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성저리동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성저리 성밑[마을](/topic/마을) 모산굴(茅山窟, 경상북도 기념물 제27호)에서 왜적에게 몰살당한 주민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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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성저리 성밑[마을](/topic/마을) 모산굴(茅山窟, 경상북도 기념물 제27호)에서 왜적에게 몰살당한 주민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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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태
정의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성저리 성밑[마을](/topic/마을) 모산굴(茅山窟, 경상북도 기념물 제27호)에서 왜적에게 몰살당한 주민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동제.
정의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성저리 성밑[마을](/topic/마을) 모산굴(茅山窟, 경상북도 기념물 제27호)에서 왜적에게 몰살당한 주민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동제.
내용1. 동고사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성저리 동고사의 제당은 [마을](/topic/마을) 어귀의 400년이 넘은 동신목(洞神木), 왕산 정상의 참나무인 산신당(山神堂), 이웃에 위치한 새터마을의 당목과입석으로 구성된 동신당(洞神堂)이다. 마을 어귀의 동신목과 새터의 당(堂)은 부부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목은 불에 타서 흔적만 남아 있으며, 새터의 동신당은 돌무더기였으나 농경지를 정리할 때 당을 없애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현재는 당목과 입석이 있고 제물 진설을 위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제의는 ‘동고사’라고 하며, 제당은 [수구맥이](/topic/수구맥이)·산지당 새터당이라고 한다. [제관](/topic/제관)은 섣달그믐께 이장이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에 따라 선정한 뒤에 동네회의에서 [헌관](/topic/헌관)과 축관을 선출한다. 경비는 [동답](/topic/동답) 다섯 [마지기](/topic/마지기)의 소출로 충당한다. 세 곳의 제당에서 제의를 행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려 제의를 동신목에서만 행하는 것으로 축소하였다가 마을에 나쁜 일이 자주발생하여 본래대로 행하고 있다. 1940년대까지 [별신굿](/topic/별신굿)이 5년마다 행해졌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제물은 선출된 제관이 가은 장보다 비교적 거리가 멀어서 아는 사람이 적은 농암 장을 이용한다. 이것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서 생기게 될 부정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금기는 보통 제당들과 제관 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금줄은 제일(祭日) 일주일 전에 제관과 축관이 꼰 것으로, 각 제당과 제관의 집 앞에 친다. 금줄을 친 뒤부터 제관들은매일 냇가에 가서 목욕재계해야 한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부터 제관은 제물을 장만한다. 그러다가 밤 12시([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0시)가 가까워지면 제관과 축관은 제물을 들고 먼저 동신목으로 향한다. 제당에 도착한 이들은제물을 진설하고, 재배하고, 술잔을 올리고, [독축](/topic/독축)하고, 소지올리기를 행한다. 그리고 다시 재배하는 것으로 제의는 끝난다. [축문](/topic/축문) 내용은 이장과 모든 동민, 공직자 및 운전자,객지의 자손들, 농사의 풍농과 특용작물의 풍농, 모든 일의 성취 등에 대한 사항들을 동신에게 기원하는 것이다. 즉 동신은 동민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한 해 동안 보호하고 있으며, 동민은 동신에게 그 성취를 기원하기 위해 동고사(수구맥이제)를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온 제관과 축관은 다시 제물을 들고 왕산의 정상에 위치한 산지당으로 향한다. 산지당의 제의 절차는 동고사와 동일하다. 이들은 다시 집으로 내려와서 새터당으로 가 제의를 행한다. 이튿날 새벽 2시쯤에 모든 제의가 끝난다. 제관과 축관은제관 집으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음복](/topic/음복)을 하고, 축관은 집으로 돌아간다.

