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성황제
읍치(邑治) 또는 지역, [마을](/topic/마을) 공동체 단위로 성황신에게 행하는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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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치(邑治) 또는 지역, [마을](/topic/마을) 공동체 단위로 성황신에게 행하는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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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섭
정의읍치(邑治) 또는 지역, [마을](/topic/마을) 공동체 단위로 성황신에게 행하는 제의.
정의읍치(邑治) 또는 지역, [마을](/topic/마을) 공동체 단위로 성황신에게 행하는 제의.
Seonghwngje es un ritual comunitario que se realiza para venerar a la deidad del pueblo, Seonghwangsin.

El “swonghwangje” se llama también “seonangje”, que es un ritual originado desde “el culto chino al dios de la ciudad, Cheng Huang” que se introdujo al reino Gorye de la dinastía Song con el primer registro acerca del santuario de Seonghwang en el año 996, el décimo quinto año del reinado Seongjong.

En la época de la dinastía Joseon (1392-1910), el seonghwangje se observaba en dos formas: una es el ritual organizado por el gobierno y oficiado por funcionarios gubernamentales y otra es el ritual de la versión civil, organizado por chamanes o habitantes locales.

A finales de la dinastía Joseon, el seonghwangje de forma chamánica empezó a realizarse mucho más frecuente, con el cual se supone que la versión del ritual organizado por el gobierno no había penetrado en las comunidades locales. Además, como los funcionarios locales llamados como “yangni” aplicaban los procedimientos del ritual confuciano a la versión civil del seonghwangje, las dos formas del ritual se fusionaron progresivamente en un ritual comunitario que se practicaba en todo el territorio.

Además, el santuario de seonghwangsa donde el retrato de Seonghwangsin estaba enclaustrado empezó a construirse en cada aldea. En el proceso, los rituales aldeanos oficiados por chamanes, incluyendo el byeolsingut que se celebraba en el 5 de mayo del calendario lunar, surgieron como una costumbre principal en el culto a los dioses del pueblo.
Seonghwangje is a communal ritual held to worship the village deity Seonghwangsin.

The ritual originated from the Chinese worship of Cheng Huang, or City God (the name literally meaning “wall and moat”), which was introduced to Goryeo from the Song dynasty, the earliest record dating back to 996, the fifteen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In Joseon (1392-1910), seonghwangje was observed in two forms: the state-run ritual officiated by government officials and the civilian version organized by shamans or the local community.

In late Joseon, the shamanic form of seonghwangje became more prevalent, evidence that the staterun version of the ritual had not penetrated to the local communities. And as local clerks (hyangni) applied Confucian ritual procedures to the civilian seonghwangje, the state and civilian forms gradually merged into a communal folk worship ritual practiced around the country, the shrine seonghwangsa, with the painting of Seonghwangsin, built in each village. In the process, village rituals officiated by shamans, including byeolsingut, emerged as the main custom in the worship of village gods.
邑治或地方,村庄集体举行的奉祀城隍神的祭仪。

“城隍祭”又称“[守郎](/topic/守郎)神祭”(音)。“城隍信仰”源自中国。中国宋朝初期,城隍信仰流传至高丽,成为祭祀地方守护神的一种信仰。996 年(成宗15)城隍堂始有记载。

在高丽王朝时代,郡,县的行政中心有供奉城隍神的祠庙,城隍祭由地方的乡吏主持,具有国家祭祀体系。

到了朝鲜王朝时代,城隍祭发展成两种形式:一种是国家祭祀,即由官吏主持的国行城隍祭;另一种是民间城隍祭,由乡吏,巫师或百姓执事。

在朝鲜王朝后期,以巫术的形式举行的城隍祭再次兴盛。由此可见,国行城隍祭没有完全普及到地方。地方乡吏的参与使得儒教祭仪对民间城隍祭产生影响,邑治城隍祭逐渐演变成村庄城隍祭,城隍祭成为植根于民间的一种民俗。

