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황연동유령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강원도 태백시 황연동 유령(느릅재)에서 매년 음력 사월에 행하는 산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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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태백시 황연동 유령(느릅재)에서 매년 음력 사월에 행하는 산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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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길
정의강원도 태백시 황연동 유령(느릅재)에서 매년 음력 사월에 행하는 산신제.
정의강원도 태백시 황연동 유령(느릅재)에서 매년 음력 사월에 행하는 산신제.
참조태백 황연동 유령산령당
참고문헌한국의 [마을](/topic/마을)신앙 CD (국립민속박물관, 2007)
참조태백 황연동 유령산령당
참고문헌한국의 [마을](/topic/마을)신앙 CD (국립민속박물관, 2007)
내용느릅령[楡嶺]은 태백시와 삼척시 도계읍 사이에 있는 고개다. 이곳에서 매년 제의가 있어 왔다. 태백시 지역도 예전에는 삼척시 관내였기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1981년 태백시가 만들어지면서 이곳의 행정편제가 태백시 관내가 되었다. 삼척시 관내에 속하였을 때에는 삼척시 도계읍에서 주관하였으나 이제는 태백시에서 주관한다. 유령제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전승되는 과정에서 한때 제의가 중단된 적도 있고, [노제](/topic/노제)로 대행한 적도 있다.


1. 제의 일시 : 매년 음력 사월 열엿샛날 오전 11시쯤에 제향한다.


2. 당집과 당목 : 당집이 있는 곳은 황연동 14통 솔안[마을](/topic/마을)로, 예전의 통리1구에 해당한다. 황연동은 황지2동과 연화동(통리 부근)이 행정적으로 합해지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2005년 4월 회원들이 회비를 모아 유령산령당(楡嶺山靈堂)을 중건하였다. 당시 산당을 중건하기 위해 평생회비로 1인당 20만 원을 받았다. 평생회원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무사안녕을 비는 소지를 올려준다. 현재 회원은 사망 100여 명, 생존 200여 명이다. 산당 안에 화분 세 폭이 걸려 있다. 전승되어 오던 전설을 형상화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령, 오른쪽에는 효자 내외, 왼쪽에는 산과 나무가 각각 그려져 있다.


3. 신위 : 유령산산신령이다.


4. [축문](/topic/축문)과 홀기 : 축문과 홀기는 전승되어 오던 것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1995년에 박광옥(1941년생)이 수정하였다. 홀기 역시 2000년쯤에 박광옥이 수정하였다. 원래의 홀기에는 [음복](/topic/음복)례가 나중에 나오지만 수정한 홀기에는 망예례(望禮禮,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는 의식)가 나중에 나온다. 그리고 [분축](/topic/분축)례(焚祝禮, 축과 지방을 내려 사르는 의식)를 할 때 회원들의 소지 역시 함께 사르는 것을 추가하였다.


