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창리영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에서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지내는 당굿형 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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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에서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지내는 당굿형 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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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경
정의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에서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지내는 당굿형 동제.
정의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에서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지내는 당굿형 동제.
내용창리는 부석면 최남단에 위치해 [간척](/topic/간척)사업 후에도 유일하게 바다에 연해 있다.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지역이지만 중요한 수입원은 어업이다. [조기잡이](/topic/조기잡이)용 안강망 중선배가 정박한 포구이기도 하다. 바다의 이점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간소하게 치르던 [마을](/topic/마을) 제사가 지금과 같이 무당이 참여하는 당굿형 제사로 활성화되었다. 1983년에 간척지 사업이 완공되면서 어업이 쇠퇴하여 어업과 연계된 당굿형 영신제도 축소되었다. 그러나 바다와 접해 있어서 영신제의 명맥이 미미하게나마 유지되고 있다.창리는 조운(漕運)이 성하던 시절에 국가의 조창(漕倉)이 있던 곳으로, 교통의 요지이다. 마을 앞쪽의 천수만 일대는 일찍부터 어살[漁箭]이 발달했으며, 마을 뒤편에는 염전이 있어 소금도 생산했다. 어업용 중선이 보급되면서는 중선을 인근에서 가장 많이 부리기도 했다. 1983년에 서산 AB지구 간척사업이 이루어진 뒤 농경지는 확대되었지만 어업은 줄어들었다. 어업과 연계되어 있던 영신제는 자연스레 축소되었고, 산신당은 도로 건설로 인해 사라졌으며, 장승제도 중단되었다. 어업이 번성할 때 선주와 주민들이 합심해 지내던 마을 제사가 어업의 쇠퇴로 인해 소멸되고 축소된 것이다. 이곳의 당제는 무당을 불러 당굿을 추가한 ‘당굿형 당제’로, 내륙과 달리 해안은 어업이라는 특별한조건이 충족되면서 마을 제사가 당굿형으로 확대되었다. 지금은 영신제만이 남아 있지만 상당제로 산신제, 하당제로 장승제와 [샘제](/topic/샘제) 등이 있었다.

마을의 서북쪽에 상당이라 불리는 산신당이 있었다. 마을 초입을 에워싸고 있는 작은 동산으로, 외부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잡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산의 중앙에는 약 6.6㎡의 장방형 누석단(累石壇)이 있었다. 그 중앙에는 자그맣게 돌을 쌓고 [쇠말](/topic/쇠말)[鐵馬]을 [봉안](/topic/봉안)해 두었다. 쇠말은 발이 한 개 부러진 형태였다. 호환(虎患)이 심하던 해에 말이 밀려오는 호랑이를 발로 걷어차며 막아내다가 발 한 개가 부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해안의 마을들은 일찍부터 왜구의 침입과 잦은 전염병, 해일 등으로고통을 당했다. 그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마을 어귀에 쇠말을 봉안한 제당을 건립한 것이다. 쇠말이 사라진 뒤에는 사기로 말의 형상을 구워다가 놓기도 했다. 그러나 건설회사가 간척사업을 위해 도로건설을 하면서 이마저도 남아 있지 않다. 제사는 이곳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다.

하당은 영신당으로, 마을 동북편 해변에 위치한 당산에 있다. 중앙에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기와집](/topic/기와집)이 있다. 그 주변에는 담이 둘러져 있고, 정면에 문을 달아 두었다.당집 앞에는 70∼80명이 서 있을 정도의 공터가 있으며, 뒤편으로는 해송(海松)이 빼곡하게 심겨져 있다. 당산의 나무를 베면 벌을 받는다는 금기가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어해송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이전의 당집은 1911년에 중건되었다. 이 당집은 선주들이 주동이 되어 만든 목조와가(木造瓦家)였다. 현재의 당집은 1999년에 서산시가 지원해 시멘트 콘크리트로 벽채를 만들고 [기와](/topic/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영신당은창리의 제당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제당이다.

