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서문안당산

한국무속신앙사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마을](/topic/마을) 수호신. 1970년 5월 2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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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마을](/topic/마을) 수호신. 1970년 5월 2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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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원
정의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마을](/topic/마을) 수호신. 1970년 5월 2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마을](/topic/마을) 수호신. 1970년 5월 2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서문안당산은 부안군청에서 서쪽의 변산 방면으로 약 300m 떨어져 음식점인 당산쉼터 건너편 공터에 자리하고 있다. 서문의 옛 이름인 개풍루(凱風樓)를 나서면 향교가 있는 향교골이 나오고, 여기를 지나면 보안·줄포를 거쳐 흥덕·고창 방면으로 갈 수 있다. 또한 역리를 거쳐 하서·변산·격포진에 이르는 통로이자 서해의 해산물과 어염시초(魚鹽柴草)가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안 지역에서 서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반영하듯 부안 읍성의 세 성문 안 당산 가운데 서문안당산은 신체 수가 가장 많고 복잡한 편이다. 특히 부안성내 모든 당산의 주신은 서문안당산신이었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룻날 밤에 풍물을 치면서 동문과 남문의 당산신을 맞아와 서문안당산에서합동으로 당산제를 모시고 난 뒤 자기 [마을](/topic/마을)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당산제를 지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성 안 마을이 행정적으로 세분화되고 마을에 구장과 이장이 별도로 생기면서 합동당산제가 없어졌다고 한다.

서문안당산을 대상으로 하는 마을의 당산제는 오래전부터 행해졌으나 1978년에 중단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의 공동체의식이 약화되고 당산신에 대한 신앙심도 크게 쇠퇴하면서 서문안당산은 신체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서문안당산제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근래에 오면서 부안읍 내의 중고생들이 합동으로 음력 정월 초하룻날 낮에 제물을 올리고 사흘 동안 제의를 지냈다고 한다.

서문안당산을 대상으로 하는 제의인 서문안당산제는 서외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음력 정월 초하룻날 밤에 지낸다. 서문안당산제와 유사한 형태인 동문안·남문안 당산제의 제일이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이라는 점을 보면 서문안당산제가 가장 먼저 진행되는 셈이다. 다만 서문안당산제는 제의 당일 마을에 초상이나 출산하는 일이 발생하면 제일을 음력 이월로 연기한다. 이때 미리 준비한 제물은 이러한 일이 생긴 집으로 보내고, 음력 이월 제의 때 그 집에 새로 음식을 장만하게 한다.

마을 주민들은 섣달 초순에 마을회의를 통해 제의 전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나서 본격적으로 제의를 진행한다. 마을회의에서는 제의를 주관할 [제관](/topic/제관)을 선출한 제관은 덕망이있고 궂은일이 없는 원로자 가운데에서 한 명을 선정한다. 회의에서 선정된 제관은 제의가 끝날 때까지 부정한 곳에 [가지](/topic/가지) 않으며, 함부로 말하지 않고, 행동을 삼간다. 특히 제관은 비린 것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되며, 냉수로 목욕재계를 하여 부정을 가리기도 한다. 또한 제관은 설날에 세배를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으며, 부부간에 한 방에 들지도 않는다. 정결치 못하면 지골을 만든다고 생각해서이다. 제의 사흘 전에 제관 집의 문에 [금줄](/topic/금줄)을 걸고 [황토](/topic/황토)를 펴서 잡인(雜人)들의 접근을 금한다. 당산제 제수로는 떡과 과일 등이 있다. 제수 비용은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부담한다. 과거에는 특별히 [시주](/topic/시주)한 쌀이나, 각 가정에서 조금씩 걷은 쌀로 제수를 마련하였다.

섣달그믐날 저녁이 되면 제관은 당산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황토를 펴고 주당산인 석간에 금줄을 쳐서 부정을 가린다. 이튿날인 정월 초하룻날 밤이 되면 풍물을 울리면서 제의가 진행된다. 풍물패는 마을에 있는 샘 주위를 밟아 가며 샘굿을 먼저 지낸다. 마을에 있는 모든 [우물](/topic/우물)을 돌면서 굿을 하고, 이 굿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서문안당산제가 진행된다.

