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서울특별시 중구 방산동 4가 96[번지](/topic/번지) 방산시장 내에 위치한 성제묘에서 관우(關羽)를 주신으로 모시는 상인들의 제의. 1972년 5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지정되었다. |
---|---|
mp3Cnt | 0 |
wkorname | 장장식 |
정의 | 서울특별시 중구 방산동 4가 96[번지](/topic/번지) 방산시장 내에 위치한 성제묘에서 관우(關羽)를 주신으로 모시는 상인들의 제의. 1972년 5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지정되었다. | 정의 | 서울특별시 중구 방산동 4가 96[번지](/topic/번지) 방산시장 내에 위치한 성제묘에서 관우(關羽)를 주신으로 모시는 상인들의 제의. 1972년 5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지정되었다. | 참조 | 성제묘 | 참고문헌 | 서울민속대관 1-민간신앙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1990) 관왕묘 제례악 연구 (송지원, 소암권오성박사화갑기념 음악학논총, 논문집간행위원회, 2000) 조선후기 무묘(武廟)의 창건과 향사(享祀)의 정치적 의미-관왕묘를 중심으로 (심승구, 조선시대의 정치와제도, 집문당, 2003) 서울의 관왕묘 건치와 관우신앙의 양상 (장장식, 민속학연구 14, 국립민속박물관, 2004) 서울 영상민속지-서울의 동제 (서울역사박물관, 2006) 군인들의 신에서, 상인들의 신으로-중구 방산동성제묘의 관우제사 DVD (서울역사박물관, 2006)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현장조사 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7) | 참조 | 성제묘 | 참고문헌 | 서울민속대관 1-민간신앙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1990) 관왕묘 제례악 연구 (송지원, 소암권오성박사화갑기념 음악학논총, 논문집간행위원회, 2000) 조선후기 무묘(武廟)의 창건과 향사(享祀)의 정치적 의미-관왕묘를 중심으로 (심승구, 조선시대의 정치와제도, 집문당, 2003) 서울의 관왕묘 건치와 관우신앙의 양상 (장장식, 민속학연구 14, 국립민속박물관, 2004) 서울 영상민속지-서울의 동제 (서울역사박물관, 2006) 군인들의 신에서, 상인들의 신으로-중구 방산동성제묘의 관우제사 DVD (서울역사박물관, 2006)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현장조사 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7) | 내용 | 예전에는 매년 관우의 생일과 사망일 두 차례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사망일인 음력 시월 열아흐렛날에만 치제한다. 의례시간은 오후 3시이다. 성제묘관우제사는 방산시장 상인들로 구성된 ‘중구 방산상조회’가 주관한다. 방산상조회 회원은 75명 내외이며, 회장·부회장·총무 등의 임원이 있다. 예전에는 시장에서화재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막고, 나아가 시장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 참가자들은 이 제향에 참여하면 장사도 잘되고 부도도 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를 통해 관우가 상업신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제사 지내는 데 제비(祭費)는 10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 경비는 방산상조회의 기금과 유지의 협찬을 얻어 마련한다. 방산상조회에 속하지 않고 기독교를 믿는 상인까지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경비를 보조한다고 한다. 경비 가운데 50만 원은 제수비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청소비·잡비로 사용된다. 예전에는 돌아가면서 제물을 준비하거나 통·반장 집에서 준비했지만 지금은 식당에 맡긴다. 제사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바로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 상자를 개봉하여 현성전 안으로 들이면 부회장과 자문위원장이 진설을 맡는다. 제물은 정면의 관우 부부 앞과 좌우 화본 앞에 한 상씩 진설한다. 정면의 상에는 맨 안쪽에 지방(紙榜)을 배치했는데, 왼쪽에 ‘현호국[장군](/topic/장군)관운장신위(顯護國將軍冠雲長神位)’, 오른쪽에 ‘현비유인숙부인진천송씨신위(顯批孺人淑夫人鎭川宋氏神位)’라고 썼다.여기에서 ‘관운장(冠雲長)’은 ‘관운장(關雲長)’의, ‘현비유인(顯批孺人)’은 ‘현비유인(顯妣孺人)’의 오자이다. 여기서 관우의 부인을 모신다는 것도 주목되지만 부인이 진천 송씨라고 한 점이 흥미롭다. 지방 앞에는 초 두 자루를 밝혔다. 초 앞줄에 메 두 그릇을 놓고 그 다음 줄 양 끝에는 떡을 한 접시씩 놓았다. 다음 줄에는 포(脯)·조기·적·닭고기·생선·두부를 진설했고, 다음으로 [숙주나물](/topic/숙주나물)·고사리·[고구마](/topic/고구마)전을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대추](/topic/대추)·밤·배·감·과자·유과·[사과](/topic/사과)를 진설했다. 