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혈

한국무속신앙사전
삼성혈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topic/번지) 외 7필지에 있는 사적지로, 탐라국 시조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지는 장소. 1964년 6월 2일에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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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topic/번지) 외 7필지에 있는 사적지로, 탐라국 시조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지는 장소. 1964년 6월 2일에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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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섭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topic/번지) 외 7필지에 있는 사적지로, 탐라국 시조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지는 장소. 1964년 6월 2일에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topic/번지) 외 7필지에 있는 사적지로, 탐라국 시조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지는 장소. 1964년 6월 2일에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참조[삼성혈제](/topic/삼성혈제)
참고문헌국역 태학지상 (김경수, 성균관, 1994)
[석[전대](/topic/전대)제](/topic/석전대제) (예능민속연구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건시대제 (양명일, 고량부삼성사재단, 2009)
제주 유교식 [마을](/topic/마을)제의 전승현장 (김동섭, 제주특별자치도문화진흥본부, 2010)
참조[삼성혈제](/topic/삼성혈제)
참고문헌국역 태학지상 (김경수, 성균관, 1994)
[석[전대](/topic/전대)제](/topic/석전대제) (예능민속연구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건시대제 (양명일, 고량부삼성사재단, 2009)
제주 유교식 [마을](/topic/마을)제의 전승현장 (김동섭, 제주특별자치도문화진흥본부, 2010)
내용삼성혈에 얽혀 전해 내려오는 [삼성신화](/topic/삼성신화)는 다음과 같다.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주산(主山)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毛興) 이라는 곳에 삼신인(三神人)을 동시에 탄강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의 일이다.삼신인(三神人)이 용출(湧出)하였다 하여 이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하며, 3개의 지혈(地穴)이 있다. 이 신인(神人)들을 이름하여 을나(乙那)라 하며 세 성씨의 시조이며 탐라국을 개국하였다.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topic/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으며, 자줏빛 옷에 관대를 한 사자(使者)가 있었다. 사자가 옥함을 연즉 청의(靑衣)를 입고 자색(姿色)이 출중하고 품질(稟質, 품성)이 단아(端雅)한 공주(公主) 세 사람이 좌석을 정제(整齊, 정돈하여 [가지](/topic/가지)런함)하여 함께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topic/오곡)의 [종자](/topic/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어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 하여 기뻐하였다.사자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량국(碧浪國, 동해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라)의 사자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 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자소각(紫宵閣, 하늘에 있다고 하는 자줏빛 누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삼신인(三神人)이 강림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므로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항려(伉儷, 짝, 남편과 아내)의 예식을 갖추어 큰 국업(國業, 나라를 일으킴)을 성취 하시옵소서 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동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에 삼신인은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공주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기초](/topic/기초)가 됐다 하였다.그래서 자줏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연혼포(延婚浦)라 하며, 지금도 세 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연못을 혼인지(婚姻池)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신방굴(神房窟)이라 하고 그 안에 각기 세 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활 쏜 지역을 사시장올악(射矢長兀岳)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삼사석(三射石)이라 한다.그 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爵號)를 받았다. 또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며 해상교역 활동도 하면서 수천 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고 한다.삼성혈에서 이루어지는 제향으로는 매년 4월 10일에 춘기대제를, 10월 10일에는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각각 봉향하고 있다. 12월 10일에는 건시대제라 하여 혈단에서 제를 지내고 이다. 모든 [제관](/topic/제관)은 왕에 대한 예우로 금관[제복](/topic/제복)을 착용하여 사흘 전에 입재하여 목욕재계하고 제향에 임한다. 지금은 조선시대 때 국제로 모신 것과 달리 제주도민제로 봉행되고 있다. [초헌](/topic/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topic/아헌)관과 [종헌](/topic/종헌)관은 덕망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각각 맡아 하고 있다.
내용삼성혈에 얽혀 전해 내려오는 [삼성신화](/topic/삼성신화)는 다음과 같다.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주산(主山)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毛興) 이라는 곳에 삼신인(三神人)을 동시에 탄강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의 일이다.삼신인(三神人)이 용출(湧出)하였다 하여 이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하며, 3개의 지혈(地穴)이 있다. 이 신인(神人)들을 이름하여 을나(乙那)라 하며 세 성씨의 시조이며 탐라국을 개국하였다.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topic/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으며, 자줏빛 옷에 관대를 한 사자(使者)가 있었다. 사자가 옥함을 연즉 청의(靑衣)를 입고 자색(姿色)이 출중하고 품질(稟質, 품성)이 단아(端雅)한 공주(公主) 세 사람이 좌석을 정제(整齊, 정돈하여 [가지](/topic/가지)런함)하여 함께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topic/오곡)의 [종자](/topic/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어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 하여 기뻐하였다.사자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량국(碧浪國, 동해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라)의 사자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 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자소각(紫宵閣, 하늘에 있다고 하는 자줏빛 누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삼신인(三神人)이 강림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므로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항려(伉儷, 짝, 남편과 아내)의 예식을 갖추어 큰 국업(國業, 나라를 일으킴)을 성취 하시옵소서 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동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에 삼신인은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공주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기초](/topic/기초)가 됐다 하였다.그래서 자줏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연혼포(延婚浦)라 하며, 지금도 세 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연못을 혼인지(婚姻池)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신방굴(神房窟)이라 하고 그 안에 각기 세 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활 쏜 지역을 사시장올악(射矢長兀岳)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삼사석(三射石)이라 한다.그 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爵號)를 받았다. 또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며 해상교역 활동도 하면서 수천 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고 한다.삼성혈에서 이루어지는 제향으로는 매년 4월 10일에 춘기대제를, 10월 10일에는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각각 봉향하고 있다. 12월 10일에는 건시대제라 하여 혈단에서 제를 지내고 이다. 모든 [제관](/topic/제관)은 왕에 대한 예우로 금관[제복](/topic/제복)을 착용하여 사흘 전에 입재하여 목욕재계하고 제향에 임한다. 지금은 조선시대 때 국제로 모신 것과 달리 제주도민제로 봉행되고 있다. [초헌](/topic/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topic/아헌)관과 [종헌](/topic/종헌)관은 덕망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각각 맡아 하고 있다.
형태처음 조성될 당시만 해도 개소리,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인가(人家)와 멀리 떨어진 신성한 곳으로서 탐라국 시조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에 적소였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에 광양성당, 광양초등학교, 보성시장과 주택가가 자리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사적으로 지정된 지역은 모두 3만 3,833㎡에 이르며 [돌담](/topic/돌담)이 둘러쳐진 가운데 전체적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다.

