각편에 따라서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우선 마포나루를 출발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강화도에서 나와 인천 쪽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또 전설에 따라 애초의 목적지는 강화도가 아니라 강화도의 서편에 있는 석모도라고도한다. 이것은 본디‘강화’가 지닌 이야기의 결함을 해결하려는 뜻이 반영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건으로 보면 몽진 행렬이 손돌목을 통과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럴겨를도 없다. 그런데도 강화도의 손돌목을 지나고 있고, 이때 손돌이 죽음을 맞는다. 이런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해 각편의 [변이](/topic/변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은 손돌전설의 내용으로 볼 때 손돌전설을 준거로 한 손돌제는 전설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김포지역민이 손돌을 실재 인물로 믿고 손돌전설을 실재 사건으로 믿는 한편 이를 기리기 위해 손돌제를 의욕적으로 거행한다. 손돌을 실제화하고 역사적 사건으로 여기는 것이다. 실제로 김포지역민들은 손돌의 의행(義行)을 드높이고 기리는손돌제를 매년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있다.
유래손돌제의 유래는 구전(口傳)하는 손돌전설에 근거를 둔다. 비록 손돌공 의례의 주도층이 주요 근거로 내세운 유래담이긴 하지만 손돌을 둘러싼 전승집단의 의지를 알 수 있는직접적인 자료는 ‘제770주기 주사 손돌공진혼제’ 안내 팸플릿이다. 이 내용을 전재(全載)하면 손돌전설은 다음과 같다.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1232년(고종 19)에 강화로 파천하게 되었다. 이때 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강화도로 입도할 때 손돌의 배를 타고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거쳐 강화도로 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 지금의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가 흐르는 목에 닿게 되었다.

이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곳이다. 파천하는 고종은 심기가 어지럽고 마음이 초조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배를 젓는 손돌이를 의심하여 수차에 걸쳐 뱃길을 바로잡도록 주의를 주었으나 그때마다 손돌은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하오나 좀 더 나아가면 길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유념하여 주옵소서 라고 진언했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이것은 자신을 해하려는 손돌의 흉계라고 의심하여 신하들에게 손돌을 참수하라고 명하기에 이르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topic/가지)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를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뢰고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일행은 험한 뱃길을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왕은 늦게야 그의 충의를 깨달아 손돌을 잘 장사 지내고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topic/사당)까지 세워 주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은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베었다 하여 손돌목 이라 하고, 매년 음력 시월 20일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여 이때의 거센바람을 손돌바람 이라고 하며, 또 이날의 추위를 손돌추위 라고 하여 전해온다.

이 전설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내용으로 김포문화원이 간행한『 김포의 설화』에 16편이 실려 있다. 책에 수록된 전설의 제목으로 ‘손돌추위’를 앞세운 것이 8편이다. 이는이야기 전승집단의 관심이 손돌의 죽음에 따라 발생한 ‘손돌추위’라는 자연현상에 있다는 뜻이 된다.

[각편](/topic/각편)(各篇)마다 내용의 편차를 보이는데 대체적인 주지(主旨)는 “몽진(蒙塵)을 하던 왕이 뱃사공의 행동을 의심하여 죽이고 나중에 후회하여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이 사건 이후 손돌의 원혼 때문에 이날이 몹시 추워졌다”는 내용이다. ‘[손돌목](/topic/손돌목)’이라는 지명 유래담과 ‘손돌추위’라는 [기후](/topic/기후) 유래담을 담고 있다.

손돌제사와 관련된 손돌추위 전설은 두 개의 의미 단락을 갖는다. 하나는 왕이 피란 갈 때 억울하게 죽었다는 손돌전설의 정형성을 보이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시월 스무날이 되어도 날씨가 춥지 않은 것을 손돌의 혼이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특히 두 번째 내용은 이야기를 전승하는 화자(話者)의 개인적 설명으로 돌릴 수 없다. 각편 「선돌목과 추위」에서는 ‘손돌의 혼이 뱀으로 변하여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갔다’는 언급과 함께 ‘그 후부터 손돌목의 울림현상도 없어졌고 추위도 없어졌다’는 설명이 부가되어 있다. 이는 물론 손돌전설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부언이지만 손돌전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의미 있는 설명이라 할 수 있다.