5. [제관](/topic/제관) : 제관의 선정 등 제반 사항은 유령제위원회에서 주관한다. 현재 유령제위원회 회장은 태백시 박광옥이다. 유령제위원회에서 [헌관](/topic/헌관)을 정하지만 [초헌](/topic/초헌)관은 시장, [아헌](/topic/아헌)관은 시의장으로 거의 고정이다. [종헌](/topic/종헌)관만 매년 새로 선정한다. 종헌관은 주로 관내 교육장이지만 종교 문제로 거절하면 상공회의소 소장이나 문화원장 등이 대신한다. 2006년쯤에 금관[조복](/topic/조복)(金冠朝服)을 새로 장만하였다. 제물을 장만하는 일은 당주가 맡는다. 당주는 제의 치르기 한 달 전에 새로 뽑으며 주로 솔안마을 사람 가운데에서 선정한다. 제당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만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제물 : 제주(祭酒)는 당주가 음력 사월 초하룻날에 누룩과 쌀 2말 정도를 빚어 직접 담근다. 보통 청주 15말 분량은 나온다. 주요 희생은 소이다. 소는 제사 하루 전날 도살장에서 기술자를 초빙해 당주 집에서 잡는다. 기술자에게는 보통 수고비10만 원을 지불한다. 소를 잡은 다음 갈비나 꼬리 등은 팔기도 하지만 팔리지 않으면 제사 이튿날 국을 끓이는 데 사용한다. 쇠[가죽](/topic/가죽)도 그슬린 다음 국을 끓이는 데 집어넣는다. 제의에 사용하는 소는 500㎏ 정도 된다. 소를 잡으면 반 근 정도로 끊어 고기 약 500점을 만든다. 이것을 살짝 구워서 산령제에 한 꼬치를 사용하고, 유령제에는 7~10꼬치를 큰 [바구니](/topic/바구니)에 담아 사용한다. 쇠머리도 [제상](/topic/제상)에 올린다. 그러나 다리나 꼬리는 올리지 않는다. 진설은 유령제 당주가 직접 한다. 제물 차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을 두 개 차렸다. 육․포․술․과일([수박](/topic/수박), 배, [사과](/topic/사과), [참외](/topic/참외), [대추](/topic/대추), 곶감) 등은 두 그릇씩이고, 쇠머리를 비롯한 탕․채소(고사리)․대구포 등은 한 그릇씩이다. 메는 생용([새옹](/topic/새옹))에다 짓는다. 신령 앞에 놓는 두 그릇은 산신령 내외에게 바치는 것이고, 그 앞에 양쪽으로 놓는 두 그릇은 신령을 보좌하는 좌우 동자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오늘날 유령제의 운영 경비는 회원들의 회비에서 나온다. 1970~1980년대까지는 매년 모금을 하여 유령제를 지냈다. 그러나 점차 기금 마련이 어려워지자 회원제를 만들었다. 처음에 평생회비는 1만원부터 시작했다. 이후 2만 원, 5만 원, 20만 원을 거쳐 2008년부터는 30만 원이다. 회원의 자격 요건은 자유롭다. 나이, 성별, 지역을 불문하고 유령산신령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 유령제 행사를 위해 유령제위원회와는 별도로 유령제봉사회를 1980~1990년에 만들었다. 회원 명단은 목판에 새겨 당 안에 걸어놓았다. 산당은 평상시 개방하지는 않지만 이용을 원하는 이가 있으면 빌려 주기도 한다. 유령제가 열리면 찬조금, 축원금 등이 들어온다. 이것을 재원으로 하여 기금을 만들어 운영 경비에 충당하고 있다. 매년 유령제에 사용되는 비용은 소값에 따라 변동이 심하다. 대체로 400만~600만 원 든다.


7. 제의 절차 : 당주는 음력 사월 초하룻날이 되면 제당에 제주를 봉하고 [금줄](/topic/금줄)을 친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고 그 사이에 [한지](/topic/한지)를 잘라 넣어 만든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산령제를 먼저 올린다. 산령제는 태백산산신령에게 지내는 망제(望祭)로, 유령(느릅령)이 태백산 준령에 있기 때문에 지낸다. 산령제를 지내는 시간은 보통 유령제를 시작하기 전에 30여 분이면 끝난다. 산령제에 사용하는 제물은 과일 세 개, 메 한 그릇, 포 한 개, 쇠고기 반근(통째로), 술 등이다. 산령제는 유령제위원회 회장이 [헌작](/topic/헌작)․재배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해 당주로 뽑힌 이가 헌작․재배를 할 수도 있다. 고축을 하지 않으므로 헌작은 단잔이다.