진설 때에는 [[호박](/topic/호박)전](/topic/호박전)도 있었으나 제사에는 호박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됨에 따라 뺐다. 상 앞에는 [향로](/topic/향로)를 두어 향을 피웠다. 향 왼쪽 상에는 벽쪽에 초 한 자루를 켜고, 그 앞에 메, 전, 나물, 바나나, 은행을 진설했다. 향 오른쪽 상에는 역시 벽쪽에 초 한 자루를 켜고, 그 앞에 메, [수박](/topic/수박), 나물 2종, 건어를 진설했다. [제관](/topic/제관)들은 [유건](/topic/유건)(儒巾)을 착용하고 현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현성전 밖에 줄지어 섰다. 제사는 홀기(笏記)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홀기는 미리 흰 종이에 제향 순서를횡서(橫書)한 것이다. 첫 행은 ‘제례순서(祭禮順序)’라 되어 있다. 이하에는 행을 바꿔 가며 제례명, 주제자(主祭者), 배례의 횟수를 기록해 두었다. 마지막에는 ‘예필(禮畢)’이라 적혀 있다. 홀기는 방산상조회 총무가 읽었다. 제향의 절차는 [분향](/topic/분향)례-강신례-[참신](/topic/참신)례-[초헌](/topic/초헌)례-[독축](/topic/독축)례-[아헌](/topic/아헌)례-[종헌](/topic/종헌)례-사신례-[음복](/topic/음복)례-[분축](/topic/분축)례 순으로 진행되었다. 분향례(焚香禮)는 향을 피우는 절차로, 상조회장이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린 다음 재배했다. 강신례(降神禮)는 신을 내리게 하는 절차로, 상조회장이 재배한다. 이때 술은 따르지않는다. 참신례(參神禮)는 제사를 받기 위해 오신 신에게 인사하는 절차로, 제관들이 다함께 재배했다. 이때 현성전 밖에 있는 참가자들은 묵념을 한다. 초헌례(初獻禮)는 상조회장이 헌주(獻酒)하고 재배했다. 독축례(讀祝禮)는 총무가 [축문](/topic/축문)을 읽는 절차이다. 이때 현성전 내 제관들은 모두 엎드리고, 밖의 참관자는 꿇어앉는다.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 癸未十月辛未朔十九日己丑 大韓民國 서울市 中區 舫山洞相助會 代表 李廷鎬 敢昭告于 顯大將軍 關雲長府君 劉備 張飛 顯淑夫人 宋氏 桃園結義 愛國憂之 東奔 西走 一伐亂賊 萬民平安 誠好聖帝 歲薦一祭 謹以 淸酌庶羞 恭伸奠獻 尙饗 축문 제작자는 이번 제향의 축문에 새로운 문구를 삽입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축문의 내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가감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헌례(亞獻禮)는 을지로2가 동장이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동장의 불참으로 대리 참석한 동사무소 직원 두 명이 함께 재배했다. 종헌례(終獻禮)는 방산시장 번영회장과 경로회에서 참석한 두 사람이 첨잔을 한 다음 재배하고 이어서 전임 상조회 회장들이 재배를 했다. 홀기에는 종헌례 다음이 분축례(焚祝禮)로 되어 있으나, 제관들 사이에 갑론을박 끝에 신에게 감사하는 사신례(謝神禮)를 했다. 사신례에서는 물을 올리고 나서 메를 물에 만 다음 제관 일동이 다함께 절을 했다. 밖에서는 묵념을 했다. 음복례(飮福禮)는 상조회장이 재배 후 음복을 하는 절차이다. 분축례(焚祝禮)는 지방과 축문을 태우는 절차이다. 이로써 제사는 끝난다. 배례 틈틈이 젓가락으로 상을 세 번 톡톡 두드리며 젓가락을 제물의 이곳저곳으로 옮겨 놓는다. 이것은 신에게 여러 음식을 맛보시라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의례의 절차가 모두 끝나면 참가자들은 남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방산동성제묘제사는 유교식 제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매년 조금씩 가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내용 | 예전에는 매년 관우의 생일과 사망일 두 차례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사망일인 음력 시월 열아흐렛날에만 치제한다. 의례시간은 오후 3시이다. 성제묘관우제사는 방산시장 상인들로 구성된 ‘중구 방산상조회’가 주관한다. 방산상조회 회원은 75명 내외이며, 회장·부회장·총무 등의 임원이 있다. 예전에는 시장에서화재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막고, 나아가 시장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 참가자들은 이 제향에 참여하면 장사도 잘되고 부도도 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를 통해 관우가 상업신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제사 지내는 데 제비(祭費)는 10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 경비는 방산상조회의 기금과 유지의 협찬을 얻어 마련한다. 방산상조회에 속하지 않고 기독교를 믿는 상인까지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경비를 보조한다고 한다. 경비 가운데 50만 원은 제수비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청소비·잡비로 사용된다. 