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동문안당산

한국무속신앙사전
부안동문안당산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91[번지](/topic/번지)에 위치한 [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 1970년 5월 2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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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91[번지](/topic/번지)에 위치한 [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 1970년 5월 2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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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원
정의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91[번지](/topic/번지)에 위치한 [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 1970년 5월 2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91[번지](/topic/번지)에 위치한 [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 1970년 5월 2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내용동문안당산이 있는 동문은 성황산 아래 서림공원 입구의 관아로부터 동쪽으로 500m쯤 떨어진 동중리와 선은리 경계지점에 있었다. 문루의 이름은 ‘청원루(淸遠樓)’였다. 이동문을 나서면 망기산 및 장승배리를 지나 고마제 옆 동진 장터로 하여 청운동의 동진원을 지나면 곧바로 동진나루터에 이른다. 동문은 김제·만경·전주 등지로 다니는 부안의 관문이며, 과거에는 벼슬아치·관원·양반은 물론 온갖 상고배들의 주요 통로여서 사실상 부안의 [대문](/topic/대문)(大門)이다.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낮에 동문안당산에 당산제를 해마다 빠짐없이 지내다가 언제부터인가 격년제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제의 당일 마을에 상이 나거나 출산이 있는 경우 음력 이월 초하룻날로 옮겨 행한다. 그렇게 해야만 마을의 신이 노하지 않아 마을의 나쁜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동문안당산제의 제의 비용은 주민들이 모두 부담한다. 예전에는 제를 지내기 위해 정월 초사흗날 무렵부터 집집마다 굿물을 쳐 주어서 제사 비용과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하고 감아 놓을짚을 추렴하였다. 현재는 굿물 을 치지 않고 이장이 가구마다 일정액을 걷으러 다닌다고 한다. 제의에 앞서 정월이 산달인 임신부는 미리 마을 밖의 다른 집으로 옮겨 간다. 제일이 다가오면 부정한 사람이나 여자들이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당산 주위와 마을 어귀에 인줄을 쳐 놓는다. 이때 인줄은 줄다리기를 할 때와 달리 왼새끼로 꼬아서 만든 것을,사용한다.

동문안당산제는 마을의 대표인 이장이 주관하며 이장과는 별도로 제의를 이끌어 갈 [제관](/topic/제관)을 제의 당일 아침에 선출한다. 제관은 마을에서 가장 깨끗하고 인품이 좋은 사람으로선정한다. 주로 마을에서 나이가 많은 어른이 제관에 선출된다.

제물 장만은 정월대보름 전날인 열나흗날에 한다. 홍어도 이때 준비한다. 장은 마을 책임자인 이장과 부락위원들이 봐 오며, 모두 남자이다. 장을 봐 오면 마을회관에서 부녀자들이 음식을 장만한다. 제물은 메,주, 실과, 포, 채, 편(백설기 시루) 등이다. 집안 제사와 같이 장만하면서 이때 시루째 팥을 넣지 않은 흰시루떡을 나물 및 돼지머리와 함께 올린다. 제의가 모두 끝나면 [백지](/topic/백지)로 실과를 조금씩 싸서 새끼줄로 묶은 다음 당산에 함께 묶어 놓는다.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아침부터 [농악](/topic/농악)을 치며 집집마다 짚단을 걷어 직경 10㎝ 정도의동아줄 제작이 마[무리](/topic/무리)되면 마을의 남녀가 두 편으로 나뉘어 그해의 풍년을 비는 줄다리기를시작한다. 이때 여자 편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여자가 이기면 한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여자 편이 이기도록 미리 인원 등을 잘 조정해 줄다리기를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줄다리기에 사용한 동아줄을 메고 당산으로 간다. 당산에 도착하면 풍물에 맞춰 간단한 제사를 지낸 다음 동아줄로 [당산옷입히기](/topic/당산옷입히기)를 한다. 지난해에 입힌 옷, 즉 묵은 동아줄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는 것이다.

옷입히기가 끝나면 당산의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흙을 긁어모아 흙태우기를 한 다음 [황토](/topic/황토)를 뿌려 정화하고 나서 상을 놓아 진설한다. 진설이 끝나면 무당의 축원굿이 행해진다. 축원굿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평안한 삶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무당의 굿이 끝나면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이 절을 올린다. 과거에는 석장승에 제를 지내지 않고풍물만 쳐 주었다고 한다.

