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발산마을미륵당산

한국무속신앙사전
전라남도 무안군 발산[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의 신체. 1987년 6월1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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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무안군 발산[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의 신체. 1987년 6월1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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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인주
정의전라남도 무안군 발산[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의 신체. 1987년 6월1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전라남도 무안군 발산[마을](/topic/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의 신체. 1987년 6월1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내용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11시쯤에 [마을](/topic/마을)의 평안을 위해 미륵당산을 주신으로 한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를 지내는 목적은 농사풍년, 재액소멸, 마을단합 등이다. [제관](/topic/제관)은 [헌관](/topic/헌관) 세 명,축관 한 명, 집사 두 명을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하고 목욕재계를 하면서 근신케 한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조기, 나물, 술, 과일, 포 등을 장만한다. 제사는 설상-[분향](/topic/분향)-재배-[초헌](/topic/초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음복](/topic/음복) 순으로 지낸다.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제상](/topic/제상)의 차이는 없다. 제사가 있은 이튿날부터 2~3일간은 [농악](/topic/농악)과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하며 동민이 한데 어울려 즐긴다. 그러나 농악과 줄다리기는 오래전에 중단되었으며, 지금은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제사는 2000년쯤부터 마을 청년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다시 모시게 되었지만 농악과줄다리기는 마을 주민이 줄고 젊은 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인의 인구가 많아지면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내용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11시쯤에 [마을](/topic/마을)의 평안을 위해 미륵당산을 주신으로 한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를 지내는 목적은 농사풍년, 재액소멸, 마을단합 등이다. [제관](/topic/제관)은 [헌관](/topic/헌관) 세 명,축관 한 명, 집사 두 명을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하고 목욕재계를 하면서 근신케 한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조기, 나물, 술, 과일, 포 등을 장만한다. 제사는 설상-[분향](/topic/분향)-재배-[초헌](/topic/초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음복](/topic/음복) 순으로 지낸다.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제상](/topic/제상)의 차이는 없다. 제사가 있은 이튿날부터 2~3일간은 [농악](/topic/농악)과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하며 동민이 한데 어울려 즐긴다. 그러나 농악과 줄다리기는 오래전에 중단되었으며, 지금은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제사는 2000년쯤부터 마을 청년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다시 모시게 되었지만 농악과줄다리기는 마을 주민이 줄고 젊은 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인의 인구가 많아지면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형태발산[마을](/topic/마을)에는 장승인 할아버지(미륵)신이 거처하는 곳과 입석인 할머니(미륵)신이 거처하는 두 곳이 있다. 화강석으로 되어 있는 할아버지당산은 높이 187㎝, 둘레 110㎝이다. 마을 앞 고깃동 아래 산길리 신등마을로 가는 작은 길 옆에 세워져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입자가 매우 거칠고 표면에는 굵은 알갱이가 울퉁불퉁하게 드러나 있다. 이는 풍화하는 과정에서 약한 부분이 부식되어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네모난 돌[기둥](/topic/기둥)의 전면에는 어렴풋하지만 무덤 앞에 있는 석상처럼 의관을 갖추고 있고, 얼굴도 눈 코 입을 선각으로나타내어 입체감은 없다. 머리에는 [벙거지](/topic/벙거지)형 [모자](/topic/모자)를 씌워 놓았으며, 몸체와는 별개의 돌을 조각하여 시멘트로 접합하였다. 그리고 턱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두툼한 수염이 보인다. 할머니당산은 할아버지당산에서 150m 거리에 있는 마을 앞 농로에 있다. 할머니당산은 조각 흔적이 전혀 없는 자연 입석으로 높이 160㎝, 두께 15㎝의 화강석이다.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은 경지정리 때 농로를 따라 자리를 약간 옮겼다고 한다.