예전에는 돌아가면서 제물을 준비하거나 통·반장 집에서 준비했지만 지금은 식당에 맡긴다. 제사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바로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 상자를 개봉하여 현성전 안으로 들이면 부회장과 자문위원장이 진설을 맡는다. 제물은 정면의 관우 부부 앞과 좌우 화본 앞에 한 상씩 진설한다. 정면의 상에는 맨 안쪽에 지방(紙榜)을 배치했는데, 왼쪽에 ‘현호국[장군](/topic/장군)관운장신위(顯護國將軍冠雲長神位)’, 오른쪽에 ‘현비유인숙부인진천송씨신위(顯批孺人淑夫人鎭川宋氏神位)’라고 썼다.여기에서 ‘관운장(冠雲長)’은 ‘관운장(關雲長)’의, ‘현비유인(顯批孺人)’은 ‘현비유인(顯妣孺人)’의 오자이다. 여기서 관우의 부인을 모신다는 것도 주목되지만 부인이 진천 송씨라고 한 점이 흥미롭다. 지방 앞에는 초 두 자루를 밝혔다. 초 앞줄에 메 두 그릇을 놓고 그 다음 줄 양 끝에는 떡을 한 접시씩 놓았다. 다음 줄에는 포(脯)·조기·적·닭고기·생선·두부를 진설했고, 다음으로 [숙주나물](/topic/숙주나물)·고사리·[고구마](/topic/고구마)전을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대추](/topic/대추)·밤·배·감·과자·유과·[사과](/topic/사과)를 진설했다. 진설 때에는 [[호박](/topic/호박)전](/topic/호박전)도 있었으나 제사에는 호박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됨에 따라 뺐다. 상 앞에는 [향로](/topic/향로)를 두어 향을 피웠다. 향 왼쪽 상에는 벽쪽에 초 한 자루를 켜고, 그 앞에 메, 전, 나물, 바나나, 은행을 진설했다. 향 오른쪽 상에는 역시 벽쪽에 초 한 자루를 켜고, 그 앞에 메, [수박](/topic/수박), 나물 2종, 건어를 진설했다. [제관](/topic/제관)들은 [유건](/topic/유건)(儒巾)을 착용하고 현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현성전 밖에 줄지어 섰다. 제사는 홀기(笏記)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홀기는 미리 흰 종이에 제향 순서를횡서(橫書)한 것이다. 첫 행은 ‘제례순서(祭禮順序)’라 되어 있다. 이하에는 행을 바꿔 가며 제례명, 주제자(主祭者), 배례의 횟수를 기록해 두었다. 마지막에는 ‘예필(禮畢)’이라 적혀 있다. 홀기는 방산상조회 총무가 읽었다. 제향의 절차는 [분향](/topic/분향)례-강신례-[참신](/topic/참신)례-[초헌](/topic/초헌)례-[독축](/topic/독축)례-[아헌](/topic/아헌)례-[종헌](/topic/종헌)례-사신례-[음복](/topic/음복)례-[분축](/topic/분축)례 순으로 진행되었다. 분향례(焚香禮)는 향을 피우는 절차로, 상조회장이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린 다음 재배했다. 강신례(降神禮)는 신을 내리게 하는 절차로, 상조회장이 재배한다. 이때 술은 따르지않는다. 참신례(參神禮)는 제사를 받기 위해 오신 신에게 인사하는 절차로, 제관들이 다함께 재배했다. 이때 현성전 밖에 있는 참가자들은 묵념을 한다. 초헌례(初獻禮)는 상조회장이 헌주(獻酒)하고 재배했다. 독축례(讀祝禮)는 총무가 [축문](/topic/축문)을 읽는 절차이다. 이때 현성전 내 제관들은 모두 엎드리고, 밖의 참관자는 꿇어앉는다.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 癸未十月辛未朔十九日己丑 大韓民國 서울市 中區 舫山洞相助會 代表 李廷鎬 敢昭告于 顯大將軍 關雲長府君 劉備 張飛 顯淑夫人 宋氏 桃園結義 愛國憂之 東奔 西走 一伐亂賊 萬民平安 誠好聖帝 歲薦一祭 謹以 淸酌庶羞 恭伸奠獻 尙饗 축문 제작자는 이번 제향의 축문에 새로운 문구를 삽입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축문의 내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가감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헌례(亞獻禮)는 을지로2가 동장이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동장의 불참으로 대리 참석한 동사무소 직원 두 명이 함께 재배했다. 종헌례(終獻禮)는 방산시장 번영회장과 경로회에서 참석한 두 사람이 첨잔을 한 다음 재배하고 이어서 전임 상조회 회장들이 재배를 했다. 홀기에는 종헌례 다음이 분축례(焚祝禮)로 되어 있으나, 제관들 사이에 갑론을박 끝에 신에게 감사하는 사신례(謝神禮)를 했다. 사신례에서는 물을 올리고 나서 메를 물에 만 다음 제관 일동이 다함께 절을 했다. 밖에서는 묵념을 했다. 음복례(飮福禮)는 상조회장이 재배 후 음복을 하는 절차이다. 분축례(焚祝禮)는 지방과 축문을 태우는 절차이다. 이로써 제사는 끝난다. 배례 틈틈이 젓가락으로 상을 세 번 톡톡 두드리며 젓가락을 제물의 이곳저곳으로 옮겨 놓는다. 이것은 신에게 여러 음식을 맛보시라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의례의 절차가 모두 끝나면 참가자들은 남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방산동성제묘제사는 유교식 제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매년 조금씩 가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역사 | 우리나라의 관우신앙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참전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본디 명군과 왜군이라는 외세의 충돌 상황에서 명군에 의해 숭신(崇神)의필요성이 제기되고 명군의 강요로 수용되었다. 