村庄兴建城隍祠,供奉城隍神的画像,该风俗盛行民间。此期间,巫师主持的[端午](/topic/端午)节大型[巫祭](/topic/巫祭)也成为了一种村庄信仰。
내용성황신에 대한 제사가 중국에서 전래되었지만, 송대의 성황신앙은 전국적인 제사체계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군·현의 행정치소에 성황신을 모시는 사묘를 두고 지방의 향리들이 성황제를 주관하는 방식으로 국가적 제사 체계를 갖추었다. 고려시대 성황제는 지방세력의 정치적 권세를 표방하는 수단이었으나 조선시대 성황제는 국가[사전](/topic/사전)에 편재시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위계질서에 따르도록 격하시켰다. 조선시대에 국가가 성황제의 주제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이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민간성황제가성행하고 있었다. 이는 뿌리 깊은 지방세력과 문벌지족이 성황제를 재지(在地)기반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성황제의 경우 국행성황제와 민간성황제는조선 후기까지 동시에 진행되었다.
참고문헌고려시대의 성황신앙과 지방통치 (갑동, 한국사연구 74, 한국사연구회, 1991)
읍치성황제 주제집단의 변화와 제의 전통의 창출 (이기태, 민속원, 1997)
한국공동체신앙의 역사적연구 (박호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성황당과 성황제 (한국종교사연구회, 민속원, 1998)
한국과 중국의 성황신앙 비교 (서영대, 중국사연구 12, 중국사학회, 2001)
전주 성황신앙과 [견훤](/topic/견훤)정권 (송화섭, 후백제의 견훤정권과 전주, 사단법인 전북전통문화연구소, 2003)
내용성황신에 대한 제사가 중국에서 전래되었지만, 송대의 성황신앙은 전국적인 제사체계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군·현의 행정치소에 성황신을 모시는 사묘를 두고 지방의 향리들이 성황제를 주관하는 방식으로 국가적 제사 체계를 갖추었다. 고려시대 성황제는 지방세력의 정치적 권세를 표방하는 수단이었으나 조선시대 성황제는 국가[사전](/topic/사전)에 편재시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위계질서에 따르도록 격하시켰다. 조선시대에 국가가 성황제의 주제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이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민간성황제가성행하고 있었다. 이는 뿌리 깊은 지방세력과 문벌지족이 성황제를 재지(在地)기반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성황제의 경우 국행성황제와 민간성황제는조선 후기까지 동시에 진행되었다.
참고문헌고려시대의 성황신앙과 지방통치 (갑동, 한국사연구 74, 한국사연구회, 1991)
읍치성황제 주제집단의 변화와 제의 전통의 창출 (이기태, 민속원, 1997)
한국공동체신앙의 역사적연구 (박호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성황당과 성황제 (한국종교사연구회, 민속원, 1998)
한국과 중국의 성황신앙 비교 (서영대, 중국사연구 12, 중국사학회, 2001)
전주 성황신앙과 [견훤](/topic/견훤)정권 (송화섭, 후백제의 견훤정권과 전주, 사단법인 전북전통문화연구소, 2003)
역사통일신라시대 지방호족의 성장은 정치력, 군사력, 경제력을 갖춘 지방 토호 세력을 출현시켰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이 지방 토호세력들이 전국을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성주(城主), [장군](/topic/장군)(將軍)으로 불리는 지방 권력집단은 나라를 세워 후삼국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고려 건국 후에도 지[방제](/topic/방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중앙에서 지방 토호들을 통제할 수없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 사회는 지방분권적이고 지방자치적 성향이 강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적인 지방 세력으로 성장한 토호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보호해줄 종교적 제도로서 성황신앙을 선호하면서 받아들였다. 지방 토호세력들은 성황제의 주제권(主祭權)을 장악하여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성황제를 활용하였다.

고려시대 지방 호족들은 정례적으로 성황제를 개최하여 자신들의 가문과 문벌지족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또한 무격집단을 끌어들여 기풍제, 기우제 성격의 성황제를 개최하여 이를 지역 주민을 결속시키고 은택을 베푸는 방식으로 전개하였다. 고려시대 성황사는 처음에 진(津), 성(城)의 군사적 요새에 세워지는 방식이었으나, 12세기 중반이후 주, 군, 현의 행정치소에 성황사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군현(郡縣) 단위의 성황제는 지방관리들이 주도하였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주성황제신문(全州城隍祭神文)」에서 지방관리가 자신의 공봉(公俸) 일부를 떼어 성황제의 주찬(酒饌)을 갖춰 성황에게 제사지내는 게 관례였다고 기술해놓았다.

