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남해당지

한국무속신앙사전
고려 현종 때부터 남해의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외삼문과 신당이 복원되어 1986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9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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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 때부터 남해의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외삼문과 신당이 복원되어 1986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9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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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갑
정의고려 현종 때부터 남해의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외삼문과 신당이 복원되어 1986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정의고려 현종 때부터 남해의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외삼문과 신당이 복원되어 1986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역사남해당지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1005[번지](/topic/번지)에 위치한다. 남해당지에 대해서는 『고려사』․『동국여지지』․『여지도서』에 남해신사(南海神祠), 『세종실록지리지』에 남해신[사당](/topic/사당)(南海神祠堂), 「광여도(廣輿圖)」․「해동지도(海東地圖)」․「전라남도 군현지도」․「변사인방안지도」에 남해당(南海堂), 『대동지지』에 남해신단(南海神壇)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악해독조(嶽海瀆條)」에 삼신(山神)은 중앙에 [삼각산](/topic/삼각산)(三角山), 서쪽에 송악산(松嶽山), 남쪽에 지리산(智異山), 북쪽에 비백산(鼻白山)이 있다. 또 해신(海神)은 강원도 양양의 동해묘,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 전라도 나주의 남해당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3대 해신제 제사지였음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에 남해신당이 1028년(현종 19)에 비로소 [사전](/topic/사전)(祀典)에 올랐으며, 남해신사 제사가 중사(中祀)로서 춘추로 향(香)과 [축문](/topic/축문)(祝文)을 내려 국가적인 차원에서 올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장례원(掌禮院)에 내린 소서(沼書)를 통해서도 남해신사 해신제는 오악(五嶽)에 지낸 국제(國祭)와 같은 수준의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남해당의 해신제가 정3품관 이상의 관리와 주현 수령이 맡고 축문은 국왕이 직접 관여하였으며 [음복](/topic/음복)(飮福)과 수작(受昨)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보더라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매우 중요한 국가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해신제를 지내던 축문, 과정, 제기 등의 남아 있는 자료는 없다.
역사남해당지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1005[번지](/topic/번지)에 위치한다. 남해당지에 대해서는 『고려사』․『동국여지지』․『여지도서』에 남해신사(南海神祠), 『세종실록지리지』에 남해신[사당](/topic/사당)(南海神祠堂), 「광여도(廣輿圖)」․「해동지도(海東地圖)」․「전라남도 군현지도」․「변사인방안지도」에 남해당(南海堂), 『대동지지』에 남해신단(南海神壇)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악해독조(嶽海瀆條)」에 삼신(山神)은 중앙에 [삼각산](/topic/삼각산)(三角山), 서쪽에 송악산(松嶽山), 남쪽에 지리산(智異山), 북쪽에 비백산(鼻白山)이 있다. 또 해신(海神)은 강원도 양양의 동해묘,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 전라도 나주의 남해당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3대 해신제 제사지였음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에 남해신당이 1028년(현종 19)에 비로소 [사전](/topic/사전)(祀典)에 올랐으며, 남해신사 제사가 중사(中祀)로서 춘추로 향(香)과 [축문](/topic/축문)(祝文)을 내려 국가적인 차원에서 올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장례원(掌禮院)에 내린 소서(沼書)를 통해서도 남해신사 해신제는 오악(五嶽)에 지낸 국제(國祭)와 같은 수준의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 『[국조오례의](/topic/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남해당의 해신제가 정3품관 이상의 관리와 주현 수령이 맡고 축문은 국왕이 직접 관여하였으며 [음복](/topic/음복)(飮福)과 수작(受昨)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보더라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매우 중요한 국가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해신제를 지내던 축문, 과정, 제기 등의 남아 있는 자료는 없다.
의의남해당지는 1997년에 목[포대](/topic/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구릉사면이 2단으로 조성되었고 상단은 제사지로 사용되었다. 제사지는 주변보다 높게 조성하였으며 2열의 석축열로 [담장](/topic/담장)시설을 축조하여 주변과 차별성을 두었다. 출토품으로는 자기류와 [기와](/topic/기와)류 동전을 비롯하여 토제품, 철제품 등이 수습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규모가 확인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유구가 확인된 해신제사터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향토문화유적조사-영암군 시종면 (사단법인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5)
영암 남해신사지 (목[포대](/topic/포대)학교박물관,영암군,, 2000)
의의남해당지는 1997년에 목[포대](/topic/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구릉사면이 2단으로 조성되었고 상단은 제사지로 사용되었다. 제사지는 주변보다 높게 조성하였으며 2열의 석축열로 [담장](/topic/담장)시설을 축조하여 주변과 차별성을 두었다. 출토품으로는 자기류와 [기와](/topic/기와)류 동전을 비롯하여 토제품, 철제품 등이 수습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규모가 확인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유구가 확인된 해신제사터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향토문화유적조사-영암군 시종면 (사단법인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5)
영암 남해신사지 (목[포대](/topic/포대)학교박물관,영암군,, 2000)
유래남해신사 제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된 역사서는 없지만 현재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1010년(현종 원년)에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불만을 품은 거란의 성종이 군사 40만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1011년(현종 2) 정해일(丁亥日)에 현종이 나주로 피란하여 남해포에서 자게 되었다. 그날 밤 현종의 꿈에 나타난 백발의 수신(水神)이 빨리 영산강을 건너 무안 몽탄으로 피신하라는 암시를 주었다. 현종은 즉시 잠에서 깨어 꿈에서 이른대로 군대를 이동함으로써 거란군으로부터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현종은 환궁하여 이곳에 자신을 도와준 꿈속의 백발 수신을 위해 당을 짓게 하고 인근 6개 고을(영암, 나주, 해남, 강진, 영광, 함평)의 수령들로 하여금 일 년에 한 차례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이때 [제관](/topic/제관)들로 선정된 수령들은 제사를 지낼 때 정성이 부족하면 급사를 당한다는 말에 모두가 두려워하여 유고가 있을 것에 대비해 두 명의 예비자까지 두어가며 제사를 모셨다. 또한 제관인 수령들이 두려움 때문에 늦게 도착하여 제사를 지낼 때면 모든 [마을](/topic/마을) 주민이 횃불을 들고 나와 수령이 오는 길을 환하게 밝혔다고 한다. 특히 제사를 지내던 수령들이 두려워한 묘당(廟堂)은 가장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용이 사방으로 새겨져 있어 가까이 접근하기를 싫어했다. 특히 [서까래](/topic/서까래)나 용마루는 모두 용의 뿔과 비늘 [단청](/topic/단청)으로 되어 있어 그 형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접근하는 것조차 더욱 두려워하였다.