이를테면 ‘외세에 의한 수동적 수용’이다. 방산동 성제묘의 원래 명칭은 ‘방산정’이었으나, 현재는 성제묘라고 한다. 방산동의 성제묘가 언제 건립되고 관우제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관련 자료 부족으로 정확히 알 수 없다. 성제묘 안내문에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의해 세워졌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막연한 표현이다. 성제묘에는 고종 때 간행된『 [관성제군](/topic/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나『 명성경(明聖經)』 등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성제묘 역시 관우신앙이 성행하던 고종 때 건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염초청에서 관성제군을 부군으로 모시며 지내던 제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관제가 염초청의 부군으로 모셔진 흔적은 현재 성제묘 제사에서도 부분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현 성제묘 제사의 대상인 관우 부부는 ‘현한수정후관우부군(顯漢壽亭候關羽府君)’과 ‘현혜숙인송씨(顯惠淑人宋氏)’로 각각 표현된다. 성제묘의 제사가 조선시대 부군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면 방산동 성제묘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민간에 의해 세워졌다기보다 방산동 일대에 있던 군 관련 기관과 거기에 소속된 군인 및 관리들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제묘의 안내판에는 방산동의 성제묘를 남묘나 동묘와 달리 임진왜란 이후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이 같은 내용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현 방산동 성제묘와 조선시대 염초청 부군당 성제청과의 관련성은 좀 더 탐구해야 한다. | 역사 | 우리나라의 관우신앙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참전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본디 명군과 왜군이라는 외세의 충돌 상황에서 명군에 의해 숭신(崇神)의필요성이 제기되고 명군의 강요로 수용되었다. 이를테면 ‘외세에 의한 수동적 수용’이다. 방산동 성제묘의 원래 명칭은 ‘방산정’이었으나, 현재는 성제묘라고 한다. 방산동의 성제묘가 언제 건립되고 관우제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관련 자료 부족으로 정확히 알 수 없다. 성제묘 안내문에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의해 세워졌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막연한 표현이다. 성제묘에는 고종 때 간행된『 [관성제군](/topic/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나『 명성경(明聖經)』 등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성제묘 역시 관우신앙이 성행하던 고종 때 건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염초청에서 관성제군을 부군으로 모시며 지내던 제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관제가 염초청의 부군으로 모셔진 흔적은 현재 성제묘 제사에서도 부분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현 성제묘 제사의 대상인 관우 부부는 ‘현한수정후관우부군(顯漢壽亭候關羽府君)’과 ‘현혜숙인송씨(顯惠淑人宋氏)’로 각각 표현된다. 성제묘의 제사가 조선시대 부군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면 방산동 성제묘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민간에 의해 세워졌다기보다 방산동 일대에 있던 군 관련 기관과 거기에 소속된 군인 및 관리들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제묘의 안내판에는 방산동의 성제묘를 남묘나 동묘와 달리 임진왜란 이후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이 같은 내용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현 방산동 성제묘와 조선시대 염초청 부군당 성제청과의 관련성은 좀 더 탐구해야 한다. |
---|
국립민속박물관 | 큰무당 우옥주 유품 | 1995 | 문음사 | 김금화의 무가집 | 김금화 | 1995 | 국립민속박물관 | 한국의 무속-서울·황해도편 | 양종승 | 1999 | 한국무속학회 | 서울굿의 신화(神花) | 양종승·최진아 | 200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