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군당

한국무속신앙사전
조선시대 경아전이나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 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topic/마을) 제당의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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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아전이나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 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topic/마을) 제당의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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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정의조선시대 경아전이나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 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topic/마을) 제당의 명칭.
정의조선시대 경아전이나 지방 관아 인근에 설치된 제당 또는 현재 서울 한강 유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마을](/topic/마을) 제당의 명칭.
어원부군당은 붉은당, 부강전(富降殿), 부군묘(府君廟), 부근당(付根堂), 부군사(符君祠) 등으로도 쓰인다. 이 어원에 관해서는 크게 세 [가지](/topic/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최남선은 ‘’설을 제기하였다. 그는 『불함문화론(不含文化論)』에서 “조선에서는 ‘(Părk)’을 본원으로 하여 ‘(Părkăn)’이라고도 하였고, 전하여 ‘부군(Pukun)’ 또는 단순히 ‘불(Pur)’이라고도 칭하였다”라고 하여 ‘부군(府君)’이란 표기는 태양신을 의미하는 ‘(Părkăn)’의 음차(音差)이며 부군당은 이러한 태양신을 숭배한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조지훈 역시 제당의 명칭을 분류하면서 ‘신(神)’계와‘’계를 구분하고 ‘’계에 부군당계를 포함하였다. 그는 “부근(付根)ㆍ부군(府君 또는 富君)은 팔관(八關)ㆍ불구내ㆍ의 유속”으로 보았다. 김태곤은 그 원음을 ‘불근’, 즉 생산을 상징하는 성(性)신앙의‘불(불ㆍ불두덩ㆍ부삿ㆍ부랄)’에서 온 말로 보고 ‘부근(付根)’이 [마을](/topic/마을) 수호신의 뜻을 지닌 ‘부군(府君)’과 성신(性神)의 생산적 상징을 띠는 ‘부강(富降)’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면서 남근 [봉안](/topic/봉안) 풍속과 관련된 명칭으로 해석하였다. 마지막으로 ‘부군(府君)’은 한대(漢代)에 태수(太守)를 칭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 이능화의 견해가 있다. 그는 조선 각군(各郡)의 부군당에는 대개임소에서 죽은 수재(守宰)가 모셔져 있으며, 부군당이란 명칭은 이처럼 고을 수령이나 관리를 신으로 모시는 관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어원부군당은 붉은당, 부강전(富降殿), 부군묘(府君廟), 부근당(付根堂), 부군사(符君祠) 등으로도 쓰인다. 이 어원에 관해서는 크게 세 [가지](/topic/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최남선은 ‘’설을 제기하였다. 그는 『불함문화론(不含文化論)』에서 “조선에서는 ‘(Părk)’을 본원으로 하여 ‘(Părkăn)’이라고도 하였고, 전하여 ‘부군(Pukun)’ 또는 단순히 ‘불(Pur)’이라고도 칭하였다”라고 하여 ‘부군(府君)’이란 표기는 태양신을 의미하는 ‘(Părkăn)’의 음차(音差)이며 부군당은 이러한 태양신을 숭배한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조지훈 역시 제당의 명칭을 분류하면서 ‘신(神)’계와‘’계를 구분하고 ‘’계에 부군당계를 포함하였다. 그는 “부근(付根)ㆍ부군(府君 또는 富君)은 팔관(八關)ㆍ불구내ㆍ의 유속”으로 보았다. 김태곤은 그 원음을 ‘불근’, 즉 생산을 상징하는 성(性)신앙의‘불(불ㆍ불두덩ㆍ부삿ㆍ부랄)’에서 온 말로 보고 ‘부근(付根)’이 [마을](/topic/마을) 수호신의 뜻을 지닌 ‘부군(府君)’과 성신(性神)의 생산적 상징을 띠는 ‘부강(富降)’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면서 남근 [봉안](/topic/봉안) 풍속과 관련된 명칭으로 해석하였다. 마지막으로 ‘부군(府君)’은 한대(漢代)에 태수(太守)를 칭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 이능화의 견해가 있다. 그는 조선 각군(各郡)의 부군당에는 대개임소에서 죽은 수재(守宰)가 모셔져 있으며, 부군당이란 명칭은 이처럼 고을 수령이나 관리를 신으로 모시는 관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참조[부군당제](/topic/부군당제)
참고문헌1963 (서울 영상민속지-한강변의 [마을](/topic/마을)신앙, 서울역사박물관)
누석단ㆍ신수ㆍ당집 신앙연구-서낭고 (조지훈, 문리논집 7,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1963)
2006 (서울 한강 유역 부군당 의례 연구, 김태우,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조선무속고](/topic/조선무속고), 이능화, 계명구락부)
2003 (한국농경세시의 연구, 김택규, 영남대학교출판부)
1927 (하버드대학 옌칭 도서관의 한국 고서들, 허경진, 웅진북스)
1985 (한국민간신앙연구, 김태곤, 집문당)
Bugundang referred to shrines set up near or on the grounds of government offices in the capital or in the provinces during Joseon (1392-1910), and in present times refers to village shrines observed in the Seoul area along the Han River.

