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모포리 지역에서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에 사용되면서 동신(洞神)의 신체(神體)로 신앙시되어 온 줄. 1984년 4월 17일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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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천혜숙 |
정의 |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모포리 지역에서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에 사용되면서 동신(洞神)의 신체(神體)로 신앙시되어 온 줄. 1984년 4월 17일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모포리 지역에서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에 사용되면서 동신(洞神)의 신체(神體)로 신앙시되어 온 줄. 1984년 4월 17일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모포줄은 짚에다 칡덩굴, 굴피껍질, 억새풀을 섞어 만든 것이다.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이 아니라 영구보존용으로 만들었다. 현지에서는 이 줄을 관의 소유란 뜻의 ‘관줄’이라고 말한다. 함부로 버릴수 없고, 나아가 동신의 신체로 모셔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에서 한 번 사용하고는 일년 내내 당 안에 [봉안](/topic/봉안)되는 줄이고 골매기당신의 신체로도 인식되는 오래고 유일한 사례이다. 모포줄이 전하는 모포리는 원래 경북 영일군 지행면에 속했으나 1991년 장기면에 속한다. 1995년에 영일군이 포항시로 통합되면서 현재는 포항시 장기면에 속하게 된 [마을](/topic/마을)이다.모포리는 1리와 2리로 나뉜다. 현재 모포줄과 줄다리기가 전승되는 마을은 2리이다. 모포2리는 뒤로는 내성산을 두고 앞으로는 동해를 마주하고 있다. 그 사이에 학계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내성산과 학계들 사이로 81번 국도가 지나간다. 원래는 100가구가 훌쩍 넘는 대촌이었으나 지금은 90가구 남짓한 규모이다. 앞바다의 수심이 깊은 탓에 어업보다는 [농업](/topic/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더 많다. 농업도 밭농사를 많이 짓다가 새마을사업 이후 [관개](/topic/관개)시설이 정비되면서 벼농사 위주로 바뀌었다. 현재 이 마을에서 전승되는 모포줄과 관련된 행사는 당제, 줄제, 줄다리기가 있다. 모포줄은 현재 모포2리 칠전마을 중앙에 위치한 골매기당에 봉안되어 있다. [위패](/topic/위패)도 신상도 없이 암줄과 수줄 두 줄이 골매기 부부신의 신체로 좌정하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초이렛날이면 모포2리에서는 이 골매기당집에서 동제를 지낸다. [제관](/topic/제관)은 입재일[초엿샛날] 저녁에 당집 앞에 불을 밝혀 두고, 제물 준비가 완료되면 제물을 이곳으로 옮긴다. 마을의 다른 주민은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 제관은 당 안의 줄 앞에다 상을 차리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로는 당일 담근 술, 해물, 닭고기, 메, 채, 참기름, 삼색과[밤, 감, [대추](/topic/대추)]를 쓴다. 제사를 위해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른 뒤 술을 올린 다음 재배하고, 올린 술을 골매기 줄 위에 붓는다. 다시 잔을 올린 뒤 재배하고 올린 술을 골매기 줄 위에 붓기를 거듭한다. [헌작](/topic/헌작)을 모두 마친 뒤에는 소지를 올렸으나 지금은 이 절차가 생략된다. 아침이 되면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topic/음복)하는 것으로 골매기줄을 대상으로 지내는 동제는 모두 끝난다. 과거에는 두 명의 제관과 두 명의 [화주](/topic/화주)가 동제를 주재하였으나 농촌 인구의 노령화와 이농(離農)으로 인해 제관을 맡을 사람이 줄고 금기 수행의 불편함 때문에 제관을 기피하는 경향이 커졌다. 이 때문에 주재의 규모를 제관 한 명으로 줄이고 수고비를 지급하는 자구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 명의 제관 선정도 어려워져서 2009년부터는 인근 사찰의승려에게 동제의 주재를 의뢰하고 있다. 