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청사포당산

한국무속신앙사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청사포 해안 [마을](/topic/마을)에 바다를 향해 큰 노송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제당. 고기잡이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낭군을 기다리다 죽은 할매의 신위를 모신 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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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청사포 해안 [마을](/topic/마을)에 바다를 향해 큰 노송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제당. 고기잡이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낭군을 기다리다 죽은 할매의 신위를 모신 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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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식
정의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청사포 해안 [마을](/topic/마을)에 바다를 향해 큰 노송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제당. 고기잡이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낭군을 기다리다 죽은 할매의 신위를 모신 당이다.
정의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청사포 해안 [마을](/topic/마을)에 바다를 향해 큰 노송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제당. 고기잡이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낭군을 기다리다 죽은 할매의 신위를 모신 당이다.
내용해운대 청사포[마을](/topic/마을) 당제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래는 다음과 같다.

300여 년 전 이 마을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부터 처녀와 총각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들은 마침내 혼인하여 금실 좋은 부부로 살게 되었다. 남편이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가면 아내는 저녁때 바닷가 바위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다가 그가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 함께 집으로 가곤 하였다. 세월이 흘러 그렇게 정답게 살던 부부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영감과 할머니가 되었다. 어느 날 영감이 고깃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고 영감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할머니는 남편이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 지금의 당집 뒤에 있는 큰 소나무 위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미 죽어 바닷속 용궁에 들어가 있던 영감은 아내가 매일 소나무위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는 걸 보고 안타까워한 나머지 이 사정을 용왕에게 알렸다. 용왕도 이를 가상히 여겨 자기가 부리는 청사(靑蛇)를 보내 그의 부인을 용궁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오늘날 청사포란 지명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청사포(靑蛇浦)라 하다가 이곳 바닷가의 맑은 모래가 좋아 사람들은 모래 사(沙)자를 넣어 청사포(靑沙浦)로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날마다 기다리다가 지쳐 죽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던 그 소나무를 망부송이라 부르게되었다고 한다. 이밖에 할머니가 기다리던 그 자리에 소나무가 돋아나서 오늘날의 망부송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할머니가 죽은 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가 남편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바위를 [망부석](/topic/망부석)이라 불렀고, 할머니가 올라가서 기다리던 그 소나무를 망부송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애처로운 넋이 서려 있다 하여 그 아래에 당집을지어 할머니를 제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릿대[장군](/topic/장군)에 대한 전설도 있다.

옛날 어느 때 마을 앞으로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수장](/topic/수장)되었다. 며칠 뒤 그때 죽은 남자의 시신 하나가 파도에 밀려 지금 거릿대 자리에 당도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마을이 생기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어서 이 시신을 후하게 장사 지내 주는 것이 마을을 위해 복이될 것이라고 여겼다. 마을 사람들은 이 시신을 걸신이나 잡신의 우두머리로 칭하고 마을을 위해 좋은 일을 해 주는 신이 될 것을 염원한 나머지 후하게 장사 지낸 뒤 손장군(孫將軍)이라 호칭하였다. 그리고 처음 시신이 당도한 곳에 손장군의 제당을 마련하고 나무를 깎아 거릿대를 세웠으며, 손공장군 비석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당제의 차례를 살펴보면 먼저 할매 제당 뒤의 산신당에 가서 산신제를 지내고, 당집으로 들어가서 당제를 지낸다. 그런 다음 거릿대가 있는 동쪽 마을 쪽으로 가서 거릿대제를지낸 다음 다시 당집으로 와서 망부석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망부석이 없어졌기 때문에 망부석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제사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과 유월 초사흗날, 시월 초사흗날 세 차례 지낸다. 전에는 아침 일찍 지냈으나, 요즘에는 밤 10시 전후에 지낸다. 옛날에는 섣달그믐께 마을 사람들이 의논하여 부정이 없는 근실한 사람을 제주로 뽑았지만 요즘은 제주 노릇 할 사람이 없어 송정에 있는 고려암 스님에게 제사를 맡겨 놓았다. 제물은 일반 가정의 제사처럼 [주과포](/topic/주과포)혜, 고기, 생선, 나물 등을 올린다. 제주(祭酒)는 하루 전에 담가 제당 구석에 두면 하루 만에 술이 익어 쓸 수 있었다 한다. 옛날에는 제당 앞 바위와 바위 사이의 오목한 곳에 술단지를 두어 그곳에서 제주를 익혔다고 한다. 제의를 마치면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topic/음복)하고 마을 일을 의논한다.
참고문헌한국민속의 [원형](/topic/원형) (배도식, 집문당, 1995)
부산의 지명총람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1997)
부산의 당제 (김승찬,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부산이야기 (주경업, 부산민학회, 2008)
부산을 배웁시다 3 (주경업, 부산민학회, 2010)
해운대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주영택, 해운대지구향인회, 2010)
내용해운대 청사포[마을](/topic/마을) 당제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래는 다음과 같다.