원형의 돌담은 각석을 겹담으로 쌓아 둘렀다. 삼성혈은 조선시대 1526년(중종 21)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돌 울타리를 쌓고 혈(穴) 북쪽에 홍문(紅門)과 혈비(穴碑)를 세워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함으로써 성역화되었고 1772년(영조 48)에 양세현(梁世絢) 목사가 바깥 [담장](/topic/담장)을 쌓아 소나무를 심게 하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향청(鄕廳)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삼성혈을 자세히 살펴보면 입구, 제의 준비처, 제의처, 전시관 등으로 4개 지역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구에는 홍살문(높이 300㎝, [기둥](/topic/기둥) 직경 30㎝)이 세워져 있고, [돌하르방](/topic/돌하르방)(높이 220㎝)이 함께 놓여 있다. 그 옆에 ‘탐라국발상지’라고 새겨진 자연석과 사적지 표지(길이 77㎝, 폭 28㎝, 두께 13㎝)가 세워져 있어 도심의 다른 지역과 구분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자란 수목들이 수림을 이루고 있다. 이 홍살문은 조선 중종 21년 목사 이수동에 의한 것으로, 당시 중종이 홍문과 표단을 내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적지임을 알리는 한글과 영문 표기의 안내문을 지나면 출입구인 건시문을 만난다. 삼성혈로들어 오는 첫 [대문](/topic/대문)인 건시문은 삼문 형태로 [기와](/topic/기와)를 얹었다. 양쪽 앞에는 돌하르방이 놓여 있다. 혈 안에는 울창한 수림과 몇 개의 건물을 연결하는 관람로가 갖추어져 있다. 관람로는 현무암을 판석(板石)으로 다듬어 깔아 비가 내려도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제의 준비처에는 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건시문을 지나 왼쪽에 붉은 흙인 송이를 바닥에 깔고 자리하고 있는 숭보당을 중심으로 동남쪽에 전사청, 숭보당과 전사청 뒷부분에 수직사, 수직사 뒤쪽에 종무청, 전사청 뒤쪽에 제기고가 각각 자리를 잡고 있다.