서문안당산제는 진설-[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소지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를 올릴 때에는 “군수영감 소지요”,“서장영감 소지요” 하면서 기관장·유지·주민들의 순으로 축원을 드린다. 마을의 공동 소망과 개개인의 집안 소망을 소지축원으로 올려 마을의 액운을 씻고 새해의 밝은 소망을 이루고자 축원하는 것이다. 축원 내용은 ‘올해에도 마을의 모든일을 잘 보살펴 주시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제의는 새벽 3시나 4시가 되면 끝난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면 당제에 올린 흰떡을 먹으면신수에 좋고 무병하다 하여 동민들은 백설기 떡을 나누어 간다. [제상](/topic/제상)은 4상으로 차려 개별 신체에 하나씩 놓는다.

당산제가 끝나면 정월대보름날 당산솟대에 옷 입히기를 한다. 옷을 입힐 때 사용되는 동아줄은 마을 사람들이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목적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것으로, 줄다리기가 끝나면 이 줄을 가져가 당산 신체에 옷을 입히는 것이다. 이 지역의 줄다리기는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당산제가 진행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회관에 모여 당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의가 끝나면 모두 모여 [음복](/topic/음복)을 한다.

서문안당산제는 동문안당산제와 비슷한 시기(1990년대)까지 해마다 마을 주민 중심으로 제의를 지냈다. 하지만 이농현상으로 인해 이 이후부터 격년제로 지내오다 2000년대 초반에 전승이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2010년에 부안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제의를 지내게 되었다.
참고문헌민속종합조사보고서-전라북도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1)
전라북도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부안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원광사, 1984)
전라북도의 민속예술 (전라북도, 1997)
새천년 노을이 엮어내는 땅 (김민성, 고글, 1999)
부안읍 성안 당산고 (김형주, 향토문화연구 1, 원광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 2001)
전북의 역사문물전 3-부안 (국립전주박물관, 삼성인터컴, 2001)
전통문화예술의 정리 전라북도 [마을](/topic/마을)지킴이·정악 (전라북도, 2004)
전라북도 장승신앙의 전승과 그 배경 (박호원, 전북학연구총서 2-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내용서문안당산은 부안군청에서 서쪽의 변산 방면으로 약 300m 떨어져 음식점인 당산쉼터 건너편 공터에 자리하고 있다. 서문의 옛 이름인 개풍루(凱風樓)를 나서면 향교가 있는 향교골이 나오고, 여기를 지나면 보안·줄포를 거쳐 흥덕·고창 방면으로 갈 수 있다. 또한 역리를 거쳐 하서·변산·격포진에 이르는 통로이자 서해의 해산물과 어염시초(魚鹽柴草)가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안 지역에서 서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반영하듯 부안 읍성의 세 성문 안 당산 가운데 서문안당산은 신체 수가 가장 많고 복잡한 편이다. 특히 부안성내 모든 당산의 주신은 서문안당산신이었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룻날 밤에 풍물을 치면서 동문과 남문의 당산신을 맞아와 서문안당산에서합동으로 당산제를 모시고 난 뒤 자기 [마을](/topic/마을)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당산제를 지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성 안 마을이 행정적으로 세분화되고 마을에 구장과 이장이 별도로 생기면서 합동당산제가 없어졌다고 한다.

서문안당산을 대상으로 하는 마을의 당산제는 오래전부터 행해졌으나 1978년에 중단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마을의 공동체의식이 약화되고 당산신에 대한 신앙심도 크게 쇠퇴하면서 서문안당산은 신체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서문안당산제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근래에 오면서 부안읍 내의 중고생들이 합동으로 음력 정월 초하룻날 낮에 제물을 올리고 사흘 동안 제의를 지냈다고 한다.

서문안당산을 대상으로 하는 제의인 서문안당산제는 서외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음력 정월 초하룻날 밤에 지낸다. 서문안당산제와 유사한 형태인 동문안·남문안 당산제의 제일이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이라는 점을 보면 서문안당산제가 가장 먼저 진행되는 셈이다. 다만 서문안당산제는 제의 당일 마을에 초상이나 출산하는 일이 발생하면 제일을 음력 이월로 연기한다. 이때 미리 준비한 제물은 이러한 일이 생긴 집으로 보내고, 음력 이월 제의 때 그 집에 새로 음식을 장만하게 한다.

