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성황제

한국무속신앙사전
1214년부터 1823년까지 600여 년 동안 전라도 순창에서 거행된 지역수호신에 대한 제사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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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년부터 1823년까지 600여 년 동안 전라도 순창에서 거행된 지역수호신에 대한 제사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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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동
정의1214년부터 1823년까지 600여 년 동안 전라도 순창에서 거행된 지역수호신에 대한 제사의식.
유래 및 역사「성황대신사적(城隍大神事跡)」을 바탕으로 1214년부터 시작되어 1823년까지 600여 년 동안 지속된 성황제의 제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순창성황제의 대상이된 성황신은 남신인 설공검(薛公儉)과 여신으로 이루어진 부부신이었다. 순창의 성황신으로 모셔진 설공검은 1224년(고려 고종11) 설신(薛愼)과 그 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강화도의 교동감무(喬同監務)를 시작으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를 지낸 뒤 고종 말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예부낭중(禮部郎中)이 되었다. 그가 관직에 취임한 이후 과거에 등제한 것을 보면 초직(初職)은 아버지 설신의 음덕, 즉 음서(蔭敍)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부(父)나 조(祖)가 5품 이상이면 음서의 혜택을 받을수 있었다. 설공검이 과거 등제 이전에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버지 설신이 정품인 추밀원부사와 형부상서, 정2품인 상서좌복야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 후 1271년(원종 12)에는 군기감(軍器監)으로서 세자 심(諶, 후의 충렬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는 고려가 강화도에 들어가 몽골에 항거하다 개경으로 환도한 이듬해로 세자와 더불어 상서우승(尙書右丞) 송분(宋玢), 호부낭중(戶部郎中) 김서(金), 군기감 설공검 등 의관 자제 20여 명, 유관 관청 직원 100여 명이 인질로 원(元)에가게 된 것이다. 이때 세자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후일 충렬왕조에 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 공으로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고 1278년(충렬왕 4)에좌승선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아들인 설지충(薛之冲)을 독로화(禿魯花, 인질을 의미)로 몽골에 들여보냈다. 그해에는 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필사적(必闍赤, 재상급)’이 되었다. 이때 필사적으로는 설공검과 더불어 김주정, 박항, 이존비, 염승익, 조인규, 이지저, 인공수 등이 임명되었다. 곧이어 감찰대부(監察大夫)·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거쳐 첨의참리(僉議參理)로 승진하였으며,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하였다. 첨의중찬은 고려 전기의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만든 첨의부의 최고관직으로서 종1품에 해당하는 관직이었으니 그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설공검은 충렬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고려사(高麗史)』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따르면 설공검은 성격이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남을 대할 때는 공손하고 검소하게 지냈다. 그는 조정의 관리로서 6품 이상 되는 자가 친상(親喪)을 당하면 반드시 소복을 입고 가서 조문하였고, 자신을 찾는 사람이 집에 오면 관품에 관계없이 신을 거꾸로 신을 정도로 급히 나가 맞이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그가 병이 들어 누워 있을 때 채홍철(蔡洪哲)이 진찰을 하러 가 보니 그는 베 이불을 덮고 왕골[자리](/topic/자리)를 깔고 있는 등 거처하는 모습이 중과 같았다고 한다. 채홍철은 감탄하여 말하기를 “우리와 설공(薛公)을 비교한다면 이른바 벌레와 황학(黃鶴)의 차이와 같다”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성황대신사적」의 기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한편 설공검 옆에 모셔진 여신은 원래 조씨(趙氏)였다. 즉 설공검의 선조인 설자승(薛子升)이 1126년(인종 4)에 이자겸의 난을 피하여 순창으로 내려왔을 때 그의 처가 바로순창 조씨 조영숙(趙永淑)의 딸이었다. 이들이 여기에 세거하면서 고려 후기 설공검과 순창 조씨 가문의 부인이 부부신으로 모셔졌다. 물론 제사도 이들 가문이 주관하였다. 그러다가 고려 말엽에 순창 조씨의 세거지가 분산되면서 그 공백을 옥천조씨(玉川 趙氏)가 메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신인 순창 조씨가 옥천 조씨로 바뀌었다. 그러나 둘 다조씨였기 때문에 여신은 조씨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들 성씨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순창의 토착 세력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순창성황제는 폐지되지 않고 존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교의 확대와 더불어 통제를 받을 수밖에없었다. 그리하여 제일을 삭망일(朔望日)로 바꾸는 한편 난잡한 무당의 참여를 배제하고 아전들을 파견하여 [독축](/topic/독축)(讀祝)을 하게 되었다. 한편 1379년(우왕 5)부터 순창에서 내려와 살게된 남원 양씨(南原 楊氏)가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면서 순창의 성황신 가운데 여신이 남원 양씨로 바뀌었다.