동문안당산은 먼저 줄다리기를 하고 난 뒤에 줄을 감고 나서 제를 지낸다. 다른 마을에서는 대개 왼새끼를 꼬아 만들지만 이 마을에서는 특이하게도 오른새끼를 꼬아서 줄을 만든다고 한다. 줄은 남녀로 편을 갈라 잡아당기고 나서 그 줄을 어깨에 메고 시내를 한 바퀴 돈 다음 당산에 옷을 입힌 뒤 제를 지내는 것이다. 줄다리기를 한 용줄로 당산옷입히기를 하는 것은 용신을 마을의 지킴이인 당산신께 바치는 일이며, 용신을 부리고 조정하여 올해에도 풍년이 들게 해 달라는 뜻이다. [농경문화](/topic/농경문화)권에서는 용을 [농업](/topic/농업)의 신으로인식하여 풍년이 될지 흉년이 될지는 용신의 뜻에 달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안 성안이라는 지역적으로 인접해 있음에도 동문안당산제와 서문안당산제는 많이 다르다. 동문안당산제의가 무격 형식을 띤 전래의 순수한 민간신앙 형식이라면 서문안당산제는 유교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동문안당산제는 이농현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2005년부터 단절되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해마다 지내오던 마을 제의를 격년제로 지냈으나 제의 비용 마련의 어려움과 제의 지낼 인원 부족으로 단절된 것이다.
참고문헌민속종합조사보고서-전라북도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1)
전라북도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부안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원광사, 1984)
전라북도의 민속예술 (전라북도, 1997)
부안읍 성안 당산고 (김형주, 향토문화연구 1, 원광대학교향토문화연구소, 2001)
전통문화예술의 정리 전라북도 [마을](/topic/마을)지킴이·정악 (전라북도, 2004)
부안 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 (김형주, 전북학연구총서 2-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전라북도 장승신앙의 전승과 그 배경 (박호원, 전북학연구총서 2-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내용동문안당산이 있는 동문은 성황산 아래 서림공원 입구의 관아로부터 동쪽으로 500m쯤 떨어진 동중리와 선은리 경계지점에 있었다. 문루의 이름은 ‘청원루(淸遠樓)’였다. 이동문을 나서면 망기산 및 장승배리를 지나 고마제 옆 동진 장터로 하여 청운동의 동진원을 지나면 곧바로 동진나루터에 이른다. 동문은 김제·만경·전주 등지로 다니는 부안의 관문이며, 과거에는 벼슬아치·관원·양반은 물론 온갖 상고배들의 주요 통로여서 사실상 부안의 [대문](/topic/대문)(大門)이다.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낮에 동문안당산에 당산제를 해마다 빠짐없이 지내다가 언제부터인가 격년제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제의 당일 마을에 상이 나거나 출산이 있는 경우 음력 이월 초하룻날로 옮겨 행한다. 그렇게 해야만 마을의 신이 노하지 않아 마을의 나쁜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동문안당산제의 제의 비용은 주민들이 모두 부담한다. 예전에는 제를 지내기 위해 정월 초사흗날 무렵부터 집집마다 굿물을 쳐 주어서 제사 비용과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하고 감아 놓을짚을 추렴하였다. 현재는 굿물 을 치지 않고 이장이 가구마다 일정액을 걷으러 다닌다고 한다. 제의에 앞서 정월이 산달인 임신부는 미리 마을 밖의 다른 집으로 옮겨 간다. 제일이 다가오면 부정한 사람이나 여자들이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당산 주위와 마을 어귀에 인줄을 쳐 놓는다. 이때 인줄은 줄다리기를 할 때와 달리 왼새끼로 꼬아서 만든 것을,사용한다.

동문안당산제는 마을의 대표인 이장이 주관하며 이장과는 별도로 제의를 이끌어 갈 [제관](/topic/제관)을 제의 당일 아침에 선출한다. 제관은 마을에서 가장 깨끗하고 인품이 좋은 사람으로선정한다. 주로 마을에서 나이가 많은 어른이 제관에 선출된다.

