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납읍리마을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서 홍역신인 서신, [마을](/topic/마을) 수호신인 토신, 손님신[客神]인 [포신](/topic/포신)에게 마을의 풍요 및 무사안녕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남성 중심의 유교식 마을제. 1986년 4월 10일에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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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서 홍역신인 서신, [마을](/topic/마을) 수호신인 토신, 손님신[客神]인 [포신](/topic/포신)에게 마을의 풍요 및 무사안녕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남성 중심의 유교식 마을제. 1986년 4월 10일에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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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병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서 홍역신인 서신, [마을](/topic/마을) 수호신인 토신, 손님신[客神]인 [포신](/topic/포신)에게 마을의 풍요 및 무사안녕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남성 중심의 유교식 마을제. 1986년 4월 10일에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서 홍역신인 서신, [마을](/topic/마을) 수호신인 토신, 손님신[客神]인 [포신](/topic/포신)에게 마을의 풍요 및 무사안녕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남성 중심의 유교식 마을제. 1986년 4월 10일에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제단은 [마을](/topic/마을) 금산공원 안에 있다. 상록수가 울창한 공원 한가운데에 돌을 쌓아 울타리를 두른 곳에 [포신](/topic/포신)단(酺神壇), 토신단(土神壇), 서신단(西神壇)이 있다. 제장 정면(북쪽)에 서신단과 토신단, 오른쪽에 포신단이 각각 배치돼 있다. 제단의 상석(床石)은 자연석으로 만들었고, 상석 뒤에는 지방을 써 붙일 수 있도록 비석 모양의 작은 돌을 각각 세워 놓았다. 제청 건물은 제장 남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제장의 넓이는 동서 길이 8m, 남북 길이 15m 정도로 꽤 넓고 바닥도 잘 정비돼 있다. 서신단 왼쪽에 망료위가 있고, 토신단과 포신단의 각 오른쪽에 직육면체의 돌이 하나씩 놓여 있다.

납읍리의 제단에 모시는 신은 서신(西神), 토신(土神), 포신(酺神) 세 신위(神位)이다. 세 개의 신단(神壇)에는 각각 비석 모양의 작은 돌을 세워 놓았다. 여기에 신위를 나타내는 지방을 써 붙인다. 포신단(酺神壇)에는 포신지위(酺神之位), 토신단(土神壇)에는 토신지위(土神之位), 서신단(西神壇)에는 서신지위(西神之位)라고 각각 써 붙인다. 포신은 손님신으로서 인물재해지신(人物災害之神)이고, 토신은 마을의 토지신으로서 마을 수호신이며, 서신은 홍역신(紅疫神)이다.

제사는 춘제(春祭)와 추제(秋祭)로 연 두 차례 지내다가 현재는 정월 상정일(上丁日)의 춘제만 지낸다. 상정일에 마을에서 부정한 일이 생겨 행제하지 못하게 되면 중정일(中丁日)로 연기하고, 이날에도 행제하지 못할 사유가 생기면 해일(亥日)에 지낸다. 곧 혹정혹해(或丁或亥)일에 지내는 것이다.

[연말](/topic/연말)이 되면 포제 준비를 위한 ‘포제상회[酺祭鄕會]’를 열어 제향비, 제청([제관](/topic/제관)들이 합숙 [재계](/topic/재계)할 집), 제의 준비, 제관 선출 문제 등을 논의한다. 향회에는 향장이 주장(主掌)해 오다가 향장제가 없어지면서 이장(里長)이 각 동장의 협조 아래 회를 소집한다. 이 향회에서 제관 선출과 제비(祭費)의 예산 결산을 한다. 제비는 마을의 기금 또는 마을 사람들의 부조금, 이장․동장․유지들의 찬조금으로 충당한다.