순창 설씨나 옥천 조씨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면서 향리에서의 위세도 약해져 갔다. 이러한 토착 성씨들의 퇴조 현상과 함께 이후 새롭게 이거하여 정착한 성씨들이 순창성황제를 주도하게 되었다. 임씨(林氏)·옹씨(邕氏)·최씨(崔氏) 등이 그들이다. 그리하여 순창성황제의 조선 후기 주도층은 향리성(鄕吏姓)으로 고착된 일부의 순창 설씨와 조씨,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임·옹·최씨들로 교대되었다. 한편 순창 설씨와 조씨들 가운데 조선 전기에 사족화한 세력들은 1785년(정조 9)에 자신들의 선조인 고려시기 인물 설공검(薛公儉)·설인검(薛仁儉)·조원길(趙元吉)을 주자(朱子)와 함께 무이서원(武夷書院)에 제향함으로써 별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처럼 순창의 성황제는 지방 세력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으나 시대에 따라 주관의 주체가 조금씩 달랐다. 고려시대의 성황제는 지방의 향리 집단과 무격 집단이 주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성리학적 지배 질서 확립 차원에서 성황제를 지방관이 주재하고, 제사 물품도 관아에서 조달하였다. 이것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속현이 없어지고 거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중앙집권력이 강화되는 시대적 상황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는 향리의 주도권이 약화되어 갔지만 향리 세력들은 지방에서의 성황제를 비롯한 제사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겉으로는 지방관이 지방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향리를 비롯한 지방 세력이 여전히 성황제를 주관하였다. 이에 따라 유교로 무장한 지방관과 전통 신앙을 지키려는 향리 세력들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즉 국가에서는유교적 관점에서 성황제를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이를 금지 내지 통제하려 하였으나 향리 세력과 무격(巫覡) 집단은 이를 유지, 보존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계속적인 통제로 순창의 성황제도 변화되어 갔다. 정부의 음사 규제로 1563년쯤 순창의 성황제는 무격 중심에서 유교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위상도 격하되었다. 이전까지 지방관이 직접 통제하고 주관하던 것이 아전이나 이방, 의생, 공생 등 하급 관속들이 주관하는 행사로 변화됐다. 지방관이 주관하는 성황제와는 달리 향리들이 읍의 통치를 위해 주도하는 성황제가 따로 존속하기도 하였다.「 성황대신사적」에도 1563년 [현판](/topic/현판) 제작과 1740년 성황사 보수에 앞장선 세력들의 명단에 호장(戶長)과 이방(吏房)들이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실제 제의를 주관하는 집단은 여전히 무격이었음도 알 수 있다.

순창성황제는 매년 음력 5월 1일부터 5월 5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마지막 날인 5월 5일은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행하는 단오절(端午節) 또는 단양절(端陽節)이다. 단오절인 5월 5일은 파종을 끝낸 뒤 약간의 휴식이 가능한 날이어서 이 때 성황제를 지냈다. 이로써 성황제는 지역민들의 축제가 되고 단합도 도모할 수 있었다. 즉 순창성황제는 단오절에 거행되는 지역 수호신에 대한 제사 의식이다.