각편 16편의 편차는 ‘① 시기 ② 등장인물과 배경 ③ 권력자의 이동 이유’에서 주로 나타난다.

첫째, 사건의 시기를 ‘고려’로 설정한 설화보다 막연한 시기를 뜻하는 ‘옛날’로 나타나는 설화가 반이나 되고, 임진왜란을 포함한 조선시대로 설정한 설화가 네 편이다.반면에 고려시대로 설정한 설화는 두 편뿐이다. 이 점은 ‘고려 고종 대를 반영하고 있는 손돌고사’가 이야기 구조상 불안하다는 뜻이다. 설화의 형성과 배경 사이에 어긋남이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고려 고종은 개경을 떠나 손돌목을 통과하지 않았다.

둘째, 등장인물은 사건의 시기만큼 큰 편차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건의 시기와 맞물려 일정한 관련을 맺는다. 가해자가 모티브의 속성상 ‘임금’인 것은 크게 어긋나지 않고, 피해자인 손돌이 ‘손돌’ 또는 ‘선돌’로 나타나는 것 역시 발음상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등장인물의 편차는 크지 않다. 하지만 뱃사공의 이름이 ‘손돌’이고 ‘선돌’이 틀리다는 단정은 어렵다.

이야기의 배경지인 손돌목은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인 염하(鹽河)에 있다. 염하는 바다라기보다 강이라고 할 정도로 좁으며, 물길이 험하여 지방의 세곡을 실어 나르던 세곡선이 가장 힘든 뱃길로 여기던 곳이다. 손돌목은 바로 이 염하의 한가운데에 있는 곳으로, 곳곳에 암초와 돌섬이 있어 물이 굽이쳐 흐르는 수로이다. 이런 지리적 여건에서‘선돌이 있는 목’이라는 뜻의 ‘선돌목’이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뱃사람’이라는 뜻으로 ‘선돌(船乭)’이라는이름이 부회되었고, 마침내 ‘손돌’로 굳어졌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돌(乭)’은 ‘돌쇠’라는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흔히 다른 말 뒤에 붙이는 사내아이의 비칭(卑稱)이며, ‘손돌’은 ‘성(손)+명(돌)’으로 분석되어 ‘돌’이라는 홑이름으로 쓰인다는 것은 다소 불합리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뱃사공 이름이 ‘손돌’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손돌전설을 향유하고 있는 현지인의 발음에 등장하는‘선돌’이라는 것 사이의 편차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름 측면에서도 손돌전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보는 데 어려움이 있다.

셋째, 임금의 몽진 경로도 여러 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손돌전설에 나타나는 고려 고종은 개경에서 강화로 몽진한다. 그러나 각편에 따라서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우선 마포나루를 출발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강화도에서 나와 인천 쪽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또 전설에 따라 애초의 목적지는 강화도가 아니라 강화도의 서편에 있는 석모도라고도한다. 이것은 본디‘강화’가 지닌 이야기의 결함을 해결하려는 뜻이 반영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건으로 보면 몽진 행렬이 손돌목을 통과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럴겨를도 없다. 그런데도 강화도의 손돌목을 지나고 있고, 이때 손돌이 죽음을 맞는다. 이런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해 각편의 [변이](/topic/변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은 손돌전설의 내용으로 볼 때 손돌전설을 준거로 한 손돌제는 전설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김포지역민이 손돌을 실재 인물로 믿고 손돌전설을 실재 사건으로 믿는 한편 이를 기리기 위해 손돌제를 의욕적으로 거행한다. 손돌을 실제화하고 역사적 사건으로 여기는 것이다. 실제로 김포지역민들은 손돌의 의행(義行)을 드높이고 기리는손돌제를 매년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남해안별신굿하효길1998
청주대교육 석사학위논문남해안별신굿과 동해안별신굿에 나타난 춤의 형태적 의미 비교이보영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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