당집 내부에는 정면에 [임경업 [장군](/topic/장군)](/topic/임경업장군)과 그의 부인을 그린 무신도를 걸고, 그 아래에 장군신위(將軍神位)·부인신위(婦人神位)라고 묵서된 [위패](/topic/위패)를 봉안했다. 그 왼쪽에는 지토당과 슈당, 오른쪽에는 손님신위와 수배당이 역시 묵서된 위패로 각각 봉안되어 있다. 슈당은 바다의 신으로 용왕이라 하며, 지토당은 지신(地神)이라 한다. 손님은 호구별상을말하며, 수배는 잡귀신이다. 임경업 장군은 서해안에서 조기의 신 또는 어업의 신으로 모셔진다. 천수만에서 조기잡이가 성할 때는 당제는 물론 각 어선에서도 모셨다. 그 전통이 이어져 당집에 봉안한 것이다. 무신도는 본래 없었으나 1970년대에 그려 모셨다. 그러나 무신도를 잃어버린 후 장군과 부인을 그린 새로운 그림을 봉안했다. 오래되어 퇴락하여 2000년대 중반에 다시 임경업 장군만을 그려 봉안했다. 이 그림은 충북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에 위치한 임경업 장군의 사우(祠宇)에 모셔 둔 표준영정을 모사했다.무신도라기보다는 유교 사우에 모신 [영정](/topic/영정)이기에 그 모습이 사뭇 이질적이다. 천수만에 조기가 가득했을 때에는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나 조기잡이가 시들해지면서 그 의미도 줄었다. 장승은 서산에서 창리로 들어오는 길목에 2기가 위치해 있어서, 이곳에서 [노제](/topic/노제)(路祭)를 지냈으나 제사가 축소되면서 소멸되었다.

제사는 마을에서 선출된 당주가 주관하며, 산신제와 영신제 당주를 각기 선출했다.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보아 운이 닿는 사람으로 영신당 당주 한 명, 산신당 당주 세명을 각각 뽑았다. 이 가운데 영신당 당주에게만 제사를 마친 뒤 수고했다고 쌀 한 [가마니](/topic/가마니)를 주었다.

당굿은 무당이 주관한다. 예전에는 마을에 [단골](/topic/단골)이 있어 그가 굿을 주관했지만 단골이 사라진 뒤로는 형편에 따라 적당한 사람을 불러 굿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지역 출신으로 앉은굿을 하는 큰무당을 부른다. 중선을 부리던 시절에는 큰 무당패를 불러 [삼현육각](/topic/삼현육각)을 잡히고 성대하게 굿을 했다. 어업의 쇠퇴로 과거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여전히 무당이 굿을 주재하면서 당굿형 당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굿의 전통은 과거와 단절되어 새롭게 만들어졌다.

제사 비용은 동네 추렴을 원칙으로 하지만 선주(船主)가 많았기에 그들이 조금 더 부담하고, 주민들은 조금씩 성의껏 낸다. 소 한 마리를 제물로 썼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지금은 마을공동양식장의 수익을 축적해 만든 어촌계 공동금액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당주가 직접 서산 장에 나가 구입해 온다. 산신제는 소찬(素餐)만을 올리므로 [노구솥](/topic/노구솥)에 메를 지어 올린다. 상당 앞의 넓은 바위에서 직접 노구메를 지어 솥째 놓았다.영신제에는 소를 잡아 산적으로 올리고, 술·[[가래](/topic/가래)떡](/topic/가래떡)·삼색실과·메 등을 올린다. 술은 대동샘물을 길어다가 영신당에서 제사 지내기 하루 전날에 직접 빚어 두었다가 사용한다. 한동안 소를 잡을 수 없어 돼지로 대체하다가 지금은 산적감만 쇠고기를 구입해 사용한다. 소를 잡을 때에는 제의가 파한 뒤에 당주가 가구수대로 동일하게 고기를 분배한다.

산신제는 음력 정월 초이튿날 밤 10시쯤에 당주만이 참석하여 거행한다. 상당 앞에서 직접 노구메를 지어 솥째 올리고, 공동샘에 길은 [정화수](/topic/정화수) 세 잔을 올린다. 당주가 재배한뒤 대동소지 한 장과 가구당 한 장씩 개별적으로 소지를 올려준다. 제사를 마치면 노구에 담긴 메를 설었거나 질었거나 개의치 않고 군말 없이 먹고는 자정을 전후해 하산한다. 추운 겨울철에 바람막이조차 없는 산에서 지내는 제사였기에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고 한다.

정월 초사흗날 아침에는 당주 집에서 당주[고사](/topic/고사)를 지낸다. 이때는 각 배의 깃대를 당주 집 앞에 가져다 세운다. 당주고사를 마친 뒤에는 술과 고기로 [음복](/topic/음복)하고, 잠시 쉬었다가하당제를 지내러 영신당으로 향한다.

