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산디마을탑제

한국무속신앙사전
대전광역시 유성구 장동 산디[마을](/topic/마을)에서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마을로 들어오는 액(厄)을 막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탑제. 1998년 7월 21일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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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유성구 장동 산디[마을](/topic/마을)에서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마을로 들어오는 액(厄)을 막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탑제. 1998년 7월 21일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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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경
특징장동 산디는 조선시대 회덕현(懷德縣)의 [진산](/topic/진산)(鎭山)인 계족산(鷄足山)의 중턱에 위치한 [마을](/topic/마을)이다. 이곳에서는 계족산신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해마다 산신제를 지내고, 마을 어귀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할아버지탑과 할머니탑에서 탑제를 지낸다. 이 가운데 눈에 잘 띄는 탑제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산신제-탑제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산신제-탑제의 이중구조는 계족산 인근 마을들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시월에 산신제를 올리고, 이듬해 정월에 탑제를 올린다. 이 마을에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제사를 중단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6․25전쟁 때에도 부상자나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 위치한 피란[고지](/topic/고지)여서 전쟁의 피해도 보지 않았다.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는 마을 어귀의 탑에서 탑제를 지낸다. 이 제사는 ‘[거리제](/topic/거리제)’ 또는 ‘노상제’라고도 부른다.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액을 막기 위해 마을 어귀의 숲거리에 탑을 세웠다.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언덕쪽에 할아버지탑, 내를 건너 아래쪽에 할머니탑이 각각 있다. 할아버지탑이 할머니탑에 비해 조금 크다. 할아버지탑은 둘레가 100㎝이고, 위에는 높이 30㎝의 뾰족한 머릿돌이 올려져 있다. 할머니탑은 둘레가 80㎝이고, 역시 위에는 높이 20㎝의 작은 머릿돌이 한 개 올려져 있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탑의 머릿돌에 종이를 씌우고 두 탑을 [금줄](/topic/금줄)로 연결한다. 부부간이므로 연결해 두는 것이다. 두 탑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에는 [가마니](/topic/가마니)로 다리를 놓아 역시 부부간의 돈독한 정을 과시한다. 탑제가 거행되는 시간에 맞추어 각 가정에서는 ‘[마중시루](/topic/마중시루)’를 올린다. 마중시루는 마을의 신령을 집 안으로 맞이하는 시루이다. 마중시루는 보통 산신제를 거행할 때 마련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탑제와 더불어 행한다.

탑제를 정성껏 지내면 계족산신이 응답을 하여 산울림이 들린다고도 한다. ‘계족산이 울면 비가 오고 풍년이 든다’는 전설과 관련이 깊다. 몇 해 전에 탑제를 지내다가 산울림이 들려 그해의 풍년을 기약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주민 모두 산신당을 향해 절을 한다. 탑제와 산신제는 계족산 아래에서 생활하는 장동마을 주민들에게 마을의 안녕뿐만 아니라 각 가정의 평안과 건강을 수호하는 것으로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특징장동 산디는 조선시대 회덕현(懷德縣)의 [진산](/topic/진산)(鎭山)인 계족산(鷄足山)의 중턱에 위치한 [마을](/topic/마을)이다. 이곳에서는 계족산신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해마다 산신제를 지내고, 마을 어귀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할아버지탑과 할머니탑에서 탑제를 지낸다. 이 가운데 눈에 잘 띄는 탑제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산신제-탑제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산신제-탑제의 이중구조는 계족산 인근 마을들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시월에 산신제를 올리고, 이듬해 정월에 탑제를 올린다. 이 마을에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제사를 중단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6․25전쟁 때에도 부상자나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 위치한 피란[고지](/topic/고지)여서 전쟁의 피해도 보지 않았다.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는 마을 어귀의 탑에서 탑제를 지낸다. 이 제사는 ‘[거리제](/topic/거리제)’ 또는 ‘노상제’라고도 부른다.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액을 막기 위해 마을 어귀의 숲거리에 탑을 세웠다.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언덕쪽에 할아버지탑, 내를 건너 아래쪽에 할머니탑이 각각 있다. 할아버지탑이 할머니탑에 비해 조금 크다. 할아버지탑은 둘레가 100㎝이고, 위에는 높이 30㎝의 뾰족한 머릿돌이 올려져 있다. 할머니탑은 둘레가 80㎝이고, 역시 위에는 높이 20㎝의 작은 머릿돌이 한 개 올려져 있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탑의 머릿돌에 종이를 씌우고 두 탑을 [금줄](/topic/금줄)로 연결한다. 부부간이므로 연결해 두는 것이다. 두 탑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에는 [가마니](/topic/가마니)로 다리를 놓아 역시 부부간의 돈독한 정을 과시한다. 탑제가 거행되는 시간에 맞추어 각 가정에서는 ‘[마중시루](/topic/마중시루)’를 올린다. 마중시루는 마을의 신령을 집 안으로 맞이하는 시루이다. 마중시루는 보통 산신제를 거행할 때 마련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탑제와 더불어 행한다.