제물 장만은 정월대보름 전날인 열나흗날에 한다. 홍어도 이때 준비한다. 장은 마을 책임자인 이장과 부락위원들이 봐 오며, 모두 남자이다. 장을 봐 오면 마을회관에서 부녀자들이 음식을 장만한다. 제물은 메,주, 실과, 포, 채, 편(백설기 시루) 등이다. 집안 제사와 같이 장만하면서 이때 시루째 팥을 넣지 않은 흰시루떡을 나물 및 돼지머리와 함께 올린다. 제의가 모두 끝나면 [백지](/topic/백지)로 실과를 조금씩 싸서 새끼줄로 묶은 다음 당산에 함께 묶어 놓는다.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아침부터 [농악](/topic/농악)을 치며 집집마다 짚단을 걷어 직경 10㎝ 정도의동아줄 제작이 마[무리](/topic/무리)되면 마을의 남녀가 두 편으로 나뉘어 그해의 풍년을 비는 줄다리기를시작한다. 이때 여자 편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여자가 이기면 한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여자 편이 이기도록 미리 인원 등을 잘 조정해 줄다리기를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줄다리기에 사용한 동아줄을 메고 당산으로 간다. 당산에 도착하면 풍물에 맞춰 간단한 제사를 지낸 다음 동아줄로 [당산옷입히기](/topic/당산옷입히기)를 한다. 지난해에 입힌 옷, 즉 묵은 동아줄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는 것이다.

옷입히기가 끝나면 당산의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흙을 긁어모아 흙태우기를 한 다음 [황토](/topic/황토)를 뿌려 정화하고 나서 상을 놓아 진설한다. 진설이 끝나면 무당의 축원굿이 행해진다. 축원굿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평안한 삶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무당의 굿이 끝나면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이 절을 올린다. 과거에는 석장승에 제를 지내지 않고풍물만 쳐 주었다고 한다.

동문안당산은 먼저 줄다리기를 하고 난 뒤에 줄을 감고 나서 제를 지낸다. 다른 마을에서는 대개 왼새끼를 꼬아 만들지만 이 마을에서는 특이하게도 오른새끼를 꼬아서 줄을 만든다고 한다. 줄은 남녀로 편을 갈라 잡아당기고 나서 그 줄을 어깨에 메고 시내를 한 바퀴 돈 다음 당산에 옷을 입힌 뒤 제를 지내는 것이다. 줄다리기를 한 용줄로 당산옷입히기를 하는 것은 용신을 마을의 지킴이인 당산신께 바치는 일이며, 용신을 부리고 조정하여 올해에도 풍년이 들게 해 달라는 뜻이다. [농경문화](/topic/농경문화)권에서는 용을 [농업](/topic/농업)의 신으로인식하여 풍년이 될지 흉년이 될지는 용신의 뜻에 달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안 성안이라는 지역적으로 인접해 있음에도 동문안당산제와 서문안당산제는 많이 다르다. 동문안당산제의가 무격 형식을 띤 전래의 순수한 민간신앙 형식이라면 서문안당산제는 유교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동문안당산제는 이농현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2005년부터 단절되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해마다 지내오던 마을 제의를 격년제로 지냈으나 제의 비용 마련의 어려움과 제의 지낼 인원 부족으로 단절된 것이다.
참고문헌민속종합조사보고서-전라북도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1)
전라북도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부안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원광사, 1984)
전라북도의 민속예술 (전라북도, 1997)
부안읍 성안 당산고 (김형주, 향토문화연구 1, 원광대학교향토문화연구소, 2001)
전통문화예술의 정리 전라북도 [마을](/topic/마을)지킴이·정악 (전라북도, 2004)
부안 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 (김형주, 전북학연구총서 2-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전라북도 장승신앙의 전승과 그 배경 (박호원, 전북학연구총서 2-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역사동문안당산의 신체인 솟대당산과 석장승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부안읍성의 성문 안 3곳(동문안, 서문안, 남문안)에 조성된 당산들은 모두 기능, 형태, 조성기법 등이 유사해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동문안당산이 17세기 말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연 신체에 해당하는 당산나무가 동문안당산 주위에 본래 존재했다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돌로 만들어진 솟대당산이 과거 당산나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안 읍성을 중심으로 모두 세 곳에 동문안과 유사한 형태의 당산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안 읍내에 있는 산의 명칭이 ‘성황산’이라는 점에서 이들 당산이 [마을](/topic/마을) 당산으로서의 성격 이전에는 성안의 주민들이 함께 지내던 성황제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동문안당산은 크게 앞당산과 뒷당산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앞당산은 동문안 솟대당산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 있어 아무런 신체물이 없다. 다만 주민들은 이곳을 과거 동문안마을의 입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뒷당산은 동문안당산이 있는 곳이며, 이곳에는 본래 오늘날 남아 있는 3기의 당산 이외에 한 기의 신체가 더 있었다. 주당산과 성문의 중간 지점에 있던 신목인 당산나무가 도로공사로 인해 없어지면서 동문안당산에서 볼 수 있는 3기의 당산만이 현재까지 전해[지게](/topic/지게) 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1979년 도로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동중리마을의 입구 도로변에 주염나무 신목 한 그루가 앞당산이라 하여 있었다. 당산제를 지낼 때에는 그곳으로 가서 한바탕의 풍물굿을 쳐 주고 솟대당산 할아버지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 돌장승 하원당[장군](/topic/장군)도 원위치에서 10m쯤 옮겼다가 2004년 10월에 다시 도로를 넓히면서 [상원](/topic/상원)장군의 옆으로나란히 옮겨 왔다. 2004년에 석장승을 오늘날의 자리로 옮겨온 이후 이듬해 1월에 부안문화원 주최로 합궁제 및 이전 준공제를 지냈다.