제관은 [초헌](/topic/초헌)관(初獻官), [아헌](/topic/아헌)관(亞獻官), [종헌](/topic/종헌)관(終獻官), 집례(執禮), 대축(大祝), 찬자(贊者), 알자(謁者), 봉로(奉爐), 봉향(奉香), 전작(奠爵), 사준(司樽), 봉작(奉爵), 전사관(典司官) 등 12제관(十二祭官)이다. 그러나 전사관은 정식 제관이 아니고 제물 관리를 담당한다. [헌관](/topic/헌관)(獻官)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고령자가 선출돼 제를 진행한다. 지금은 이장이 초헌관을 맡는다. 집례는 예절과 제법을 잘 아는 자로 선출하며, 대축은 축을 쓸 수 있고 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소제관(小祭官)은 원래 결혼한 사람만이 선출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미혼자도 맡는다. 제관들은 제일 사흘 전에 제청에 입재해 합숙한다. 입재 전후에는 몸 정성을 다하고 불상사가 없도록 한다. 시체를 보지 않아야 하며, 개고기 따위를 먹지 말아야 한다. 또한 비늘 없는 고기로 만든 음식은 삼간다.

정월 정일(丁日) 자시(子時)가 되면 각 제관은 청금(靑衿)에 [유건](/topic/유건)(儒巾)을 쓰고 집례가 부르는 홀기(笏記)에 따라 제례를 진행한다. 홀기는 향교의 [석전](/topic/석전)제 홀기와비슷하다. 다른 점은 진홀(搢笏, 홀을 띠에 꽂음)과 집홀(執笏, 홀을 잡아 가슴에 댐)이 없고, 소퇴궤(小退跪, 조금 물러나 꿇어앉음)가 없는 것뿐이다. 진홀과 집홀이 없는 것은 헌관들이 홀(笏)을 들지 않고 행제하기 때문이며, 소퇴궤가 없는 것은 초헌례를 지낸 뒤 [독축](/topic/독축)할 때 초헌관이 소퇴궤하지 않은 채 대축이 독축하기 때문이다. 홀기에 따른 제의는 전폐례(奠幣禮)-초헌례(初獻禮)-독축(讀祝)-아헌례(亞獻禮)-종헌례(終獻禮)-철변두(撤籩豆)-망료위(望燎位) 순으로 진행한다. 이때 신위가 3위이므로 전폐례 이하 각 예를 각 헌관이 포신, 토신, 서신 순으로 행하여 원위치로 돌아온 뒤 사배(四拜)를 함이 조금 다를 뿐이다.

[축문](/topic/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酺祭祝
維歲次云云 幼學 姓名 ○○○ 敢昭告于
酺神之靈 伏惟酺神 除灾降福 保我人民 報賽無斁
土神之靈 保艮社神 惠我恩德 願賜物豐 長養壽城
西神之靈 降臨西神 善良兒輩 以賜紅疫 全然無頉
謹以牲幣 醴齋粢盛 遮品式陳 祇薦于神 尙饗