These government office shrines were also called bulgeundang (red shrine), bugunmyo (shrine for government office deity), or bugeundang (phallic shrine).

In Joseon, bugundang was housed in tile-roofed buildings that measured one or two kan (1 kan=6.6 m²), located on its own separate grounds fenced with walls, in a corner of the courtyard of the government office building, or in a forest or on a hill nearby. These shrines were constructed as part of the government building in the beginning, but are believed to have been transformed into communal shrines as their government-related functions became obsolete.

Hung inside the shrine was a painting of Bugun ([Government Office Deity](/topic/GovernmentOfficeDeity)), portrayed sometimes as a singular individual or as husband and wife. Historical figures and other characters are worshipped as Bugun, including [Dangun](/en/topic/detail/1913), founder of ancient kingdom Gojoseon; [Yi Seong-gye](/topic/YiSeong-gye), founder of Joseon; General [Kim Yu-sin](/topic/KimYu-sin) of Silla; General [Nam Yi](/topic/NamYi) of Joseon; General Choe Yeong of Goryeo; General Im Gyeong-eop of Joseon; and Maiden Song.
참조[부군당제](/topic/부군당제)
참고문헌1963 (서울 영상민속지-한강변의 [마을](/topic/마을)신앙, 서울역사박물관)
누석단ㆍ신수ㆍ당집 신앙연구-서낭고 (조지훈, 문리논집 7,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1963)
2006 (서울 한강 유역 부군당 의례 연구, 김태우,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조선무속고](/topic/조선무속고), 이능화, 계명구락부)
2003 (한국농경세시의 연구, 김택규, 영남대학교출판부)
1927 (하버드대학 옌칭 도서관의 한국 고서들, 허경진, 웅진북스)
1985 (한국민간신앙연구, 김태곤, 집문당)
Bugundang referred to shrines set up near or on the grounds of government offices in the capital or in the provinces during Joseon (1392-1910), and in present times refers to village shrines observed in the Seoul area along the Han River.

These government office shrines were also called bulgeundang (red shrine), bugunmyo (shrine for government office deity), or bugeundang (phallic shrine).

In Joseon, bugundang was housed in tile-roofed buildings that measured one or two kan (1 kan=6.6 m²), located on its own separate grounds fenced with walls, in a corner of the courtyard of the government office building, or in a forest or on a hill nearby. These shrines were constructed as part of the government building in the beginning, but are believed to have been transformed into communal shrines as their government-related functions became obsolete.