모포줄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 행사는 추석날 오전에 이루어지는 줄다리기이다. 마을에서는 1, 2반의 상동과 3, 4반의 하동으로 편을 나누어서 줄다리기를 하며, 이긴 쪽이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다. 상동과 하동의 기준은 동네 가운데 있는 마을회관 앞 길이며 현재 줄다리기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줄다리기를 하는 추석날 아침이면 먼저 줄제를 지낸다. 이는 줄을 꺼내가니 놀라지 마시고 허락해 주십사라는 의미이다. 동제를 맡은 제관이 줄제를 주재한다. 줄제에서는 줄 앞에다 술, 포, 삼색과의 간략한 제물을 진설한 다음 헌작하고 재배한다. 올린 술을 골매기 줄 위에 뿌리는 것은 동제 때와 같다. 그러나 제관만 참여하는 동제와 달리 줄제에는 마을 사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줄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줄을 메고 풍물을 앞세워서 마을을 도는 것으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과거에는 각 편에서 암줄과 수줄을 메고 줄대장을 앞세운 뒤에 마을을 돌았지만 지금은 수줄만 들고 젊은 사람들이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정도이다. 줄다리기 장소는 원래 뇌성산 아래의 밭이었지만 추석 때까지 [가을걷이](/topic/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은 곳이 있어 바닷가 백사장으로 바뀌었다가 요즘은 다시 마을 한복판에 생긴 신작로로 옮겨졌다. 일단 줄다리기 장소로 줄을 운반한 뒤에는 두 줄을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두 줄을 연결하려면 1m 정도 되는 통나무를 끼워야 한다. 이를 ‘갯목’ 또는 ‘곤목’이라고 한다.줄을 연결하는 일은 ‘갯목 건다’, ‘곤목 건다’, ‘[비녀](/topic/비녀) 꽂는다’라고 말한다. 이때 두 줄의 머리를 마주 대놓고 대치하면서 먼저 접근하려 들지 않고 서로 ‘이리 오라’고권유하고 버틴다. 수줄의 머리가 암줄 안으로 들어가야 ‘갯목을 거는’ 일이 가능하다. 이 장면이 마치 남녀의 교합을 연상시키기도 하여 부녀자들은 멀찌감치 물러나 있고, 남성들만의 작업이 되어 때로 음란한 대화가 섞이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을 다투다가 암줄이 줄 머리를 세워 벌리고 수줄이 머리를 옆으로 세워 암줄의 고 안에 넣고 갯목을 끼우는 일로 줄의 연결이 마감된다. 오랜 승강이 끝에 줄의 연결이 이루어지면 징소리를 신호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줄 머리 부분은 젊은장정들 꼬리 부분은 나이든 이들, 종줄은 여성과 아이들이 각각 당긴다. 세 번 당겨서 두 번 이기는 쪽이 승자이다. 모포2리에서 행해지는 줄다리기에는 요즘도 200여 명이 참여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그날 바로 줄을 메고 운반해 다시 골매기 당집에 보관한다. 다른 지역에서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강물에 버리거나, 썰어서 논에 거름으로 쓰거나, 태우거나 하여 없애는 것과 달리 모포리에서는 신체로서 영구히 당집에 모셔 두고 제사까지 지내는 점에서 유일하고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매년 행해지던 줄다리기 행사는 일제강점기 이후 격년제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과거의 모포줄다리기는 모포 1, 2리를 중심으로 장기면, 구룡포읍, 동해면 등 인근의더 넓은 지역을 포함하여 해촌과 육촌 간에 이루어진 지역형 줄다리기이던 것이 현재는 모포2리의 상 하동을 단위로 한 마을형 줄다리기로 축소된 점이다. 영일군 일월문화제의군민대회가 포항시 축제의 행사로 편입되면서 모조줄을 이용하여 지역형 줄다리기의 면모가 이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암줄과 수줄, 해촌과 육촌, 동부와 서부 간의 승패를 통해 풍어와 풍농을 점치는 신앙과 그 문화적 의미는 많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 참고문헌 | 모포줄다리기 (임동권, 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155, 문화재관리국, 1984) 모포줄 (한양명,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 1,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2005) | 내용 | 모포줄은 짚에다 칡덩굴, 굴피껍질, 억새풀을 섞어 만든 것이다.