탑제를 정성껏 지내면 계족산신이 응답을 하여 산울림이 들린다고도 한다. ‘계족산이 울면 비가 오고 풍년이 든다’는 전설과 관련이 깊다. 몇 해 전에 탑제를 지내다가 산울림이 들려 그해의 풍년을 기약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주민 모두 산신당을 향해 절을 한다. 탑제와 산신제는 계족산 아래에서 생활하는 장동마을 주민들에게 마을의 안녕뿐만 아니라 각 가정의 평안과 건강을 수호하는 것으로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정의대전광역시 유성구 장동 산디[마을](/topic/마을)에서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마을로 들어오는 액(厄)을 막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탑제. 1998년 7월 21일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정의대전광역시 유성구 장동 산디[마을](/topic/마을)에서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마을로 들어오는 액(厄)을 막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탑제. 1998년 7월 21일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장동의 산신제와 탑제는 대전시 대덕구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베풀어지는 [마을](/topic/마을)신앙의 구조를 하고 있다. 계족산은 대전의 동쪽을 수호하는 지역의 [진산](/topic/진산)이다. 계족산 뒤편으로 ‘열두 산뒤’ 마을이 있다. 그 가운데 산디마을이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주신으로 계족산 산신을 모신다.

산디마을은 벌집 형국이다. 집을 한 [계단](/topic/계단)씩 올려 지어 벌집처럼 생겼으며,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가 벌집처럼 한 개뿐이다. 이 마을은 49가구가 넘으면 불이 나서 집이 헐려 늘 49가구를 유지한다는 전설이 어려 있다. 대전은 일제강점기에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산디마을은 산속 깊숙이 위치해 전통문화가 비교적 오래도록 보존되었다.

이곳의 탑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시작된다. 이에 앞서 음력 섣달 스무엿샛날에 [제관](/topic/제관) 일행을 선정해 제사를 준비한다. 제물을 장만하는 고양주와 제사를 주관하는 집사, 제물을 지고 가는 짐꾼 등을 선출한다. 과거에는 신수를 보아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이 닿는 사람으로 선정했으나 1995년 이후로는 제관 선정이 어려워 다섯 가구씩 의무적으로 돌아가며 맡는다. 고양주는 산신제까지를 주관하므로 상유사라 하여 특별히 깨끗한 사람을 뽑는다.

