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상하동할미지석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하동 지석[마을](/topic/마을)에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지석(支石)을 대상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드리는 마을 제사. 마을에서는 일반적으로 ‘지석제(支石祭)’라 칭하면서 할미지석제, 지석제사, 바위할머니제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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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하동 지석[마을](/topic/마을)에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지석(支石)을 대상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드리는 마을 제사. 마을에서는 일반적으로 ‘지석제(支石祭)’라 칭하면서 할미지석제, 지석제사, 바위할머니제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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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석
정의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하동 지석[마을](/topic/마을)에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지석(支石)을 대상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드리는 마을 제사. 마을에서는 일반적으로 ‘지석제(支石祭)’라 칭하면서 할미지석제, 지석제사, 바위할머니제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의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하동 지석[마을](/topic/마을)에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지석(支石)을 대상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드리는 마을 제사. 마을에서는 일반적으로 ‘지석제(支石祭)’라 칭하면서 할미지석제, 지석제사, 바위할머니제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용지석제는 1600년쯤부터 매년 음력 시월 초에 행해지고 있다. 상하동 지석[마을](/topic/마을) 원로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부터 행해졌으며, 6․25전쟁 중에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석마을은 곡부 공씨(曲阜 孔氏)의 세거지인 만큼 지석제도 공씨 가문에서 대대로 지내 왔다고 한다. 지금은 지석제보존위원회에서 ‘고인돌청년회’를 결성하여 매년 음력 10월 초순에 택일하여 지석제를 지내고 있다. 제사 비용은 마을 이장이 주관하여 헌성금을 받고 마을기금으로 충당한다.

상하동에는 본래 마을 위쪽의 상지석(上支石)과 아래쪽의 하지석(下支石) 2기의 지석묘가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상하지석 두 곳을 합하여 ‘상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지석은 할아버지바위로 불리고 하지석은 할미바위, 지석할머니, 바위할머니, 할머니바위 등으로 불렸다. 현재 상지석은 무너져 멸실되었고, 하지석만 남아 상하동 지석제의 신체(神體)로 숭앙되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하지석이 할머니바위로 불리게 된 것은 바위할머니가 바위를 옮겨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석 위에 손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바위할머니의 손자국이라고 한다.

상하동할미지석제의 신체인 하지석은 용인시 기흥구 상하3동 389-3[번지](/topic/번지)에 있다. 용인에서 수원으로 가는 국도 42호선 도로변에 있는 하지석은 마을 원로들에 따르면 도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예전의 위치에서 약간 옮겨졌다고 한다. 도로 공사 때마다 길바닥을 돋우는 과정에서 지석묘는 점차 길보다 낮게 자리 잡게 되었다. 지석묘 주변 사면에는 콘크리트로 담을 쌓고 그 위에 철제 [난간](/topic/난간)을 둘렀다. 이 때문에 길에서는 모습을 볼 수 없으며, 가까이 다가가서 난간을 넘겨다보아야 겨우 볼 수 있다.

당집은 없고 고인돌만 있다. 고인돌은 덮개돌이 사다리꼴로 길이 3.1m, 넓은 모서리가 3.1m, 짧은 모서리가 2.8m, 두께 1m이다. 장축은 남서향으로 길이가 짧은 상태이다. 용인 지역의 다른 사다리꼴 평면 덮개돌에 비하여 두께가 두꺼운 편이다. 매우 두툼한 바둑판식 덮개돌과 유사하다. 덮개돌 아래의 굄돌들은 무너져 이 두툼한 덮개돌 아래에 깔려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덮개돌이 아래 두툼한 굄돌을 뉘어서 깔고 있어 이층으로 겹쳐진 이중 덮개돌과 유사한 구조이다. 탁자식 고인돌의 유형이지만 이층 덮개돌 구조로 볼 수 있어 중부지방 이남에서 나타나는 탑파식(塔婆式) 고인돌의 원형으로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지석제를 지내기 한 달 전쯤 마을회의를 열고 노인회의 자문으로 제삿날을 정한다. 제사 일주일 전에는 부정한 사항이 없는 사람으로 당주와 [제관](/topic/제관)을 정한다. 제관은 당주 한 명과 축관 한 명 등 모두 두 명이다. 제관 선정 이후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제일을 다음달로 연기하여 다시 택일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술․[담배](/topic/담배), 살생, [조문](/topic/조문), 부부관계 등 부정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도 금한다. 제관은 식수도 개울을 파서 샘[우물](/topic/우물)을 만들어 사용한다. 샘우물에는 [금줄](/topic/금줄)을 쳐서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지석묘 주위를 청소하고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접근을 금지한다. 금줄은 지석과 당주 집에만 두른다. 당주 집 앞에는 인근 야산에서 [황토](/topic/황토)를 파 와 세 군데 뿌리고, 사기그릇에 [정화수](/topic/정화수)를 떠놓는다.