Hung inside the shrine was a painting of Bugun ([Government Office Deity](/topic/GovernmentOfficeDeity)), portrayed sometimes as a singular individual or as husband and wife. Historical figures and other characters are worshipped as Bugun, including [Dangun](/en/topic/detail/1913), founder of ancient kingdom Gojoseon; [Yi Seong-gye](/topic/YiSeong-gye), founder of Joseon; General [Kim Yu-sin](/topic/KimYu-sin) of Silla; General [Nam Yi](/topic/NamYi) of Joseon; General Choe Yeong of Goryeo; General Im Gyeong-eop of Joseon; and Maiden Song.
내용조선시대 부군당은 서울 도성 내 관청 가운데 의금부를 비롯하여 양현고, 사역원, 사헌부, 예관, 사복시, 종친부, 공조, 제용감, 선혜청, 도총부, 의영고 등에 설치되어 있었다. 지방에서는 평안도 영유현, 황해도 서흥부와 신천군, 경상도 안의현, 전라도 영암군, 강원도 원주목 등의 관아 안이나 인근에 부군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방에 설치된 부군당의 특징으로 영유현, 서흥부, 안의현의 경우 동북쪽에 세워진 부군당과 대응하여 여단과 사직이 서쪽에 세워져 있다는 점과 1840년 이후 부군당이 관아 안이 아닌 밖에도 세워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1840년 이전에는 거의 모든 부군당이 관청 내에 설치되어 있으나 1840년경의 서흥부와 1872년경의 영암군 및 원주목에서는 관아 문 밖이나 [마을](/topic/마을) 동북쪽 산기슭에 부군당이 건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부군당은 주로 서울 한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부군당이라고 확실하게 명시된 경우와 부군당으로 추정되는 경우까지 합하면 2006년 서울 지역만 30여 곳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20여 곳의 부군당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부군당이라고 확실하게 명시된 경우는 [편액](/topic/편액), [현판](/topic/현판), [축문](/topic/축문), 기타 기록물, 주재 집단의 조직 명칭 등에 ‘府君堂’이 명시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는 성동구 금호동·응봉동·성수동·옥수동·동빙고동, 용산구 산천동·서빙고동·[이태원](/topic/이태원)동·한남동(큰한강)·한남동(작은한강)·청암동, 마포구 창전동·당인동·도화동, 영등포구 당산동·영등포동, 신길2동 지역 부군당들이다. 또한, 부군당으로 추정되는 경우는 부군당임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객관적인 근거는 없지만 고귀한 신분의 인격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거나 지역민들에게 ‘부군당’으로 호칭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는 성동구 사근동 남이[장군](/topic/장군)사당과 행당동 아기씨당, 용산구 보광동 명[화전](/topic/화전)과 보광동 무후묘 및 용문동 남이장군사당, 마포구 창전동 [공민왕](/topic/공민왕)[사당](/topic/사당), 동[대문](/topic/대문)구 전농동 부강전 등이 있다. 또 지금은소실되었으나 마포구 도화동 덕대[우물](/topic/우물)성황당, 현석동 대동당, 대흥동 불당, 신정동 대동당, 신수동 복개당, 망원동 [금성당](/topic/금성당), 종로구 명륜동 부군당 및 송파구 [잠실](/topic/잠실)동 부군당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기타 경기도 김포ㆍ연천 일대와 인천광역시 강화 및 임진강 유역에서도 부군당이 조사 되었다. 경기도 연천군의 장남면 고랑포리에도 부군당이라 불리던 제당이 있었으며,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부군당에는 모형남근이 [봉안](/topic/봉안)되어 있어 서울 지역의 신길2동과 함께 부군당 내 모형남근 봉안 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 부군당 설치 기관 | 소재지 | 부군당의 위치와 규모 | 기록 연도 | 출전 |
| -------- | -------- | -------- | -------- | -------- |
| 양현고 | 서울 | 미상 | | 조선왕조실록 |
| 사역원 | 서울 | 누각의 정북쪽(두칸) | 1511년 | 통문관지 |
| 사헌부 | 서울 | 미상 | 1700년대 | 연려실기술 |
| 예관 | 서울 | 위치 미상, 임경업 장군 화상 봉안 | 1449년 | 동국여지비고 |
| 의금부 | 서울 | 미상 | 1850년대 | 승[정원](/topic/정원)일기 |
| 의영고 | 서울 | 창고 뒤에 독립된 공간, 송씨처녀 초상 봉안 | 1667년 | 이재난고 |
| 사복시 | 서울 | 서북쪽 담의 모퉁이(한 칸) | 1768년 | 숙천제아도 |
| 종친부 | 서울 | 동남쪽 모퉁이에 독립된 공간(두 칸, 단 쌓음)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공조 | 서울 | 서리청의 바로 오른쪽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경조부지 |
| 제용감 | 서울 | 당상[대청](/topic/대청)에서 동북쪽 숲 사이(두 칸)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선혜청 | 서울 | 私庫와 북벽 사이 독립된 공간(두 칸)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도총부 | 서울 | 서리청 북서쪽 담 아래(두 칸)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영유현 관아 | 평안도 | 동북쪽 담 모퉁이(서쪽 여단·사직과 대응)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서흥부 | 황해도 | 마을 동북쪽 산기슭(서쪽 여단·사직과 대응)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신천군 관아 | 황해도 | 관아 북쪽 담 아래(성황당은 마을 북동쪽 산기슭에 별도 존재)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안의현 관아 | 경상도 | 위치 미상(여단 왼쪽에 마을 성황당은 별도 존재) | 1793년 | 연암집 |
| 영암군 | 전라도 | 관아 남문 앞 | 1872년 | 1872년 지방도 |
| 원주목 | 강원도 | 마을 동북쪽 산기슭 | 1872년 | 1872년 지방도 |


조선시대 부군당 설치 기관과 부군당 위치 및 규모
朝鲜时代建于首尔官衙或地方官衙附近的祭堂,现为主要集中于首尔汉江流域村庄祭堂名称。

[府君](/topic/府君)堂亦被称作部根堂,府君庙,付根堂等。

朝鲜时代的府君堂为一间或两间的瓦房,有部分府君堂配有围墙和院子,为独立空间。另一部分府君堂则位于官衙院内一侧或附近的树林或山脚。府君堂最初被建为官衙的附属建筑,随着后来官衙功能的不复存在,此处演变为公共祭堂。