제물은 제일 전날인 병일(丙日)에 준비하여 정일 자시가 가까워지면 제단에 진설한다. 제물 품목은 다음과 같다. 도량서직(稻粱黍稷, 벼와 [기장](/topic/기장))의 네 [가지](/topic/가지) 메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지만 양(粱)․서(黍)․직(稷)이 없어서 양(粱) 대신 도(稻), 쌀메 두 그릇, 서(黍)와 직(稷) 대신 차좁쌀메 두 그릇을 올렸다. 그러다가 지금은 같은 메를 두 그릇 올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쌀메 한 그릇, 차좁쌀메 한 그릇만 올린다. 희생(犧牲)은 동네에서 기르던 검은 돼지[黑豚]를 골라 털을 벗겨 내장은 꺼내고 통째로 올린다. ‘모혈(毛血)’이라 하여 돼지의 털과 피 약간을 접시에 담아 준비한다. 폐백(幣帛)은 [명주](/topic/명주)(明紬)와 [백지](/topic/백지)(白紙)를 쓴다. 3신위 몫을 준비하면서 명주는 석자 두 치, 백지는 한 권을 써 오다가 요즘은 5~7장을 각각 올린다. 과류(果類)로는 밤, [대추](/topic/대추), 비자, 귤, 배 등을 쓴다. 제주(祭酒)는 감주(甘酒)를 예주(禮酒)로 사용한다. 해어(海魚)는 포(酺) 대신 조기 말린 것을 구워서 올린다. 채소류는 [미나리](/topic/미나리)와 무채를 올린다. 이를 ‘청근(菁根)’이라 부른다.
참고문헌제주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주도, 1986)
제주도부락지 2 (제주대학교탐라문화연구소, 1990)
제주의 전통문화 (제주도교육청, 1996)
제주의 문화재(증보판) (제주도, 1998)
제주의 민속 (제주도, 1998)
제주도지 (제주특별자치도, 2006)
제주도 본향당신앙과 본풀이 (문무병, 민속원, 2008)
화산섬,제주문화재탐방 (제주문화예술재단, 2009)
제주도 [마을](/topic/마을)제 종합보고서-제주 유교식 마을제의 전승현장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진흥본부 박물관운영부, 2010)
내용제단은 [마을](/topic/마을) 금산공원 안에 있다. 상록수가 울창한 공원 한가운데에 돌을 쌓아 울타리를 두른 곳에 [포신](/topic/포신)단(酺神壇), 토신단(土神壇), 서신단(西神壇)이 있다. 제장 정면(북쪽)에 서신단과 토신단, 오른쪽에 포신단이 각각 배치돼 있다. 제단의 상석(床石)은 자연석으로 만들었고, 상석 뒤에는 지방을 써 붙일 수 있도록 비석 모양의 작은 돌을 각각 세워 놓았다. 제청 건물은 제장 남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제장의 넓이는 동서 길이 8m, 남북 길이 15m 정도로 꽤 넓고 바닥도 잘 정비돼 있다. 서신단 왼쪽에 망료위가 있고, 토신단과 포신단의 각 오른쪽에 직육면체의 돌이 하나씩 놓여 있다.

납읍리의 제단에 모시는 신은 서신(西神), 토신(土神), 포신(酺神) 세 신위(神位)이다. 세 개의 신단(神壇)에는 각각 비석 모양의 작은 돌을 세워 놓았다. 여기에 신위를 나타내는 지방을 써 붙인다. 포신단(酺神壇)에는 포신지위(酺神之位), 토신단(土神壇)에는 토신지위(土神之位), 서신단(西神壇)에는 서신지위(西神之位)라고 각각 써 붙인다. 포신은 손님신으로서 인물재해지신(人物災害之神)이고, 토신은 마을의 토지신으로서 마을 수호신이며, 서신은 홍역신(紅疫神)이다.

제사는 춘제(春祭)와 추제(秋祭)로 연 두 차례 지내다가 현재는 정월 상정일(上丁日)의 춘제만 지낸다. 상정일에 마을에서 부정한 일이 생겨 행제하지 못하게 되면 중정일(中丁日)로 연기하고, 이날에도 행제하지 못할 사유가 생기면 해일(亥日)에 지낸다. 곧 혹정혹해(或丁或亥)일에 지내는 것이다.

[연말](/topic/연말)이 되면 포제 준비를 위한 ‘포제상회[酺祭鄕會]’를 열어 제향비, 제청([제관](/topic/제관)들이 합숙 [재계](/topic/재계)할 집), 제의 준비, 제관 선출 문제 등을 논의한다. 향회에는 향장이 주장(主掌)해 오다가 향장제가 없어지면서 이장(里長)이 각 동장의 협조 아래 회를 소집한다. 이 향회에서 제관 선출과 제비(祭費)의 예산 결산을 한다. 제비는 마을의 기금 또는 마을 사람들의 부조금, 이장․동장․유지들의 찬조금으로 충당한다.

제관은 [초헌](/topic/초헌)관(初獻官), [아헌](/topic/아헌)관(亞獻官), [종헌](/topic/종헌)관(終獻官), 집례(執禮), 대축(大祝), 찬자(贊者), 알자(謁者), 봉로(奉爐), 봉향(奉香), 전작(奠爵), 사준(司樽), 봉작(奉爵), 전사관(典司官) 등 12제관(十二祭官)이다. 그러나 전사관은 정식 제관이 아니고 제물 관리를 담당한다. [헌관](/topic/헌관)(獻官)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고령자가 선출돼 제를 진행한다. 지금은 이장이 초헌관을 맡는다. 집례는 예절과 제법을 잘 아는 자로 선출하며, 대축은 축을 쓸 수 있고 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소제관(小祭官)은 원래 결혼한 사람만이 선출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미혼자도 맡는다. 제관들은 제일 사흘 전에 제청에 입재해 합숙한다. 입재 전후에는 몸 정성을 다하고 불상사가 없도록 한다. 시체를 보지 않아야 하며, 개고기 따위를 먹지 말아야 한다. 또한 비늘 없는 고기로 만든 음식은 삼간다.