제의는 홀기에 준하여 진행한다. 유교식이지만 소지는 올린다. 한편 유령제에서 소지를 올리는 방식이 특이하다. 한지를 접어 한 장씩 소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소지 몇백 장이 들어갈 수 있는 소지함을 미리 만들어 분축례를 할 때 소지함째 불른다. 지금은 하지 않지만,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퇴송](/topic/퇴송)을 하였다.제의가 끝나면 음복한 다음 모두 점심을 먹는다. 점심은 소고기국밥이다. 또 제사에 사용한 쇠고기 반 근과 떡 등을 집어넣은 도시락을 만들어 현장에 온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보통 제의는 낮 12시쯤이면 마치지만 집행부는 12시가 넘어도 결산을 하느라고 분주하다.
내용느릅령[楡嶺]은 태백시와 삼척시 도계읍 사이에 있는 고개다. 이곳에서 매년 제의가 있어 왔다. 태백시 지역도 예전에는 삼척시 관내였기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1981년 태백시가 만들어지면서 이곳의 행정편제가 태백시 관내가 되었다. 삼척시 관내에 속하였을 때에는 삼척시 도계읍에서 주관하였으나 이제는 태백시에서 주관한다. 유령제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전승되는 과정에서 한때 제의가 중단된 적도 있고, [노제](/topic/노제)로 대행한 적도 있다.


1. 제의 일시 : 매년 음력 사월 열엿샛날 오전 11시쯤에 제향한다.


2. 당집과 당목 : 당집이 있는 곳은 황연동 14통 솔안[마을](/topic/마을)로, 예전의 통리1구에 해당한다. 황연동은 황지2동과 연화동(통리 부근)이 행정적으로 합해지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2005년 4월 회원들이 회비를 모아 유령산령당(楡嶺山靈堂)을 중건하였다. 당시 산당을 중건하기 위해 평생회비로 1인당 20만 원을 받았다. 평생회원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무사안녕을 비는 소지를 올려준다. 현재 회원은 사망 100여 명, 생존 200여 명이다. 산당 안에 화분 세 폭이 걸려 있다. 전승되어 오던 전설을 형상화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령, 오른쪽에는 효자 내외, 왼쪽에는 산과 나무가 각각 그려져 있다.


3. 신위 : 유령산산신령이다.


4. [축문](/topic/축문)과 홀기 : 축문과 홀기는 전승되어 오던 것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1995년에 박광옥(1941년생)이 수정하였다. 홀기 역시 2000년쯤에 박광옥이 수정하였다. 원래의 홀기에는 [음복](/topic/음복)례가 나중에 나오지만 수정한 홀기에는 망예례(望禮禮,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는 의식)가 나중에 나온다. 그리고 [분축](/topic/분축)례(焚祝禮, 축과 지방을 내려 사르는 의식)를 할 때 회원들의 소지 역시 함께 사르는 것을 추가하였다.