순창성황제의 대상인 성황신들에게는 작호가 있다. 남성황신의 작호는 ‘금자광록대부 삼한공신 문하시○ ○○[장군](/topic/장군)(金紫光祿大夫 三韓功臣 門下侍○ ○○將軍)’이고, 여성황신의 작호는 ‘성황대부 삼한국대부인(城隍大夫 三韓國大夫人)’이다. 이는 모두 국가에서 내린 작호이다.
정의1214년부터 1823년까지 600여 년 동안 전라도 순창에서 거행된 지역수호신에 대한 제사의식.
유래 및 역사「성황대신사적(城隍大神事跡)」을 바탕으로 1214년부터 시작되어 1823년까지 600여 년 동안 지속된 성황제의 제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순창성황제의 대상이된 성황신은 남신인 설공검(薛公儉)과 여신으로 이루어진 부부신이었다. 순창의 성황신으로 모셔진 설공검은 1224년(고려 고종11) 설신(薛愼)과 그 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강화도의 교동감무(喬同監務)를 시작으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를 지낸 뒤 고종 말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예부낭중(禮部郎中)이 되었다. 그가 관직에 취임한 이후 과거에 등제한 것을 보면 초직(初職)은 아버지 설신의 음덕, 즉 음서(蔭敍)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부(父)나 조(祖)가 5품 이상이면 음서의 혜택을 받을수 있었다. 설공검이 과거 등제 이전에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버지 설신이 정품인 추밀원부사와 형부상서, 정2품인 상서좌복야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 후 1271년(원종 12)에는 군기감(軍器監)으로서 세자 심(諶, 후의 충렬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는 고려가 강화도에 들어가 몽골에 항거하다 개경으로 환도한 이듬해로 세자와 더불어 상서우승(尙書右丞) 송분(宋玢), 호부낭중(戶部郎中) 김서(金), 군기감 설공검 등 의관 자제 20여 명, 유관 관청 직원 100여 명이 인질로 원(元)에가게 된 것이다. 이때 세자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후일 충렬왕조에 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 공으로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고 1278년(충렬왕 4)에좌승선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아들인 설지충(薛之冲)을 독로화(禿魯花, 인질을 의미)로 몽골에 들여보냈다. 그해에는 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필사적(必闍赤, 재상급)’이 되었다. 이때 필사적으로는 설공검과 더불어 김주정, 박항, 이존비, 염승익, 조인규, 이지저, 인공수 등이 임명되었다. 곧이어 감찰대부(監察大夫)·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거쳐 첨의참리(僉議參理)로 승진하였으며,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하였다. 첨의중찬은 고려 전기의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만든 첨의부의 최고관직으로서 종1품에 해당하는 관직이었으니 그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설공검은 충렬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고려사(高麗史)』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따르면 설공검은 성격이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남을 대할 때는 공손하고 검소하게 지냈다. 그는 조정의 관리로서 6품 이상 되는 자가 친상(親喪)을 당하면 반드시 소복을 입고 가서 조문하였고, 자신을 찾는 사람이 집에 오면 관품에 관계없이 신을 거꾸로 신을 정도로 급히 나가 맞이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그가 병이 들어 누워 있을 때 채홍철(蔡洪哲)이 진찰을 하러 가 보니 그는 베 이불을 덮고 왕골[자리](/topic/자리)를 깔고 있는 등 거처하는 모습이 중과 같았다고 한다. 채홍철은 감탄하여 말하기를 “우리와 설공(薛公)을 비교한다면 이른바 벌레와 황학(黃鶴)의 차이와 같다”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성황대신사적」의 기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한편 설공검 옆에 모셔진 여신은 원래 조씨(趙氏)였다. 즉 설공검의 선조인 설자승(薛子升)이 1126년(인종 4)에 이자겸의 난을 피하여 순창으로 내려왔을 때 그의 처가 바로순창 조씨 조영숙(趙永淑)의 딸이었다. 이들이 여기에 세거하면서 고려 후기 설공검과 순창 조씨 가문의 부인이 부부신으로 모셔졌다. 물론 제사도 이들 가문이 주관하였다. 그러다가 고려 말엽에 순창 조씨의 세거지가 분산되면서 그 공백을 옥천조씨(玉川 趙氏)가 메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신인 순창 조씨가 옥천 조씨로 바뀌었다. 그러나 둘 다조씨였기 때문에 여신은 조씨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들 성씨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순창의 토착 세력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순창성황제는 폐지되지 않고 존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교의 확대와 더불어 통제를 받을 수밖에없었다. 그리하여 제일을 삭망일(朔望日)로 바꾸는 한편 난잡한 무당의 참여를 배제하고 아전들을 파견하여 [독축](/topic/독축)(讀祝)을 하게 되었다. 한편 1379년(우왕 5)부터 순창에서 내려와 살게된 남원 양씨(南原 楊氏)가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면서 순창의 성황신 가운데 여신이 남원 양씨로 바뀌었다.