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이 아니라 영구보존용으로 만들었다. 현지에서는 이 줄을 관의 소유란 뜻의 ‘관줄’이라고 말한다. 함부로 버릴수 없고, 나아가 동신의 신체로 모셔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에서 한 번 사용하고는 일년 내내 당 안에 [봉안](/topic/봉안)되는 줄이고 골매기당신의 신체로도 인식되는 오래고 유일한 사례이다. 모포줄이 전하는 모포리는 원래 경북 영일군 지행면에 속했으나 1991년 장기면에 속한다. 1995년에 영일군이 포항시로 통합되면서 현재는 포항시 장기면에 속하게 된 [마을](/topic/마을)이다.모포리는 1리와 2리로 나뉜다. 현재 모포줄과 줄다리기가 전승되는 마을은 2리이다. 모포2리는 뒤로는 내성산을 두고 앞으로는 동해를 마주하고 있다. 그 사이에 학계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내성산과 학계들 사이로 81번 국도가 지나간다. 원래는 100가구가 훌쩍 넘는 대촌이었으나 지금은 90가구 남짓한 규모이다. 앞바다의 수심이 깊은 탓에 어업보다는 [농업](/topic/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더 많다. 농업도 밭농사를 많이 짓다가 새마을사업 이후 [관개](/topic/관개)시설이 정비되면서 벼농사 위주로 바뀌었다. 현재 이 마을에서 전승되는 모포줄과 관련된 행사는 당제, 줄제, 줄다리기가 있다. 모포줄은 현재 모포2리 칠전마을 중앙에 위치한 골매기당에 봉안되어 있다. [위패](/topic/위패)도 신상도 없이 암줄과 수줄 두 줄이 골매기 부부신의 신체로 좌정하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초이렛날이면 모포2리에서는 이 골매기당집에서 동제를 지낸다. [제관](/topic/제관)은 입재일[초엿샛날] 저녁에 당집 앞에 불을 밝혀 두고, 제물 준비가 완료되면 제물을 이곳으로 옮긴다. 마을의 다른 주민은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 제관은 당 안의 줄 앞에다 상을 차리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로는 당일 담근 술, 해물, 닭고기, 메, 채, 참기름, 삼색과[밤, 감, [대추](/topic/대추)]를 쓴다. 제사를 위해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른 뒤 술을 올린 다음 재배하고, 올린 술을 골매기 줄 위에 붓는다. 다시 잔을 올린 뒤 재배하고 올린 술을 골매기 줄 위에 붓기를 거듭한다. [헌작](/topic/헌작)을 모두 마친 뒤에는 소지를 올렸으나 지금은 이 절차가 생략된다. 아침이 되면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topic/음복)하는 것으로 골매기줄을 대상으로 지내는 동제는 모두 끝난다. 과거에는 두 명의 제관과 두 명의 [화주](/topic/화주)가 동제를 주재하였으나 농촌 인구의 노령화와 이농(離農)으로 인해 제관을 맡을 사람이 줄고 금기 수행의 불편함 때문에 제관을 기피하는 경향이 커졌다. 이 때문에 주재의 규모를 제관 한 명으로 줄이고 수고비를 지급하는 자구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 명의 제관 선정도 어려워져서 2009년부터는 인근 사찰의승려에게 동제의 주재를 의뢰하고 있다. 모포줄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 행사는 추석날 오전에 이루어지는 줄다리기이다. 마을에서는 1, 2반의 상동과 3, 4반의 하동으로 편을 나누어서 줄다리기를 하며, 이긴 쪽이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다. 상동과 하동의 기준은 동네 가운데 있는 마을회관 앞 길이며 현재 줄다리기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줄다리기를 하는 추석날 아침이면 먼저 줄제를 지낸다. 이는 줄을 꺼내가니 놀라지 마시고 허락해 주십사라는 의미이다. 동제를 맡은 제관이 줄제를 주재한다. 줄제에서는 줄 앞에다 술, 포, 삼색과의 간략한 제물을 진설한 다음 헌작하고 재배한다. 올린 술을 골매기 줄 위에 뿌리는 것은 동제 때와 같다. 그러나 제관만 참여하는 동제와 달리 줄제에는 마을 사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줄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줄을 메고 풍물을 앞세워서 마을을 도는 것으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과거에는 각 편에서 암줄과 수줄을 메고 줄대장을 앞세운 뒤에 마을을 돌았지만 지금은 수줄만 들고 젊은 사람들이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정도이다. 