마을 주민들은 섣달 초순에 마을회의를 통해 제의 전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나서 본격적으로 제의를 진행한다. 마을회의에서는 제의를 주관할 [제관](/topic/제관)을 선출한 제관은 덕망이있고 궂은일이 없는 원로자 가운데에서 한 명을 선정한다. 회의에서 선정된 제관은 제의가 끝날 때까지 부정한 곳에 [가지](/topic/가지) 않으며, 함부로 말하지 않고, 행동을 삼간다. 특히 제관은 비린 것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되며, 냉수로 목욕재계를 하여 부정을 가리기도 한다. 또한 제관은 설날에 세배를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으며, 부부간에 한 방에 들지도 않는다. 정결치 못하면 지골을 만든다고 생각해서이다. 제의 사흘 전에 제관 집의 문에 [금줄](/topic/금줄)을 걸고 [황토](/topic/황토)를 펴서 잡인(雜人)들의 접근을 금한다. 당산제 제수로는 떡과 과일 등이 있다. 제수 비용은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부담한다. 과거에는 특별히 [시주](/topic/시주)한 쌀이나, 각 가정에서 조금씩 걷은 쌀로 제수를 마련하였다.

섣달그믐날 저녁이 되면 제관은 당산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황토를 펴고 주당산인 석간에 금줄을 쳐서 부정을 가린다. 이튿날인 정월 초하룻날 밤이 되면 풍물을 울리면서 제의가 진행된다. 풍물패는 마을에 있는 샘 주위를 밟아 가며 샘굿을 먼저 지낸다. 마을에 있는 모든 [우물](/topic/우물)을 돌면서 굿을 하고, 이 굿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서문안당산제가 진행된다.

서문안당산제는 진설-[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소지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를 올릴 때에는 “군수영감 소지요”,“서장영감 소지요” 하면서 기관장·유지·주민들의 순으로 축원을 드린다. 마을의 공동 소망과 개개인의 집안 소망을 소지축원으로 올려 마을의 액운을 씻고 새해의 밝은 소망을 이루고자 축원하는 것이다. 축원 내용은 ‘올해에도 마을의 모든일을 잘 보살펴 주시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제의는 새벽 3시나 4시가 되면 끝난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면 당제에 올린 흰떡을 먹으면신수에 좋고 무병하다 하여 동민들은 백설기 떡을 나누어 간다. [제상](/topic/제상)은 4상으로 차려 개별 신체에 하나씩 놓는다.

당산제가 끝나면 정월대보름날 당산솟대에 옷 입히기를 한다. 옷을 입힐 때 사용되는 동아줄은 마을 사람들이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목적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것으로, 줄다리기가 끝나면 이 줄을 가져가 당산 신체에 옷을 입히는 것이다. 이 지역의 줄다리기는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당산제가 진행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회관에 모여 당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의가 끝나면 모두 모여 [음복](/topic/음복)을 한다.