순창 설씨나 옥천 조씨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면서 향리에서의 위세도 약해져 갔다. 이러한 토착 성씨들의 퇴조 현상과 함께 이후 새롭게 이거하여 정착한 성씨들이 순창성황제를 주도하게 되었다. 임씨(林氏)·옹씨(邕氏)·최씨(崔氏) 등이 그들이다. 그리하여 순창성황제의 조선 후기 주도층은 향리성(鄕吏姓)으로 고착된 일부의 순창 설씨와 조씨,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임·옹·최씨들로 교대되었다. 한편 순창 설씨와 조씨들 가운데 조선 전기에 사족화한 세력들은 1785년(정조 9)에 자신들의 선조인 고려시기 인물 설공검(薛公儉)·설인검(薛仁儉)·조원길(趙元吉)을 주자(朱子)와 함께 무이서원(武夷書院)에 제향함으로써 별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처럼 순창의 성황제는 지방 세력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으나 시대에 따라 주관의 주체가 조금씩 달랐다. 고려시대의 성황제는 지방의 향리 집단과 무격 집단이 주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성리학적 지배 질서 확립 차원에서 성황제를 지방관이 주재하고, 제사 물품도 관아에서 조달하였다. 이것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속현이 없어지고 거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중앙집권력이 강화되는 시대적 상황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는 향리의 주도권이 약화되어 갔지만 향리 세력들은 지방에서의 성황제를 비롯한 제사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겉으로는 지방관이 지방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향리를 비롯한 지방 세력이 여전히 성황제를 주관하였다. 이에 따라 유교로 무장한 지방관과 전통 신앙을 지키려는 향리 세력들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즉 국가에서는유교적 관점에서 성황제를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이를 금지 내지 통제하려 하였으나 향리 세력과 무격(巫覡) 집단은 이를 유지, 보존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계속적인 통제로 순창의 성황제도 변화되어 갔다. 정부의 음사 규제로 1563년쯤 순창의 성황제는 무격 중심에서 유교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위상도 격하되었다. 이전까지 지방관이 직접 통제하고 주관하던 것이 아전이나 이방, 의생, 공생 등 하급 관속들이 주관하는 행사로 변화됐다. 지방관이 주관하는 성황제와는 달리 향리들이 읍의 통치를 위해 주도하는 성황제가 따로 존속하기도 하였다.「 성황대신사적」에도 1563년 [현판](/topic/현판) 제작과 1740년 성황사 보수에 앞장선 세력들의 명단에 호장(戶長)과 이방(吏房)들이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실제 제의를 주관하는 집단은 여전히 무격이었음도 알 수 있다.

순창성황제는 매년 음력 5월 1일부터 5월 5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마지막 날인 5월 5일은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행하는 단오절(端午節) 또는 단양절(端陽節)이다. 단오절인 5월 5일은 파종을 끝낸 뒤 약간의 휴식이 가능한 날이어서 이 때 성황제를 지냈다. 이로써 성황제는 지역민들의 축제가 되고 단합도 도모할 수 있었다. 즉 순창성황제는 단오절에 거행되는 지역 수호신에 대한 제사 의식이다.