300여 년 전 이 마을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부터 처녀와 총각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들은 마침내 혼인하여 금실 좋은 부부로 살게 되었다. 남편이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가면 아내는 저녁때 바닷가 바위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다가 그가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 함께 집으로 가곤 하였다. 세월이 흘러 그렇게 정답게 살던 부부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영감과 할머니가 되었다. 어느 날 영감이 고깃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고 영감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할머니는 남편이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 지금의 당집 뒤에 있는 큰 소나무 위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미 죽어 바닷속 용궁에 들어가 있던 영감은 아내가 매일 소나무위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는 걸 보고 안타까워한 나머지 이 사정을 용왕에게 알렸다. 용왕도 이를 가상히 여겨 자기가 부리는 청사(靑蛇)를 보내 그의 부인을 용궁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오늘날 청사포란 지명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청사포(靑蛇浦)라 하다가 이곳 바닷가의 맑은 모래가 좋아 사람들은 모래 사(沙)자를 넣어 청사포(靑沙浦)로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날마다 기다리다가 지쳐 죽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던 그 소나무를 망부송이라 부르게되었다고 한다. 이밖에 할머니가 기다리던 그 자리에 소나무가 돋아나서 오늘날의 망부송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할머니가 죽은 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가 남편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바위를 [망부석](/topic/망부석)이라 불렀고, 할머니가 올라가서 기다리던 그 소나무를 망부송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애처로운 넋이 서려 있다 하여 그 아래에 당집을지어 할머니를 제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릿대[장군](/topic/장군)에 대한 전설도 있다.

