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돌모산당산제

한국무속신앙사전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에서 행해지는 [마을](/topic/마을) 제의. 돌모산당산은 솟대형 석주신간(솟대당산)이며, ‘당산할머니’ 또는 ‘당산 하나씨’ 등으로 불린다. 마을 주민들은 이 신간이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라 여기고 해마다 이곳에 제의를 올리고 있다. 돌모산당산은 1985년 8월 16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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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에서 행해지는 [마을](/topic/마을) 제의. 돌모산당산은 솟대형 석주신간(솟대당산)이며, ‘당산할머니’ 또는 ‘당산 하나씨’ 등으로 불린다. 마을 주민들은 이 신간이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라 여기고 해마다 이곳에 제의를 올리고 있다. 돌모산당산은 1985년 8월 16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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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원
정의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에서 행해지는 [마을](/topic/마을) 제의. 돌모산당산은 솟대형 석주신간(솟대당산)이며, ‘당산할머니’ 또는 ‘당산 하나씨’ 등으로 불린다. 마을 주민들은 이 신간이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라 여기고 해마다 이곳에 제의를 올리고 있다. 돌모산당산은 1985년 8월 16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정의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에서 행해지는 [마을](/topic/마을) 제의. 돌모산당산은 솟대형 석주신간(솟대당산)이며, ‘당산할머니’ 또는 ‘당산 하나씨’ 등으로 불린다. 마을 주민들은 이 신간이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라 여기고 해마다 이곳에 제의를 올리고 있다. 돌모산당산은 1985년 8월 16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내용돌모산당산제가 행해지는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內寥里)에서 ‘내요’는 역구지[여뀌 또는 삼[고지](/topic/고지)(蔘古地)], 즉 [마을](/topic/마을)의 안쪽이라는 뜻이다. 돌모산은 내요 , 즉 안역구지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전체 100여 가구 가운데 80가구가 영주 이씨(瀛州李氏) 석호공파(石湖公派)이다. 이들 영주 이씨의 입향조는 이승간(李承澗)이라는 인물이며, 마을에는이승간과 그의 아들 광춘의 효자정문인 세효문(世孝門)이 있고 돌모산 새터에는 영주 이씨의 효열정문인 석정문(石旌門)이 있다.

돌모산은 석제 마을과 석하 마을로 나뉘는 곳이긴 하지만 본래는 돌모산이라는 하나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부안읍에서 주산면 방면으로 5~6㎞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읍과 인접해 있다. 마을 뒤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다. 그리고 그 앞쪽에 넓은 평야가 [자리](/topic/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평야가 있는 위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내요리 지역민들은 당산에 대한 신앙심이 매우 강하여 제의를 열심히 모시면 그해 마을은 풍년을 맞고 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당산제를 안 모시거나 소홀히 행하면 그해 마을에는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긴다고 하여 더욱 열심히 모신다.

돌모산당산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진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당산제를 지내기 전에 마을에서 초상이 나거나 출산이 있으면 이월 초하룻날로 제일을 변경한다. 당산제는동아줄 꼬기와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 주산(마을)돌기와 짐대할머니에 옷 입히기 순으로 진행된다. 제의 준비는 정월대보름 며칠 전부터 시작되어 정월 열나흗날 무렵이면 제물을 마련하고줄다리기에 사용할 [볏짚](/topic/볏짚)을 미리 걷어 준비를 마친다. 예전에는 [제관](/topic/제관) 및 제사에 참여하는 인원을 한 달 전에 선정하여 제의를 준비하도록 했다. 제관은 모두 8명이며 이들은 집사로 불린다. [초헌](/topic/초헌)관, [종헌](/topic/종헌)관, 집례, 축관, 봉향, 붕노 등 제관 명칭은 유교 제사의 예를 그대로 따라 붙였다. 제사 방식도 유교 제례식을 따르며, 제를 지낼 때에는 풍물 없이 조용하게 진행한다.