정월대보름날 오전에 마을 주민들이 회관에 모여 음복하면서 동네 회의와 경비 결산을 한 다음 풍물을 치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회의 내용은 그해의 품삯 결정 등 공사(公事)와 마을재산의 문서닦기, 이튿날에 행하게 될 성밑 굴 빌기 및 [기세배](/topic/기세배)와 관련한 사항 등이다. 기세배와 관련한 주된 사항은 ‘다른 마을에서 오는 방문객들을 어떻게 맞이하여 대접할 것인가’와 ‘싸움이 벌어지면 어떻게 말릴 것인가’이다. 성밑마을에는 나락을 500~1,000석 가까이 [수확](/topic/수확)하는 부잣집이 다섯 집 정도 있었는데 이들이 경비를 부담하였다. 보통 술을 장만하여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일이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행사여서 다툼과 시비가 빈번했다. 이 때문에 부잣집에서는 힘센 장정들을 고용하여 이날 행사에 동원하였다. 이들 장정에게는 일 년치 품삯을 더 쳐서 주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음복과 회의가 끝난 뒤 복색을 갖추고 풍물과 [농기](/topic/농기)(農旗)를 꺼내들고서 이튿날 있을 행사를 위해 풍물연습을 한다. 해질녘이 되면 이튿날 행사를 다시 한 번 더 논의한 다음 집으로 돌아간다. 젊은이들은 남아서 모산굴을 밝힐 관솔을 준비한다. 또한 마을의 각 집안의 부녀자들은 행사에 오게 될 손님들 접대를 위한 준비로 바쁘게 움직인다.기세배를 구경하기 위해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하루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기도 한다.

성저리의 동제는 매년 행하는 것이지만 5년마다 별신굿도 행하였다. 별신굿은 수구맥이 동신목 앞에 굿당을 차려 놓고 인근의 무당 7~8명을 초빙하여 성하게 행한다. 이 굿은 ‘귀신달군 날’(정월 열엿샛날) 하루 동안 진행된다.

1997년에 행한 동고사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丁丑) 正月(辛巳) 朔十五日(乙未)
幼學 (蔡仁植) 大祝 (南太熙)
감히 소소히 謹告하옵나이다.
一. 영명하신 동신(洞神)님 전(前)에 전 동민들이 정성을 모아 진상상(進床上)하오나 부족함을 용서하옵시고 소소히 기꺼이 많이 [흠향](/topic/흠향)하시옵소서.
一. 여쭐 말씀 무지 미련한 인생들은 오직 동신님의 보호해 주시는 덕분으로 무사히 생계를 지속하고 있음을 천만 감사히 경송하고 있습니다.
一. 정축년 새해에도 전 동민을 대표하여 중요한 동사무(洞事務)를 담당한 이장의 계획설계하는 매사가 여의(如意) 잘 되도록 동신님 전께옵서 지혜를 깨우쳐 주시옵기를 진심으로 기원복망(祈願伏望)하옵나이다.
一. 다음은 성저 우리 마을 백 여호 집집마다 계획하고 소망하는 매사가 여의형통하옵고 다행이 충만하옵기를 영명하신 동신님께서 고루고루 보살펴 주심을 천만번 기원복망하나이다.
一. 다음은 공직에 근무하는 사람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동리의 남녀노소 모두 무사안일(無事安逸)하기를 기원복망하나이다.
一. 다음은 우리 마을 집집마다 자녀손들이 객리에서 생활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모두 하는 매사가 여의하옵기 가호하여 주심을 동신님의 은덕을 길이길이 기원복망하옵나이다.
一. 다음은 농촌생활은 농사가 제일 큰 직업이옵나이다. 집집마다 [오곡](/topic/오곡)잡곡이 풍성하고 모든 작업에 지혜를 깨우쳐 주심을 기원경망하옵나이다.
一. 다음은 우리 마을 특용작물로 큰 몫을 하는 연초경작 [버섯](/topic/버섯)재배 잠업축산 기외 전 동민의 대소사 간 계획지사가 모두 성취하도록 동신님 전간절히 기원복망하옵나이다.
一. 끝으로 우리 마을 동신님의 천추의 명복을 길이길이 경송앙축하옵나이다.
一. 재차 여쭐 말씀 정축년을 맞이하여 전동(全洞) 집집마다 무사태평(無事泰平)하고 항상 평화롭고만사여의형통하옵기를 동신님의 가호를 진심으로 축원하여 공손히 재배하옵니다.

