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여귀](/topic/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여귀’라고 한다. 여제는 이러한 여귀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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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귀](/topic/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여귀’라고 한다. 여제는 이러한 여귀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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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수
정의[여귀](/topic/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여귀’라고 한다. 여제는 이러한 여귀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정의[여귀](/topic/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여귀’라고 한다. 여제는 이러한 여귀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참조[여귀](/topic/여귀)
참고문헌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조중환 면담 (1982년 4월 25일)
四庫全書, 新增東國輿地勝覽, 禮記, 朝鮮王朝實錄, 洪武禮祭, 진도의 여제고 (나경수, 전남의 민속연구, 민속원, 1994)
함경도의 민속 (전경욱,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9)
참조[여귀](/topic/여귀)
참고문헌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조중환 면담 (1982년 4월 25일)
四庫全書, 新增東國輿地勝覽, 禮記, 朝鮮王朝實錄, 洪武禮祭, 진도의 여제고 (나경수, 전남의 민속연구, 민속원, 1994)
함경도의 민속 (전경욱,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9)
내용여제는 중국에서 수입하여 관에서 주관한 제사였다. 이는 동양의 생사관(生死觀) 또는 귀령관(鬼靈觀)에 근거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억울하게 죽은 혼령은 여귀가 되어 구천을 맴돌면서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고 믿었다. 민간에서 무속을 통해 [천도굿](/topic/천도굿)을 행하는 사례와 마찬[가지](/topic/가지)로정부에서도 역시 이러한 [원귀](/topic/원귀)를 위해 관에서 주도하는 제사를 지내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로 보면 신라시대에 전쟁터에서 비명횡사한 사람을 위해 가을에 [팔관회](/topic/팔관회)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러한 행사가 불교의 수륙재(水陸齋)로 대체된다. 수륙재는 본래 중국에서 520년(양 무제 보통 원년)에 처음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971년(고려 광종 22)에 수원 갈양사에서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처음 시행하여 고려ㆍ조선조를 거치면서 계속되어 왔다. 조선시대 초에 많은 선비가 여제를 모시기 때문에 수륙재는 모시지 말도록 상소를 올렸다. 수륙재는 단종 대에 이르러 드디어 왕명으로 금해졌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자생적인 팔관회가 시행되다가 중국으로부터 수륙재와 여제를 수입하여 국가를 위해 죽은 영령이나 제사를 모셔 줄 후손이 없는 불쌍한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줌으로써 나라와 고을에 끼칠 해악을 막고자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 매년 여제를 모셨지만 특히 나라에 큰 일이 벌어졌을 때 여제가 조정에서 논의되고, 그 거행이 촉구되던 사례가 많다. 황해도와 경기 일원에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문종은 스스로 여제 [축문](/topic/축문)을 지어 내려 제사하게 하였다. 중종은 전사자 및 압사자에 대해 치제하였으며, 전염병이 돌 때마다 수령에게 특명을 내려 여제에 만전을기하도록 하였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죽은 사람을 위해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고, 광해군ㆍ인조ㆍ현종 때에도 역시 전염병이 크게 돌아 방액을 위해 여제를 지냈다. 순조 12년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따로 여제를 지냈다.
내용여제는 중국에서 수입하여 관에서 주관한 제사였다. 이는 동양의 생사관(生死觀) 또는 귀령관(鬼靈觀)에 근거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거나억울하게 죽은 혼령은 여귀가 되어 구천을 맴돌면서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고 믿었다. 민간에서 무속을 통해 [천도굿](/topic/천도굿)을 행하는 사례와 마찬[가지](/topic/가지)로정부에서도 역시 이러한 [원귀](/topic/원귀)를 위해 관에서 주도하는 제사를 지내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로 보면 신라시대에 전쟁터에서 비명횡사한 사람을 위해 가을에 [팔관회](/topic/팔관회)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러한 행사가 불교의 수륙재(水陸齋)로 대체된다. 수륙재는 본래 중국에서 520년(양 무제 보통 원년)에 처음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971년(고려 광종 22)에 수원 갈양사에서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처음 시행하여 고려ㆍ조선조를 거치면서 계속되어 왔다. 조선시대 초에 많은 선비가 여제를 모시기 때문에 수륙재는 모시지 말도록 상소를 올렸다. 수륙재는 단종 대에 이르러 드디어 왕명으로 금해졌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자생적인 팔관회가 시행되다가 중국으로부터 수륙재와 여제를 수입하여 국가를 위해 죽은 영령이나 제사를 모셔 줄 후손이 없는 불쌍한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줌으로써 나라와 고을에 끼칠 해악을 막고자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 매년 여제를 모셨지만 특히 나라에 큰 일이 벌어졌을 때 여제가 조정에서 논의되고, 그 거행이 촉구되던 사례가 많다. 황해도와 경기 일원에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문종은 스스로 여제 [축문](/topic/축문)을 지어 내려 제사하게 하였다. 중종은 전사자 및 압사자에 대해 치제하였으며, 전염병이 돌 때마다 수령에게 특명을 내려 여제에 만전을기하도록 하였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죽은 사람을 위해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고, 광해군ㆍ인조ㆍ현종 때에도 역시 전염병이 크게 돌아 방액을 위해 여제를 지냈다. 순조 12년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따로 여제를 지냈다.