5. [제관](/topic/제관) : 제관의 선정 등 제반 사항은 유령제위원회에서 주관한다. 현재 유령제위원회 회장은 태백시 박광옥이다. 유령제위원회에서 [헌관](/topic/헌관)을 정하지만 [초헌](/topic/초헌)관은 시장, [아헌](/topic/아헌)관은 시의장으로 거의 고정이다. [종헌](/topic/종헌)관만 매년 새로 선정한다. 종헌관은 주로 관내 교육장이지만 종교 문제로 거절하면 상공회의소 소장이나 문화원장 등이 대신한다. 2006년쯤에 금관[조복](/topic/조복)(金冠朝服)을 새로 장만하였다. 제물을 장만하는 일은 당주가 맡는다. 당주는 제의 치르기 한 달 전에 새로 뽑으며 주로 솔안마을 사람 가운데에서 선정한다. 제당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만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제물 : 제주(祭酒)는 당주가 음력 사월 초하룻날에 누룩과 쌀 2말 정도를 빚어 직접 담근다. 보통 청주 15말 분량은 나온다. 주요 희생은 소이다. 소는 제사 하루 전날 도살장에서 기술자를 초빙해 당주 집에서 잡는다. 기술자에게는 보통 수고비10만 원을 지불한다. 소를 잡은 다음 갈비나 꼬리 등은 팔기도 하지만 팔리지 않으면 제사 이튿날 국을 끓이는 데 사용한다. 쇠[가죽](/topic/가죽)도 그슬린 다음 국을 끓이는 데 집어넣는다. 제의에 사용하는 소는 500㎏ 정도 된다. 소를 잡으면 반 근 정도로 끊어 고기 약 500점을 만든다. 이것을 살짝 구워서 산령제에 한 꼬치를 사용하고, 유령제에는 7~10꼬치를 큰 [바구니](/topic/바구니)에 담아 사용한다. 쇠머리도 [제상](/topic/제상)에 올린다. 그러나 다리나 꼬리는 올리지 않는다. 진설은 유령제 당주가 직접 한다. 제물 차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을 두 개 차렸다. 육․포․술․과일([수박](/topic/수박), 배, [사과](/topic/사과), [참외](/topic/참외), [대추](/topic/대추), 곶감) 등은 두 그릇씩이고, 쇠머리를 비롯한 탕․채소(고사리)․대구포 등은 한 그릇씩이다. 메는 생용([새옹](/topic/새옹))에다 짓는다. 신령 앞에 놓는 두 그릇은 산신령 내외에게 바치는 것이고, 그 앞에 양쪽으로 놓는 두 그릇은 신령을 보좌하는 좌우 동자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오늘날 유령제의 운영 경비는 회원들의 회비에서 나온다. 1970~1980년대까지는 매년 모금을 하여 유령제를 지냈다. 그러나 점차 기금 마련이 어려워지자 회원제를 만들었다. 처음에 평생회비는 1만원부터 시작했다. 이후 2만 원, 5만 원, 20만 원을 거쳐 2008년부터는 30만 원이다. 회원의 자격 요건은 자유롭다. 나이, 성별, 지역을 불문하고 유령산신령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 유령제 행사를 위해 유령제위원회와는 별도로 유령제봉사회를 1980~1990년에 만들었다. 회원 명단은 목판에 새겨 당 안에 걸어놓았다. 산당은 평상시 개방하지는 않지만 이용을 원하는 이가 있으면 빌려 주기도 한다. 유령제가 열리면 찬조금, 축원금 등이 들어온다. 이것을 재원으로 하여 기금을 만들어 운영 경비에 충당하고 있다. 매년 유령제에 사용되는 비용은 소값에 따라 변동이 심하다. 대체로 400만~600만 원 든다.


7. 제의 절차 : 당주는 음력 사월 초하룻날이 되면 제당에 제주를 봉하고 [금줄](/topic/금줄)을 친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고 그 사이에 [한지](/topic/한지)를 잘라 넣어 만든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산령제를 먼저 올린다. 산령제는 태백산산신령에게 지내는 망제(望祭)로, 유령(느릅령)이 태백산 준령에 있기 때문에 지낸다. 산령제를 지내는 시간은 보통 유령제를 시작하기 전에 30여 분이면 끝난다. 산령제에 사용하는 제물은 과일 세 개, 메 한 그릇, 포 한 개, 쇠고기 반근(통째로), 술 등이다. 산령제는 유령제위원회 회장이 [헌작](/topic/헌작)․재배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해 당주로 뽑힌 이가 헌작․재배를 할 수도 있다. 고축을 하지 않으므로 헌작은 단잔이다.