府君堂内部供奉有府君神画像。部分画像只画有府君神,另一部分则画有夫妇并排的形象。被供奉为府君神的有[檀君](/topic/檀君),[李成桂](/topic/李成桂),金庚信,[南怡](/topic/南怡)将军,崔莹将军,[林庆业将军](/topic/林庆业将军)及宋氏姑娘等。
내용조선시대 부군당은 서울 도성 내 관청 가운데 의금부를 비롯하여 양현고, 사역원, 사헌부, 예관, 사복시, 종친부, 공조, 제용감, 선혜청, 도총부, 의영고 등에 설치되어 있었다. 지방에서는 평안도 영유현, 황해도 서흥부와 신천군, 경상도 안의현, 전라도 영암군, 강원도 원주목 등의 관아 안이나 인근에 부군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방에 설치된 부군당의 특징으로 영유현, 서흥부, 안의현의 경우 동북쪽에 세워진 부군당과 대응하여 여단과 사직이 서쪽에 세워져 있다는 점과 1840년 이후 부군당이 관아 안이 아닌 밖에도 세워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1840년 이전에는 거의 모든 부군당이 관청 내에 설치되어 있으나 1840년경의 서흥부와 1872년경의 영암군 및 원주목에서는 관아 문 밖이나 [마을](/topic/마을) 동북쪽 산기슭에 부군당이 건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부군당은 주로 서울 한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부군당이라고 확실하게 명시된 경우와 부군당으로 추정되는 경우까지 합하면 2006년 서울 지역만 30여 곳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20여 곳의 부군당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부군당이라고 확실하게 명시된 경우는 [편액](/topic/편액), [현판](/topic/현판), [축문](/topic/축문), 기타 기록물, 주재 집단의 조직 명칭 등에 ‘府君堂’이 명시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는 성동구 금호동·응봉동·성수동·옥수동·동빙고동, 용산구 산천동·서빙고동·[이태원](/topic/이태원)동·한남동(큰한강)·한남동(작은한강)·청암동, 마포구 창전동·당인동·도화동, 영등포구 당산동·영등포동, 신길2동 지역 부군당들이다. 또한, 부군당으로 추정되는 경우는 부군당임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객관적인 근거는 없지만 고귀한 신분의 인격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거나 지역민들에게 ‘부군당’으로 호칭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는 성동구 사근동 남이[장군](/topic/장군)사당과 행당동 아기씨당, 용산구 보광동 명[화전](/topic/화전)과 보광동 무후묘 및 용문동 남이장군사당, 마포구 창전동 [공민왕](/topic/공민왕)[사당](/topic/사당), 동[대문](/topic/대문)구 전농동 부강전 등이 있다. 또 지금은소실되었으나 마포구 도화동 덕대[우물](/topic/우물)성황당, 현석동 대동당, 대흥동 불당, 신정동 대동당, 신수동 복개당, 망원동 [금성당](/topic/금성당), 종로구 명륜동 부군당 및 송파구 [잠실](/topic/잠실)동 부군당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기타 경기도 김포ㆍ연천 일대와 인천광역시 강화 및 임진강 유역에서도 부군당이 조사 되었다. 경기도 연천군의 장남면 고랑포리에도 부군당이라 불리던 제당이 있었으며,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부군당에는 모형남근이 [봉안](/topic/봉안)되어 있어 서울 지역의 신길2동과 함께 부군당 내 모형남근 봉안 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 부군당 설치 기관 | 소재지 | 부군당의 위치와 규모 | 기록 연도 | 출전 |
| -------- | -------- | -------- | -------- | -------- |
| 양현고 | 서울 | 미상 | | 조선왕조실록 |
| 사역원 | 서울 | 누각의 정북쪽(두칸) | 1511년 | 통문관지 |
| 사헌부 | 서울 | 미상 | 1700년대 | 연려실기술 |
| 예관 | 서울 | 위치 미상, 임경업 장군 화상 봉안 | 1449년 | 동국여지비고 |
| 의금부 | 서울 | 미상 | 1850년대 | 승[정원](/topic/정원)일기 |
| 의영고 | 서울 | 창고 뒤에 독립된 공간, 송씨처녀 초상 봉안 | 1667년 | 이재난고 |
| 사복시 | 서울 | 서북쪽 담의 모퉁이(한 칸) | 1768년 | 숙천제아도 |
| 종친부 | 서울 | 동남쪽 모퉁이에 독립된 공간(두 칸, 단 쌓음)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공조 | 서울 | 서리청의 바로 오른쪽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경조부지 |
| 제용감 | 서울 | 당상[대청](/topic/대청)에서 동북쪽 숲 사이(두 칸)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선혜청 | 서울 | 私庫와 북벽 사이 독립된 공간(두 칸)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도총부 | 서울 | 서리청 북서쪽 담 아래(두 칸)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영유현 관아 | 평안도 | 동북쪽 담 모퉁이(서쪽 여단·사직과 대응)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서흥부 | 황해도 | 마을 동북쪽 산기슭(서쪽 여단·사직과 대응)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신천군 관아 | 황해도 | 관아 북쪽 담 아래(성황당은 마을 북동쪽 산기슭에 별도 존재) | 1840년경 | 숙천제아도 |
| 안의현 관아 | 경상도 | 위치 미상(여단 왼쪽에 마을 성황당은 별도 존재) | 1793년 | 연암집 |
| 영암군 | 전라도 | 관아 남문 앞 | 1872년 | 1872년 지방도 |
| 원주목 | 강원도 | 마을 동북쪽 산기슭 | 1872년 | 1872년 지방도 |


