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염전의 주인들이 소금이 많이 생산되고 소금 일을 무사히 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제의. 염전고사는 지역에 따라 [벗고사](/topic/벗고사), 벌막고사, 소금고사라고도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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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Cnt | 0 |
wkorname | 유승훈 |
정의 | 염전의 주인들이 소금이 많이 생산되고 소금 일을 무사히 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제의. 염전고사는 지역에 따라 [벗고사](/topic/벗고사), 벌막고사, 소금고사라고도 부른다. | 정의 | 염전의 주인들이 소금이 많이 생산되고 소금 일을 무사히 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제의. 염전고사는 지역에 따라 [벗고사](/topic/벗고사), 벌막고사, 소금고사라고도 부른다. | 내용 | 충청남도 서산․태안 지역은 우리나라의 서해안 가운데 자염 생산이 활발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불을 때서 소금을 만든다고 하여 ‘화염(火鹽)’이라 불렀다. 태안군 고남면 고남리에서는 여름철 조수가 밀려가는 조금에 맞춰서 염전고사를 지냈다. 염전 앞에서 돼지머리를 비롯한 음식을 차려 놓고 술잔을 올려서 한 해 동안 소금 생산이 잘된 것을 감사드렸다. 고사가 끝난 뒤에 일꾼들이 모여서 술과 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태안군 고남면 장곡리에서는 양력 3월에 소금고사를 지냈다. 염전에서 [시루떡](/topic/시루떡), 돼지머리, 삼색실과로 상을 차려 놓고 “우리 소금 잘 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고사가 끝난 뒤에는 떡을 조금씩 떼어 접시에 담아서 ‘짠물 보관하는 굴’의 [지붕](/topic/지붕) 아래쪽에 가져다 놓았다. 전라북도 고창군 검당[마을](/topic/마을)에서는 일 년에 한 번 벌막고사를 지냈다. 고사는 섣달그믐날 밤 또는 첫 소금을 내릴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 벌막에서 지냈다. 이 고사를 지내기 위한 음식은 벌막의 주인이 장만한다. 이때 빠져서는 안 되는 제물이 [메밀](/topic/메밀)범벅이다. 벌막 [기둥](/topic/기둥)에다 [제상](/topic/제상)을 차려 놓고 일꾼들과 함께 고사를 모신다. 벌막 주인이 절을 하고 나서 ‘소금을 잘 내려 주십사’하는 의미에서 소지도 올렸다. 고사를 마친 뒤에는 메밀범벅을 벌막 근처에 뿌려 두고 돼지머리와 음식을 일꾼들이 나눠먹는다. 돼지머리를 먹은 이후에 남은 뼈는 왼새끼에 끼워서 벌막 기둥에 매달아 두었다. 천일염전에서도 염전고사와 비슷한 제의가 이어졌다. 전라남도 신안군의 천일염전에서는 이러한 고사를 ‘채렴식’이라고 부른다. 염전 저수지의 수문 앞에서 제상을 차리고 술을 올렸다. 이 고사에서는 좋은 소금을 많이 생산하고, 염전에서 일하는 염부들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자염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천일염의 생산도 절대적으로 그 해의 [기후](/topic/기후)에 의존하였다. 비가 많이 오는 해에는 천일염의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기 때문에 소금의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이 고사로 표현되는 것이다. | 내용 | 충청남도 서산․태안 지역은 우리나라의 서해안 가운데 자염 생산이 활발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불을 때서 소금을 만든다고 하여 ‘화염(火鹽)’이라 불렀다. 태안군 고남면 고남리에서는 여름철 조수가 밀려가는 조금에 맞춰서 염전고사를 지냈다. 염전 앞에서 돼지머리를 비롯한 음식을 차려 놓고 술잔을 올려서 한 해 동안 소금 생산이 잘된 것을 감사드렸다. 고사가 끝난 뒤에 일꾼들이 모여서 술과 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태안군 고남면 장곡리에서는 양력 3월에 소금고사를 지냈다. 염전에서 [시루떡](/topic/시루떡), 돼지머리, 삼색실과로 상을 차려 놓고 “우리 소금 잘 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고사가 끝난 뒤에는 떡을 조금씩 떼어 접시에 담아서 ‘짠물 보관하는 굴’의 [지붕](/topic/지붕) 아래쪽에 가져다 놓았다. 전라북도 고창군 검당[마을](/topic/마을)에서는 일 년에 한 번 벌막고사를 지냈다. 고사는 섣달그믐날 밤 또는 첫 소금을 내릴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 벌막에서 지냈다. 이 고사를 지내기 위한 음식은 벌막의 주인이 장만한다. 이때 빠져서는 안 되는 제물이 [메밀](/topic/메밀)범벅이다. 벌막 [기둥](/topic/기둥)에다 [제상](/topic/제상)을 차려 놓고 일꾼들과 함께 고사를 모신다. 벌막 주인이 절을 하고 나서 ‘소금을 잘 내려 주십사’하는 의미에서 소지도 올렸다. 고사를 마친 뒤에는 메밀범벅을 벌막 근처에 뿌려 두고 돼지머리와 음식을 일꾼들이 나눠먹는다. 돼지머리를 먹은 이후에 남은 뼈는 왼새끼에 끼워서 벌막 기둥에 매달아 두었다. 천일염전에서도 염전고사와 비슷한 제의가 이어졌다. 전라남도 신안군의 천일염전에서는 이러한 고사를 ‘채렴식’이라고 부른다. 염전 저수지의 수문 앞에서 제상을 차리고 술을 올렸다. 이 고사에서는 좋은 소금을 많이 생산하고, 염전에서 일하는 염부들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자염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천일염의 생산도 절대적으로 그 해의 [기후](/topic/기후)에 의존하였다. 비가 많이 오는 해에는 천일염의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기 때문에 소금의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이 고사로 표현되는 것이다. | 역사 | 구한말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염(煮鹽)이 생산되었다. 자염의 생산은 바닷물을 바로 끓이는 직자식(直煮式)과 갯벌에서 흙을 갈아서 짠 흙을 만든 다음 여기에 바닷물을 부어서 짠물을 얻는 염전식(鹽田式)이 있었다. 염전식 생산법은 삼국시대에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는 보편적인 방식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자염은 갯벌이 분포된 서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생산되었다. 