제사 당일 저녁 무렵이 되면 주민들이 모여든다. 이장의 주도 아래 상하동 부녀회, 청년회 회원들이 제사 준비를 한다. 일부는 지석묘 옆 넓은 [마당](/topic/마당)에 [장작](/topic/장작)불을 지펴서 한기(寒氣)를 막고, 일부는 음식을 준비한다.

오후 8시쯤에 본격적으로 지석제를 준비한다. 당주와 축관은 유사 세 명과 함께 의관으로 갈아입는다. 제수는 당주 집에서 마련한다. 9시쯤이 되면 당주와 유사 등 선출된 제관 몇 명만이 고인돌 보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제사를 시작한다.

제수는 돼지를 잡아 사용하였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소를 제물로 올리고 있다. 제물로 쓰이는 소는 열흘 전에 구입해 길러서 사용한다. 제수용 소는 반드시 잡털이 없는 황소여야 한다. 교미한 적이 없는 중소가 가장 적절하다고 한다. 제수로 올릴 때에는 소 피, 곱창, 각 부위 등을 모두 사용한다.

떡은 백설기를 사용하며, 여덟 되 정도 준비한다. 술은 [조라술](/topic/조라술)을 사용한다. 당주가 제사 하루 전날에 조라술을 담가서 지석묘 주변에 움막 같은 이엉을 엮고 그곳에 술독을 묻어 둔다. 대략 쌀 1되 7홉으로 조라술을 빚는다. 3홉은 식혜를 만든다. 이때 사용하는 쌀은 모두 당주가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 한다.

메를 짓고, 탕은 소의 곱창으로 만든다. 포는 [통북어](/topic/통북어) 세 마리를 마련한다. 눈알이 빠진 것은 안 된다. 떡시루에 통북어를 꽂는다. 이 밖에 삼색과일과 생두부를 진설한다. 나물은 무나물만 놓는다. 향은 목향, 잔은 세 개를 놓는다.

술, 메, 탕에 사용하는 물은 모두 제관이 미리 개울을 파서 금줄을 두른 샘우물에서 길어다가 사용한다. 불을 지피기 위해 미리 나무를 해 지석묘 근처에 두고 제사 당일에 이 나무를 태운 숯불로 메와 탕을 짓는다.

제사상은 유교식으로 진설한다. 제기는 당주집에서 가져와 사용한다. 제사는 [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소지-술뿌리기-[음복](/topic/음복) 순으로 한다. [축문](/topic/축문)은 예부터 전하는 일정한 서식에 간지(干支)만 고쳐서 읽는다.

소지는 마을 사람들 이름을 전부 기록하고, [헌관](/topic/헌관)이 일일이 “아무개 소지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올린다.

支石祭 祝文
維歲次 (干支)十月 (干支)朔 初四日 (干支)
幼學 (堂主名) 我洞里住民之於
謹具小牵酒果 齋浴虔誠 敢昭告于
支石之神 蒼然全体 忍起平地 鎭壓大村
遙然氣像 別呼磅礡
鍾神造化 賴及大洞 秦鞭難動
漢鼓猶鳴 敬之受祐 慢之有殃
吾村有卜 賴神之靈 齋誠虔禱
卒世安樂 謹具蔬餠 尊靈是憑是聽
謹具再拜 靈其保佑 用神 虔告
謹告

한문으로 쓴 글에 운을 띄워 읽는 축문을 국역하면 다음과 같다.