고려시대 성황제는 지역수호신을 향사하는 방식으로 향읍(鄕邑)의 [진산](/topic/진산)(鎭山)에 세워진 성황사에서 읍치제의(邑治祭儀)를 거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읍치제의로서 성황제는지방 관리들이 주도하고 무격(巫覡)들을 동원해 기풍제, 기우제 형식을 빌려 단오절 성황제로 발전시켜 갔다. 순창과 강릉 단오제가 대표적인 단오절 성황제이다. 단오절(음력 5월1일~5월5일)은 향촌 사회에서 [모내기](/topic/모내기)를 마친 직후의 [농한기](/topic/농한기)여서 [농민](/topic/농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았고, 절기상 기우제 및 성황제를 지내기 좋은 시점이었다. 이러한점에서 성황제는 풍농기원의 성격이 강한 읍치제의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지방향리들은 성황제를 통하여 재지(在地) 기반을 강화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지방 세력의 정치적 역량이 곧 성황신의 위상과 비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3세기에 고려왕실이 수시로 성황신의 영험과 음조에 따라 지방의 성황신에게 존호(尊號)와 작위(爵位)를 수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 건국 직후 1393년(태조 2)에 전국의 주요 성황신에게 차등을 두어 봉작함으로써 고려시대 성황제와 성황신앙은 민간신앙의 대상을 넘어 지방 권력의 권세를 가늠하는 잣대이기도 했다. 고려 말에 국내 성황과 명산대천을 국가 [사전](/topic/사전)(祀典)에 포함시키고 성황제를 국행제의로 개최하여 지방 토호세력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억제하지 못하고 사전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따라 유교제례가 도입되면서 성황제도 유교예제의 적용을 받게 된다. 태조 원년의 사전 개편안에는 “여러 주(州)·군(郡)의 성황으로서 국제(國祭)로 청허(請許)된 것에는 모주(某州)·모군(某郡)의 성황지신(城隍之神)이라고 칭하고 위판(位版)을 설치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봄·가을마다 제사를 지내되 제물(祭物)·제기(祭器)·작헌례(爵獻禮)는 한결같이 조정(朝廷)의 예제(禮制)에 따르라”고 명시하고 있다. 명(明)의 『홍무예제(洪武禮制)』에맞춰 국가제사를 재정비하라는 왕명에 따라, 고려 말에 전국 주요 성황신에게 주어진 봉작이 유명무실해지고, 위판 외에 신상도 철거하도록 조치하였으며, 성황제는 봄과 가을에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왕명을 받은 지방수령이 성황제를 주도하여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조선 초기 신흥사대부들은 사전을 정비하고 사전에 들지 않는 제사는 음사(陰祀)로 규정하고 금단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조선 초에 시행한 국가 사전의 정비는 왕조 교체에 따라 지방 통치제도를 재정립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태종 대에 의례상정소가 설치되고 사전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때 성황은 종묘, 사직에 이어 중사(中祀)로 편제시켜 왕권의 위계질서에 따르게 하였다. 태종 11년에는 『홍무예제』에 따라 성황신을 풍운뇌우신(風雲雷雨神) 및 산천신(山川神)과 함께 치제하도록 하였고, 세종 대의『 오례의(五禮儀)』와 성종 대의『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제정하면서 예제의 전거를 마련하였다.『 세종실록』 권128「 오례」길례조에는 서례(序禮)와 의식(儀式)으로 구분하여 모든 제사는 등차(等次)에 따라 제사 일시, 제단 규모, 신위, [축판](/topic/축판), 제물의 종류와 수량이 정해져 있다. 또 의식은 제의 진행에 따른 절차와 제기, 제물의 진설, 행례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행례 절차에 따르면 성황제는 풍운뇌우 및 산천 제사와 합제하는 방식으로 거행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조선 중기 이후 삼단일묘제(三壇一廟制)의 시행에 따라 성황제는 여제(癘祭), 사직제(社稷祭)와 함께 지방관리들이 치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성황제는 국가제사로서 관리들이 지내는 국행성황제(國行城隍祭)와 향리·무당·지역주민 주도의 민간성황제(民間城隍祭)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국행성황제는 지방 수령이 유교제례로 거행하는 것일 뿐 민간에 수용되어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국제관사(國祭官祀)는 국가 사전에 편재된 제사를 지방관리들이춘추제(春秋祭)로 거행하는 방식이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지방향리, 무당, 지역주민들이 주도하는 성황제가 지속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중앙정부의 음사 규제가 느슨해지는 기회를 틈타 무속식 성황제가 다시 흥성하는 것을 보면, 유교예제에 따른 국행성황제가 지방에까지 전면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방 향리들의 역할로유교제례가 민간성황제의 영향을 미치고 읍치성황제가 촌락성황제로 정착하면서 성황제의 민속화 과정은 널리 확산되어 갔다. 자연[마을](/topic/마을)에 성황사를 짓고 성황신의 화상(畫像)을 [봉안](/topic/봉안)하는 풍속은 민간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당들이 주관하는 단오절 [별신굿](/topic/별신굿)도 마을신앙으로 정착하게 된다. 정부에서도 민간성황제가 기풍제, 기우제 등 마을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사인 만큼 성황제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기는 어려웠다. 순창 성황제의 경우, 향리들은 성황제를 주도하고 무당들은 성황사를 관리하면서 성황제를 주재하는 관행이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경우 조선시대까지 전승되던 읍치성황제도 조선왕조의 종식과 함께 그 주도권이 관(官)에서 민(民)으로 이관되어 민간주도의 성황제가 되는 사례도 확인된다.
역사통일신라시대 지방호족의 성장은 정치력, 군사력, 경제력을 갖춘 지방 토호 세력을 출현시켰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이 지방 토호세력들이 전국을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성주(城主), [장군](/topic/장군)(將軍)으로 불리는 지방 권력집단은 나라를 세워 후삼국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고려 건국 후에도 지[방제](/topic/방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중앙에서 지방 토호들을 통제할 수없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 사회는 지방분권적이고 지방자치적 성향이 강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적인 지방 세력으로 성장한 토호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보호해줄 종교적 제도로서 성황신앙을 선호하면서 받아들였다. 지방 토호세력들은 성황제의 주제권(主祭權)을 장악하여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성황제를 활용하였다.