형태발산[마을](/topic/마을)에는 장승인 할아버지(미륵)신이 거처하는 곳과 입석인 할머니(미륵)신이 거처하는 두 곳이 있다. 화강석으로 되어 있는 할아버지당산은 높이 187㎝, 둘레 110㎝이다. 마을 앞 고깃동 아래 산길리 신등마을로 가는 작은 길 옆에 세워져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입자가 매우 거칠고 표면에는 굵은 알갱이가 울퉁불퉁하게 드러나 있다. 이는 풍화하는 과정에서 약한 부분이 부식되어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네모난 돌[기둥](/topic/기둥)의 전면에는 어렴풋하지만 무덤 앞에 있는 석상처럼 의관을 갖추고 있고, 얼굴도 눈 코 입을 선각으로나타내어 입체감은 없다. 머리에는 [벙거지](/topic/벙거지)형 [모자](/topic/모자)를 씌워 놓았으며, 몸체와는 별개의 돌을 조각하여 시멘트로 접합하였다. 그리고 턱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두툼한 수염이 보인다. 할머니당산은 할아버지당산에서 150m 거리에 있는 마을 앞 농로에 있다. 할머니당산은 조각 흔적이 전혀 없는 자연 입석으로 높이 160㎝, 두께 15㎝의 화강석이다.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은 경지정리 때 농로를 따라 자리를 약간 옮겼다고 한다.
의의발산[마을](/topic/마을)의 [미륵당](/topic/미륵당)산은 불교의 미륵신앙과 마을신앙의 습합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마을신앙과 불교신앙 간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유형문화 자료이다. 특히 입석과 장승이 동시에 마을신앙의 신체가 되고 있어서 장승의 민속신앙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장승과 입석의 민속문화사적 관계를 규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의의가 크다.미륵당산의 형성 과정과 관련된 미륵과 석가의 경쟁담은 신화적 의미를 지니며, 할아버지당산이 [벙거지](/topic/벙거지)형의 석장승이라는 사실은 호남 지방의 장승문화와 제주도지방의 돌하루방문화를 비교연구할 수 있는 비교민속학적 의의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무안군의 문화유적 (목[포대](/topic/포대)박물관, 1986)
[마을](/topic/마을)유래지 (무안군, 1987)
전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6)
의의발산[마을](/topic/마을)의 [미륵당](/topic/미륵당)산은 불교의 미륵신앙과 마을신앙의 습합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마을신앙과 불교신앙 간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유형문화 자료이다. 특히 입석과 장승이 동시에 마을신앙의 신체가 되고 있어서 장승의 민속신앙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장승과 입석의 민속문화사적 관계를 규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의의가 크다.미륵당산의 형성 과정과 관련된 미륵과 석가의 경쟁담은 신화적 의미를 지니며, 할아버지당산이 [벙거지](/topic/벙거지)형의 석장승이라는 사실은 호남 지방의 장승문화와 제주도지방의 돌하루방문화를 비교연구할 수 있는 비교민속학적 의의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무안군의 문화유적 (목[포대](/topic/포대)박물관, 1986)
[마을](/topic/마을)유래지 (무안군, 1987)
전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6)
유래충남 천안에서 살던 밀양 박씨가 잦은 흉년으로 살기 어려워지자 1680년쯤에 좋은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발산[마을](/topic/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앞에는 바다가 인접해 있고 지세가 좋아 500년 이상을 안주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서당골’, ‘비석거리’라고 불리다가 마을 앞 절의 스님이 들고다니던 바라 모양으로 마을이 생겼다 하여 바리때 ‘발(鉢)’ 자와 마을 뒤편 산의 ‘뫼 산(山)’ 자를 따서 ‘발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 장승과 입석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불교의 미륵보살과 석가가 도술시합을 하다가 미륵보살이 약해 힘을 비등하게 하기 위해 한쪽에는 청룡등을 세워 할머니당산이라 했고, 다른 한쪽은 백호등[고지](/topic/고지)등을 세워 할아버지당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유래충남 천안에서 살던 밀양 박씨가 잦은 흉년으로 살기 어려워지자 1680년쯤에 좋은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발산[마을](/topic/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앞에는 바다가 인접해 있고 지세가 좋아 500년 이상을 안주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서당골’, ‘비석거리’라고 불리다가 마을 앞 절의 스님이 들고다니던 바라 모양으로 마을이 생겼다 하여 바리때 ‘발(鉢)’ 자와 마을 뒤편 산의 ‘뫼 산(山)’ 자를 따서 ‘발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 장승과 입석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불교의 미륵보살과 석가가 도술시합을 하다가 미륵보살이 약해 힘을 비등하게 하기 위해 한쪽에는 청룡등을 세워 할머니당산이라 했고, 다른 한쪽은 백호등[고지](/topic/고지)등을 세워 할아버지당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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