“유세차 (干支) 시월 (干支)삭 초○일(干支) 유학 (당주 이름)과 우리 마을 주민은 삼가 작은 소와 술, 과일을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삼가 아뢰옵니다. 지석묘의 신령, 창연한 큰 돌덩이, 평지에 우뚝 솟아 큰 마을을 진압하시고, 원대한 기상이 방박하다고(야무지다고) 할 만하더이다. 종신의 조화가 큰 고을에 미치나니, 진나라의 채찍이 어지럽게 움직이자 한나라 북이 울리는 듯합니다. 경건히 도움을 받드나니 재앙을 덜게 하옵소서. 우리 마을에 복이 있어 신의 영험을 입었나이다.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게 기도하나니, 영원토록 안락하게 하여 주옵소서. 삼가 나물과 떡을 갖추어 감히 길상을 바라나니, 높으신 신령께서는 이를 의지하고 들어주옵소서. 삼가 예를 갖추어 재배하나니, 신령으로 보호하고 도와주소서. 신에게 경건하게 아뢰옵고 또 아뢰옵나이다.”

오후 9시 30분쯤 제사가 끝나면 떡과 북어, 제수에서 조금씩 떼어내 지석묘 위에 올려놓는다. 제관들이 음복하고 나면 소의 내장을 끓여서 마을 사람들 모두 나누어 먹는다. 특히 제사떡은 ‘복떡’이라고 여겨 주민 모두가 조금씩 나눠 먹으며, 노인들을 위해 봉송하기도 한다. 희생으로 사용한 소는 헌성금을 낸 주민들에게 똑같이 배분한다. 제관에게는 특별히 몫을 더 준다. 제수는 당주가 가져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밤 11시 무렵에 주민들이 각자 돌아가면서 지석제는 마[무리](/topic/무리)된다.

상하동할미지석제는 용인 지역의 대표적인 마을신앙이다. 신체가 지석묘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상하동 지석마을이 도시개발로 급변하고 있고, 신체인 지석묘가 국도 42번 도로변에 있기에 얼마나 존속될지를 우려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지석제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매년 지석제를 지내고 있다. 지석제의 당주를 맡은 공달영, 공병헌, 박해원, 조상기 등은 이 마을의 토박이로 “할미지석제는 상하동 지석마을의 안녕과 결속을 위한 제사인 만큼 절대 폐해질 수 없는 마을신앙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참고문헌구성면지 (용인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1998)
용인의 [마을](/topic/마을)의례 (한국역사민속학회 외, 2000)
용인시사 2 (용인시사편찬위원회, 2006)
내용지석제는 1600년쯤부터 매년 음력 시월 초에 행해지고 있다. 상하동 지석[마을](/topic/마을) 원로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부터 행해졌으며, 6․25전쟁 중에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석마을은 곡부 공씨(曲阜 孔氏)의 세거지인 만큼 지석제도 공씨 가문에서 대대로 지내 왔다고 한다. 지금은 지석제보존위원회에서 ‘고인돌청년회’를 결성하여 매년 음력 10월 초순에 택일하여 지석제를 지내고 있다. 제사 비용은 마을 이장이 주관하여 헌성금을 받고 마을기금으로 충당한다.

상하동에는 본래 마을 위쪽의 상지석(上支石)과 아래쪽의 하지석(下支石) 2기의 지석묘가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상하지석 두 곳을 합하여 ‘상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지석은 할아버지바위로 불리고 하지석은 할미바위, 지석할머니, 바위할머니, 할머니바위 등으로 불렸다. 현재 상지석은 무너져 멸실되었고, 하지석만 남아 상하동 지석제의 신체(神體)로 숭앙되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하지석이 할머니바위로 불리게 된 것은 바위할머니가 바위를 옮겨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석 위에 손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바위할머니의 손자국이라고 한다.

상하동할미지석제의 신체인 하지석은 용인시 기흥구 상하3동 389-3[번지](/topic/번지)에 있다. 용인에서 수원으로 가는 국도 42호선 도로변에 있는 하지석은 마을 원로들에 따르면 도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예전의 위치에서 약간 옮겨졌다고 한다. 도로 공사 때마다 길바닥을 돋우는 과정에서 지석묘는 점차 길보다 낮게 자리 잡게 되었다. 지석묘 주변 사면에는 콘크리트로 담을 쌓고 그 위에 철제 [난간](/topic/난간)을 둘렀다. 이 때문에 길에서는 모습을 볼 수 없으며, 가까이 다가가서 난간을 넘겨다보아야 겨우 볼 수 있다.