제의는 홀기에 준하여 진행한다. 유교식이지만 소지는 올린다. 한편 유령제에서 소지를 올리는 방식이 특이하다. 한지를 접어 한 장씩 소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소지 몇백 장이 들어갈 수 있는 소지함을 미리 만들어 분축례를 할 때 소지함째 불른다. 지금은 하지 않지만,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퇴송](/topic/퇴송)을 하였다.제의가 끝나면 음복한 다음 모두 점심을 먹는다. 점심은 소고기국밥이다. 또 제사에 사용한 쇠고기 반 근과 떡 등을 집어넣은 도시락을 만들어 현장에 온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보통 제의는 낮 12시쯤이면 마치지만 집행부는 12시가 넘어도 결산을 하느라고 분주하다.
지역사례[마을](/topic/마을)제의에서 소(또는 돼지)를 잡는 것은 동해안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태백시에서도 통리, 백산, 철암, 현리([소도](/topic/소도)를 의미), 황지(연화산) 등 여러 곳이 있다.
지역사례[마을](/topic/마을)제의에서 소(또는 돼지)를 잡는 것은 동해안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태백시에서도 통리, 백산, 철암, 현리([소도](/topic/소도)를 의미), 황지(연화산) 등 여러 곳이 있다.
유래1500년쯤 상장면(황지)에 사는 효자가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장만하러 소달면(오늘날의 도계읍)의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느릅령에 호랑이가 있어 한두 명이 넘다가는 호랑이 밥이 되기 일쑤였다. 보통 6~8명이 함께 고개를 넘어야 안전했다. 그런데 효자가 돌아오는 날에 마침 함께 넘을 사람이 없었다. 이날 밤에 선친 제사가 있는 효자는 할 수 없이 혼자서라도 넘어야 했다. 그러다가 끝내 호랑이에게 잡혔다. 효자가 살려 달라고 사연을 얘기하니 호랑이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냐고 물었다. 소원이 뭐냐고 하니 황소 한 마리를 잡아 제향하라는 것이었다. 효자는 엉겁결에 응낙하였다. 그때 마침 황지의 [마을](/topic/마을) 사람 7~8명이 효자가 돌아오지 않자 호랑이에게 해를 당한 것 아닌가 염려하여 [무리](/topic/무리)지어 횃불을 들고 효자를 찾으러 나왔다. 그들이 효자를 발견한 순간 효자는 기절했고 호랑이는 마침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효자를 구해 데리고 왔다. 그렇게 하여 제사를 무사히 지낸 효자는 며칠 뒤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소를 한 마리 마련하여 산령제를 올렸다. 범은 곧 산령이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처음 올린 제일이 음력 사월 열엿샛날이었다. 이듬해 마을 농사가 흉년이고 질병이 만연하는 등 폐해가 적지 않았다. 주민들은 산령에게 제를 올리지 않아 그런가 하고 여기고 부랴부랴 황소를 장만하여 제를 올렸다. 그랬더니 마을이 다시 평온해졌다. 이후부터 호랑이(산령)에게 제향하는 풍속이 생겨났다.
유래1500년쯤 상장면(황지)에 사는 효자가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장만하러 소달면(오늘날의 도계읍)의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느릅령에 호랑이가 있어 한두 명이 넘다가는 호랑이 밥이 되기 일쑤였다. 보통 6~8명이 함께 고개를 넘어야 안전했다. 그런데 효자가 돌아오는 날에 마침 함께 넘을 사람이 없었다. 이날 밤에 선친 제사가 있는 효자는 할 수 없이 혼자서라도 넘어야 했다. 그러다가 끝내 호랑이에게 잡혔다. 효자가 살려 달라고 사연을 얘기하니 호랑이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냐고 물었다. 소원이 뭐냐고 하니 황소 한 마리를 잡아 제향하라는 것이었다. 효자는 엉겁결에 응낙하였다. 그때 마침 황지의 [마을](/topic/마을) 사람 7~8명이 효자가 돌아오지 않자 호랑이에게 해를 당한 것 아닌가 염려하여 [무리](/topic/무리)지어 횃불을 들고 효자를 찾으러 나왔다. 그들이 효자를 발견한 순간 효자는 기절했고 호랑이는 마침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효자를 구해 데리고 왔다. 그렇게 하여 제사를 무사히 지낸 효자는 며칠 뒤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소를 한 마리 마련하여 산령제를 올렸다. 범은 곧 산령이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처음 올린 제일이 음력 사월 열엿샛날이었다. 이듬해 마을 농사가 흉년이고 질병이 만연하는 등 폐해가 적지 않았다. 주민들은 산령에게 제를 올리지 않아 그런가 하고 여기고 부랴부랴 황소를 장만하여 제를 올렸다. 그랬더니 마을이 다시 평온해졌다. 이후부터 호랑이(산령)에게 제향하는 풍속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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