정월 정일(丁日) 자시(子時)가 되면 각 제관은 청금(靑衿)에 [유건](/topic/유건)(儒巾)을 쓰고 집례가 부르는 홀기(笏記)에 따라 제례를 진행한다. 홀기는 향교의 [석전](/topic/석전)제 홀기와비슷하다. 다른 점은 진홀(搢笏, 홀을 띠에 꽂음)과 집홀(執笏, 홀을 잡아 가슴에 댐)이 없고, 소퇴궤(小退跪, 조금 물러나 꿇어앉음)가 없는 것뿐이다. 진홀과 집홀이 없는 것은 헌관들이 홀(笏)을 들지 않고 행제하기 때문이며, 소퇴궤가 없는 것은 초헌례를 지낸 뒤 [독축](/topic/독축)할 때 초헌관이 소퇴궤하지 않은 채 대축이 독축하기 때문이다. 홀기에 따른 제의는 전폐례(奠幣禮)-초헌례(初獻禮)-독축(讀祝)-아헌례(亞獻禮)-종헌례(終獻禮)-철변두(撤籩豆)-망료위(望燎位) 순으로 진행한다. 이때 신위가 3위이므로 전폐례 이하 각 예를 각 헌관이 포신, 토신, 서신 순으로 행하여 원위치로 돌아온 뒤 사배(四拜)를 함이 조금 다를 뿐이다.

[축문](/topic/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酺祭祝
維歲次云云 幼學 姓名 ○○○ 敢昭告于
酺神之靈 伏惟酺神 除灾降福 保我人民 報賽無斁
土神之靈 保艮社神 惠我恩德 願賜物豐 長養壽城
西神之靈 降臨西神 善良兒輩 以賜紅疫 全然無頉
謹以牲幣 醴齋粢盛 遮品式陳 祇薦于神 尙饗

제물은 제일 전날인 병일(丙日)에 준비하여 정일 자시가 가까워지면 제단에 진설한다. 제물 품목은 다음과 같다. 도량서직(稻粱黍稷, 벼와 [기장](/topic/기장))의 네 [가지](/topic/가지) 메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지만 양(粱)․서(黍)․직(稷)이 없어서 양(粱) 대신 도(稻), 쌀메 두 그릇, 서(黍)와 직(稷) 대신 차좁쌀메 두 그릇을 올렸다. 그러다가 지금은 같은 메를 두 그릇 올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쌀메 한 그릇, 차좁쌀메 한 그릇만 올린다. 희생(犧牲)은 동네에서 기르던 검은 돼지[黑豚]를 골라 털을 벗겨 내장은 꺼내고 통째로 올린다. ‘모혈(毛血)’이라 하여 돼지의 털과 피 약간을 접시에 담아 준비한다. 폐백(幣帛)은 [명주](/topic/명주)(明紬)와 [백지](/topic/백지)(白紙)를 쓴다. 3신위 몫을 준비하면서 명주는 석자 두 치, 백지는 한 권을 써 오다가 요즘은 5~7장을 각각 올린다. 과류(果類)로는 밤, [대추](/topic/대추), 비자, 귤, 배 등을 쓴다. 제주(祭酒)는 감주(甘酒)를 예주(禮酒)로 사용한다. 해어(海魚)는 포(酺) 대신 조기 말린 것을 구워서 올린다. 채소류는 [미나리](/topic/미나리)와 무채를 올린다. 이를 ‘청근(菁根)’이라 부른다.
참고문헌제주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주도, 1986)
제주도부락지 2 (제주대학교탐라문화연구소, 1990)
제주의 전통문화 (제주도교육청, 1996)
제주의 문화재(증보판) (제주도, 1998)
제주의 민속 (제주도, 1998)
제주도지 (제주특별자치도, 2006)
제주도 본향당신앙과 본풀이 (문무병, 민속원, 2008)
화산섬,제주문화재탐방 (제주문화예술재단, 2009)
제주도 [마을](/topic/마을)제 종합보고서-제주 유교식 마을제의 전승현장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진흥본부 박물관운영부, 2010)
유래납읍리는 예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적인 유림촌(儒林村)이다. 이에 따라 이 [마을](/topic/마을)의 모든 민간신앙 의례는 유교 색채가 농후한 것이 특징이며, 아울러 포제도 예전 그대로 유교식 제법으로 유지․보존되고 있다.