제사 하루 전날에 신탄진 장에 나가 제물로 밤, [대추](/topic/대추), [사과](/topic/사과), 배, 곶감, 명태, 향, 소지종이, 양초, 참기름을 산다. 할아버지탑과 할머니탑에 동일하게 제물을 올린다. 제주(祭酒)는 고양주가 일주일 전에 담고, 떡은 백설기로 마련한다. 이곳에서는 ‘탑제는 당일정성, 산제는 삼일정성’이라고 한다. 산신은 마을의 상당에서 모셔지는 최고의 신령이기에 깊은 정성을 들여야 한다. 산신제에는 제관 일행 이외에는 아무도 참여할 수 없다. 비의(祕儀)로 거행되는 산신제에 비해 탑제는 마을 어귀의 열린 공간에서 베풀어지기 때문인지 부정하지 않으면 참여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열나흗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낮 12시가 되면 제사 준비를 한다. 고양주 집에서 탑제에 올릴 떡을 안치면 각 가정에서도 [마중시루](/topic/마중시루)를 올린다. 저녁 8시쯤이 되면 풍장패가 풍물을 울리면서 고양주 집으로 간다. 고양주 집에서는 [마당](/topic/마당)에 상을 펼치고, 쌀 한 말과 물 한 동이를 놓아둔다. [처마](/topic/처마)에는 마을을 상징하는 [농기](/topic/농기)(農旗)를 걸쳐 둔다. 농기가 세워져 있기에 멀리서 보아도 고양주의 집을 확인할 수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 옥수(玉水) 한 그릇을 상에 올려놓으면 풍물패가 그 앞에서 풍물을 한바탕 치면서 “만복을 받읍쇼!” 하고 축언을 한다. 천주님께 제사를 지냄을 알리는 의식이라 한다. 그런 다음 [우물](/topic/우물), [장독대](/topic/장독대), [부엌](/topic/부엌) 순서로 풍물을 치며 지신을 밟는다. 이어 농기 앞에서 [농신제](/topic/농신제)를 지낸다. 술 한 잔을 올리고 나서 간단히 [비손](/topic/비손)하고 풍장을 친다. 그런 다음 마을의 공동우물을 돌며 간단히 비손한다. 이를 요왕제라고 한다. “물 줍쇼! 물 줍쇼! 사해 용왕님 물 줍쇼! 뚫어라! 뚫어라! 물구녕만 뚫어라! 동해물도 따르고, 서해물도 따르고, 맑은 물만 출렁출렁!”이라 하며 풍장을 친다.

그런 뒤 마을을 돌아 할아버지탑으로 가서 제물을 진설한다. 술, 과일, 포, 떡만을 올린 소찬이지만 거룩하게 드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진설한다. 그러고 나서 할아버지탑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에 앞서 탑의 몸통에는 [금줄](/topic/금줄)을 드리우고, 탑의 윗돌에는 종이를 씌우고 금줄을 감아 탑을 의인화(擬人化)한다. 이것을 ‘탑의 옷을 입힌다’고 한다. 이는 고양주가 하는 일로, 다른 사람이 대신하지 않는다. 고양주가 정성을 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제상](/topic/제상) 위에 제물을 진설하면 고양주가 [분향](/topic/분향)하고 술 석 잔을 올린다. [헌작](/topic/헌작)을 하면 고양주와 집사가 나란히 재배한다. [축문](/topic/축문)은 읽지 않고 소지만 올린다. 대동소지-고양주소지-노년층소지-중년층소지-청년층소지-소년층소지-우마소지 순서로 올린다.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할아버지탑 제사가 끝나면 곧장 할머니탑으로 옮겨가서 동일한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마친 뒤에는 다시 할아버지 탑 앞으로 옮겨와 [음복](/topic/음복)한다. 제상에 올린 떡을 나누어 먹으며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한다.

또 떡과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종이로 싸서 탑 위에 올려놓았다. 최근에는 짚으로 만든 오쟁이에 담아 올려놓는다. 이 제물을 먹으면 재수가 좋다고 하여 서로 가져가려고 한다. 떡도 떼어내 나누어 준다. 이 떡을 먹어도 재수가 좋다고 여긴다. 특히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부녀자들은 반드시 얻어먹는다.

탑제가 거행되는 동안 각 가정에서는 집안의 안과태평을 빌기 위해 탑제에 맞추어 마중시루를 올리고 마을에 임재한 신령을 집 안으로 불러들인다.