제물은 깨끗한 집에 맡겨 장만한다. [축문](/topic/축문)은 만들지만 소지하는 절차가 없다. 제비는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여 거둔 것으로 충당하며, 줄 제작에 필요한 짚은 농사 규모에따라 갹출하여 걷는다.

제의는 당골이 주관하여 설차-[분향](/topic/분향)-강신-제관 재배-[음복](/topic/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제물로는 백설기, 떡, 삼색실과 등 일반 가제(家祭)의 음식차림과 거의 같다. 행사 당일인 정월대보름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 준비를 위해 돌모산 경로당 앞에 모인다. 모인 마을 사람들은 풍물을 치며 당산제의 시작을 알린다. 남자들이 풍물을 치면 아녀자들은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에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미리 걷어 놓은 볏짚으로 줄다리기에 쓸 줄을 꼬는 작업을 한다. 작업은 마을의 대로변에서 주로 남성들이 하며, 두 패로 나눠 길게 늘어서서 손으로 줄을 꼰다.

줄다리기에 쓰일 정도의 크기로 외줄 제작이 완성되면 잠시 휴식을 한 다음 여성들이 준비해 놓은 음식을 먹는다. 그러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로당 앞에 모인다. 모이기 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줄을 마을 대로에 길게 늘여 편다. 이 지역에서 사용하는 줄이 외줄이기 때문에 줄 가운데에 중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를 한다. 또 승패를 알아볼 수 있도록 줄이 놓여 있는 중간 부분에 물로 선을 그려 표시를 해 놓는다.

그러고 나서 마을 사람들은 남녀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한다. 남자라 하더라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여성 편으로 가서 줄을 당긴다. 총 세 번 중에서 두 번을 먼저 이기는 편이 승리한다. 여성 편이 이겨야만 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가능한 한 여성 편이 이길 수 있도록 한다. 여성이 이겨야 하기 때문에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가 회초리를들고 남성 편에 가서 줄을 당기고 있는 남성들을 때린다. 심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라 모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심하게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어깨에 메고 마을을 한 바퀴 돈다. 이때 [영기](/topic/영기)를 든 사람과 풍물패가 앞장선다. 줄을 메고 마을을 도는 것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땅을 다지는 역할도 한다. 이는 마을을 돌면서 잡귀를 몰아내는 의식이다.

[마을돌기](/topic/마을돌기)가 끝나면 줄을 멘 채 당산이 놓여 있는 마을 어귀로 간다. 당산에 도착하면 먼저 풍물을 치고 당산에 입혀져 있는 예전의 헌 옷[줄]을 벗기고 새로 만든 줄을 입힌다. 새 옷을 입히는 것은 새로운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측면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의 새로운 기원을 담은 줄을 입힘으로써 한 해 동안 마을에 아무 탈 없이 풍년을 해 주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당산님께 새 옷 입히기가 끝나면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낸다. 이 제사를 마지막으로 정월대보름날 행한 돌모산당산제는 끝이 난다. 소지를 올리고 난 뒤에 따로 [헌식](/topic/헌식)은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제의가 밤 9시쯤에 끝났지만 지금은 오후 5시쯤에 끝난다. 제의가 끝나면 주민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한다. 예전에는 지난해에 입혀둔 줄을 밭 등에 뿌리면 풍년이 든다고 하여 농사일을 하는 주민들이 줄을 집으로 가져갔다.
내용돌모산당산제가 행해지는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內寥里)에서 ‘내요’는 역구지[여뀌 또는 삼[고지](/topic/고지)(蔘古地)], 즉 [마을](/topic/마을)의 안쪽이라는 뜻이다. 돌모산은 내요 , 즉 안역구지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전체 100여 가구 가운데 80가구가 영주 이씨(瀛州李氏) 석호공파(石湖公派)이다. 이들 영주 이씨의 입향조는 이승간(李承澗)이라는 인물이며, 마을에는이승간과 그의 아들 광춘의 효자정문인 세효문(世孝門)이 있고 돌모산 새터에는 영주 이씨의 효열정문인 석정문(石旌門)이 있다.