동문안에 솟대당산과 석장승이 세워진 연유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석장승은 문지기 장승으로서 동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악한 것을 막아 주는 신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솟대당산이 세워진 연유는 부안 읍내의 지형과 관련이 있다. 부안 읍내의 지형이 행주형국(行舟形局)이어서 배가 가벼우면 쉽게 전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오리를 올려놓은 짐대를 세우게되었다고 한다.

한편 당산의 본래 기능은 성(城)의 동문 수호였으나 성의 기능이 마비됨에 따라 마을 주민들의 수호신으로 섬겨진 것으로 보인다. 동문안당산이 서문안당산과 다른 점은 당제와 함께 줄다리를 하고 나서 당산에 ‘옷을 입힌다’고 동아줄을 감아 놓는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동아줄을 감을 때 신체의 밑에서부터 석조가 있는 곳까지 감아 주지 못하면 그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역사동문안당산의 신체인 솟대당산과 석장승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부안읍성의 성문 안 3곳(동문안, 서문안, 남문안)에 조성된 당산들은 모두 기능, 형태, 조성기법 등이 유사해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동문안당산이 17세기 말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연 신체에 해당하는 당산나무가 동문안당산 주위에 본래 존재했다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돌로 만들어진 솟대당산이 과거 당산나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안 읍성을 중심으로 모두 세 곳에 동문안과 유사한 형태의 당산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안 읍내에 있는 산의 명칭이 ‘성황산’이라는 점에서 이들 당산이 [마을](/topic/마을) 당산으로서의 성격 이전에는 성안의 주민들이 함께 지내던 성황제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동문안당산은 크게 앞당산과 뒷당산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앞당산은 동문안 솟대당산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 있어 아무런 신체물이 없다. 다만 주민들은 이곳을 과거 동문안마을의 입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뒷당산은 동문안당산이 있는 곳이며, 이곳에는 본래 오늘날 남아 있는 3기의 당산 이외에 한 기의 신체가 더 있었다. 주당산과 성문의 중간 지점에 있던 신목인 당산나무가 도로공사로 인해 없어지면서 동문안당산에서 볼 수 있는 3기의 당산만이 현재까지 전해[지게](/topic/지게) 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1979년 도로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동중리마을의 입구 도로변에 주염나무 신목 한 그루가 앞당산이라 하여 있었다. 당산제를 지낼 때에는 그곳으로 가서 한바탕의 풍물굿을 쳐 주고 솟대당산 할아버지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 돌장승 하원당[장군](/topic/장군)도 원위치에서 10m쯤 옮겼다가 2004년 10월에 다시 도로를 넓히면서 [상원](/topic/상원)장군의 옆으로나란히 옮겨 왔다. 2004년에 석장승을 오늘날의 자리로 옮겨온 이후 이듬해 1월에 부안문화원 주최로 합궁제 및 이전 준공제를 지냈다.

동문안에 솟대당산과 석장승이 세워진 연유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석장승은 문지기 장승으로서 동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악한 것을 막아 주는 신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솟대당산이 세워진 연유는 부안 읍내의 지형과 관련이 있다. 부안 읍내의 지형이 행주형국(行舟形局)이어서 배가 가벼우면 쉽게 전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오리를 올려놓은 짐대를 세우게되었다고 한다.