당주는 먼저 영신당에 올라 제사 모실 준비를 한다. 풍물패는 [뱃기](/topic/뱃기)를 앞세우고 해변을 따라 영신당으로 향한다. 당산에 도착하면 그 입구에 [주과포](/topic/주과포)만을 올린 [제상](/topic/제상)을 놓고 무당이 [부정풀이](/topic/부정풀이)를 한다. 부정풀이가 끝나야 주민들은 비로소 당집에 오를 수 있다. 뱃기는 당집 앞에 바다를 바라보도록 세운다. 뱃기가 많은 때는 100개가 넘었다고 하니 어업의 성황을 짐작할 수 있다. 당집 앞에 [자리](/topic/자리)를 깔고 굿청을 마련한다. 바람을 막기 위해 당집 앞에는 포장을 쳐 둔다. 먼저 당주가 제물을 올리고 [헌작](/topic/헌작) 후 재배한다. 간소하게 당제가 끝나면 당굿을 시작한다. 밤이 새도록 굿과 배치기를 번갈아 가며 행한다. 굿은 1980년대 중반에 단골이 주관할 때에는 지토굿-공석굿-손님굿-수비굿-오방굿-군웅굿-허식굿 순서로 놀았다. 앉은굿이 거행되는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지금은 서낭굿과 장군굿만으로 간소하게 행한다. 서낭굿을 할 때에는 당집에 보관된 노란[쾌자](/topic/쾌자)를 무당이걸쳐 입는다. 노란색은 [서낭신](/topic/서낭신)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당굿이라 하여 무당의 굿이나 법사의 독경이 중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중시되는 것은 주민들이 참여하는 배치기와 무당에게 공수를 받는 것이다. 굿 한 거리나 경 한 석이 끝나면 배치기가 이어진다. 조용하게 관람하던 주민들도 굿이나 경이 끝나면 일어서서 배치기를 하며 흥을 돋운다. 무당이 오방기를 들고 기 뽑기를 하면 한 쪽에 물러서 있던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어 공수를 듣는다. 배치기는 노래꾼들이 둘 또는 셋씩 마주보고 배 놀이이다. 굿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관람객이던 주민들이 배치기와 더불어 신명나는 놀이판의 주인이 된다. 밤새도록 반복되는 굿거리에 배치기와 공수는 주민들이 영신제를 이끌고 가는 힘이기도 하다.

간혹 흰 [광목](/topic/광목)으로 띠를 만들어 그물을 상징화하여 당기면서 배치기를 부르기도 한다. 힘에 겨우면 마련된 술과 떡을 먹으며 밤이 깊도록 놀았다. 새벽녘이 되어 막바지에 이르면 소지를 올린다. 산신제에 참석할 수 없었던 주민들에게 한 해의 안녕과 풍어를 보장하는 소지는 무엇보다 중시되었다. 무당이 직접 마을 소지를 올리고 나서 가구별로 소지를 올려준다. 이때 참석자는 별비(別費)를 내고 공수를 받는다. 소지후 허식굿을 하면 모든 굿이 끝난다. 당 앞에 꽂아 둔 뱃기를 빼어 들고 자신의 배로 돌아가 꽂는다.배별로 당맞이 배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뱃기만을 꽂기도 한다. 과거에는 당산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가까이에 배를 대 놓고 서둘러 뱃기를 꽂았다. 먼저 뱃기를꽂으면 풍어를 할 수 있다는 속신 때문에 경쟁적으로 싸움을 벌이곤 했다.