2. 기세배 : ‘귀신 달군 날’인 열엿샛날에는 동신목과 동사가 있는 마을 앞 광장에서 동네 어른들과 풍물패가 모여 한바탕 힘차게 풍물을 두드린 다음 아침 9시나 10시쯤에 농기를 앞세우고 모산굴로 향한다. 모산굴 앞에는 행사장으로 사용되는 6,600㎡의 넓은 공터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굴등’이라고 불린다. ‘굴등’에 도착한 풍물패는 한바탕 풍물을 치면서 놀이를 한 다음 [상쇠](/topic/상쇠)의 지휘에 따라 굴 앞에 모여서 고유제 준비를 한다.

고유제는 준비해 온 간단한 제물을 차리고 굴을 향해 절을 올리는 것이 전부이다. 제관과 농기가 앞줄에 서고 그 뒤로 풍물패가 [무리](/topic/무리)를 지어 도열하여 절을 올린다. 모산굴에서의 고유제는 돼지고기와 [삼실과](/topic/삼실과), 술을 진설하고 술잔을 올리면서 고유(告由, 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신에게 고함)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난다. 고유제의 축문에 따르면 [위령제](/topic/위령제)가 임진왜란 이후에 지속되다가 어느 해부터 중단되었고 1993년에 비로소 재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령제의 의미는 주민들을 잘 돌보아 주시고, 집집마다 무사하고 평화롭고 다행스럽게 살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다. 또한 농사와 각종 특수작물과 [가축](/topic/가축)업·상업·공업·광업 등 주민들의 성공적인 생활을 돌보아 주시고, 서로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임을 알 수있게 한다.

제사가 끝나면 제관과 축관, 주민들은 풍물을 울리면서 관솔불이 밝혀진 모산굴로 들어간다. 이들은 20~30분 동안 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풍물을 치고 나온 다음 굴 입구에 위치한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농기를 세워둔다. 다른 마을에서 온 농기들은 성저리의 농기에게 세배를 올린 뒤에 들어간다. 주변 마을은 성저리를 ‘형님마을’, ‘어른마을’등으로 부른다.

오후 1~2시가 되면 다른 마을 농기들이 모두 굴 앞에 모여 함께 세배를 올린다. 이것은 굴에서 희생당한 영혼을 달래 주는 의미라고 한다. 성저리의 농기를 필두로 참가한 마을전체의 농기가 상쇠의 인사굿 가락을 신호로 굴을 향해 45도 각도로 깍듯이 절을 올린다. 그런 뒤 각 마을의 농기는 자기 마을의 풍물패 쪽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성저리를 제외한 마을끼리는 농기들이 맞닥뜨릴 때마다 기(氣)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승리한 편에서는 더욱 기세가 등등하지만 패한 마을에서는 풀이 죽어서 분함을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싸움이 너무 심하게 벌어진 때에는 주관 마을인 성저리 사람들이 중지하도록 말리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도중에 싸움을 계속하기도 했다고 한다.

기세배는 하루 만에 끝난다. 오후 5시쯤 해가 뉘엿뉘엿해 질 무렵에 모든 마을 참가자들은 농기와 풍물패를 앞세우고 자기 마을로 돌아간다. 이때 농기가 찢기거나 부러진 마을의 경우 “허리춤에 꽹매기만 달랑달랑 매고 간다”는 말과 같이 풍물을 제대로 울리지도 못하고 의기소침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또한 돌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술에 취해 있기도 하며, 자기 마을로 돌아간 뒤에도 술을 마시면서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성저리의 기세배는 1940년까지 행해지다가 중단되었다.