당집은 없고 고인돌만 있다. 고인돌은 덮개돌이 사다리꼴로 길이 3.1m, 넓은 모서리가 3.1m, 짧은 모서리가 2.8m, 두께 1m이다. 장축은 남서향으로 길이가 짧은 상태이다. 용인 지역의 다른 사다리꼴 평면 덮개돌에 비하여 두께가 두꺼운 편이다. 매우 두툼한 바둑판식 덮개돌과 유사하다. 덮개돌 아래의 굄돌들은 무너져 이 두툼한 덮개돌 아래에 깔려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덮개돌이 아래 두툼한 굄돌을 뉘어서 깔고 있어 이층으로 겹쳐진 이중 덮개돌과 유사한 구조이다. 탁자식 고인돌의 유형이지만 이층 덮개돌 구조로 볼 수 있어 중부지방 이남에서 나타나는 탑파식(塔婆式) 고인돌의 원형으로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지석제를 지내기 한 달 전쯤 마을회의를 열고 노인회의 자문으로 제삿날을 정한다. 제사 일주일 전에는 부정한 사항이 없는 사람으로 당주와 [제관](/topic/제관)을 정한다. 제관은 당주 한 명과 축관 한 명 등 모두 두 명이다. 제관 선정 이후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제일을 다음달로 연기하여 다시 택일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술․[담배](/topic/담배), 살생, [조문](/topic/조문), 부부관계 등 부정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도 금한다. 제관은 식수도 개울을 파서 샘[우물](/topic/우물)을 만들어 사용한다. 샘우물에는 [금줄](/topic/금줄)을 쳐서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지석묘 주위를 청소하고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접근을 금지한다. 금줄은 지석과 당주 집에만 두른다. 당주 집 앞에는 인근 야산에서 [황토](/topic/황토)를 파 와 세 군데 뿌리고, 사기그릇에 [정화수](/topic/정화수)를 떠놓는다.

제사 당일 저녁 무렵이 되면 주민들이 모여든다. 이장의 주도 아래 상하동 부녀회, 청년회 회원들이 제사 준비를 한다. 일부는 지석묘 옆 넓은 [마당](/topic/마당)에 [장작](/topic/장작)불을 지펴서 한기(寒氣)를 막고, 일부는 음식을 준비한다.

오후 8시쯤에 본격적으로 지석제를 준비한다. 당주와 축관은 유사 세 명과 함께 의관으로 갈아입는다. 제수는 당주 집에서 마련한다. 9시쯤이 되면 당주와 유사 등 선출된 제관 몇 명만이 고인돌 보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제사를 시작한다.

제수는 돼지를 잡아 사용하였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소를 제물로 올리고 있다. 제물로 쓰이는 소는 열흘 전에 구입해 길러서 사용한다. 제수용 소는 반드시 잡털이 없는 황소여야 한다. 교미한 적이 없는 중소가 가장 적절하다고 한다. 제수로 올릴 때에는 소 피, 곱창, 각 부위 등을 모두 사용한다.

떡은 백설기를 사용하며, 여덟 되 정도 준비한다. 술은 [조라술](/topic/조라술)을 사용한다. 당주가 제사 하루 전날에 조라술을 담가서 지석묘 주변에 움막 같은 이엉을 엮고 그곳에 술독을 묻어 둔다. 대략 쌀 1되 7홉으로 조라술을 빚는다. 3홉은 식혜를 만든다. 이때 사용하는 쌀은 모두 당주가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 한다.

메를 짓고, 탕은 소의 곱창으로 만든다. 포는 [통북어](/topic/통북어) 세 마리를 마련한다. 눈알이 빠진 것은 안 된다. 떡시루에 통북어를 꽂는다. 이 밖에 삼색과일과 생두부를 진설한다. 나물은 무나물만 놓는다. 향은 목향, 잔은 세 개를 놓는다.