모든 제사가 끝나면 고양주가 마지막 정리를 위해 [해물리기](/topic/해물리기)를 한다. 물이 담긴 바[가지](/topic/가지)에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담아 부엌칼로 휘휘 저은 다음 탑 앞쪽으로 나아가 바가지에 담긴 것을 마을 밖으로 휙 내던지며 “허파세!”라고 외친다. 그런 뒤 들고 있는 부엌칼로 땅에 열 십 자를 긋고는 마을로 돌아온다. 모든 부정한 것을 물리쳤다는 상징이다.

마을로 돌아와 고양주의 집으로 가서 음복하고 제주를 나누어 마신다. 이 술은 맛이 하도 좋아 먹다 보면 취하는 줄을 모르지만 실제로는 취해서 일어서지 못한다고 하여 ‘앉은뱅이술’이라고 한다.

이튿날에는 주민들이 모두 모여 제비 결산을 하고 척사놀이를 하며 하루를 논다. 대보름을 맞이하여 풍농(豐農)을 기원하는 다양한 민속행사가 어우러진 마을 축제마당이 된다.

정월 탑제가 마을의 액을 막기 위한 제사였다면 음력 시월 초사흗날에 거행하는 산신제는 한 해 동안 마을을 편안하게 돌보아주신 산신령께 감사를 드리는 감사제이다. 과거에는 마을이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탓에 산짐승으로부터의 피해가 많아 이를 막기 위해 산신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마을 뒤편의 계족산 중턱에 산신당에 있다. 마을에서는 산신당이 보이지 않지만 산신당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본래는 1950년대에 지은 작은 두 칸의 [초가집](/topic/초가집)이었다. 한 칸에는 산신의 [위패](/topic/위패)를 모셨으며, 다른 한 칸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관들이 추위를 피하는 곳으로 이용했다. 1995년에 대덕구의 지원으로 개축하여 두 칸에 [기와](/topic/기와)를 얹은 형태가 되었다. 그 옆에는 본래 있던 긴 돌이 하나 서 있다. 산신당을 짓기 이전에는 이 돌을 산신으로 여겼다. 그 옆에는 제사를 지낼 때만 사용하는 샘이 있다. 이 마을에는 산신을 위패 형태로 [봉안](/topic/봉안)했다. 산에서 직접 통돼지를 잡아 제물로 사용하며 산신령이 들을 수 있도록 돼지가 ‘꽥꽥’ 소리를 내게 해야 잘 지냈다고 여긴다.

탑제와 더불어 산신제는 계족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들에서 지내는 보편적인 제사이다. 산디마을의 제사는 주민들의 열성과 믿음 속에서 단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주민들에게 탑제와 산신제는 마을의 든든한 울타리인 셈이다.
참고문헌대덕구민속지 (대덕구청, 1989)
민간신앙 (이필영, 대전의 민속지, 1998)
대덕구사-신앙 (이필영, 대덕구, 2006)
한국의 [마을](/topic/마을)신앙 상 (국립민속박물관, 2007)
내용장동의 산신제와 탑제는 대전시 대덕구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베풀어지는 [마을](/topic/마을)신앙의 구조를 하고 있다. 계족산은 대전의 동쪽을 수호하는 지역의 [진산](/topic/진산)이다. 계족산 뒤편으로 ‘열두 산뒤’ 마을이 있다. 그 가운데 산디마을이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주신으로 계족산 산신을 모신다.

산디마을은 벌집 형국이다. 집을 한 [계단](/topic/계단)씩 올려 지어 벌집처럼 생겼으며,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가 벌집처럼 한 개뿐이다. 이 마을은 49가구가 넘으면 불이 나서 집이 헐려 늘 49가구를 유지한다는 전설이 어려 있다. 대전은 일제강점기에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산디마을은 산속 깊숙이 위치해 전통문화가 비교적 오래도록 보존되었다.