조선시대 부군당 설치 기관과 부군당 위치 및 규모
역사부군당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로서 15세기 인물인 어효첨이 집의가 되었을 때 아랫사람이 고사(古事)가 그러하다고(새로 부임한 관원은 필히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고하니 공이 “부군이란 어찌된 물건이냐”라고 하면서 지전을 거둬 불사르고 전후에 공이 역임한 관청에서는 부군을 모두 불사르고 헐었다고 한다(“公爲執義下人告以古事公曰府君何物令取紙錢焚之 前後所歷官府其府君之祀率皆焚毁之”,『연려실기술』제4권, 문종조고사본말, 문종조의 명신 어효첨).

여기서 신임 관원들이 부군당에 제사지내는 것을‘고사(古事)’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관행은 당시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16~17세기에는 양현고, 사역원, 사헌부, 의금부, 의영고 등 도성 내 각사에 부군당이 설립되었다. 그 당시 부군당은 각사의 부속 건물이었으며, 주로 아전들이 관리하였다. 18~19세기에는 한강 유역과 지방 관아에도 부군당이 설치되기에 이른다. 즉 한강 유역인 용산구 서빙고동의 부군당이 1875년에 중건되었고, 1872년 영암군과 원주목의 관아 인근에 부군당이설치된 정황은 부군당의 지역적 범위가 대폭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서빙고동 부군당의 경우 1875년 중건 이후 1891년에는 서빙고 지역 ‘노인계’, 1903년에는‘이중계원’들이 각각 주축이 되어 부군당을 중수한 것을 보면 이 당시 부군당에 대한 관리와 의례의 시행은 지역민들이 주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신사나 군대 건립을 위해 일부 부군당이 이전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쳐 현재 남아 있는 부군당은 대부분 서울 한강 유역에 존재하며 이 밖에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등 다른 일부 지역에 존재한다.


| 연도 | 내용 | 출전 | 명칭 |
| -------- | -------- | -------- | -------- |
| 1449년 | 어효첨이 府君을 모두 불사르고 헐다. | 연려실기술 | 府君 |
| 1511년 | 양현고 안 付根堂에 제사를 지낸다. | 조선왕조실록 | 付根堂 |
| 1517년 | 헌부에서 각사에 명령하여 付根을 불사르고 제사를 금하다. | 조선왕조실록 | 付根 |
| 16세기 말 ~ 17세기 초 | 지금 아문의 풍속에 禱祀하는 곳이 있는데 附君이라고 한다. 신임 관리는 반드시 제사를 지낸다. | [지봉유설](/topic/지봉유설) | 附君 |
| 1667년 초 | 각사에 모두 府君堂이 있어 신을 모시고 있는데 상익이란 자는 禁府의 부군당에서 항시 춤추고 하였다고 하니 어찌 실성하지 않았겠는가? | 승[정원](/topic/정원)일기 | 府君堂 |
| 18세기 초 | 부군당은 두 칸이며 누각의 정북 쪽에 있다. 강희 정해년에 중건하여 예전에 비해 반칸이 늘었다. | 통문관지 | 附君堂 |
| 1738~1791년 | 서울에 있는 각 아문에는 모두 府君堂이 설치되어 있으며 아전이나 노비들이 제사를 지낸다. 본 庫에는 송씨 처녀의 초상을 모신 부군당이 있으며, 성균관 노비들이 벽송정 동쪽 가장[자리](/topic/자리)에 부군당을 설치하였는데 [최영](/topic/최영)[장군](/topic/장군)과 우왕의 왕비를 모셨다. | 이재난고 | 府君堂 |
| 1793년 | 중앙의 모든 관청과 지방의 이청 옆에 府君堂을 두고 무당이 가무오락으로 귀신을 즐겁게 하다. | 연암집 | 府君堂 |
| 1800년 경 | 우리나라에 附根堂이 있다. 지금 京師 각사에 神祠가 있는데 이를 付根堂이라 하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府君堂이 되었다. 付根이란 宋氏姐가 접한 것으로, 네 벽에 목경물을 걸어 놓아 심히 음설하고 불경스럽다. | 오주연문장전신고 | 附根堂 付根堂 府君堂 |
| 1850년대 | 예관 府君堂에 임장군의 화상를 그려 놓고 제사 지내다. 각사 아전의 청방 곁에 符君祠가 있어 해마다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 동국여지비고 | 府君堂 符君祠 |
| 1908년 | 都下 관부에 작은 사우를 두고 지전을 걸어 놓았는데 이를 府君堂이라 한다. | 추재총화 | 府君堂 |