모산굴 고유제 축문(1993년)은 다음과 같다.

축 성저동굴 고유제

維歲次(癸酉)十月(乙亥)朔二十一日(乙未)
洞民代行 (李相大) 敢昭告于 祝官 (南太熙)
癸酉年十月二十一日 吉辰日에 감히 동굴영혼 전(前)에 엄숙히 고유제를 올립니다.
근 십여 년 전에는 동리 선인(先人)들께서 임진란시 동 굴에 화를 당한 원혼신령님전에 위령제를 올리었으나 세상 변천으로 관의 중지를 당하고 이때까지 배알하지못하여 심히 죄송하옵기로 동굴 주변을 단장하고 세세년년(歲歲年年) 정성으로 봉공하겠습니다.
자애하시고 현명하신 영혼신님께옵서 무지한 동민들을 관대히 용서하옵시고 오늘에 변변치 못한 한 시루 백편과 [주과포](/topic/주과포)로 제수를 하였사오니 이 정성을 쾌히 받아주시옵기를 경망하며 재배하옵니이다.
현명하신 영혼신님께서 미련한 인간들을 갈지 마시고 항상 이 못난 인생들을 고루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복망하옵나이다.
더하여 영혼신님께옵서 전 동민들에게 올바른 의사와 지혜를 깨우쳐 주셔서 가가호호마다 무사하고 평화롭고 다행이 충만하도록 하여 주심을 간절히 빌고 비나이다.
또 동민들은 농사를 제일로 하온데 오곡잡곡이 풍성하고 각종 특수작물 가축산 상업 공업 광업 등등을 하는 동민들 중에서 각리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성공하도록 돌보아 주시고 내내 전 동민들이 상부상조 하며 화목하고 인정 있고 다행다복하옵기를 진심으로 복망하나이다.
끝으로 오늘 정성을 모은 제수로 위령제를 쾌히 받아주시고 많이 헌향하옵시고영혼신님의 천만년 명복을 경망하옵고 전 동민들을 대(代)하여 공손히 재배하나이다.
참고문헌문경 모산굴 [기세배](/topic/기세배) 조사보고 (안태현, 문경 모산굴 기세배, 문경세재박물관, 2000)
내용1. 동고사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성저리 동고사의 제당은 [마을](/topic/마을) 어귀의 400년이 넘은 동신목(洞神木), 왕산 정상의 참나무인 산신당(山神堂), 이웃에 위치한 새터마을의 당목과입석으로 구성된 동신당(洞神堂)이다. 마을 어귀의 동신목과 새터의 당(堂)은 부부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목은 불에 타서 흔적만 남아 있으며, 새터의 동신당은 돌무더기였으나 농경지를 정리할 때 당을 없애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현재는 당목과 입석이 있고 제물 진설을 위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제의는 ‘동고사’라고 하며, 제당은 [수구맥이](/topic/수구맥이)·산지당 새터당이라고 한다. [제관](/topic/제관)은 섣달그믐께 이장이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에 따라 선정한 뒤에 동네회의에서 [헌관](/topic/헌관)과 축관을 선출한다. 경비는 [동답](/topic/동답) 다섯 [마지기](/topic/마지기)의 소출로 충당한다. 세 곳의 제당에서 제의를 행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려 제의를 동신목에서만 행하는 것으로 축소하였다가 마을에 나쁜 일이 자주발생하여 본래대로 행하고 있다. 1940년대까지 [별신굿](/topic/별신굿)이 5년마다 행해졌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제물은 선출된 제관이 가은 장보다 비교적 거리가 멀어서 아는 사람이 적은 농암 장을 이용한다. 이것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서 생기게 될 부정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금기는 보통 제당들과 제관 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금줄은 제일(祭日) 일주일 전에 제관과 축관이 꼰 것으로, 각 제당과 제관의 집 앞에 친다. 금줄을 친 뒤부터 제관들은매일 냇가에 가서 목욕재계해야 한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부터 제관은 제물을 장만한다. 그러다가 밤 12시([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0시)가 가까워지면 제관과 축관은 제물을 들고 먼저 동신목으로 향한다. 제당에 도착한 이들은제물을 진설하고, 재배하고, 술잔을 올리고, [독축](/topic/독축)하고, 소지올리기를 행한다. 그리고 다시 재배하는 것으로 제의는 끝난다. [축문](/topic/축문) 내용은 이장과 모든 동민, 공직자 및 운전자,객지의 자손들, 농사의 풍농과 특용작물의 풍농, 모든 일의 성취 등에 대한 사항들을 동신에게 기원하는 것이다. 즉 동신은 동민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한 해 동안 보호하고 있으며, 동민은 동신에게 그 성취를 기원하기 위해 동고사(수구맥이제)를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온 제관과 축관은 다시 제물을 들고 왕산의 정상에 위치한 산지당으로 향한다. 산지당의 제의 절차는 동고사와 동일하다. 이들은 다시 집으로 내려와서 새터당으로 가 제의를 행한다. 이튿날 새벽 2시쯤에 모든 제의가 끝난다. 제관과 축관은제관 집으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음복](/topic/음복)을 하고, 축관은 집으로 돌아간다.