돌모산은 석제 마을과 석하 마을로 나뉘는 곳이긴 하지만 본래는 돌모산이라는 하나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부안읍에서 주산면 방면으로 5~6㎞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읍과 인접해 있다. 마을 뒤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다. 그리고 그 앞쪽에 넓은 평야가 [자리](/topic/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평야가 있는 위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내요리 지역민들은 당산에 대한 신앙심이 매우 강하여 제의를 열심히 모시면 그해 마을은 풍년을 맞고 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당산제를 안 모시거나 소홀히 행하면 그해 마을에는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긴다고 하여 더욱 열심히 모신다.

돌모산당산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진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당산제를 지내기 전에 마을에서 초상이 나거나 출산이 있으면 이월 초하룻날로 제일을 변경한다. 당산제는동아줄 꼬기와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 주산(마을)돌기와 짐대할머니에 옷 입히기 순으로 진행된다. 제의 준비는 정월대보름 며칠 전부터 시작되어 정월 열나흗날 무렵이면 제물을 마련하고줄다리기에 사용할 [볏짚](/topic/볏짚)을 미리 걷어 준비를 마친다. 예전에는 [제관](/topic/제관) 및 제사에 참여하는 인원을 한 달 전에 선정하여 제의를 준비하도록 했다. 제관은 모두 8명이며 이들은 집사로 불린다. [초헌](/topic/초헌)관, [종헌](/topic/종헌)관, 집례, 축관, 봉향, 붕노 등 제관 명칭은 유교 제사의 예를 그대로 따라 붙였다. 제사 방식도 유교 제례식을 따르며, 제를 지낼 때에는 풍물 없이 조용하게 진행한다.

제물은 깨끗한 집에 맡겨 장만한다. [축문](/topic/축문)은 만들지만 소지하는 절차가 없다. 제비는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여 거둔 것으로 충당하며, 줄 제작에 필요한 짚은 농사 규모에따라 갹출하여 걷는다.

제의는 당골이 주관하여 설차-[분향](/topic/분향)-강신-제관 재배-[음복](/topic/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제물로는 백설기, 떡, 삼색실과 등 일반 가제(家祭)의 음식차림과 거의 같다. 행사 당일인 정월대보름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 준비를 위해 돌모산 경로당 앞에 모인다. 모인 마을 사람들은 풍물을 치며 당산제의 시작을 알린다. 남자들이 풍물을 치면 아녀자들은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에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미리 걷어 놓은 볏짚으로 줄다리기에 쓸 줄을 꼬는 작업을 한다. 작업은 마을의 대로변에서 주로 남성들이 하며, 두 패로 나눠 길게 늘어서서 손으로 줄을 꼰다.

줄다리기에 쓰일 정도의 크기로 외줄 제작이 완성되면 잠시 휴식을 한 다음 여성들이 준비해 놓은 음식을 먹는다. 그러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로당 앞에 모인다. 모이기 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줄을 마을 대로에 길게 늘여 편다. 이 지역에서 사용하는 줄이 외줄이기 때문에 줄 가운데에 중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를 한다. 또 승패를 알아볼 수 있도록 줄이 놓여 있는 중간 부분에 물로 선을 그려 표시를 해 놓는다.

그러고 나서 마을 사람들은 남녀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한다. 남자라 하더라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여성 편으로 가서 줄을 당긴다. 총 세 번 중에서 두 번을 먼저 이기는 편이 승리한다. 여성 편이 이겨야만 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가능한 한 여성 편이 이길 수 있도록 한다. 여성이 이겨야 하기 때문에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가 회초리를들고 남성 편에 가서 줄을 당기고 있는 남성들을 때린다. 심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라 모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심하게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어깨에 메고 마을을 한 바퀴 돈다. 이때 [영기](/topic/영기)를 든 사람과 풍물패가 앞장선다. 줄을 메고 마을을 도는 것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땅을 다지는 역할도 한다. 이는 마을을 돌면서 잡귀를 몰아내는 의식이다.