줄다리기 장소는 원래 뇌성산 아래의 밭이었지만 추석 때까지 [가을걷이](/topic/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은 곳이 있어 바닷가 백사장으로 바뀌었다가 요즘은 다시 마을 한복판에 생긴 신작로로 옮겨졌다. 일단 줄다리기 장소로 줄을 운반한 뒤에는 두 줄을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두 줄을 연결하려면 1m 정도 되는 통나무를 끼워야 한다. 이를 ‘갯목’ 또는 ‘곤목’이라고 한다.줄을 연결하는 일은 ‘갯목 건다’, ‘곤목 건다’, ‘[비녀](/topic/비녀) 꽂는다’라고 말한다. 이때 두 줄의 머리를 마주 대놓고 대치하면서 먼저 접근하려 들지 않고 서로 ‘이리 오라’고권유하고 버틴다. 수줄의 머리가 암줄 안으로 들어가야 ‘갯목을 거는’ 일이 가능하다. 이 장면이 마치 남녀의 교합을 연상시키기도 하여 부녀자들은 멀찌감치 물러나 있고, 남성들만의 작업이 되어 때로 음란한 대화가 섞이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을 다투다가 암줄이 줄 머리를 세워 벌리고 수줄이 머리를 옆으로 세워 암줄의 고 안에 넣고 갯목을 끼우는 일로 줄의 연결이 마감된다. 오랜 승강이 끝에 줄의 연결이 이루어지면 징소리를 신호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줄 머리 부분은 젊은장정들 꼬리 부분은 나이든 이들, 종줄은 여성과 아이들이 각각 당긴다. 세 번 당겨서 두 번 이기는 쪽이 승자이다. 모포2리에서 행해지는 줄다리기에는 요즘도 200여 명이 참여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그날 바로 줄을 메고 운반해 다시 골매기 당집에 보관한다. 다른 지역에서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강물에 버리거나, 썰어서 논에 거름으로 쓰거나, 태우거나 하여 없애는 것과 달리 모포리에서는 신체로서 영구히 당집에 모셔 두고 제사까지 지내는 점에서 유일하고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매년 행해지던 줄다리기 행사는 일제강점기 이후 격년제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과거의 모포줄다리기는 모포 1, 2리를 중심으로 장기면, 구룡포읍, 동해면 등 인근의더 넓은 지역을 포함하여 해촌과 육촌 간에 이루어진 지역형 줄다리기이던 것이 현재는 모포2리의 상 하동을 단위로 한 마을형 줄다리기로 축소된 점이다. 영일군 일월문화제의군민대회가 포항시 축제의 행사로 편입되면서 모조줄을 이용하여 지역형 줄다리기의 면모가 이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암줄과 수줄, 해촌과 육촌, 동부와 서부 간의 승패를 통해 풍어와 풍농을 점치는 신앙과 그 문화적 의미는 많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 참고문헌 | 모포줄다리기 (임동권, 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155, 문화재관리국, 1984) 모포줄 (한양명,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 1,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2005) | 역사 | 모포줄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옛날 장기현감의 꿈에 뇌성산에서 용마를 탄 [장군](/topic/장군)이 내려와 이 [마을](/topic/마을) 장군정의 물을 마시면서 “이곳을 만인이 밟아 주면 마을이 태평하고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구전이 전할 뿐이다. 모포리에서는 이때부터 마을의 번성과 평안을 위해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줄다리기의 시원을 말해 주는 현몽담과 함께 모포줄이 마을의 동신으로 숭앙되는 것으로 미루어 모포줄 및 줄다리기는 마을의 동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과거에 있던 와가 골매기당의 [대들보](/topic/대들보)에 ‘건양’(建陽)이란 묵서가 있었다는 주민의 제보를 받아들인다면 모포줄과 줄다리기의 역사는 동제의 역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말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모포리는 지금은 비록 한미한 해촌이지만 과거에는 군사요충지이자 화물 교역의 중심지였다. 