서문안당산제는 동문안당산제와 비슷한 시기(1990년대)까지 해마다 마을 주민 중심으로 제의를 지냈다. 하지만 이농현상으로 인해 이 이후부터 격년제로 지내오다 2000년대 초반에 전승이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2010년에 부안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제의를 지내게 되었다.
참고문헌민속종합조사보고서-전라북도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1)
전라북도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부안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원광사, 1984)
전라북도의 민속예술 (전라북도, 1997)
새천년 노을이 엮어내는 땅 (김민성, 고글, 1999)
부안읍 성안 당산고 (김형주, 향토문화연구 1, 원광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 2001)
전북의 역사문물전 3-부안 (국립전주박물관, 삼성인터컴, 2001)
전통문화예술의 정리 전라북도 [마을](/topic/마을)지킴이·정악 (전라북도, 2004)
전라북도 장승신앙의 전승과 그 배경 (박호원, 전북학연구총서 2-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역사서문안당산은 본래 6기의 당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당산 이외에 별도로 2기의 신목(神木)이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진 것이다. 신목은서문에서 각각 서북쪽과 남쪽 150m 지점에 있었다. 남쪽의 신목은 고사되어 흔적을 알 수 없고, 서북쪽의 신목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4기의 당산이 함께 자리하게 된 것은 1980년의 도로확장 공사와 관련이 있다. 원래 서문으로 통하는 길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할머니 솟대당산이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고, 성문 입구에 있던 한 쌍의 석장승 역시 서로 마주보며 문지[기장](/topic/기장)군으로 서 있다가 이 공사로 인해 현재 자리에 4기 모두를 나란히 옮겨 세우고 그 옆에 [담장](/topic/담장)과 울타리를 설치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이들 당산이 세워진 시기와 연유, 그리고 모두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없다. 다만 솟대당산에 새겨진 ‘강희이십팔년(康熙二十八年)’이라는 글자를 보면 할아버지 솟대당산은 1689년(숙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서문안당산은 동문안당산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성 안 [마을](/topic/마을)의 안과태평을 기원하고 풍농과 번성을 빌기 위한대상 신으로 받들어져 왔다. 또 다른 유래가 있다. 부안 읍성의 형세가 행주형이어서 허한 곳에 짐대를 세워야 배가 뒤집히지 않고 잘 운항되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무사하고 잘살게 된다고 믿는 [풍수](/topic/풍수)설과 관련이 있다. 옛날에 새가 부락을 지켜주기 위해 날아와 앉았다는 내용으로, 이 때문에 일부 주민들은 그 새를 위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부안 읍성을 중심으로 모두 세 곳에 서문안당산과 유사한 형태의 당산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안의 대표적인 산의 명칭이 ‘성황산’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들 당산은 마을의 당산으로서의 성격 이전에는 성 안의 주민들이 함께 지내던 성황제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역사서문안당산은 본래 6기의 당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당산 이외에 별도로 2기의 신목(神木)이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진 것이다. 신목은서문에서 각각 서북쪽과 남쪽 150m 지점에 있었다. 남쪽의 신목은 고사되어 흔적을 알 수 없고, 서북쪽의 신목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4기의 당산이 함께 자리하게 된 것은 1980년의 도로확장 공사와 관련이 있다. 원래 서문으로 통하는 길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할머니 솟대당산이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고, 성문 입구에 있던 한 쌍의 석장승 역시 서로 마주보며 문지[기장](/topic/기장)군으로 서 있다가 이 공사로 인해 현재 자리에 4기 모두를 나란히 옮겨 세우고 그 옆에 [담장](/topic/담장)과 울타리를 설치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이들 당산이 세워진 시기와 연유, 그리고 모두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없다. 다만 솟대당산에 새겨진 ‘강희이십팔년(康熙二十八年)’이라는 글자를 보면 할아버지 솟대당산은 1689년(숙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서문안당산은 동문안당산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성 안 [마을](/topic/마을)의 안과태평을 기원하고 풍농과 번성을 빌기 위한대상 신으로 받들어져 왔다. 또 다른 유래가 있다. 부안 읍성의 형세가 행주형이어서 허한 곳에 짐대를 세워야 배가 뒤집히지 않고 잘 운항되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무사하고 잘살게 된다고 믿는 [풍수](/topic/풍수)설과 관련이 있다. 옛날에 새가 부락을 지켜주기 위해 날아와 앉았다는 내용으로, 이 때문에 일부 주민들은 그 새를 위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부안 읍성을 중심으로 모두 세 곳에 서문안당산과 유사한 형태의 당산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안의 대표적인 산의 명칭이 ‘성황산’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들 당산은 마을의 당산으로서의 성격 이전에는 성 안의 주민들이 함께 지내던 성황제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형태서문안당산은 모두 4기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다. 왼쪽부터 2기의 솟대와 석장승 한 쌍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솟대와 석장승은 각각 남녀(부부)로 구분된다. 이들 당산은솟대와 석장승의 구분 없이 남녀에 따라 ‘당산할아버지(하나씨)’·‘당산할머니’로 불린다.

서문안당산의 4기 신체(神體) 가운데 [마을](/topic/마을)의 주신(主神)은 할아버지 솟대당산이다. 할아버지 솟대당산은 높이 378㎝, 둘레 65㎝ 정도 크기이다. 일명 ‘당산솟대(솟대)’, ‘철륭’으로 불린다. 솟대당산의 상단에는 오리 한 마리가 올려 있으며, 중앙에는 세로로 ‘강희이십팔년 기사이월 ○○○ [화주](/topic/화주) ○○○ 선대부인 건립 석수 김성년(康熙二十八年 己巳二月 ○○○ 化主 ○○○ 善大夫人 建立 石手 金成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하부의 기대석에는 아홉 개의 ‘알받이 구멍’이 파여 있다.

할아버지 솟대당산(주당산) 옆에는 부인인 할머니 솟대당산(당산솟대·솟대)이 있다. 할머니 솟대당산은 할아버지 솟대당산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석간주 형태이지만 상부의 3분의 1쯤이 잘려 있다. 솟대당산의 잘려 나간 바로 아래에는 머리를 하늘 쪽으로 향한 오리가 투박하게 음각되어 있다. 할머니 솟대당산은 높이 208㎝, 둘레 140㎝이다.