조선시대 세종 때 집현전의 학자인 이계전(李季甸)은 “동해는 바닷물을 졸이고, 남해부터 서해까지는 조수가 물러갈 때를 기다려 소에 [멍에](/topic/멍에)를 매어 갯벌을 갈아서 조수를 취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서해부터 남해까지의 갯벌에서 두루 염전식으로 소금을 생산하였음을 보여준다. 염전에서 소금 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금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일제에 의하여 천일염전이 세워지면서 염전의 의미가 크게 달라졌다. 자염전은 흙을 가는 갯벌과 소금가마가 있는 염막 등으로 구성되지만 천일염전에는 조수를 막는 [제방](/topic/제방)을 비롯하여 인공적인 시설물들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이러한 천일염전이 대거 확장되면서 전통적인 자염전은 축소되었다. 하지만 소금의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천일염전에서도 소금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염전고사는 이어졌다. | 역사 | 구한말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염(煮鹽)이 생산되었다. 자염의 생산은 바닷물을 바로 끓이는 직자식(直煮式)과 갯벌에서 흙을 갈아서 짠 흙을 만든 다음 여기에 바닷물을 부어서 짠물을 얻는 염전식(鹽田式)이 있었다. 염전식 생산법은 삼국시대에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는 보편적인 방식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자염은 갯벌이 분포된 서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생산되었다. 조선시대 세종 때 집현전의 학자인 이계전(李季甸)은 “동해는 바닷물을 졸이고, 남해부터 서해까지는 조수가 물러갈 때를 기다려 소에 [멍에](/topic/멍에)를 매어 갯벌을 갈아서 조수를 취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서해부터 남해까지의 갯벌에서 두루 염전식으로 소금을 생산하였음을 보여준다. 염전에서 소금 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금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일제에 의하여 천일염전이 세워지면서 염전의 의미가 크게 달라졌다. 자염전은 흙을 가는 갯벌과 소금가마가 있는 염막 등으로 구성되지만 천일염전에는 조수를 막는 [제방](/topic/제방)을 비롯하여 인공적인 시설물들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이러한 천일염전이 대거 확장되면서 전통적인 자염전은 축소되었다. 하지만 소금의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천일염전에서도 소금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염전고사는 이어졌다. | 지역사례 | 염전고사는 소금의 풍요와 염전일의 무사를 위해 기원하는 제의이다. 어느 지역이든 그 의미는 동일하지만 고사 일시, 장소, 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다. 같은 태안군에서도 장곡리에서는 봄철에 첫 소금을 생산하여 고사를 지내는 반면에 고남리에서는 한 해 동안 소금이 잘 생산된 것을 감사드리면서 여름철에 고사를 지냈다. 우리나라에서 소금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전남 신안군의 비금면에서는 중양절에 염전고사를 지냈다. 비금면의 염전고사는 염전과 염전의 솥에 조상 상을 차려 두고 고사를 모셨다고 한다.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은 거의 염전 일을 끝마칠 때이므로 한 해 동안 소금 생산이 무사히 이뤄진 것을 조상에게 감사하는 뜻이다. 이 염전고사에서는 [조상신](/topic/조상신)이 후손의 [생업](/topic/생업)이 잘되도록 보살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 참고문헌 | 충청남도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전라남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한국의 가정신앙-충남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世宗實錄,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민속 (유승훈, 민속원, 2008) 자염생산관련 의례 고찰-‘섯구덩이’ 방식을 대상으로 (박종오, 남도민속연구 16, 남도민속학회, 2008) | 지역사례 | 염전고사는 소금의 풍요와 염전일의 무사를 위해 기원하는 제의이다. 어느 지역이든 그 의미는 동일하지만 고사 일시, 장소, 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다. 같은 태안군에서도 장곡리에서는 봄철에 첫 소금을 생산하여 고사를 지내는 반면에 고남리에서는 한 해 동안 소금이 잘 생산된 것을 감사드리면서 여름철에 고사를 지냈다. 우리나라에서 소금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전남 신안군의 비금면에서는 중양절에 염전고사를 지냈다. 비금면의 염전고사는 염전과 염전의 솥에 조상 상을 차려 두고 고사를 모셨다고 한다.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은 거의 염전 일을 끝마칠 때이므로 한 해 동안 소금 생산이 무사히 이뤄진 것을 조상에게 감사하는 뜻이다. 이 염전고사에서는 [조상신](/topic/조상신)이 후손의 [생업](/topic/생업)이 잘되도록 보살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 참고문헌 | 충청남도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전라남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한국의 가정신앙-충남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世宗實錄,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민속 (유승훈, 민속원, 2008) 자염생산관련 의례 고찰-‘섯구덩이’ 방식을 대상으로 (박종오, 남도민속연구 16, 남도민속학회,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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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 평북무형문화재 성황대제 조사보고서 | 양종승 |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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