정월대보름날 오전에 마을 주민들이 회관에 모여 음복하면서 동네 회의와 경비 결산을 한 다음 풍물을 치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회의 내용은 그해의 품삯 결정 등 공사(公事)와 마을재산의 문서닦기, 이튿날에 행하게 될 성밑 굴 빌기 및 [기세배](/topic/기세배)와 관련한 사항 등이다. 기세배와 관련한 주된 사항은 ‘다른 마을에서 오는 방문객들을 어떻게 맞이하여 대접할 것인가’와 ‘싸움이 벌어지면 어떻게 말릴 것인가’이다. 성밑마을에는 나락을 500~1,000석 가까이 [수확](/topic/수확)하는 부잣집이 다섯 집 정도 있었는데 이들이 경비를 부담하였다. 보통 술을 장만하여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일이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행사여서 다툼과 시비가 빈번했다. 이 때문에 부잣집에서는 힘센 장정들을 고용하여 이날 행사에 동원하였다. 이들 장정에게는 일 년치 품삯을 더 쳐서 주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음복과 회의가 끝난 뒤 복색을 갖추고 풍물과 [농기](/topic/농기)(農旗)를 꺼내들고서 이튿날 있을 행사를 위해 풍물연습을 한다. 해질녘이 되면 이튿날 행사를 다시 한 번 더 논의한 다음 집으로 돌아간다. 젊은이들은 남아서 모산굴을 밝힐 관솔을 준비한다. 또한 마을의 각 집안의 부녀자들은 행사에 오게 될 손님들 접대를 위한 준비로 바쁘게 움직인다.기세배를 구경하기 위해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하루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기도 한다.

성저리의 동제는 매년 행하는 것이지만 5년마다 별신굿도 행하였다. 별신굿은 수구맥이 동신목 앞에 굿당을 차려 놓고 인근의 무당 7~8명을 초빙하여 성하게 행한다. 이 굿은 ‘귀신달군 날’(정월 열엿샛날) 하루 동안 진행된다.