부군당 관련 문헌기사 목록(김태우, 2008)
역사부군당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로서 15세기 인물인 어효첨이 집의가 되었을 때 아랫사람이 고사(古事)가 그러하다고(새로 부임한 관원은 필히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고하니 공이 “부군이란 어찌된 물건이냐”라고 하면서 지전을 거둬 불사르고 전후에 공이 역임한 관청에서는 부군을 모두 불사르고 헐었다고 한다(“公爲執義下人告以古事公曰府君何物令取紙錢焚之 前後所歷官府其府君之祀率皆焚毁之”,『연려실기술』제4권, 문종조고사본말, 문종조의 명신 어효첨).

여기서 신임 관원들이 부군당에 제사지내는 것을‘고사(古事)’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관행은 당시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16~17세기에는 양현고, 사역원, 사헌부, 의금부, 의영고 등 도성 내 각사에 부군당이 설립되었다. 그 당시 부군당은 각사의 부속 건물이었으며, 주로 아전들이 관리하였다. 18~19세기에는 한강 유역과 지방 관아에도 부군당이 설치되기에 이른다. 즉 한강 유역인 용산구 서빙고동의 부군당이 1875년에 중건되었고, 1872년 영암군과 원주목의 관아 인근에 부군당이설치된 정황은 부군당의 지역적 범위가 대폭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서빙고동 부군당의 경우 1875년 중건 이후 1891년에는 서빙고 지역 ‘노인계’, 1903년에는‘이중계원’들이 각각 주축이 되어 부군당을 중수한 것을 보면 이 당시 부군당에 대한 관리와 의례의 시행은 지역민들이 주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신사나 군대 건립을 위해 일부 부군당이 이전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쳐 현재 남아 있는 부군당은 대부분 서울 한강 유역에 존재하며 이 밖에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등 다른 일부 지역에 존재한다.


| 연도 | 내용 | 출전 | 명칭 |
| -------- | -------- | -------- | -------- |
| 1449년 | 어효첨이 府君을 모두 불사르고 헐다. | 연려실기술 | 府君 |
| 1511년 | 양현고 안 付根堂에 제사를 지낸다. | 조선왕조실록 | 付根堂 |
| 1517년 | 헌부에서 각사에 명령하여 付根을 불사르고 제사를 금하다. | 조선왕조실록 | 付根 |
| 16세기 말 ~ 17세기 초 | 지금 아문의 풍속에 禱祀하는 곳이 있는데 附君이라고 한다. 신임 관리는 반드시 제사를 지낸다. | [지봉유설](/topic/지봉유설) | 附君 |
| 1667년 초 | 각사에 모두 府君堂이 있어 신을 모시고 있는데 상익이란 자는 禁府의 부군당에서 항시 춤추고 하였다고 하니 어찌 실성하지 않았겠는가? | 승[정원](/topic/정원)일기 | 府君堂 |
| 18세기 초 | 부군당은 두 칸이며 누각의 정북 쪽에 있다. 강희 정해년에 중건하여 예전에 비해 반칸이 늘었다. | 통문관지 | 附君堂 |
| 1738~1791년 | 서울에 있는 각 아문에는 모두 府君堂이 설치되어 있으며 아전이나 노비들이 제사를 지낸다. 본 庫에는 송씨 처녀의 초상을 모신 부군당이 있으며, 성균관 노비들이 벽송정 동쪽 가장[자리](/topic/자리)에 부군당을 설치하였는데 [최영](/topic/최영)[장군](/topic/장군)과 우왕의 왕비를 모셨다. | 이재난고 | 府君堂 |
| 1793년 | 중앙의 모든 관청과 지방의 이청 옆에 府君堂을 두고 무당이 가무오락으로 귀신을 즐겁게 하다. | 연암집 | 府君堂 |
| 1800년 경 | 우리나라에 附根堂이 있다. 지금 京師 각사에 神祠가 있는데 이를 付根堂이라 하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府君堂이 되었다. 付根이란 宋氏姐가 접한 것으로, 네 벽에 목경물을 걸어 놓아 심히 음설하고 불경스럽다. | 오주연문장전신고 | 附根堂 付根堂 府君堂 |
| 1850년대 | 예관 府君堂에 임장군의 화상를 그려 놓고 제사 지내다. 각사 아전의 청방 곁에 符君祠가 있어 해마다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 동국여지비고 | 府君堂 符君祠 |
| 1908년 | 都下 관부에 작은 사우를 두고 지전을 걸어 놓았는데 이를 府君堂이라 한다. | 추재총화 | 府君堂 |