고려시대 지방 호족들은 정례적으로 성황제를 개최하여 자신들의 가문과 문벌지족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또한 무격집단을 끌어들여 기풍제, 기우제 성격의 성황제를 개최하여 이를 지역 주민을 결속시키고 은택을 베푸는 방식으로 전개하였다. 고려시대 성황사는 처음에 진(津), 성(城)의 군사적 요새에 세워지는 방식이었으나, 12세기 중반이후 주, 군, 현의 행정치소에 성황사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군현(郡縣) 단위의 성황제는 지방관리들이 주도하였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주성황제신문(全州城隍祭神文)」에서 지방관리가 자신의 공봉(公俸) 일부를 떼어 성황제의 주찬(酒饌)을 갖춰 성황에게 제사지내는 게 관례였다고 기술해놓았다.

고려시대 성황제는 지역수호신을 향사하는 방식으로 향읍(鄕邑)의 [진산](/topic/진산)(鎭山)에 세워진 성황사에서 읍치제의(邑治祭儀)를 거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읍치제의로서 성황제는지방 관리들이 주도하고 무격(巫覡)들을 동원해 기풍제, 기우제 형식을 빌려 단오절 성황제로 발전시켜 갔다. 순창과 강릉 단오제가 대표적인 단오절 성황제이다. 단오절(음력 5월1일~5월5일)은 향촌 사회에서 [모내기](/topic/모내기)를 마친 직후의 [농한기](/topic/농한기)여서 [농민](/topic/농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았고, 절기상 기우제 및 성황제를 지내기 좋은 시점이었다. 이러한점에서 성황제는 풍농기원의 성격이 강한 읍치제의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지방향리들은 성황제를 통하여 재지(在地) 기반을 강화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지방 세력의 정치적 역량이 곧 성황신의 위상과 비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3세기에 고려왕실이 수시로 성황신의 영험과 음조에 따라 지방의 성황신에게 존호(尊號)와 작위(爵位)를 수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 건국 직후 1393년(태조 2)에 전국의 주요 성황신에게 차등을 두어 봉작함으로써 고려시대 성황제와 성황신앙은 민간신앙의 대상을 넘어 지방 권력의 권세를 가늠하는 잣대이기도 했다. 고려 말에 국내 성황과 명산대천을 국가 [사전](/topic/사전)(祀典)에 포함시키고 성황제를 국행제의로 개최하여 지방 토호세력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억제하지 못하고 사전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따라 유교제례가 도입되면서 성황제도 유교예제의 적용을 받게 된다. 태조 원년의 사전 개편안에는 “여러 주(州)·군(郡)의 성황으로서 국제(國祭)로 청허(請許)된 것에는 모주(某州)·모군(某郡)의 성황지신(城隍之神)이라고 칭하고 위판(位版)을 설치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봄·가을마다 제사를 지내되 제물(祭物)·제기(祭器)·작헌례(爵獻禮)는 한결같이 조정(朝廷)의 예제(禮制)에 따르라”고 명시하고 있다. 명(明)의 『홍무예제(洪武禮制)』에맞춰 국가제사를 재정비하라는 왕명에 따라, 고려 말에 전국 주요 성황신에게 주어진 봉작이 유명무실해지고, 위판 외에 신상도 철거하도록 조치하였으며, 성황제는 봄과 가을에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왕명을 받은 지방수령이 성황제를 주도하여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조선 초기 신흥사대부들은 사전을 정비하고 사전에 들지 않는 제사는 음사(陰祀)로 규정하고 금단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조선 초에 시행한 국가 사전의 정비는 왕조 교체에 따라 지방 통치제도를 재정립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태종 대에 의례상정소가 설치되고 사전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때 성황은 종묘, 사직에 이어 중사(中祀)로 편제시켜 왕권의 위계질서에 따르게 하였다. 