모포리의 앞바다는 수심이 깊고 포구가 형성되어 있어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걸쳐서 이곳에 수군기지[水軍萬戶鎭基]가 있었으며, 1658년(효종 9)에 상주하던 병력이 동래로 기지를 옮겨간 뒤에도 해창(海倉)을 설치하여 화물 교역장으로 번창한 역사가 전하고 있다.또한 이 마을은 해안 봉수가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뇌성산(磊城山)의 봉수가 그것이다. 모포리 북쪽의 [진산](/topic/진산)인 뇌성산을현지에서는 내성산이라고 부르며, 이 산에는 지금도 봉수터가 남아 있다. 원래 모포 줄다리기가 모포리를 중심으로 하여 장기면, 구룡포읍, 동해면 외에도 경주시 양북면과 양남면 주민들까지 참여한 초대형의 규모로 이루어진 것도 이 지역이 수군의 요충지이자 중요한 봉수가 운영되었던 배경과 관계가 깊다. 지금 남아 있는 모포줄은 장기현이 있을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늦어도 1600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정확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1984년 문화재 지정 당시 78세이던 임선준 옹이 자신이 소년 때부터 썼으며 당시 어른들이 전대부터 내려온 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에 따르면 100년은 넘은 것임은 확실하다. 두 줄 가운데 하나가 훼손되어 못 쓰게 되어 남은 한 줄로 두 줄을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줄이 당집 벽면의 습기로 인해 다시 상하게 되어 2004년 원형을 유지시키면서 대대적인 보수를 했다. 한편 1984년경 영일군에서 본줄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조줄을 제작했으며, 그 후 포항시 축제 등 시 단위 행사에서는 이 모조줄을 사용하고 있다. | 역사 | 모포줄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옛날 장기현감의 꿈에 뇌성산에서 용마를 탄 [장군](/topic/장군)이 내려와 이 [마을](/topic/마을) 장군정의 물을 마시면서 “이곳을 만인이 밟아 주면 마을이 태평하고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구전이 전할 뿐이다. 모포리에서는 이때부터 마을의 번성과 평안을 위해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줄다리기의 시원을 말해 주는 현몽담과 함께 모포줄이 마을의 동신으로 숭앙되는 것으로 미루어 모포줄 및 줄다리기는 마을의 동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과거에 있던 와가 골매기당의 [대들보](/topic/대들보)에 ‘건양’(建陽)이란 묵서가 있었다는 주민의 제보를 받아들인다면 모포줄과 줄다리기의 역사는 동제의 역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말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모포리는 지금은 비록 한미한 해촌이지만 과거에는 군사요충지이자 화물 교역의 중심지였다. 모포리의 앞바다는 수심이 깊고 포구가 형성되어 있어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걸쳐서 이곳에 수군기지[水軍萬戶鎭基]가 있었으며, 1658년(효종 9)에 상주하던 병력이 동래로 기지를 옮겨간 뒤에도 해창(海倉)을 설치하여 화물 교역장으로 번창한 역사가 전하고 있다.또한 이 마을은 해안 봉수가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뇌성산(磊城山)의 봉수가 그것이다. 모포리 북쪽의 [진산](/topic/진산)인 뇌성산을현지에서는 내성산이라고 부르며, 이 산에는 지금도 봉수터가 남아 있다. 원래 모포 줄다리기가 모포리를 중심으로 하여 장기면, 구룡포읍, 동해면 외에도 경주시 양북면과 양남면 주민들까지 참여한 초대형의 규모로 이루어진 것도 이 지역이 수군의 요충지이자 중요한 봉수가 운영되었던 배경과 관계가 깊다. 지금 남아 있는 모포줄은 장기현이 있을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늦어도 1600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정확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1984년 문화재 지정 당시 78세이던 임선준 옹이 자신이 소년 때부터 썼으며 당시 어른들이 전대부터 내려온 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에 따르면 100년은 넘은 것임은 확실하다. 