옛날 어느 때 마을 앞으로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수장](/topic/수장)되었다. 며칠 뒤 그때 죽은 남자의 시신 하나가 파도에 밀려 지금 거릿대 자리에 당도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마을이 생기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어서 이 시신을 후하게 장사 지내 주는 것이 마을을 위해 복이될 것이라고 여겼다. 마을 사람들은 이 시신을 걸신이나 잡신의 우두머리로 칭하고 마을을 위해 좋은 일을 해 주는 신이 될 것을 염원한 나머지 후하게 장사 지낸 뒤 손장군(孫將軍)이라 호칭하였다. 그리고 처음 시신이 당도한 곳에 손장군의 제당을 마련하고 나무를 깎아 거릿대를 세웠으며, 손공장군 비석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당제의 차례를 살펴보면 먼저 할매 제당 뒤의 산신당에 가서 산신제를 지내고, 당집으로 들어가서 당제를 지낸다. 그런 다음 거릿대가 있는 동쪽 마을 쪽으로 가서 거릿대제를지낸 다음 다시 당집으로 와서 망부석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망부석이 없어졌기 때문에 망부석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제사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과 유월 초사흗날, 시월 초사흗날 세 차례 지낸다. 전에는 아침 일찍 지냈으나, 요즘에는 밤 10시 전후에 지낸다. 옛날에는 섣달그믐께 마을 사람들이 의논하여 부정이 없는 근실한 사람을 제주로 뽑았지만 요즘은 제주 노릇 할 사람이 없어 송정에 있는 고려암 스님에게 제사를 맡겨 놓았다. 제물은 일반 가정의 제사처럼 [주과포](/topic/주과포)혜, 고기, 생선, 나물 등을 올린다. 제주(祭酒)는 하루 전에 담가 제당 구석에 두면 하루 만에 술이 익어 쓸 수 있었다 한다. 옛날에는 제당 앞 바위와 바위 사이의 오목한 곳에 술단지를 두어 그곳에서 제주를 익혔다고 한다. 제의를 마치면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topic/음복)하고 마을 일을 의논한다.
참고문헌한국민속의 [원형](/topic/원형) (배도식, 집문당, 1995)
부산의 지명총람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1997)
부산의 당제 (김승찬,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부산이야기 (주경업, 부산민학회, 2008)
부산을 배웁시다 3 (주경업, 부산민학회, 2010)
해운대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주영택, 해운대지구향인회, 2010)
역사[마을](/topic/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이나 구전으로 보아 예부터 어떤 형태로든 제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그 역사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제당 [대들보](/topic/대들보)의 기록을 보면 “단기병술년 시월이십삼일오시견주수리상량(檀紀庚戌年 拾月二拾參日午時堅柱修理上樑)”이라고 하며 1970년에 [기둥](/topic/기둥)을 새로 세우고 [지붕](/topic/지붕)을 수리하여 상량하였다고 한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있던 당집을 이때에 와서 수리하여 상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간에 가서 확인해 보니 그 대들보에 “임오년삼월초파일오시상량(壬午年參月初八日午時上樑)”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2002년(임오년)에 다시 상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3년 또는 5년마다 풍어제를 지낸다. 풍어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할매당과 거릿대 [장군](/topic/장군)당에 가서 [고사](/topic/고사)를 지낸다. 풍어제의 역사에 대하여얼마나 오래되었는지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당집을 받치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 수령이 300년 이상 되었음을 보아 당집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마을](/topic/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이나 구전으로 보아 예부터 어떤 형태로든 제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그 역사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제당 [대들보](/topic/대들보)의 기록을 보면 “단기병술년 시월이십삼일오시견주수리상량(檀紀庚戌年 拾月二拾參日午時堅柱修理上樑)”이라고 하며 1970년에 [기둥](/topic/기둥)을 새로 세우고 [지붕](/topic/지붕)을 수리하여 상량하였다고 한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있던 당집을 이때에 와서 수리하여 상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간에 가서 확인해 보니 그 대들보에 “임오년삼월초파일오시상량(壬午年參月初八日午時上樑)”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2002년(임오년)에 다시 상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3년 또는 5년마다 풍어제를 지낸다. 풍어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할매당과 거릿대 [장군](/topic/장군)당에 가서 [고사](/topic/고사)를 지낸다. 풍어제의 역사에 대하여얼마나 오래되었는지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당집을 받치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 수령이 300년 이상 되었음을 보아 당집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형태해운대에서 동쪽으로 와우산 달맞이고개를 넘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경사진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청사포[마을](/topic/마을)이 나온다. 마을의 서쪽 언덕 아래 큰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기와](/topic/기와)를 얹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의 당집이 있다. 맞배지붕이라고는 하지만 단순한 모양의 맞배지붕이 아니라 [지붕](/topic/지붕) 가운데에 용[마름](/topic/마름)과 양쪽 장[마루](/topic/마루)를 높이 쌓아 상당히 멋을 부렸다. 제당이 앉은 자리 둘레에 여유 땅이 있어서 약 230㎡의 넓이에 당집·산신당·창고가 있다. 그 둘레에는 노송 다섯 그루가 서 있다. 당집의 크기는 가로 약 3m, 세로 2.7m, 높이2.7m에 넓이 약 8㎡이다. 출입문은 옛날에는 양쪽으로 여닫는 나무문이었으나, 근년에 새로 만들어 달면서 외짝의 나무문으로 바뀌었다.