부군당 관련 문헌기사 목록(김태우, 2008)
형태조선시대 부군당의 형태를 보면 주로 맞배 또는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에 [기와](/topic/기와)를 얹었으며, [기단](/topic/기단)을 갖추었다. 규모는 한 칸에서 두 칸 정도이다. [담장](/topic/담장)과 [마당](/topic/마당) 등 독립적인 공간을 갖춘 경우도 있고, 관아의 마당 한쪽이나 관아 근처 숲 또는 산기슭에 위치한 경우도 있다. 특히 종친부와 선혜청의 부군당은 따로 담을 쌓아 독립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 가운데종친부의 부군당은 단을 쌓은 다음 그 위에 부군당을 올려 위세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현재 남아 있는 한강 유역 부군당들도 이러한 조선시대 부군당들의 외형적인 형태와 별반 차이가 없다. 또한 부군당의 정문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태극 문양은 쌍태극이 그려져 있는 경우와 삼태극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당 내부에는 부군신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부군신은 단독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와 부부가 나란히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부군신으로는 단군(檀君), [이성계](/topic/이성계)(李成桂), 김유신(金庾信), 남이(南怡) [장군](/topic/장군), 최영(崔瑩) 장군, 임경업(林慶業) 장군, 송씨(宋氏)처녀 등이다. 구체적인 사례로서 예관에서는 [임경업 장군](/topic/임경업장군) 화상을 [봉안](/topic/봉안)했고, 의영고에서는 송씨처녀 화상을 모셨으며, 성균관 하인들(下輩)이 세웠다는 벽송정 동쪽 골짜기의 부군당에서는 [최영 장군](/topic/최영장군)과 우왕의 왕비를 모셨다는 것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쓰인 『연암집(燕巖集)』의 안의현 현사에서 곽후를 제사한 기(記)를 보면 “[주립](/topic/주립)(朱笠)에 구슬 갓끈을 달고 호수(虎鬚)를 꽂아 위엄과 사나움이 마치 장수와 같다”라고 하여 현재 한강 유역 부군당에 모셔진 화상들의 모습과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일부 부군당에는 모형 남근이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며, 현재 영등포구 신길2동이나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등의 부군당에 모형 남근이 봉안되어 있다.
형태조선시대 부군당의 형태를 보면 주로 맞배 또는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에 [기와](/topic/기와)를 얹었으며, [기단](/topic/기단)을 갖추었다. 규모는 한 칸에서 두 칸 정도이다. [담장](/topic/담장)과 [마당](/topic/마당) 등 독립적인 공간을 갖춘 경우도 있고, 관아의 마당 한쪽이나 관아 근처 숲 또는 산기슭에 위치한 경우도 있다. 특히 종친부와 선혜청의 부군당은 따로 담을 쌓아 독립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 가운데종친부의 부군당은 단을 쌓은 다음 그 위에 부군당을 올려 위세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현재 남아 있는 한강 유역 부군당들도 이러한 조선시대 부군당들의 외형적인 형태와 별반 차이가 없다. 또한 부군당의 정문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태극 문양은 쌍태극이 그려져 있는 경우와 삼태극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당 내부에는 부군신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부군신은 단독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와 부부가 나란히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부군신으로는 단군(檀君), [이성계](/topic/이성계)(李成桂), 김유신(金庾信), 남이(南怡) [장군](/topic/장군), 최영(崔瑩) 장군, 임경업(林慶業) 장군, 송씨(宋氏)처녀 등이다. 구체적인 사례로서 예관에서는 [임경업 장군](/topic/임경업장군) 화상을 [봉안](/topic/봉안)했고, 의영고에서는 송씨처녀 화상을 모셨으며, 성균관 하인들(下輩)이 세웠다는 벽송정 동쪽 골짜기의 부군당에서는 [최영 장군](/topic/최영장군)과 우왕의 왕비를 모셨다는 것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쓰인 『연암집(燕巖集)』의 안의현 현사에서 곽후를 제사한 기(記)를 보면 “[주립](/topic/주립)(朱笠)에 구슬 갓끈을 달고 호수(虎鬚)를 꽂아 위엄과 사나움이 마치 장수와 같다”라고 하여 현재 한강 유역 부군당에 모셔진 화상들의 모습과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일부 부군당에는 모형 남근이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며, 현재 영등포구 신길2동이나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등의 부군당에 모형 남근이 봉안되어 있다.
朝鲜时代建于首尔官衙或地方官衙附近的祭堂,现为主要集中于首尔汉江流域村庄祭堂名称。