순창성황제의 대상인 성황신들에게는 작호가 있다. 남성황신의 작호는 ‘금자광록대부 삼한공신 문하시○ ○○[장군](/topic/장군)(金紫光祿大夫 三韓功臣 門下侍○ ○○將軍)’이고, 여성황신의 작호는 ‘성황대부 삼한국대부인(城隍大夫 三韓國大夫人)’이다. 이는 모두 국가에서 내린 작호이다.
참조[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topic/현판)](/topic/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
참고문헌순창성황대신사적 [현판](/topic/현판)의 발견과 그 고찰 (양만정, 옥천문화 1, 옥천문화원, 1993)
순창성황당 현판에 대하여 (남풍현, 고문서연구 7, 한국고문서학회, 1995)
고려시대 순창의 지방세력과 성황신앙 (김갑동, 한국사연구 97, 한국사연구회, 1997)
성황당과 성황제 (한국종교사연구회 편, 민속원, 1998)
순창성황당 현판의 판독과 해석 (남풍현, 성황당과성황제, 민속원, 1998)
조선중기 전라도 순창군 성황제의의 성격 (정승모,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순창성황제의 변천과 주도세력 (이해준,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순창의 성황신과 성곽설화 (송화섭,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조선시대의 성황제 (김철웅, 사학지 35, 단국사학회, 2002)
참조[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topic/현판)](/topic/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
참고문헌순창성황대신사적 [현판](/topic/현판)의 발견과 그 고찰 (양만정, 옥천문화 1, 옥천문화원, 1993)
순창성황당 현판에 대하여 (남풍현, 고문서연구 7, 한국고문서학회, 1995)
고려시대 순창의 지방세력과 성황신앙 (김갑동, 한국사연구 97, 한국사연구회, 1997)
성황당과 성황제 (한국종교사연구회 편, 민속원, 1998)
순창성황당 현판의 판독과 해석 (남풍현, 성황당과성황제, 민속원, 1998)
조선중기 전라도 순창군 성황제의의 성격 (정승모,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순창성황제의 변천과 주도세력 (이해준,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순창의 성황신과 성곽설화 (송화섭, 역사민속학 7, 역사민속학회, 1998)
조선시대의 성황제 (김철웅, 사학지 35, 단국사학회, 2002)
내용「성황대신사적」의 기록을 근거로 제의 절차를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성황제를 지내기 전인 사월 그믐날에 이 지역의 대모산성에 올라가 성황기(城隍旗)를 들고 성황신의 혼을 불러온다. 여성황신의 [혼백](/topic/혼백)은 상자에 받고 대기(大旗)에도 받는다. 그리고 본당인 성황당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강신의례(降神儀禮)이다. 그날 파견된 지방관속은 [사모](/topic/사모)관대를 단정히 하여 말을 타고 간다. 그 앞뒤에는 걸어서 따르는 [무리](/topic/무리)가 있고, 사람들이 벌려 서서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이때 [마을](/topic/마을)에서는 성황당 주변과 당산 나무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부정을 타지 않게 한다. 제사를 주관할 사람은 목욕재계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금한다. 대모산성에서 내려온 성황대기와 혼백상자는 성황사에 [봉안](/topic/봉안)한다.

오월 초하룻날이 되면 설공검을 모신 성황사에서 본격적으로 제의가 시작된다. 지방관이나 아전은 성황대왕과 성황대부인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혼백상자를 열어 성황신 부부의 합위의식(合位儀式)을 거행한다. 그 후 무당들은 굿을 하여 성황대기에 두 신위의 혼백을 받는다.

이러한 의식이 끝난 뒤에는 향리와 무당들이 주관하는 공동 제의가 거행되면서 지역 축제가 시작된다. 향리 가운데 세력이 있는 다섯 명의 집에 가설 성황당이 설치되고 닷새동안 번갈아 가면서 제의가 행해진다. 가설 성황당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설씨대왕(薛氏大王)과 양씨대부인(楊氏大夫人)의 혼백을 담은 대기를 앞세우고 무당들이 춤을 추고재주를 부린다. 성황신과 더불어 즐기는 것이다. 이를 오신의례(娛神儀禮)라고 한다.