이곳의 탑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시작된다. 이에 앞서 음력 섣달 스무엿샛날에 [제관](/topic/제관) 일행을 선정해 제사를 준비한다. 제물을 장만하는 고양주와 제사를 주관하는 집사, 제물을 지고 가는 짐꾼 등을 선출한다. 과거에는 신수를 보아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이 닿는 사람으로 선정했으나 1995년 이후로는 제관 선정이 어려워 다섯 가구씩 의무적으로 돌아가며 맡는다. 고양주는 산신제까지를 주관하므로 상유사라 하여 특별히 깨끗한 사람을 뽑는다.

제사 하루 전날에 신탄진 장에 나가 제물로 밤, [대추](/topic/대추), [사과](/topic/사과), 배, 곶감, 명태, 향, 소지종이, 양초, 참기름을 산다. 할아버지탑과 할머니탑에 동일하게 제물을 올린다. 제주(祭酒)는 고양주가 일주일 전에 담고, 떡은 백설기로 마련한다. 이곳에서는 ‘탑제는 당일정성, 산제는 삼일정성’이라고 한다. 산신은 마을의 상당에서 모셔지는 최고의 신령이기에 깊은 정성을 들여야 한다. 산신제에는 제관 일행 이외에는 아무도 참여할 수 없다. 비의(祕儀)로 거행되는 산신제에 비해 탑제는 마을 어귀의 열린 공간에서 베풀어지기 때문인지 부정하지 않으면 참여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열나흗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낮 12시가 되면 제사 준비를 한다. 고양주 집에서 탑제에 올릴 떡을 안치면 각 가정에서도 [마중시루](/topic/마중시루)를 올린다. 저녁 8시쯤이 되면 풍장패가 풍물을 울리면서 고양주 집으로 간다. 고양주 집에서는 [마당](/topic/마당)에 상을 펼치고, 쌀 한 말과 물 한 동이를 놓아둔다. [처마](/topic/처마)에는 마을을 상징하는 [농기](/topic/농기)(農旗)를 걸쳐 둔다. 농기가 세워져 있기에 멀리서 보아도 고양주의 집을 확인할 수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 옥수(玉水) 한 그릇을 상에 올려놓으면 풍물패가 그 앞에서 풍물을 한바탕 치면서 “만복을 받읍쇼!” 하고 축언을 한다. 천주님께 제사를 지냄을 알리는 의식이라 한다. 그런 다음 [우물](/topic/우물), [장독대](/topic/장독대), [부엌](/topic/부엌) 순서로 풍물을 치며 지신을 밟는다. 이어 농기 앞에서 [농신제](/topic/농신제)를 지낸다. 술 한 잔을 올리고 나서 간단히 [비손](/topic/비손)하고 풍장을 친다. 그런 다음 마을의 공동우물을 돌며 간단히 비손한다. 이를 요왕제라고 한다. “물 줍쇼! 물 줍쇼! 사해 용왕님 물 줍쇼! 뚫어라! 뚫어라! 물구녕만 뚫어라! 동해물도 따르고, 서해물도 따르고, 맑은 물만 출렁출렁!”이라 하며 풍장을 친다.

그런 뒤 마을을 돌아 할아버지탑으로 가서 제물을 진설한다. 술, 과일, 포, 떡만을 올린 소찬이지만 거룩하게 드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진설한다. 그러고 나서 할아버지탑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에 앞서 탑의 몸통에는 [금줄](/topic/금줄)을 드리우고, 탑의 윗돌에는 종이를 씌우고 금줄을 감아 탑을 의인화(擬人化)한다. 이것을 ‘탑의 옷을 입힌다’고 한다. 이는 고양주가 하는 일로, 다른 사람이 대신하지 않는다. 고양주가 정성을 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제상](/topic/제상) 위에 제물을 진설하면 고양주가 [분향](/topic/분향)하고 술 석 잔을 올린다. [헌작](/topic/헌작)을 하면 고양주와 집사가 나란히 재배한다. [축문](/topic/축문)은 읽지 않고 소지만 올린다. 대동소지-고양주소지-노년층소지-중년층소지-청년층소지-소년층소지-우마소지 순서로 올린다.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할아버지탑 제사가 끝나면 곧장 할머니탑으로 옮겨가서 동일한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마친 뒤에는 다시 할아버지 탑 앞으로 옮겨와 [음복](/topic/음복)한다. 제상에 올린 떡을 나누어 먹으며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한다.