당제를 마친 뒤에는 대동[우물](/topic/우물)에 나가 샘굿을 하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지신을 밟아 주었다. 장승제는 1950년대까지 윤년에 지냈다. [윤달](/topic/윤달)이 드는 해에 초사흗날에 소나무를 베어다가 장승을 깎아 세웠다. 윤달이 드는 해에는 유독 질병이 돌고 온갖 재앙이 닥치므로 이를 예방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영신제가 비록 축소되었지만 그것은 마을의 변화와 더불어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굿과 놀이가 어우러진 신명나는 당굿형 당제는 창리 주민들의 희망과 소망을 담은축제이다. 지금은 지역의 축제로 활성화되어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천수만 창리 [마을](/topic/마을)굿 (주강현, 충남의 장승·솟대 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1)
서해안 풍어제와 임경업 전설 (홍태한, 전설과 지역문화, 민속원, 2002)
어촌의 변화에 따른 마을신앙의 변모 (홍태한, 도서문화31, 목[포대](/topic/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8)
내용창리는 부석면 최남단에 위치해 [간척](/topic/간척)사업 후에도 유일하게 바다에 연해 있다.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지역이지만 중요한 수입원은 어업이다. [조기잡이](/topic/조기잡이)용 안강망 중선배가 정박한 포구이기도 하다. 바다의 이점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간소하게 치르던 [마을](/topic/마을) 제사가 지금과 같이 무당이 참여하는 당굿형 제사로 활성화되었다. 1983년에 간척지 사업이 완공되면서 어업이 쇠퇴하여 어업과 연계된 당굿형 영신제도 축소되었다. 그러나 바다와 접해 있어서 영신제의 명맥이 미미하게나마 유지되고 있다.창리는 조운(漕運)이 성하던 시절에 국가의 조창(漕倉)이 있던 곳으로, 교통의 요지이다. 마을 앞쪽의 천수만 일대는 일찍부터 어살[漁箭]이 발달했으며, 마을 뒤편에는 염전이 있어 소금도 생산했다. 어업용 중선이 보급되면서는 중선을 인근에서 가장 많이 부리기도 했다. 1983년에 서산 AB지구 간척사업이 이루어진 뒤 농경지는 확대되었지만 어업은 줄어들었다. 어업과 연계되어 있던 영신제는 자연스레 축소되었고, 산신당은 도로 건설로 인해 사라졌으며, 장승제도 중단되었다. 어업이 번성할 때 선주와 주민들이 합심해 지내던 마을 제사가 어업의 쇠퇴로 인해 소멸되고 축소된 것이다. 이곳의 당제는 무당을 불러 당굿을 추가한 ‘당굿형 당제’로, 내륙과 달리 해안은 어업이라는 특별한조건이 충족되면서 마을 제사가 당굿형으로 확대되었다. 지금은 영신제만이 남아 있지만 상당제로 산신제, 하당제로 장승제와 [샘제](/topic/샘제) 등이 있었다.

마을의 서북쪽에 상당이라 불리는 산신당이 있었다. 마을 초입을 에워싸고 있는 작은 동산으로, 외부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잡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산의 중앙에는 약 6.6㎡의 장방형 누석단(累石壇)이 있었다. 그 중앙에는 자그맣게 돌을 쌓고 [쇠말](/topic/쇠말)[鐵馬]을 [봉안](/topic/봉안)해 두었다. 쇠말은 발이 한 개 부러진 형태였다. 호환(虎患)이 심하던 해에 말이 밀려오는 호랑이를 발로 걷어차며 막아내다가 발 한 개가 부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해안의 마을들은 일찍부터 왜구의 침입과 잦은 전염병, 해일 등으로고통을 당했다. 그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마을 어귀에 쇠말을 봉안한 제당을 건립한 것이다. 쇠말이 사라진 뒤에는 사기로 말의 형상을 구워다가 놓기도 했다. 그러나 건설회사가 간척사업을 위해 도로건설을 하면서 이마저도 남아 있지 않다. 제사는 이곳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다.

하당은 영신당으로, 마을 동북편 해변에 위치한 당산에 있다. 중앙에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기와집](/topic/기와집)이 있다. 그 주변에는 담이 둘러져 있고, 정면에 문을 달아 두었다.당집 앞에는 70∼80명이 서 있을 정도의 공터가 있으며, 뒤편으로는 해송(海松)이 빼곡하게 심겨져 있다. 당산의 나무를 베면 벌을 받는다는 금기가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어해송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이전의 당집은 1911년에 중건되었다. 이 당집은 선주들이 주동이 되어 만든 목조와가(木造瓦家)였다. 현재의 당집은 1999년에 서산시가 지원해 시멘트 콘크리트로 벽채를 만들고 [기와](/topic/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영신당은창리의 제당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제당이다.