전사청(奠祀廳)은 제향(祭享)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집으로서 1827년(순조 27)에 세워진 뒤 몇 차례 이건(移建) 중수(重修)하였으며, 2000년 9월에 중건(重建)하였다. 숭보당(崇報堂)은 1849년(헌종 15)에 뛰어난 선비를 두어 면학하던 재사(齋舍)로서 몇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재생들이 학업을 연마하던 숭보당은 1974년 12월에 현 위치로옮겼다. 건물은 전면 7칸과 측면 4칸인 5량집으로 앞너비 15.95m, 옆너비 6.62m이다. [지붕](/topic/지붕)은 팔작형이다. 높이 0.82m의 부[초석](/topic/초석) 위에 높이 0.75m, 지름 0.28m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또 주두(柱頭) 위에 창방과 도리를 사래 [맞춤](/topic/맞춤)하였으며, 끝[막새](/topic/막새)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수직사(守直舍)는 삼성혈을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이었으며, 종무청은 삼성혈의 제반 업무를 맡아 보는 재단사무실로 이용되는 곳이다. 제기고는 제의에 사용되는 제기와 용품을 보관하는 곳이다.

제의처에는 입구에 삼성문이 세워져 있고 안쪽에 삼성전이 있다. 후면 북동쪽에 북문, 남쪽에 전향문이 있다. 전향문 서쪽에 혈단문이 있고, 그 안쪽에 삼성혈, 혈단, 혈비가자리하고 있다.

삼성전은 삼성사(三姓祠)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분향](/topic/분향)(焚香)하는 곳이다. 삼성전의 입구인 삼성문에는 [향로](/topic/향로)와 향이 준비되어 있다.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삼성전이다. 지금부터 약 4,300여 년 전 탐라(耽羅)를 창시한 삼을나(三乙那)의 [위패](/topic/위패)가 [봉안](/topic/봉안)된 묘사(廟祠)이다. 신라에 입조(入朝)한 성주(星主), 왕자(王子), 도내(徒內) 삼고씨(三高氏)가 오늘쪽에 배향되고 있다. 1698년(숙종 24)에 유한명(柳漢明) 목사가 혈(穴)의 동쪽에 삼을나묘(三乙那廟, 지금의 三姓殿)를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 후 1703년(숙종 29)에 이형상 목사가 가락천 동쪽으로 삼성전을 옮겼다. 1785년에는 정조가「 삼성사(三姓祠)」라는 [편액](/topic/편액)을 친히 하사하여 왕(王)에 대한 예우로서 국제(國祭)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종 8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사우(祠宇)가 한때 헐렸다가 고종 27년에 다시 세웠고, 1910년에 중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에 낡은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고 웅건한 모습으로 또다시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전면 6칸, 측면 4칸의 7량 집이다. 면적은 앞 너비 12.05m, 옆 너비 5.5m이고 지붕은 팔작형이다. 또 높이 0.15m인 원형 주춧돌 위에 높이 1.55m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을 사래 맞춤하였다. 양식은 주심포이며, 막새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그 후 수차례 중수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서원(書院)인 삼성사는 1740년(영조 16)에 안경운(安慶運)목사가 재생(齋生)을 두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사액(賜額)이 내려진 것은 1785년(정조 9) 이월이었다.제주 유학(幼學) 양경천(梁擎天)의 상언(上言)에 따라 예관(禮官) 고택겸(高宅謙)이 와서 ‘삼성사’란 왕의 어필 액자와 절목을 내렸다. 삼성사에는 장의(掌議) 한 명과 유사(有司) 두 명, [정원](/topic/정원) 내의 30명, 정원 외 70명의 학생을 두었다.