솟대당산 옆에 세워져 있는 한 쌍의 석장승은 서문안당산에서 하위신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장승의 명칭은 솟대당산처럼 ‘당산할아버지(하나씨)’, ‘당산할머니’로 부르기도 하지만 성별 구분 없이 ‘문지[기장](/topic/기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석장승은 솟대당산과 달리 한 쌍이 각각 당산과 당산부인으로 구분되지 않고 모두 서문안당산의 하위신에 해당된다. 남성의 상징인 할아버지 장승은 [벙거지](/topic/벙거지)를 쓴 모습에 소담한 수염이 턱 밑에까지 내려와 있으며, 둥근 눈망울은 이중으로 튀어나와 있다. 안면의 두 눈썹 사이에는 양각된 백호가 뚜렷하며, 양 볼에는 살이 넉넉하게 표현되어 인자하게 보인다. 귀는 보이지 않으며, 복부에는 ‘[상원](/topic/상원)주[장군](/topic/장군)(上元周將軍)’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있다. 여성의 상징인 할머니 장승은 푸짐하고 넓적한 얼굴에 이마가 약간 훼손된 상태이며, 미간에는 백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눈망울과 코는 거의 마모되고 양쪽의 귀는 없다. 복부에는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편평하게 보인다. 입과 턱 부분만은 뚜렷하며, 입은 ‘한 일(一)’자로 이가 약간 드러나 있다. 장승의 크기를 보면 할아버지 석장승은 높이 220㎝에 둘레 140㎝이며, 할머니 석장승은 높이 210㎝에 둘레 145㎝이다.
형태서문안당산은 모두 4기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다. 왼쪽부터 2기의 솟대와 석장승 한 쌍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솟대와 석장승은 각각 남녀(부부)로 구분된다. 이들 당산은솟대와 석장승의 구분 없이 남녀에 따라 ‘당산할아버지(하나씨)’·‘당산할머니’로 불린다.

서문안당산의 4기 신체(神體) 가운데 [마을](/topic/마을)의 주신(主神)은 할아버지 솟대당산이다. 할아버지 솟대당산은 높이 378㎝, 둘레 65㎝ 정도 크기이다. 일명 ‘당산솟대(솟대)’, ‘철륭’으로 불린다. 솟대당산의 상단에는 오리 한 마리가 올려 있으며, 중앙에는 세로로 ‘강희이십팔년 기사이월 ○○○ [화주](/topic/화주) ○○○ 선대부인 건립 석수 김성년(康熙二十八年 己巳二月 ○○○ 化主 ○○○ 善大夫人 建立 石手 金成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하부의 기대석에는 아홉 개의 ‘알받이 구멍’이 파여 있다.

할아버지 솟대당산(주당산) 옆에는 부인인 할머니 솟대당산(당산솟대·솟대)이 있다. 할머니 솟대당산은 할아버지 솟대당산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석간주 형태이지만 상부의 3분의 1쯤이 잘려 있다. 솟대당산의 잘려 나간 바로 아래에는 머리를 하늘 쪽으로 향한 오리가 투박하게 음각되어 있다. 할머니 솟대당산은 높이 208㎝, 둘레 140㎝이다.

솟대당산 옆에 세워져 있는 한 쌍의 석장승은 서문안당산에서 하위신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장승의 명칭은 솟대당산처럼 ‘당산할아버지(하나씨)’, ‘당산할머니’로 부르기도 하지만 성별 구분 없이 ‘문지[기장](/topic/기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석장승은 솟대당산과 달리 한 쌍이 각각 당산과 당산부인으로 구분되지 않고 모두 서문안당산의 하위신에 해당된다. 남성의 상징인 할아버지 장승은 [벙거지](/topic/벙거지)를 쓴 모습에 소담한 수염이 턱 밑에까지 내려와 있으며, 둥근 눈망울은 이중으로 튀어나와 있다. 안면의 두 눈썹 사이에는 양각된 백호가 뚜렷하며, 양 볼에는 살이 넉넉하게 표현되어 인자하게 보인다. 귀는 보이지 않으며, 복부에는 ‘[상원](/topic/상원)주[장군](/topic/장군)(上元周將軍)’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있다. 여성의 상징인 할머니 장승은 푸짐하고 넓적한 얼굴에 이마가 약간 훼손된 상태이며, 미간에는 백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눈망울과 코는 거의 마모되고 양쪽의 귀는 없다. 복부에는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편평하게 보인다. 입과 턱 부분만은 뚜렷하며, 입은 ‘한 일(一)’자로 이가 약간 드러나 있다. 장승의 크기를 보면 할아버지 석장승은 높이 220㎝에 둘레 140㎝이며, 할머니 석장승은 높이 210㎝에 둘레 14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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