[마을돌기](/topic/마을돌기)가 끝나면 줄을 멘 채 당산이 놓여 있는 마을 어귀로 간다. 당산에 도착하면 먼저 풍물을 치고 당산에 입혀져 있는 예전의 헌 옷[줄]을 벗기고 새로 만든 줄을 입힌다. 새 옷을 입히는 것은 새로운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측면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의 새로운 기원을 담은 줄을 입힘으로써 한 해 동안 마을에 아무 탈 없이 풍년을 해 주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당산님께 새 옷 입히기가 끝나면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낸다. 이 제사를 마지막으로 정월대보름날 행한 돌모산당산제는 끝이 난다. 소지를 올리고 난 뒤에 따로 [헌식](/topic/헌식)은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제의가 밤 9시쯤에 끝났지만 지금은 오후 5시쯤에 끝난다. 제의가 끝나면 주민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한다. 예전에는 지난해에 입혀둔 줄을 밭 등에 뿌리면 풍년이 든다고 하여 농사일을 하는 주민들이 줄을 집으로 가져갔다.
역사돌모산당산제의 신체인 당산은 [마을](/topic/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다. 이 당산의 성격은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할머니신으로 보고 있지만 할아버지신으로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화강암으로 제작된 이 당산은 높이 250㎝, 둘레 80㎝이다. 당산 위에 올려진 오리의 석조 길이는 40㎝, 몸 둘레는 25㎝이며 부리는 서북쪽을 향하고 있다. 언제부터 이 당산이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내용이 없다. 다만 1960년대 때 강한 태풍으로 인해 중간부가 파손되어 보수작업 이후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돌모산당산제의 시작 역시 연원을 알 수 없지만이 지역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산제의 신앙 대상인 짐대할머니(솟대당산)가 마을에 세워[지게](/topic/지게) 된 계기가 이곳의 [풍수](/topic/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의 형국이 행주형(行舟形)으로서 배가 가벼우면 쉽게 파선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오리를 올린 돌[기둥](/topic/기둥)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의 지형이행주형인 이유로 마을 주민들은 물이 부족하더라도 절대 [우물](/topic/우물)을 파지 않는다. 마을에 우물을 파게 되면배의 밑창을 뚫는 것과 같기 때문에 물이 새어들어 배가가라앉게 되고, 결국 마을이 망한다는 믿음에서이다. 실제로 마을 밖 서편에 큰 우물 하나를 파서 이용하고 있을 뿐 마을 안에 우물이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예로 1940년대에 마을 안의 큰 부자가 이를 우습게 여기고 자기 집안에 우물을 팠다가 이후 집안은 망하고 마을에도 불행한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가 있는 당산제의 시작은 17세기 이후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향촌사회가 좀 더 조직화된 조선 후기 무렵에 이르러 돌모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마을제의가 주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부안 동·서문안 당산제가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돌모산당산제도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돌모산당산제는 근래까지도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역사돌모산당산제의 신체인 당산은 [마을](/topic/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다. 이 당산의 성격은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할머니신으로 보고 있지만 할아버지신으로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화강암으로 제작된 이 당산은 높이 250㎝, 둘레 80㎝이다. 당산 위에 올려진 오리의 석조 길이는 40㎝, 몸 둘레는 25㎝이며 부리는 서북쪽을 향하고 있다. 언제부터 이 당산이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내용이 없다. 다만 1960년대 때 강한 태풍으로 인해 중간부가 파손되어 보수작업 이후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돌모산당산제의 시작 역시 연원을 알 수 없지만이 지역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산제의 신앙 대상인 짐대할머니(솟대당산)가 마을에 세워[지게](/topic/지게) 된 계기가 이곳의 [풍수](/topic/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의 형국이 행주형(行舟形)으로서 배가 가벼우면 쉽게 파선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오리를 올린 돌[기둥](/topic/기둥)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의 지형이행주형인 이유로 마을 주민들은 물이 부족하더라도 절대 [우물](/topic/우물)을 파지 않는다. 