또 떡과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종이로 싸서 탑 위에 올려놓았다. 최근에는 짚으로 만든 오쟁이에 담아 올려놓는다. 이 제물을 먹으면 재수가 좋다고 하여 서로 가져가려고 한다. 떡도 떼어내 나누어 준다. 이 떡을 먹어도 재수가 좋다고 여긴다. 특히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부녀자들은 반드시 얻어먹는다.

탑제가 거행되는 동안 각 가정에서는 집안의 안과태평을 빌기 위해 탑제에 맞추어 마중시루를 올리고 마을에 임재한 신령을 집 안으로 불러들인다.

모든 제사가 끝나면 고양주가 마지막 정리를 위해 [해물리기](/topic/해물리기)를 한다. 물이 담긴 바[가지](/topic/가지)에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담아 부엌칼로 휘휘 저은 다음 탑 앞쪽으로 나아가 바가지에 담긴 것을 마을 밖으로 휙 내던지며 “허파세!”라고 외친다. 그런 뒤 들고 있는 부엌칼로 땅에 열 십 자를 긋고는 마을로 돌아온다. 모든 부정한 것을 물리쳤다는 상징이다.

마을로 돌아와 고양주의 집으로 가서 음복하고 제주를 나누어 마신다. 이 술은 맛이 하도 좋아 먹다 보면 취하는 줄을 모르지만 실제로는 취해서 일어서지 못한다고 하여 ‘앉은뱅이술’이라고 한다.

이튿날에는 주민들이 모두 모여 제비 결산을 하고 척사놀이를 하며 하루를 논다. 대보름을 맞이하여 풍농(豐農)을 기원하는 다양한 민속행사가 어우러진 마을 축제마당이 된다.

정월 탑제가 마을의 액을 막기 위한 제사였다면 음력 시월 초사흗날에 거행하는 산신제는 한 해 동안 마을을 편안하게 돌보아주신 산신령께 감사를 드리는 감사제이다. 과거에는 마을이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탓에 산짐승으로부터의 피해가 많아 이를 막기 위해 산신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마을 뒤편의 계족산 중턱에 산신당에 있다. 마을에서는 산신당이 보이지 않지만 산신당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본래는 1950년대에 지은 작은 두 칸의 [초가집](/topic/초가집)이었다. 한 칸에는 산신의 [위패](/topic/위패)를 모셨으며, 다른 한 칸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관들이 추위를 피하는 곳으로 이용했다. 1995년에 대덕구의 지원으로 개축하여 두 칸에 [기와](/topic/기와)를 얹은 형태가 되었다. 그 옆에는 본래 있던 긴 돌이 하나 서 있다. 산신당을 짓기 이전에는 이 돌을 산신으로 여겼다. 그 옆에는 제사를 지낼 때만 사용하는 샘이 있다. 이 마을에는 산신을 위패 형태로 [봉안](/topic/봉안)했다. 산에서 직접 통돼지를 잡아 제물로 사용하며 산신령이 들을 수 있도록 돼지가 ‘꽥꽥’ 소리를 내게 해야 잘 지냈다고 여긴다.

탑제와 더불어 산신제는 계족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들에서 지내는 보편적인 제사이다. 산디마을의 제사는 주민들의 열성과 믿음 속에서 단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주민들에게 탑제와 산신제는 마을의 든든한 울타리인 셈이다.
참고문헌대덕구민속지 (대덕구청, 1989)
민간신앙 (이필영, 대전의 민속지, 1998)
대덕구사-신앙 (이필영, 대덕구, 2006)
한국의 [마을](/topic/마을)신앙 상 (국립민속박물관, 2007)
한국문화인류학회한국 무신의 계통김태곤1970
문음사김금화의 무가집김금화1995
한국 무속신 고찰양종승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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