제당 안의 장식을 보면 벽면은 하얗게 도색되어 있고, [장판](/topic/장판)은 노란색의 비닐을 깔았다. 제단은 바닥에서 약 80㎝ 쯤 높이에서 П모양으로 폭 약 40㎝의 나무 제단을 돌아가며 만들어 붙여 놓았다가 지금은 인조대리석으로 똑같이 새로 설치하였다. 제당 안은 세 부분의 제단으로 나뉘어 있다. 출입문에서 정면의 벽에 나무로 만든 [위패](/topic/위패)함을 붙여 두었고, 위패함 1m 쯤 아래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 영역이 골매기할매의 제단이다. 위패함에는 노란색의 니스가 칠해져 있으며 그 안에 ‘현동조비김해김씨신위(顯洞祖妣金海金氏神位)’라 써 놓았다. 위패의 크기는 가로 10㎝, 세로 24㎝, 두께 약 3㎝이다. 제당의 서편 제단은 성주를 모신 곳으로 벽 가운데에 [한지](/topic/한지)를 접어서 신체(身體)를 만들어 붙여 두었다. 한지의 크기는 가로 12㎝, 세로 20㎝ 정도이다. 정면에서 오른쪽의 동편 제단은 세존제단이며 신체의 표시는 아무것도 없다.

산신당은 본 제당의 오른쪽 뒤편에있다. 제당 뒤쪽의 언덕배기에 오래된 큰 둥치의 소나무 두 그루가Ⅴ 자형으로 벌여 서 있는 오른쪽으로 가로 약 90㎝, 세로 80㎝, 높이 90㎝의 블록 담으로 만들어진 산신당이 있다. 지붕은 위로 도톰하게 만들어져 있고, 앞문은 없다. 산신당 오른쪽에는 제기와 기물을 넣어 두는 창고가 있다.

거릿대 제당은 본 제당이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바닷가여서 횟집이 밀집되어 있다. 제당이 동산횟집의 [담장](/topic/담장)과 붙어 있는 공간으로 도로보다약간 높은 둔덕에 있다. 제당은 가로 약 5.5m, 세로 약 7.8m의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둘레에는 약 1m 높이의 시멘트 블록으로 담장이 쳐져 있다. 그곳 안쪽에 가로 137㎝, 세로 67㎝, 높이 약 6㎝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그 앞쪽으로는 가로 92㎝, 세로 75㎝, 높이 25㎝의 보조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제단의 위쪽에는 오석으로 된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은 ‘손공[장군](/topic/장군)비(孫公將軍碑)’라 새겨져 있다. 본래의 비석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나 2003년 제14호 태풍 매미호의 급습으로 비석이 부러져서 새로 만들어 세운것이 지금의 오석비석이다. 이전 비석도 없애지 않고 오른쪽에 기대어 놓았다. 신령으로 모신 비석이므로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 함께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54㎝, 폭 24㎝, 두께 약 10㎝이다. 이 비석의 왼편에 Y 자 모양의 나무를 세워 놓았다. 이것이 거릿대의 상징물이다. 이 상징물은 높이가 75㎝, 나무의 굵기는 밑 부분의지름이 약 10㎝이다. 이 제단의 둘레에는 높이 약 1m 되는 П모양의 블록 담장이 쳐져 있다.