남해신은 용신(龍神)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사를 지낼 때면 영산강 반대쪽인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의 주룡량(駐龍梁)에서 용이 나타나 남해포로 들어오는 현상을 볼 수 있다고 구전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밀물 때 영산강을 통해 바닷물이 올라오고 상류에서 흙탕물이 내려와 만나는 형태가 용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는 영산강 줄기의 전체적인 지형과 어우러져 나타나는 시각적인 모습이다. 남해신사는 현종 이래로 관(官)과 민(民)에 의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 오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어 봄과 가을에 제를 지내고 있다.
유래남해신사 제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된 역사서는 없지만 현재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1010년(현종 원년)에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불만을 품은 거란의 성종이 군사 40만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1011년(현종 2) 정해일(丁亥日)에 현종이 나주로 피란하여 남해포에서 자게 되었다. 그날 밤 현종의 꿈에 나타난 백발의 수신(水神)이 빨리 영산강을 건너 무안 몽탄으로 피신하라는 암시를 주었다. 현종은 즉시 잠에서 깨어 꿈에서 이른대로 군대를 이동함으로써 거란군으로부터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현종은 환궁하여 이곳에 자신을 도와준 꿈속의 백발 수신을 위해 당을 짓게 하고 인근 6개 고을(영암, 나주, 해남, 강진, 영광, 함평)의 수령들로 하여금 일 년에 한 차례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이때 [제관](/topic/제관)들로 선정된 수령들은 제사를 지낼 때 정성이 부족하면 급사를 당한다는 말에 모두가 두려워하여 유고가 있을 것에 대비해 두 명의 예비자까지 두어가며 제사를 모셨다. 또한 제관인 수령들이 두려움 때문에 늦게 도착하여 제사를 지낼 때면 모든 [마을](/topic/마을) 주민이 횃불을 들고 나와 수령이 오는 길을 환하게 밝혔다고 한다. 특히 제사를 지내던 수령들이 두려워한 묘당(廟堂)은 가장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용이 사방으로 새겨져 있어 가까이 접근하기를 싫어했다. 특히 [서까래](/topic/서까래)나 용마루는 모두 용의 뿔과 비늘 [단청](/topic/단청)으로 되어 있어 그 형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접근하는 것조차 더욱 두려워하였다.

남해신은 용신(龍神)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사를 지낼 때면 영산강 반대쪽인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의 주룡량(駐龍梁)에서 용이 나타나 남해포로 들어오는 현상을 볼 수 있다고 구전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밀물 때 영산강을 통해 바닷물이 올라오고 상류에서 흙탕물이 내려와 만나는 형태가 용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는 영산강 줄기의 전체적인 지형과 어우러져 나타나는 시각적인 모습이다. 남해신사는 현종 이래로 관(官)과 민(民)에 의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 오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어 봄과 가을에 제를 지내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호남 넋건지기굿 [민속소식]양종승2007
전라북도전북 무형문화재 호남 넋건지기굿 지정조사보고서양종승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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