태종 11년에는 『홍무예제』에 따라 성황신을 풍운뇌우신(風雲雷雨神) 및 산천신(山川神)과 함께 치제하도록 하였고, 세종 대의『 오례의(五禮儀)』와 성종 대의『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제정하면서 예제의 전거를 마련하였다.『 세종실록』 권128「 오례」길례조에는 서례(序禮)와 의식(儀式)으로 구분하여 모든 제사는 등차(等次)에 따라 제사 일시, 제단 규모, 신위, [축판](/topic/축판), 제물의 종류와 수량이 정해져 있다. 또 의식은 제의 진행에 따른 절차와 제기, 제물의 진설, 행례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행례 절차에 따르면 성황제는 풍운뇌우 및 산천 제사와 합제하는 방식으로 거행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조선 중기 이후 삼단일묘제(三壇一廟制)의 시행에 따라 성황제는 여제(癘祭), 사직제(社稷祭)와 함께 지방관리들이 치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성황제는 국가제사로서 관리들이 지내는 국행성황제(國行城隍祭)와 향리·무당·지역주민 주도의 민간성황제(民間城隍祭)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국행성황제는 지방 수령이 유교제례로 거행하는 것일 뿐 민간에 수용되어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국제관사(國祭官祀)는 국가 사전에 편재된 제사를 지방관리들이춘추제(春秋祭)로 거행하는 방식이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지방향리, 무당, 지역주민들이 주도하는 성황제가 지속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중앙정부의 음사 규제가 느슨해지는 기회를 틈타 무속식 성황제가 다시 흥성하는 것을 보면, 유교예제에 따른 국행성황제가 지방에까지 전면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방 향리들의 역할로유교제례가 민간성황제의 영향을 미치고 읍치성황제가 촌락성황제로 정착하면서 성황제의 민속화 과정은 널리 확산되어 갔다. 자연[마을](/topic/마을)에 성황사를 짓고 성황신의 화상(畫像)을 [봉안](/topic/봉안)하는 풍속은 민간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당들이 주관하는 단오절 [별신굿](/topic/별신굿)도 마을신앙으로 정착하게 된다. 정부에서도 민간성황제가 기풍제, 기우제 등 마을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사인 만큼 성황제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기는 어려웠다. 순창 성황제의 경우, 향리들은 성황제를 주도하고 무당들은 성황사를 관리하면서 성황제를 주재하는 관행이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경우 조선시대까지 전승되던 읍치성황제도 조선왕조의 종식과 함께 그 주도권이 관(官)에서 민(民)으로 이관되어 민간주도의 성황제가 되는 사례도 확인된다.
Seonghwngje es un ritual comunitario que se realiza para venerar a la deidad del pueblo, Seonghwangsin.

El “swonghwangje” se llama también “seonangje”, que es un ritual originado desde “el culto chino al dios de la ciudad, Cheng Huang” que se introdujo al reino Gorye de la dinastía Song con el primer registro acerca del santuario de Seonghwang en el año 996, el décimo quinto año del reinado Seongjong.