전시관은 2001년 12월에 개관하였다. 전시실과 영상실을 두고 있는 한식 [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전시실에서는 삼성혈과 관련된 [현판](/topic/현판), 고문헌, 제기 등 실증적인 자료들을 전시함으로써 고대탐라(제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삼성혈의 신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상영하는 등 신비스러운 제주(탐라)의 역사와 이 고장 선조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탐라 개국신화를 영상화하여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탐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 주고 있는 곳이다.

이밖에도 오랜 유적지가 지니는 오래된 다양한 수목과 고풍스런 정자 및 돌담길·유적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 사람들의 공로비 등은 제주를 찾는 관광객은 물론 오고가는 철새의 도심 속 정류지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이 세 개의 지혈은 주위가 수백 년 된 고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든 나뭇[가지](/topic/가지)가 혈을 향하여 경배하듯이 신비한 자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아[무리](/topic/무리)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내려도 일년 내내 고이거나 쌓이는 일이 없으며, 주위의 나무들이 혈을 중심으로 모두 수그러져 있어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형태처음 조성될 당시만 해도 개소리,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인가(人家)와 멀리 떨어진 신성한 곳으로서 탐라국 시조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에 적소였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에 광양성당, 광양초등학교, 보성시장과 주택가가 자리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사적으로 지정된 지역은 모두 3만 3,833㎡에 이르며 [돌담](/topic/돌담)이 둘러쳐진 가운데 전체적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다.

원형의 돌담은 각석을 겹담으로 쌓아 둘렀다. 삼성혈은 조선시대 1526년(중종 21)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돌 울타리를 쌓고 혈(穴) 북쪽에 홍문(紅門)과 혈비(穴碑)를 세워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함으로써 성역화되었고 1772년(영조 48)에 양세현(梁世絢) 목사가 바깥 [담장](/topic/담장)을 쌓아 소나무를 심게 하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향청(鄕廳)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삼성혈을 자세히 살펴보면 입구, 제의 준비처, 제의처, 전시관 등으로 4개 지역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구에는 홍살문(높이 300㎝, [기둥](/topic/기둥) 직경 30㎝)이 세워져 있고, [돌하르방](/topic/돌하르방)(높이 220㎝)이 함께 놓여 있다. 그 옆에 ‘탐라국발상지’라고 새겨진 자연석과 사적지 표지(길이 77㎝, 폭 28㎝, 두께 13㎝)가 세워져 있어 도심의 다른 지역과 구분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자란 수목들이 수림을 이루고 있다. 이 홍살문은 조선 중종 21년 목사 이수동에 의한 것으로, 당시 중종이 홍문과 표단을 내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적지임을 알리는 한글과 영문 표기의 안내문을 지나면 출입구인 건시문을 만난다. 삼성혈로들어 오는 첫 [대문](/topic/대문)인 건시문은 삼문 형태로 [기와](/topic/기와)를 얹었다. 양쪽 앞에는 돌하르방이 놓여 있다. 혈 안에는 울창한 수림과 몇 개의 건물을 연결하는 관람로가 갖추어져 있다. 관람로는 현무암을 판석(板石)으로 다듬어 깔아 비가 내려도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제의 준비처에는 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건시문을 지나 왼쪽에 붉은 흙인 송이를 바닥에 깔고 자리하고 있는 숭보당을 중심으로 동남쪽에 전사청, 숭보당과 전사청 뒷부분에 수직사, 수직사 뒤쪽에 종무청, 전사청 뒤쪽에 제기고가 각각 자리를 잡고 있다.

전사청(奠祀廳)은 제향(祭享)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집으로서 1827년(순조 27)에 세워진 뒤 몇 차례 이건(移建) 중수(重修)하였으며, 2000년 9월에 중건(重建)하였다. 숭보당(崇報堂)은 1849년(헌종 15)에 뛰어난 선비를 두어 면학하던 재사(齋舍)로서 몇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재생들이 학업을 연마하던 숭보당은 1974년 12월에 현 위치로옮겼다. 건물은 전면 7칸과 측면 4칸인 5량집으로 앞너비 15.95m, 옆너비 6.62m이다. [지붕](/topic/지붕)은 팔작형이다. 높이 0.82m의 부[초석](/topic/초석) 위에 높이 0.75m, 지름 0.28m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또 주두(柱頭) 위에 창방과 도리를 사래 [맞춤](/topic/맞춤)하였으며, 끝[막새](/topic/막새)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수직사(守直舍)는 삼성혈을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이었으며, 종무청은 삼성혈의 제반 업무를 맡아 보는 재단사무실로 이용되는 곳이다. 제기고는 제의에 사용되는 제기와 용품을 보관하는 곳이다.