두 줄 가운데 하나가 훼손되어 못 쓰게 되어 남은 한 줄로 두 줄을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줄이 당집 벽면의 습기로 인해 다시 상하게 되어 2004년 원형을 유지시키면서 대대적인 보수를 했다. 한편 1984년경 영일군에서 본줄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조줄을 제작했으며, 그 후 포항시 축제 등 시 단위 행사에서는 이 모조줄을 사용하고 있다. | 형태 | 모포줄은 암줄과 수줄 두 점이 있다. 현재 모포리에는 2004년에 보수한 줄이 전하고 있다. 이전의 모포줄은 질긴 칡덩굴과 굴피를 짚에다 섞어서 만든 것으로 암줄과 수줄의 길이가 각각 58m, 둘레가 1.5m나 되었다. 줄 위에 사람이 앉아도 발이 땅에 닿지 않고, 한 줄을 장정 70여 명이 들어야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이 두 줄도 오래 전 원래 있던 줄 하나가 훼손되어서 남은 한 줄을 나누어 둘로 만든 것이라고 하니, 원형은 더 어마어마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모포줄은 가닥줄과 중줄을 [합사](/topic/합사)한 형태로 제작한 것이다. 짚에다 칡덩굴과 굴피나무 껍질을 섞어 가닥줄을 만들거나, 또는 칡덩굴과 굴피로만 가닥줄들을 만들어서 이들을 중줄로 엮고 그 중줄들을 다시 엮어서 큰 줄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주로 짚으로 만든 여느 지역의 줄과 달리 오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줄을 보관해 온 당집 벽면에 점차 습기가 차서 부분적으로 줄이 상하게 되자, [마을](/topic/마을)에서는 2004년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줄의 원형태를 유지하면서 보수작업을 했다. 이번 보수에는 마을 뒷산의 칡과 억새, 영덕의 굴피나무를 짚에다 섞어 가닥줄과 중줄을 만들고 이들을 다시 원래의 줄과 함께 엮었다. [이음](/topic/이음)새 부분들에는 로프를 이용하였다. 보수 후 줄 하나의 길이가 30m로 줄어들었다. 마을에서 암줄은 할매골매기신, 수줄은 할배골매기신의 신체로 여겨지며, 마을의 당집에 정중히 [봉안](/topic/봉안)된다. 두 신이 봉안된 형태는 암줄의 꼬리부터 똬리를 틀어올려 암줄의 머리가 위로 오게 한 다음 거기에다 수줄의 머리를 맞대어 감아 올려 수줄의 꼬리가 맨 위로 올라온 모양을 하고 있다. 현지에서는 이를 두신이 성적 교합의 형태로 당집에 안치된 것으로 인식한다. | 형태 | 모포줄은 암줄과 수줄 두 점이 있다. 현재 모포리에는 2004년에 보수한 줄이 전하고 있다. 이전의 모포줄은 질긴 칡덩굴과 굴피를 짚에다 섞어서 만든 것으로 암줄과 수줄의 길이가 각각 58m, 둘레가 1.5m나 되었다. 줄 위에 사람이 앉아도 발이 땅에 닿지 않고, 한 줄을 장정 70여 명이 들어야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이 두 줄도 오래 전 원래 있던 줄 하나가 훼손되어서 남은 한 줄을 나누어 둘로 만든 것이라고 하니, 원형은 더 어마어마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모포줄은 가닥줄과 중줄을 [합사](/topic/합사)한 형태로 제작한 것이다. 짚에다 칡덩굴과 굴피나무 껍질을 섞어 가닥줄을 만들거나, 또는 칡덩굴과 굴피로만 가닥줄들을 만들어서 이들을 중줄로 엮고 그 중줄들을 다시 엮어서 큰 줄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주로 짚으로 만든 여느 지역의 줄과 달리 오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줄을 보관해 온 당집 벽면에 점차 습기가 차서 부분적으로 줄이 상하게 되자, [마을](/topic/마을)에서는 2004년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줄의 원형태를 유지하면서 보수작업을 했다. 이번 보수에는 마을 뒷산의 칡과 억새, 영덕의 굴피나무를 짚에다 섞어 가닥줄과 중줄을 만들고 이들을 다시 원래의 줄과 함께 엮었다. [이음](/topic/이음)새 부분들에는 로프를 이용하였다. 보수 후 줄 하나의 길이가 30m로 줄어들었다. 마을에서 암줄은 할매골매기신, 수줄은 할배골매기신의 신체로 여겨지며, 마을의 당집에 정중히 [봉안](/topic/봉안)된다. 두 신이 봉안된 형태는 암줄의 꼬리부터 똬리를 틀어올려 암줄의 머리가 위로 오게 한 다음 거기에다 수줄의 머리를 맞대어 감아 올려 수줄의 꼬리가 맨 위로 올라온 모양을 하고 있다. 현지에서는 이를 두신이 성적 교합의 형태로 당집에 안치된 것으로 인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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