술, 메, 탕에 사용하는 물은 모두 제관이 미리 개울을 파서 금줄을 두른 샘우물에서 길어다가 사용한다. 불을 지피기 위해 미리 나무를 해 지석묘 근처에 두고 제사 당일에 이 나무를 태운 숯불로 메와 탕을 짓는다.

제사상은 유교식으로 진설한다. 제기는 당주집에서 가져와 사용한다. 제사는 [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소지-술뿌리기-[음복](/topic/음복) 순으로 한다. [축문](/topic/축문)은 예부터 전하는 일정한 서식에 간지(干支)만 고쳐서 읽는다.

소지는 마을 사람들 이름을 전부 기록하고, [헌관](/topic/헌관)이 일일이 “아무개 소지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올린다.

支石祭 祝文
維歲次 (干支)十月 (干支)朔 初四日 (干支)
幼學 (堂主名) 我洞里住民之於
謹具小牵酒果 齋浴虔誠 敢昭告于
支石之神 蒼然全体 忍起平地 鎭壓大村
遙然氣像 別呼磅礡
鍾神造化 賴及大洞 秦鞭難動
漢鼓猶鳴 敬之受祐 慢之有殃
吾村有卜 賴神之靈 齋誠虔禱
卒世安樂 謹具蔬餠 尊靈是憑是聽
謹具再拜 靈其保佑 用神 虔告
謹告

한문으로 쓴 글에 운을 띄워 읽는 축문을 국역하면 다음과 같다.

“유세차 (干支) 시월 (干支)삭 초○일(干支) 유학 (당주 이름)과 우리 마을 주민은 삼가 작은 소와 술, 과일을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삼가 아뢰옵니다. 지석묘의 신령, 창연한 큰 돌덩이, 평지에 우뚝 솟아 큰 마을을 진압하시고, 원대한 기상이 방박하다고(야무지다고) 할 만하더이다. 종신의 조화가 큰 고을에 미치나니, 진나라의 채찍이 어지럽게 움직이자 한나라 북이 울리는 듯합니다. 경건히 도움을 받드나니 재앙을 덜게 하옵소서. 우리 마을에 복이 있어 신의 영험을 입었나이다.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게 기도하나니, 영원토록 안락하게 하여 주옵소서. 삼가 나물과 떡을 갖추어 감히 길상을 바라나니, 높으신 신령께서는 이를 의지하고 들어주옵소서. 삼가 예를 갖추어 재배하나니, 신령으로 보호하고 도와주소서. 신에게 경건하게 아뢰옵고 또 아뢰옵나이다.”

오후 9시 30분쯤 제사가 끝나면 떡과 북어, 제수에서 조금씩 떼어내 지석묘 위에 올려놓는다. 제관들이 음복하고 나면 소의 내장을 끓여서 마을 사람들 모두 나누어 먹는다. 특히 제사떡은 ‘복떡’이라고 여겨 주민 모두가 조금씩 나눠 먹으며, 노인들을 위해 봉송하기도 한다. 희생으로 사용한 소는 헌성금을 낸 주민들에게 똑같이 배분한다. 제관에게는 특별히 몫을 더 준다. 제수는 당주가 가져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밤 11시 무렵에 주민들이 각자 돌아가면서 지석제는 마[무리](/topic/무리)된다.

상하동할미지석제는 용인 지역의 대표적인 마을신앙이다. 신체가 지석묘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상하동 지석마을이 도시개발로 급변하고 있고, 신체인 지석묘가 국도 42번 도로변에 있기에 얼마나 존속될지를 우려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지석제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매년 지석제를 지내고 있다. 지석제의 당주를 맡은 공달영, 공병헌, 박해원, 조상기 등은 이 마을의 토박이로 “할미지석제는 상하동 지석마을의 안녕과 결속을 위한 제사인 만큼 절대 폐해질 수 없는 마을신앙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참고문헌구성면지 (용인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1998)
용인의 [마을](/topic/마을)의례 (한국역사민속학회 외, 2000)
용인시사 2 (용인시사편찬위원회, 2006)
국립민속박물관한국의 무속-서울ㆍ황해도편양종승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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