가설 성황당에서의 제의가 끝나면 성황사 앞 큰 [마당](/topic/마당)에 와 축원 의례와 함께 단오절 행사가 거행된다. [윷놀이](/topic/윷놀이), [줄타기](/topic/줄타기), [꼭두각시놀음](/topic/꼭두각시놀음) 등이 행해진다. 한바탕 즐겁게 논 다음성황신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송신의례(送神儀禮)이다.
내용「성황대신사적」의 기록을 근거로 제의 절차를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성황제를 지내기 전인 사월 그믐날에 이 지역의 대모산성에 올라가 성황기(城隍旗)를 들고 성황신의 혼을 불러온다. 여성황신의 [혼백](/topic/혼백)은 상자에 받고 대기(大旗)에도 받는다. 그리고 본당인 성황당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강신의례(降神儀禮)이다. 그날 파견된 지방관속은 [사모](/topic/사모)관대를 단정히 하여 말을 타고 간다. 그 앞뒤에는 걸어서 따르는 [무리](/topic/무리)가 있고, 사람들이 벌려 서서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이때 [마을](/topic/마을)에서는 성황당 주변과 당산 나무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부정을 타지 않게 한다. 제사를 주관할 사람은 목욕재계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금한다. 대모산성에서 내려온 성황대기와 혼백상자는 성황사에 [봉안](/topic/봉안)한다.

오월 초하룻날이 되면 설공검을 모신 성황사에서 본격적으로 제의가 시작된다. 지방관이나 아전은 성황대왕과 성황대부인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혼백상자를 열어 성황신 부부의 합위의식(合位儀式)을 거행한다. 그 후 무당들은 굿을 하여 성황대기에 두 신위의 혼백을 받는다.

이러한 의식이 끝난 뒤에는 향리와 무당들이 주관하는 공동 제의가 거행되면서 지역 축제가 시작된다. 향리 가운데 세력이 있는 다섯 명의 집에 가설 성황당이 설치되고 닷새동안 번갈아 가면서 제의가 행해진다. 가설 성황당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설씨대왕(薛氏大王)과 양씨대부인(楊氏大夫人)의 혼백을 담은 대기를 앞세우고 무당들이 춤을 추고재주를 부린다. 성황신과 더불어 즐기는 것이다. 이를 오신의례(娛神儀禮)라고 한다.

가설 성황당에서의 제의가 끝나면 성황사 앞 큰 [마당](/topic/마당)에 와 축원 의례와 함께 단오절 행사가 거행된다. [윷놀이](/topic/윷놀이), [줄타기](/topic/줄타기), [꼭두각시놀음](/topic/꼭두각시놀음) 등이 행해진다. 한바탕 즐겁게 논 다음성황신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송신의례(送神儀禮)이다.
의의순창의 성황제는 지방관과 향리, 무격,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한[마당](/topic/마당)의 축제로 거행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은 같은 지역에 살면서 같은 의식을 공유한 동일집단이 되었다.
의의순창의 성황제는 지방관과 향리, 무격,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한[마당](/topic/마당)의 축제로 거행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은 같은 지역에 살면서 같은 의식을 공유한 동일집단이 되었다.
남해안별신굿(KBS 코리아, 2003년 4월 15일 방영)
대원사팔도 굿황루시1992
국립민속박물관큰무당 우옥주 유품1995
도서출판 民俗苑한국의 굿하효길 외2002
화산문화동해안별신굿박경신·장휘주2002
국립민속박물관사진으로 보는 민속의 어제와 오늘 12003
비교민속학회민속과 종교2003
경춘사한국복식의 역사백영자·최해율2004
한국복식학회 55조선시대 몽두의에 관한 연구박성실2005
국립문화재연구소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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