한편 당산의 본래 기능은 성(城)의 동문 수호였으나 성의 기능이 마비됨에 따라 마을 주민들의 수호신으로 섬겨진 것으로 보인다. 동문안당산이 서문안당산과 다른 점은 당제와 함께 줄다리를 하고 나서 당산에 ‘옷을 입힌다’고 동아줄을 감아 놓는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동아줄을 감을 때 신체의 밑에서부터 석조가 있는 곳까지 감아 주지 못하면 그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형태동문안당산은 솟대당산 1기와 한 쌍의 석장승을 합해 3기의 당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문안당산 3기의 신체(神體) 가운데 [마을](/topic/마을)의 주신은 솟대당산이다. 솟대당산은 동문안 60m 지점의 길가, 구체적으로는 전주와 김제로 빠져 나가는 길목인 동문안 삼거리 주택가 앞에 세워져 있다. 이 솟대 당산은 높이 320㎝의 화강암 [기둥](/topic/기둥) 위에 한 마리의 오리가앉아 있는 모습이며, 오리는 서북쪽을 향하고 있다. 동문안당산의 오리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본래 있던 오리는 누군가가 떼어 가서 다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솟대당산의 기둥은 사각 형태로 매우 투박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특별한 명문은 보이지 않는다.

이 솟대당산에서 동쪽으로 약 50m 지점에 당산목이 있고, 그 사이에 길 양쪽으로 한 쌍의 석장승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장승은 모두 화강석으로 투박하게 조성되었으며, 밑에는 모두 개대석이 깔려 있다. 남신인 당산할아버지장승은 여신인 당산할머니장승보다 50㎝ 정도 작은 180㎝이며, 몸 둘레는 얇은 편이다. 머리에는 [벙거지](/topic/벙거지) 모양의 [모자](/topic/모자)를 쓰고 있고, 양쪽 귀는 흔적만 보인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으며, 둥근 눈망울에 이를 드러내고 있으나 무서운 형상은 아니다. 수염은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다. 그 아래로는 희미하게 ‘[상원](/topic/상원)주[장군](/topic/장군)(上元周將軍)’이라는 명문이 보이지만 마모가 심하여 확연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당산할머니장승은 체구가 큰 편으로 223㎝ 높이에 밑 둘레가 85㎝이며, 이마가 헌칠하고 미간에 백호가 조성되어 있다. 눈망울은 이중으로 튀어나왔으며, 코는 큰 편이다. 긴턱에 아랫니가 앙상하게 보여 다소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양쪽 귀는 도톰하게 남아 있다. 복부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보인다. 이 역시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판독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형태동문안당산은 솟대당산 1기와 한 쌍의 석장승을 합해 3기의 당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문안당산 3기의 신체(神體) 가운데 [마을](/topic/마을)의 주신은 솟대당산이다. 솟대당산은 동문안 60m 지점의 길가, 구체적으로는 전주와 김제로 빠져 나가는 길목인 동문안 삼거리 주택가 앞에 세워져 있다. 이 솟대 당산은 높이 320㎝의 화강암 [기둥](/topic/기둥) 위에 한 마리의 오리가앉아 있는 모습이며, 오리는 서북쪽을 향하고 있다. 동문안당산의 오리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본래 있던 오리는 누군가가 떼어 가서 다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솟대당산의 기둥은 사각 형태로 매우 투박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특별한 명문은 보이지 않는다.

이 솟대당산에서 동쪽으로 약 50m 지점에 당산목이 있고, 그 사이에 길 양쪽으로 한 쌍의 석장승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장승은 모두 화강석으로 투박하게 조성되었으며, 밑에는 모두 개대석이 깔려 있다. 남신인 당산할아버지장승은 여신인 당산할머니장승보다 50㎝ 정도 작은 180㎝이며, 몸 둘레는 얇은 편이다. 머리에는 [벙거지](/topic/벙거지) 모양의 [모자](/topic/모자)를 쓰고 있고, 양쪽 귀는 흔적만 보인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으며, 둥근 눈망울에 이를 드러내고 있으나 무서운 형상은 아니다. 수염은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다. 그 아래로는 희미하게 ‘[상원](/topic/상원)주[장군](/topic/장군)(上元周將軍)’이라는 명문이 보이지만 마모가 심하여 확연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당산할머니장승은 체구가 큰 편으로 223㎝ 높이에 밑 둘레가 85㎝이며, 이마가 헌칠하고 미간에 백호가 조성되어 있다. 눈망울은 이중으로 튀어나왔으며, 코는 큰 편이다. 긴턱에 아랫니가 앙상하게 보여 다소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양쪽 귀는 도톰하게 남아 있다. 복부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보인다. 이 역시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판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부안동문안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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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동문안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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