당집 내부에는 정면에 [임경업 [장군](/topic/장군)](/topic/임경업장군)과 그의 부인을 그린 무신도를 걸고, 그 아래에 장군신위(將軍神位)·부인신위(婦人神位)라고 묵서된 [위패](/topic/위패)를 봉안했다. 그 왼쪽에는 지토당과 슈당, 오른쪽에는 손님신위와 수배당이 역시 묵서된 위패로 각각 봉안되어 있다. 슈당은 바다의 신으로 용왕이라 하며, 지토당은 지신(地神)이라 한다. 손님은 호구별상을말하며, 수배는 잡귀신이다. 임경업 장군은 서해안에서 조기의 신 또는 어업의 신으로 모셔진다. 천수만에서 조기잡이가 성할 때는 당제는 물론 각 어선에서도 모셨다. 그 전통이 이어져 당집에 봉안한 것이다. 무신도는 본래 없었으나 1970년대에 그려 모셨다. 그러나 무신도를 잃어버린 후 장군과 부인을 그린 새로운 그림을 봉안했다. 오래되어 퇴락하여 2000년대 중반에 다시 임경업 장군만을 그려 봉안했다. 이 그림은 충북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에 위치한 임경업 장군의 사우(祠宇)에 모셔 둔 표준영정을 모사했다.무신도라기보다는 유교 사우에 모신 [영정](/topic/영정)이기에 그 모습이 사뭇 이질적이다. 천수만에 조기가 가득했을 때에는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나 조기잡이가 시들해지면서 그 의미도 줄었다. 장승은 서산에서 창리로 들어오는 길목에 2기가 위치해 있어서, 이곳에서 [노제](/topic/노제)(路祭)를 지냈으나 제사가 축소되면서 소멸되었다.

제사는 마을에서 선출된 당주가 주관하며, 산신제와 영신제 당주를 각기 선출했다.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보아 운이 닿는 사람으로 영신당 당주 한 명, 산신당 당주 세명을 각각 뽑았다. 이 가운데 영신당 당주에게만 제사를 마친 뒤 수고했다고 쌀 한 [가마니](/topic/가마니)를 주었다.

당굿은 무당이 주관한다. 예전에는 마을에 [단골](/topic/단골)이 있어 그가 굿을 주관했지만 단골이 사라진 뒤로는 형편에 따라 적당한 사람을 불러 굿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지역 출신으로 앉은굿을 하는 큰무당을 부른다. 중선을 부리던 시절에는 큰 무당패를 불러 [삼현육각](/topic/삼현육각)을 잡히고 성대하게 굿을 했다. 어업의 쇠퇴로 과거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여전히 무당이 굿을 주재하면서 당굿형 당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굿의 전통은 과거와 단절되어 새롭게 만들어졌다.

제사 비용은 동네 추렴을 원칙으로 하지만 선주(船主)가 많았기에 그들이 조금 더 부담하고, 주민들은 조금씩 성의껏 낸다. 소 한 마리를 제물로 썼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지금은 마을공동양식장의 수익을 축적해 만든 어촌계 공동금액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당주가 직접 서산 장에 나가 구입해 온다. 산신제는 소찬(素餐)만을 올리므로 [노구솥](/topic/노구솥)에 메를 지어 올린다. 상당 앞의 넓은 바위에서 직접 노구메를 지어 솥째 놓았다.영신제에는 소를 잡아 산적으로 올리고, 술·[[가래](/topic/가래)떡](/topic/가래떡)·삼색실과·메 등을 올린다. 술은 대동샘물을 길어다가 영신당에서 제사 지내기 하루 전날에 직접 빚어 두었다가 사용한다. 한동안 소를 잡을 수 없어 돼지로 대체하다가 지금은 산적감만 쇠고기를 구입해 사용한다. 소를 잡을 때에는 제의가 파한 뒤에 당주가 가구수대로 동일하게 고기를 분배한다.

산신제는 음력 정월 초이튿날 밤 10시쯤에 당주만이 참석하여 거행한다. 상당 앞에서 직접 노구메를 지어 솥째 올리고, 공동샘에 길은 [정화수](/topic/정화수) 세 잔을 올린다. 당주가 재배한뒤 대동소지 한 장과 가구당 한 장씩 개별적으로 소지를 올려준다. 제사를 마치면 노구에 담긴 메를 설었거나 질었거나 개의치 않고 군말 없이 먹고는 자정을 전후해 하산한다. 추운 겨울철에 바람막이조차 없는 산에서 지내는 제사였기에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고 한다.

정월 초사흗날 아침에는 당주 집에서 당주[고사](/topic/고사)를 지낸다. 이때는 각 배의 깃대를 당주 집 앞에 가져다 세운다. 당주고사를 마친 뒤에는 술과 고기로 [음복](/topic/음복)하고, 잠시 쉬었다가하당제를 지내러 영신당으로 향한다.