역사여제의 역사는 기록에 따르면 멀리 중국의 주나라 시대까지 소급된다. 주나라의 제례에 대해 적고 있는 『[예기](/topic/예기)(禮記)』에 따르면 천자는 일곱 [가지](/topic/가지)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다섯 가지 제사를 지내고, 대부는 세가지 제사를 지내는데 이들 제사에 포함하여 여제는 반드시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이후 약간의 형태적인 변화가 보이기도 하지만 역대 왕조를 통해 계속해서 여제를 중시하여 지냈다.

우리나라에서 여제는 조선 태종(太宗, 재위1400~1418) 때 처음으로 기록에 나온다. 태종은 우리나라의 모든 제례가 중국 명나라 태조 때 만들어진『홍무예제(洪武禮祭)』에 의거하면서도 유독 여제를 지내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예조](/topic/예조)(禮曹)에 명을 내려 앞으로 여제에 관련된 제법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초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국가는 물론 각 군ㆍ현 단위의 고을까지 여제단을 만들어 여제를 지내게 되었다.
역사여제의 역사는 기록에 따르면 멀리 중국의 주나라 시대까지 소급된다. 주나라의 제례에 대해 적고 있는 『[예기](/topic/예기)(禮記)』에 따르면 천자는 일곱 [가지](/topic/가지)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다섯 가지 제사를 지내고, 대부는 세가지 제사를 지내는데 이들 제사에 포함하여 여제는 반드시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이후 약간의 형태적인 변화가 보이기도 하지만 역대 왕조를 통해 계속해서 여제를 중시하여 지냈다.

우리나라에서 여제는 조선 태종(太宗, 재위1400~1418) 때 처음으로 기록에 나온다. 태종은 우리나라의 모든 제례가 중국 명나라 태조 때 만들어진『홍무예제(洪武禮祭)』에 의거하면서도 유독 여제를 지내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예조](/topic/예조)(禮曹)에 명을 내려 앞으로 여제에 관련된 제법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초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국가는 물론 각 군ㆍ현 단위의 고을까지 여제단을 만들어 여제를 지내게 되었다.
형태여제는 본래 민간이 아니라 관에서 지내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 『명사(明史)』에 여제를 지내는 형태가 소상하게 나온다. 여기에 근거하여 우리나라에서도 태종 때 만들어진여제를 모시는 제사 방식이『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소개되어 있다. 조선 초에 정해진 여제를 지내는 형태를 몇 [가지](/topic/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사를 지내는 목적은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 줌으로써 한을 풀어 주고, 여귀가 민간에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행하고자 한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단위는 서울과 지방의 각 행정단위로 나누었으며, 현을 최하위 단위로 하였다. 제사 날짜는 봄에는 청명(淸明), 가을에는 7월 15일, 겨울에는 10월 1일이다. 제사 장소는 각 성의 북쪽에 따로 여제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제물은 서울에서는 양 세 [마리](/topic/마리), 돼지 세 마리, 쌀 45말을 쓴다. 지방에서는 서울에 비해 3분의1을 감하고, 현에서는 그 반으로 다시 줄인다. 제물 가운데 양은 노루나 사슴으로 대신 할 수도 있다. [제관](/topic/제관)은 서울이나 개성은 당상관(堂上官)을 파견하였고, 각 지방은 그 수령이 맡았다.