제의처에는 입구에 삼성문이 세워져 있고 안쪽에 삼성전이 있다. 후면 북동쪽에 북문, 남쪽에 전향문이 있다. 전향문 서쪽에 혈단문이 있고, 그 안쪽에 삼성혈, 혈단, 혈비가자리하고 있다.

삼성전은 삼성사(三姓祠)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분향](/topic/분향)(焚香)하는 곳이다. 삼성전의 입구인 삼성문에는 [향로](/topic/향로)와 향이 준비되어 있다.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삼성전이다. 지금부터 약 4,300여 년 전 탐라(耽羅)를 창시한 삼을나(三乙那)의 [위패](/topic/위패)가 [봉안](/topic/봉안)된 묘사(廟祠)이다. 신라에 입조(入朝)한 성주(星主), 왕자(王子), 도내(徒內) 삼고씨(三高氏)가 오늘쪽에 배향되고 있다. 1698년(숙종 24)에 유한명(柳漢明) 목사가 혈(穴)의 동쪽에 삼을나묘(三乙那廟, 지금의 三姓殿)를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 후 1703년(숙종 29)에 이형상 목사가 가락천 동쪽으로 삼성전을 옮겼다. 1785년에는 정조가「 삼성사(三姓祠)」라는 [편액](/topic/편액)을 친히 하사하여 왕(王)에 대한 예우로서 국제(國祭)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종 8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사우(祠宇)가 한때 헐렸다가 고종 27년에 다시 세웠고, 1910년에 중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에 낡은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고 웅건한 모습으로 또다시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전면 6칸, 측면 4칸의 7량 집이다. 면적은 앞 너비 12.05m, 옆 너비 5.5m이고 지붕은 팔작형이다. 또 높이 0.15m인 원형 주춧돌 위에 높이 1.55m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을 사래 맞춤하였다. 양식은 주심포이며, 막새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그 후 수차례 중수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서원(書院)인 삼성사는 1740년(영조 16)에 안경운(安慶運)목사가 재생(齋生)을 두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사액(賜額)이 내려진 것은 1785년(정조 9) 이월이었다.제주 유학(幼學) 양경천(梁擎天)의 상언(上言)에 따라 예관(禮官) 고택겸(高宅謙)이 와서 ‘삼성사’란 왕의 어필 액자와 절목을 내렸다. 삼성사에는 장의(掌議) 한 명과 유사(有司) 두 명, [정원](/topic/정원) 내의 30명, 정원 외 70명의 학생을 두었다.

전시관은 2001년 12월에 개관하였다. 전시실과 영상실을 두고 있는 한식 [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전시실에서는 삼성혈과 관련된 [현판](/topic/현판), 고문헌, 제기 등 실증적인 자료들을 전시함으로써 고대탐라(제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삼성혈의 신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상영하는 등 신비스러운 제주(탐라)의 역사와 이 고장 선조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탐라 개국신화를 영상화하여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탐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 주고 있는 곳이다.

이밖에도 오랜 유적지가 지니는 오래된 다양한 수목과 고풍스런 정자 및 돌담길·유적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 사람들의 공로비 등은 제주를 찾는 관광객은 물론 오고가는 철새의 도심 속 정류지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이 세 개의 지혈은 주위가 수백 년 된 고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든 나뭇[가지](/topic/가지)가 혈을 향하여 경배하듯이 신비한 자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아[무리](/topic/무리)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내려도 일년 내내 고이거나 쌓이는 일이 없으며, 주위의 나무들이 혈을 중심으로 모두 수그러져 있어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무당 귀물 연구-「삼국유사」의 삼부인과 무당의 거울·칼·방울을 중심으로양종승2001
도서출판 民俗苑한국의 굿하효길 외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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