En la época de la dinastía Joseon (1392-1910), el seonghwangje se observaba en dos formas: una es el ritual organizado por el gobierno y oficiado por funcionarios gubernamentales y otra es el ritual de la versión civil, organizado por chamanes o habitantes locales.

A finales de la dinastía Joseon, el seonghwangje de forma chamánica empezó a realizarse mucho más frecuente, con el cual se supone que la versión del ritual organizado por el gobierno no había penetrado en las comunidades locales. Además, como los funcionarios locales llamados como “yangni” aplicaban los procedimientos del ritual confuciano a la versión civil del seonghwangje, las dos formas del ritual se fusionaron progresivamente en un ritual comunitario que se practicaba en todo el territorio.

Además, el santuario de seonghwangsa donde el retrato de Seonghwangsin estaba enclaustrado empezó a construirse en cada aldea. En el proceso, los rituales aldeanos oficiados por chamanes, incluyendo el byeolsingut que se celebraba en el 5 de mayo del calendario lunar, surgieron como una costumbre principal en el culto a los dioses del pueblo.
Seonghwangje is a communal ritual held to worship the village deity Seonghwangsin.

The ritual originated from the Chinese worship of Cheng Huang, or City God (the name literally meaning “wall and moat”), which was introduced to Goryeo from the Song dynasty, the earliest record dating back to 996, the fifteen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In Joseon (1392-1910), seonghwangje was observed in two forms: the state-run ritual officiated by government officials and the civilian version organized by shamans or the local community.

In late Joseon, the shamanic form of seonghwangje became more prevalent, evidence that the staterun version of the ritual had not penetrated to the local communities. And as local clerks (hyangni) applied Confucian ritual procedures to the civilian seonghwangje, the state and civilian forms gradually merged into a communal folk worship ritual practiced around the country, the shrine seonghwangsa, with the painting of Seonghwangsin, built in each village. In the process, village rituals officiated by shamans, including byeolsingut, emerged as the main custom in the worship of village gods.
邑治或地方,村庄集体举行的奉祀城隍神的祭仪。

“城隍祭”又称“[守郎](/topic/守郎)神祭”(音)。“城隍信仰”源自中国。中国宋朝初期,城隍信仰流传至高丽,成为祭祀地方守护神的一种信仰。996 年(成宗15)城隍堂始有记载。

在高丽王朝时代,郡,县的行政中心有供奉城隍神的祠庙,城隍祭由地方的乡吏主持,具有国家祭祀体系。

到了朝鲜王朝时代,城隍祭发展成两种形式:一种是国家祭祀,即由官吏主持的国行城隍祭;另一种是民间城隍祭,由乡吏,巫师或百姓执事。

在朝鲜王朝后期,以巫术的形式举行的城隍祭再次兴盛。由此可见,国行城隍祭没有完全普及到地方。地方乡吏的参与使得儒教祭仪对民间城隍祭产生影响,邑治城隍祭逐渐演变成村庄城隍祭,城隍祭成为植根于民间的一种民俗。

村庄兴建城隍祠,供奉城隍神的画像,该风俗盛行民间。此期间,巫师主持的[端午](/topic/端午)节大型[巫祭](/topic/巫祭)也成为了一种村庄信仰。
유래성황제는 서낭제라고도 불리면서 그 유래에 대한 주장도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중국에서 전래했다고 여기는 성황신앙에 대하여 살피기로 한다.

6세기경 위진남북조시대에양쯔강 유역의 지방 세력들이 성황신앙을 발달시켰으며, 당·송대에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중국 송대 초기의 성황신앙이 지역수호신에 제사하는 신앙 형태로 고려에 전해졌으며, 996년(성종 15)에 성황당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유래성황제는 서낭제라고도 불리면서 그 유래에 대한 주장도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중국에서 전래했다고 여기는 성황신앙에 대하여 살피기로 한다.

6세기경 위진남북조시대에양쯔강 유역의 지방 세력들이 성황신앙을 발달시켰으며, 당·송대에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중국 송대 초기의 성황신앙이 지역수호신에 제사하는 신앙 형태로 고려에 전해졌으며, 996년(성종 15)에 성황당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충청도 앉은굿 연구-충남 부여 지방을 중심으로오문선1994
도서출판 民俗苑한국의 굿하효길 외2002
국립문화재연구소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충청도2005
한국무속학회충청지역의 종이무구임승범2006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무속의 물질문화 연구최진아2009
고성 문암리 성황제
19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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