형태여제는 본래 민간이 아니라 관에서 지내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 『명사(明史)』에 여제를 지내는 형태가 소상하게 나온다. 여기에 근거하여 우리나라에서도 태종 때 만들어진여제를 모시는 제사 방식이『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소개되어 있다. 조선 초에 정해진 여제를 지내는 형태를 몇 [가지](/topic/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사를 지내는 목적은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 줌으로써 한을 풀어 주고, 여귀가 민간에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행하고자 한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단위는 서울과 지방의 각 행정단위로 나누었으며, 현을 최하위 단위로 하였다. 제사 날짜는 봄에는 청명(淸明), 가을에는 7월 15일, 겨울에는 10월 1일이다. 제사 장소는 각 성의 북쪽에 따로 여제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제물은 서울에서는 양 세 [마리](/topic/마리), 돼지 세 마리, 쌀 45말을 쓴다. 지방에서는 서울에 비해 3분의1을 감하고, 현에서는 그 반으로 다시 줄인다. 제물 가운데 양은 노루나 사슴으로 대신 할 수도 있다. [제관](/topic/제관)은 서울이나 개성은 당상관(堂上官)을 파견하였고, 각 지방은 그 수령이 맡았다.
지역사례지역사례 조선 후기에 이르면 관에서 지내던 제사가 전기만큼 엄격하게 모셔지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정과 맞물려 관에서 지내던 제사를 민간에서 차용하여 민간신앙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모든 고을에서 있었던 성황단과 여제단 역시 민간에서 맡아 모시는 사례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을 시사한다.

특히 여제와 관련하여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재미있는 형태로 민간신앙에 여제가 수용되는 양상을 보인다. 진도읍 교동리에서는 [거리제](/topic/거리제)가 행해질 때 여제도 이에 부수되는 행사로 치러졌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여제단이라고 불리던 제당은 옛날에 진도읍의 북산인 철마산 아래쪽, 현 향교 옆에 있었다고 한다. 여제단은 [돌담](/topic/돌담)이 둘러 있었다.[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에 3.3㎡ 남짓한 크기였다. 사방으로 벽이 있었고 앞쪽으로 두 쪽 문이 있어서 자물쇠를 잠글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어려서 그곳을 지날 일이 있어도 일부러 길을 피하였으며,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제는 진도읍 교동리에서 주관하였다. 교동리는 서외리, 북상리, 사정리, 송현리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전우라고 부르는 이장 한 사람과 네 명의 반장이 있었다고 한다. 제사는 일 년에 두번 지냈다. 봄에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모셨으며, 가을에는 시월 중 어느 날 모셨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진도읍 교동리의 중심 마을인 사정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거리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 600여 년 된 팽나무가 당산나무이다.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대보름 새벽까지 거리제가 모셔지고 나면 네 개 마을에서 뽑힌 [제관](/topic/제관)들이 제물을 갖추어 여제단에 오른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며, 풍물을 울리면서 마치 토끼몰이를 할 때처럼 “우~우~” 하는 함성과 함께 귀신을 몰고 여제단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포위망을 좁혀 귀신을 몰아 여제단에 이르면 함성과 풍물소리가 절정에 달한다. 제관들은 여제단 앞에 [제상](/topic/제상)을 차리고 제의를 지낸다. 제사가 다 끝나면 누군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떤 사람이 “무[자귀](/topic/자귀)(無子鬼, 곧 자식 없이 죽은 귀신을 이르는 것으로 생각됨)” 하고 소리를 지르면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따라 “무자귀” 하면서 엎드려절하고 이내 여제단의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러면 귀신들이 그 속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진도에 떠도는 모든 귀신을 여제단 안에 가두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고, 특히무자귀라는 말이 뜻하듯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귀신에 대한 기피관념이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월대보름날에 거리제의 일환으로 행해지던 여제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농사철에 즈음하여 해를 끼칠까 하여 귀신을 잡아 가두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현재40~50대의 동민들에게까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시월이 되면 다시 제관들이 모여 여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는 정월대보름 때 잡아 가둔 귀신들을 농사가 다 끝났기 때문에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으라고 풀어 주는 것이라 한다. 마을 사람인 조중환에 따르면 여제단은 ‘귀신을 잡아 가두는 감옥’이다. 또 여제는 농사철에 가두었다가 [농한기](/topic/농한기)에는 풀어 주는 정기적인 행사이다. 진도에서의 여제는 동제에 포함되어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치러진 것이다.