마을에 우물을 파게 되면배의 밑창을 뚫는 것과 같기 때문에 물이 새어들어 배가가라앉게 되고, 결국 마을이 망한다는 믿음에서이다. 실제로 마을 밖 서편에 큰 우물 하나를 파서 이용하고 있을 뿐 마을 안에 우물이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예로 1940년대에 마을 안의 큰 부자가 이를 우습게 여기고 자기 집안에 우물을 팠다가 이후 집안은 망하고 마을에도 불행한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가 있는 당산제의 시작은 17세기 이후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향촌사회가 좀 더 조직화된 조선 후기 무렵에 이르러 돌모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마을제의가 주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부안 동·서문안 당산제가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돌모산당산제도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돌모산당산제는 근래까지도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지역사례전라도 여러 지역의 [마을](/topic/마을)굿 중 하나인 당산제와 비교할 때 돌모산당산제 역시 이들 제의와 여러 면에서 많이 닮아 있다. 줄은 [볏짚](/topic/볏짚)을 모아서 만들고, 그 줄로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한 다음 당산에 옷을 입히는 과정은 돌모산 지역의 당산제 이외에도 전라도 여러 지역의 당산제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돌모산당산제와 유사한 형태의 당산제는 돌모산과인접한 지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부안우동리당산제, 고창오거리 당산제, [부안동문안당산](/topic/부안동문안당산)제 역시 전라도 당산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마을굿이다. 특히 돌모산당산제와 이들 당산제에서 행해지는 줄다리기는 [농경문화](/topic/농경문화)적 요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당산제는 평야가 많은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서 행해진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면 반드시 여성 편이 이겨야 하고, 그 줄을 마을을 수호하고 있는 당산신께 입힘으로써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점이 바로 농경문화적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전라북도의 민속예술 (전라북도, 1997)
부안읍성안 당산고 (김형주, 향토문화연구 1, 원광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대한노인회 부안군지회, 2001)
전통문화예술의 정리-전라북도 [마을](/topic/마을)지킴이·정악 (전라북도, 2004)
부안 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김형주, 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전라북도 장승신앙의 전승과 그 배경 (박호원, 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지역사례전라도 여러 지역의 [마을](/topic/마을)굿 중 하나인 당산제와 비교할 때 돌모산당산제 역시 이들 제의와 여러 면에서 많이 닮아 있다. 줄은 [볏짚](/topic/볏짚)을 모아서 만들고, 그 줄로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한 다음 당산에 옷을 입히는 과정은 돌모산 지역의 당산제 이외에도 전라도 여러 지역의 당산제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돌모산당산제와 유사한 형태의 당산제는 돌모산과인접한 지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부안우동리당산제, 고창오거리 당산제, [부안동문안당산](/topic/부안동문안당산)제 역시 전라도 당산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마을굿이다. 특히 돌모산당산제와 이들 당산제에서 행해지는 줄다리기는 [농경문화](/topic/농경문화)적 요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당산제는 평야가 많은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서 행해진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면 반드시 여성 편이 이겨야 하고, 그 줄을 마을을 수호하고 있는 당산신께 입힘으로써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점이 바로 농경문화적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전라북도의 민속예술 (전라북도, 1997)
부안읍성안 당산고 (김형주, 향토문화연구 1, 원광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대한노인회 부안군지회, 2001)
전통문화예술의 정리-전라북도 [마을](/topic/마을)지킴이·정악 (전라북도, 2004)
부안 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김형주, 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전라북도 장승신앙의 전승과 그 배경 (박호원, 전북의 민속, 전라북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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