현재 당집 앞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바위가 철거되면서 [망부석](/topic/망부석)과 제단은 사라지고 없다.
형태해운대에서 동쪽으로 와우산 달맞이고개를 넘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경사진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청사포[마을](/topic/마을)이 나온다. 마을의 서쪽 언덕 아래 큰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기와](/topic/기와)를 얹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의 당집이 있다. 맞배지붕이라고는 하지만 단순한 모양의 맞배지붕이 아니라 [지붕](/topic/지붕) 가운데에 용[마름](/topic/마름)과 양쪽 장[마루](/topic/마루)를 높이 쌓아 상당히 멋을 부렸다. 제당이 앉은 자리 둘레에 여유 땅이 있어서 약 230㎡의 넓이에 당집·산신당·창고가 있다. 그 둘레에는 노송 다섯 그루가 서 있다. 당집의 크기는 가로 약 3m, 세로 2.7m, 높이2.7m에 넓이 약 8㎡이다. 출입문은 옛날에는 양쪽으로 여닫는 나무문이었으나, 근년에 새로 만들어 달면서 외짝의 나무문으로 바뀌었다.

제당 안의 장식을 보면 벽면은 하얗게 도색되어 있고, [장판](/topic/장판)은 노란색의 비닐을 깔았다. 제단은 바닥에서 약 80㎝ 쯤 높이에서 П모양으로 폭 약 40㎝의 나무 제단을 돌아가며 만들어 붙여 놓았다가 지금은 인조대리석으로 똑같이 새로 설치하였다. 제당 안은 세 부분의 제단으로 나뉘어 있다. 출입문에서 정면의 벽에 나무로 만든 [위패](/topic/위패)함을 붙여 두었고, 위패함 1m 쯤 아래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 영역이 골매기할매의 제단이다. 위패함에는 노란색의 니스가 칠해져 있으며 그 안에 ‘현동조비김해김씨신위(顯洞祖妣金海金氏神位)’라 써 놓았다. 위패의 크기는 가로 10㎝, 세로 24㎝, 두께 약 3㎝이다. 제당의 서편 제단은 성주를 모신 곳으로 벽 가운데에 [한지](/topic/한지)를 접어서 신체(身體)를 만들어 붙여 두었다. 한지의 크기는 가로 12㎝, 세로 20㎝ 정도이다. 정면에서 오른쪽의 동편 제단은 세존제단이며 신체의 표시는 아무것도 없다.

산신당은 본 제당의 오른쪽 뒤편에있다. 제당 뒤쪽의 언덕배기에 오래된 큰 둥치의 소나무 두 그루가Ⅴ 자형으로 벌여 서 있는 오른쪽으로 가로 약 90㎝, 세로 80㎝, 높이 90㎝의 블록 담으로 만들어진 산신당이 있다. 지붕은 위로 도톰하게 만들어져 있고, 앞문은 없다. 산신당 오른쪽에는 제기와 기물을 넣어 두는 창고가 있다.

거릿대 제당은 본 제당이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바닷가여서 횟집이 밀집되어 있다. 제당이 동산횟집의 [담장](/topic/담장)과 붙어 있는 공간으로 도로보다약간 높은 둔덕에 있다. 제당은 가로 약 5.5m, 세로 약 7.8m의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둘레에는 약 1m 높이의 시멘트 블록으로 담장이 쳐져 있다. 그곳 안쪽에 가로 137㎝, 세로 67㎝, 높이 약 6㎝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그 앞쪽으로는 가로 92㎝, 세로 75㎝, 높이 25㎝의 보조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제단의 위쪽에는 오석으로 된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은 ‘손공[장군](/topic/장군)비(孫公將軍碑)’라 새겨져 있다. 본래의 비석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나 2003년 제14호 태풍 매미호의 급습으로 비석이 부러져서 새로 만들어 세운것이 지금의 오석비석이다. 이전 비석도 없애지 않고 오른쪽에 기대어 놓았다. 신령으로 모신 비석이므로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 함께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54㎝, 폭 24㎝, 두께 약 10㎝이다. 이 비석의 왼편에 Y 자 모양의 나무를 세워 놓았다. 이것이 거릿대의 상징물이다. 이 상징물은 높이가 75㎝, 나무의 굵기는 밑 부분의지름이 약 10㎝이다. 이 제단의 둘레에는 높이 약 1m 되는 П모양의 블록 담장이 쳐져 있다.

현재 당집 앞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바위가 철거되면서 [망부석](/topic/망부석)과 제단은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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