[府君](/topic/府君)堂亦被称作部根堂,府君庙,付根堂等。

朝鲜时代的府君堂为一间或两间的瓦房,有部分府君堂配有围墙和院子,为独立空间。另一部分府君堂则位于官衙院内一侧或附近的树林或山脚。府君堂最初被建为官衙的附属建筑,随着后来官衙功能的不复存在,此处演变为公共祭堂。

府君堂内部供奉有府君神画像。部分画像只画有府君神,另一部分则画有夫妇并排的形象。被供奉为府君神的有[檀君](/topic/檀君),[李成桂](/topic/李成桂),金庚信,[南怡](/topic/南怡)将军,崔莹将军,[林庆业将军](/topic/林庆业将军)及宋氏姑娘等。
유래부군당의 건립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부군당에 관한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조선『중종실록(中宗實錄)』 1511년(중종 6) 3월 29일 기묘(己卯)에 “양현고 안에 부근당(付根堂)이 있다. 부근(付根)은 관부에서 기축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나라의 풍속이다(養賢庫內有付根堂 付根者 官府設祠祈祝 國俗也)”라는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군당 건립의 풍속이 그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군당 건립의 좀 더 구체적인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권 2한성부(漢城府) 사묘(祠廟)에 “부군사(符君祠)는 각사(各司) 아전들의 청방 곁에 있으며, 해마다 시월 초하룻날에 제사를 지낸다. 세상에서 혹 말하기를 고려의 시중 최영(崔瑩, 1316~1388)이 관직에 있을 때 재물에 깨끗하고 징수를 하지 않고 이름을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존숭한다고 한다. 각 고을에도 모두 있다”라고 하여 부군당 건립이 [최영 [장군](/topic/장군)](/topic/최영장군)에 대한 신앙과도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topic/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천지편(天地篇) 천지잡류(天地雜類) 귀신설(鬼神說) 화동음사변증설(華東陰祀辨證說)에서 “부근은 송씨저(송각시)가 실려 있어 사방 벽에 목경물을 많이 만들어 달고 지나치게 음설하고 불경스럽다(付根 乃宋氏姐所接四壁多作木莖物以掛之 甚淫褻不經)”라고 하여 부군당에 남근을 [봉안](/topic/봉안)하게 된 유래도 알 수 있다.
유래부군당의 건립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부군당에 관한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조선『중종실록(中宗實錄)』 1511년(중종 6) 3월 29일 기묘(己卯)에 “양현고 안에 부근당(付根堂)이 있다. 부근(付根)은 관부에서 기축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나라의 풍속이다(養賢庫內有付根堂 付根者 官府設祠祈祝 國俗也)”라는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군당 건립의 풍속이 그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군당 건립의 좀 더 구체적인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권 2한성부(漢城府) 사묘(祠廟)에 “부군사(符君祠)는 각사(各司) 아전들의 청방 곁에 있으며, 해마다 시월 초하룻날에 제사를 지낸다. 세상에서 혹 말하기를 고려의 시중 최영(崔瑩, 1316~1388)이 관직에 있을 때 재물에 깨끗하고 징수를 하지 않고 이름을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존숭한다고 한다. 각 고을에도 모두 있다”라고 하여 부군당 건립이 [최영 [장군](/topic/장군)](/topic/최영장군)에 대한 신앙과도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topic/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천지편(天地篇) 천지잡류(天地雜類) 귀신설(鬼神說) 화동음사변증설(華東陰祀辨證說)에서 “부근은 송씨저(송각시)가 실려 있어 사방 벽에 목경물을 많이 만들어 달고 지나치게 음설하고 불경스럽다(付根 乃宋氏姐所接四壁多作木莖物以掛之 甚淫褻不經)”라고 하여 부군당에 남근을 [봉안](/topic/봉안)하게 된 유래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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