당주는 먼저 영신당에 올라 제사 모실 준비를 한다. 풍물패는 [뱃기](/topic/뱃기)를 앞세우고 해변을 따라 영신당으로 향한다. 당산에 도착하면 그 입구에 [주과포](/topic/주과포)만을 올린 [제상](/topic/제상)을 놓고 무당이 [부정풀이](/topic/부정풀이)를 한다. 부정풀이가 끝나야 주민들은 비로소 당집에 오를 수 있다. 뱃기는 당집 앞에 바다를 바라보도록 세운다. 뱃기가 많은 때는 100개가 넘었다고 하니 어업의 성황을 짐작할 수 있다. 당집 앞에 [자리](/topic/자리)를 깔고 굿청을 마련한다. 바람을 막기 위해 당집 앞에는 포장을 쳐 둔다. 먼저 당주가 제물을 올리고 [헌작](/topic/헌작) 후 재배한다. 간소하게 당제가 끝나면 당굿을 시작한다. 밤이 새도록 굿과 배치기를 번갈아 가며 행한다. 굿은 1980년대 중반에 단골이 주관할 때에는 지토굿-공석굿-손님굿-수비굿-오방굿-군웅굿-허식굿 순서로 놀았다. 앉은굿이 거행되는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지금은 서낭굿과 장군굿만으로 간소하게 행한다. 서낭굿을 할 때에는 당집에 보관된 노란[쾌자](/topic/쾌자)를 무당이걸쳐 입는다. 노란색은 [서낭신](/topic/서낭신)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당굿이라 하여 무당의 굿이나 법사의 독경이 중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중시되는 것은 주민들이 참여하는 배치기와 무당에게 공수를 받는 것이다. 굿 한 거리나 경 한 석이 끝나면 배치기가 이어진다. 조용하게 관람하던 주민들도 굿이나 경이 끝나면 일어서서 배치기를 하며 흥을 돋운다. 무당이 오방기를 들고 기 뽑기를 하면 한 쪽에 물러서 있던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어 공수를 듣는다. 배치기는 노래꾼들이 둘 또는 셋씩 마주보고 배 놀이이다. 굿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관람객이던 주민들이 배치기와 더불어 신명나는 놀이판의 주인이 된다. 밤새도록 반복되는 굿거리에 배치기와 공수는 주민들이 영신제를 이끌고 가는 힘이기도 하다.

간혹 흰 [광목](/topic/광목)으로 띠를 만들어 그물을 상징화하여 당기면서 배치기를 부르기도 한다. 힘에 겨우면 마련된 술과 떡을 먹으며 밤이 깊도록 놀았다. 새벽녘이 되어 막바지에 이르면 소지를 올린다. 산신제에 참석할 수 없었던 주민들에게 한 해의 안녕과 풍어를 보장하는 소지는 무엇보다 중시되었다. 무당이 직접 마을 소지를 올리고 나서 가구별로 소지를 올려준다. 이때 참석자는 별비(別費)를 내고 공수를 받는다. 소지후 허식굿을 하면 모든 굿이 끝난다. 당 앞에 꽂아 둔 뱃기를 빼어 들고 자신의 배로 돌아가 꽂는다.배별로 당맞이 배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뱃기만을 꽂기도 한다. 과거에는 당산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가까이에 배를 대 놓고 서둘러 뱃기를 꽂았다. 먼저 뱃기를꽂으면 풍어를 할 수 있다는 속신 때문에 경쟁적으로 싸움을 벌이곤 했다.

당제를 마친 뒤에는 대동[우물](/topic/우물)에 나가 샘굿을 하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지신을 밟아 주었다. 장승제는 1950년대까지 윤년에 지냈다. [윤달](/topic/윤달)이 드는 해에 초사흗날에 소나무를 베어다가 장승을 깎아 세웠다. 윤달이 드는 해에는 유독 질병이 돌고 온갖 재앙이 닥치므로 이를 예방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영신제가 비록 축소되었지만 그것은 마을의 변화와 더불어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굿과 놀이가 어우러진 신명나는 당굿형 당제는 창리 주민들의 희망과 소망을 담은축제이다. 지금은 지역의 축제로 활성화되어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천수만 창리 [마을](/topic/마을)굿 (주강현, 충남의 장승·솟대 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1)
서해안 풍어제와 임경업 전설 (홍태한, 전설과 지역문화, 민속원, 2002)
어촌의 변화에 따른 마을신앙의 변모 (홍태한, 도서문화31, 목[포대](/topic/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8)
대전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대전·충남의 무속 연구1997
한국역사민속학회부여지역의 앉은굿오문선1997
국립문화재연구소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충청도2005
한국무속학회충청지역의 종이무구임승범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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