한편 함경도 지방에서도 여제가 동제로 모셔진 사례가 보인다. 전경욱의 조사에 따르면 함남 단천군과 북청군 여러 마을에서 매년 한 차례나 두 차례 마을제사로 여제를 지낸예가 많았다고 한다. 마을마다 각기 다른 형식으로 여제를 지내지만 일반적인 여제에 대한 의식(意識)은 비슷하다. 즉 마을의 안녕과 풍요, 전염병과 재화(災禍)를 막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던 것이다.
지역사례지역사례 조선 후기에 이르면 관에서 지내던 제사가 전기만큼 엄격하게 모셔지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정과 맞물려 관에서 지내던 제사를 민간에서 차용하여 민간신앙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모든 고을에서 있었던 성황단과 여제단 역시 민간에서 맡아 모시는 사례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을 시사한다.

특히 여제와 관련하여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재미있는 형태로 민간신앙에 여제가 수용되는 양상을 보인다. 진도읍 교동리에서는 [거리제](/topic/거리제)가 행해질 때 여제도 이에 부수되는 행사로 치러졌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여제단이라고 불리던 제당은 옛날에 진도읍의 북산인 철마산 아래쪽, 현 향교 옆에 있었다고 한다. 여제단은 [돌담](/topic/돌담)이 둘러 있었다.[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에 3.3㎡ 남짓한 크기였다. 사방으로 벽이 있었고 앞쪽으로 두 쪽 문이 있어서 자물쇠를 잠글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어려서 그곳을 지날 일이 있어도 일부러 길을 피하였으며,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제는 진도읍 교동리에서 주관하였다. 교동리는 서외리, 북상리, 사정리, 송현리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전우라고 부르는 이장 한 사람과 네 명의 반장이 있었다고 한다. 제사는 일 년에 두번 지냈다. 봄에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모셨으며, 가을에는 시월 중 어느 날 모셨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진도읍 교동리의 중심 마을인 사정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거리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 600여 년 된 팽나무가 당산나무이다.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대보름 새벽까지 거리제가 모셔지고 나면 네 개 마을에서 뽑힌 [제관](/topic/제관)들이 제물을 갖추어 여제단에 오른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며, 풍물을 울리면서 마치 토끼몰이를 할 때처럼 “우~우~” 하는 함성과 함께 귀신을 몰고 여제단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포위망을 좁혀 귀신을 몰아 여제단에 이르면 함성과 풍물소리가 절정에 달한다. 제관들은 여제단 앞에 [제상](/topic/제상)을 차리고 제의를 지낸다. 제사가 다 끝나면 누군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떤 사람이 “무[자귀](/topic/자귀)(無子鬼, 곧 자식 없이 죽은 귀신을 이르는 것으로 생각됨)” 하고 소리를 지르면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따라 “무자귀” 하면서 엎드려절하고 이내 여제단의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러면 귀신들이 그 속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진도에 떠도는 모든 귀신을 여제단 안에 가두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고, 특히무자귀라는 말이 뜻하듯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귀신에 대한 기피관념이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월대보름날에 거리제의 일환으로 행해지던 여제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농사철에 즈음하여 해를 끼칠까 하여 귀신을 잡아 가두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현재40~50대의 동민들에게까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시월이 되면 다시 제관들이 모여 여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는 정월대보름 때 잡아 가둔 귀신들을 농사가 다 끝났기 때문에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으라고 풀어 주는 것이라 한다. 마을 사람인 조중환에 따르면 여제단은 ‘귀신을 잡아 가두는 감옥’이다. 또 여제는 농사철에 가두었다가 [농한기](/topic/농한기)에는 풀어 주는 정기적인 행사이다. 진도에서의 여제는 동제에 포함되어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치러진 것이다.

한편 함경도 지방에서도 여제가 동제로 모셔진 사례가 보인다. 전경욱의 조사에 따르면 함남 단천군과 북청군 여러 마을에서 매년 한 차례나 두 차례 마을제사로 여제를 지낸예가 많았다고 한다. 마을마다 각기 다른 형식으로 여제를 지내지만 일반적인 여제에 대한 의식(意識)은 비슷하다. 즉 마을의 안녕과 풍요, 전염병과 재화(災禍)를 막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던 것이다.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동해안 굿의 전승과 변화윤동환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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