납읍리포제가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납읍리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역의 포제가 발생 연대를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주목(濟州牧) 풍속조(風俗條) 상음사(尙淫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또 봄과 가을에 남녀가 [무리](/topic/무리)지어 광양당과 차귀당에 술과 고기를 갖춰서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又於春秋 男女群聚 廣壤堂 遮歸堂 具酒肉祭神)” 여기서 남녀가 무리를 지어 술과 제물을 갖추어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했으니 이는 남녀 공동으로 지내는 마을제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자들은 남자끼리 모여 유교식으로 포제를 지내고, 여자들은 여자끼리 모여 무속의 당굿을 지낸다. 이 기록을 통해 이전의 마을제는 남녀 공동으로 신당에서 심방을 청하여 당굿으로 지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주도에 향교가 세워져 유교가 보급된 것은 조선 초기이며, 그것이 일반 민간에 널리 보급된 것은 더 후대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마을제가 유교식으로 행해[지게](/topic/지게) 된 것은 조선 초기보다 훨씬 후대인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을제는 처음에 남녀가 함께 모인 가운데 당굿으로 행해졌지만 남성 중심 사회에 유교문화가 보급․전파되면서 무속의 당굿을 미신시하는 풍조가 번지게 되고, 이로 인해 남자들은 무속 중심의 당굿에서 이탈․독립하여 유교식 포제라는 새로운 마을제를 창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형태는 조선 중엽 이후에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래납읍리는 예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적인 유림촌(儒林村)이다. 이에 따라 이 [마을](/topic/마을)의 모든 민간신앙 의례는 유교 색채가 농후한 것이 특징이며, 아울러 포제도 예전 그대로 유교식 제법으로 유지․보존되고 있다.

납읍리포제가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납읍리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역의 포제가 발생 연대를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주목(濟州牧) 풍속조(風俗條) 상음사(尙淫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또 봄과 가을에 남녀가 [무리](/topic/무리)지어 광양당과 차귀당에 술과 고기를 갖춰서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又於春秋 男女群聚 廣壤堂 遮歸堂 具酒肉祭神)” 여기서 남녀가 무리를 지어 술과 제물을 갖추어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했으니 이는 남녀 공동으로 지내는 마을제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자들은 남자끼리 모여 유교식으로 포제를 지내고, 여자들은 여자끼리 모여 무속의 당굿을 지낸다. 이 기록을 통해 이전의 마을제는 남녀 공동으로 신당에서 심방을 청하여 당굿으로 지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주도에 향교가 세워져 유교가 보급된 것은 조선 초기이며, 그것이 일반 민간에 널리 보급된 것은 더 후대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마을제가 유교식으로 행해[지게](/topic/지게) 된 것은 조선 초기보다 훨씬 후대인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을제는 처음에 남녀가 함께 모인 가운데 당굿으로 행해졌지만 남성 중심 사회에 유교문화가 보급․전파되면서 무속의 당굿을 미신시하는 풍조가 번지게 되고, 이로 인해 남자들은 무속 중심의 당굿에서 이탈․독립하여 유교식 포제라는 새로운 마을제를 창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형태는 조선 중엽 이후에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망자천도굿 비교 연구오진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경남ㆍ경북 동해안 무악 비교 연구장휘주2002
국립문화재연구소동해안별신굿장휘주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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