1997년에 행한 동고사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丁丑) 正月(辛巳) 朔十五日(乙未)
幼學 (蔡仁植) 大祝 (南太熙)
감히 소소히 謹告하옵나이다.
一. 영명하신 동신(洞神)님 전(前)에 전 동민들이 정성을 모아 진상상(進床上)하오나 부족함을 용서하옵시고 소소히 기꺼이 많이 [흠향](/topic/흠향)하시옵소서.
一. 여쭐 말씀 무지 미련한 인생들은 오직 동신님의 보호해 주시는 덕분으로 무사히 생계를 지속하고 있음을 천만 감사히 경송하고 있습니다.
一. 정축년 새해에도 전 동민을 대표하여 중요한 동사무(洞事務)를 담당한 이장의 계획설계하는 매사가 여의(如意) 잘 되도록 동신님 전께옵서 지혜를 깨우쳐 주시옵기를 진심으로 기원복망(祈願伏望)하옵나이다.
一. 다음은 성저 우리 마을 백 여호 집집마다 계획하고 소망하는 매사가 여의형통하옵고 다행이 충만하옵기를 영명하신 동신님께서 고루고루 보살펴 주심을 천만번 기원복망하나이다.
一. 다음은 공직에 근무하는 사람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동리의 남녀노소 모두 무사안일(無事安逸)하기를 기원복망하나이다.
一. 다음은 우리 마을 집집마다 자녀손들이 객리에서 생활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모두 하는 매사가 여의하옵기 가호하여 주심을 동신님의 은덕을 길이길이 기원복망하옵나이다.
一. 다음은 농촌생활은 농사가 제일 큰 직업이옵나이다. 집집마다 [오곡](/topic/오곡)잡곡이 풍성하고 모든 작업에 지혜를 깨우쳐 주심을 기원경망하옵나이다.
一. 다음은 우리 마을 특용작물로 큰 몫을 하는 연초경작 [버섯](/topic/버섯)재배 잠업축산 기외 전 동민의 대소사 간 계획지사가 모두 성취하도록 동신님 전간절히 기원복망하옵나이다.
一. 끝으로 우리 마을 동신님의 천추의 명복을 길이길이 경송앙축하옵나이다.
一. 재차 여쭐 말씀 정축년을 맞이하여 전동(全洞) 집집마다 무사태평(無事泰平)하고 항상 평화롭고만사여의형통하옵기를 동신님의 가호를 진심으로 축원하여 공손히 재배하옵니다.

2. 기세배 : ‘귀신 달군 날’인 열엿샛날에는 동신목과 동사가 있는 마을 앞 광장에서 동네 어른들과 풍물패가 모여 한바탕 힘차게 풍물을 두드린 다음 아침 9시나 10시쯤에 농기를 앞세우고 모산굴로 향한다. 모산굴 앞에는 행사장으로 사용되는 6,600㎡의 넓은 공터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굴등’이라고 불린다. ‘굴등’에 도착한 풍물패는 한바탕 풍물을 치면서 놀이를 한 다음 [상쇠](/topic/상쇠)의 지휘에 따라 굴 앞에 모여서 고유제 준비를 한다.

고유제는 준비해 온 간단한 제물을 차리고 굴을 향해 절을 올리는 것이 전부이다. 제관과 농기가 앞줄에 서고 그 뒤로 풍물패가 [무리](/topic/무리)를 지어 도열하여 절을 올린다. 모산굴에서의 고유제는 돼지고기와 [삼실과](/topic/삼실과), 술을 진설하고 술잔을 올리면서 고유(告由, 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신에게 고함)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난다. 고유제의 축문에 따르면 [위령제](/topic/위령제)가 임진왜란 이후에 지속되다가 어느 해부터 중단되었고 1993년에 비로소 재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령제의 의미는 주민들을 잘 돌보아 주시고, 집집마다 무사하고 평화롭고 다행스럽게 살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다. 또한 농사와 각종 특수작물과 [가축](/topic/가축)업·상업·공업·광업 등 주민들의 성공적인 생활을 돌보아 주시고, 서로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임을 알 수있게 한다.

제사가 끝나면 제관과 축관, 주민들은 풍물을 울리면서 관솔불이 밝혀진 모산굴로 들어간다. 이들은 20~30분 동안 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풍물을 치고 나온 다음 굴 입구에 위치한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농기를 세워둔다. 다른 마을에서 온 농기들은 성저리의 농기에게 세배를 올린 뒤에 들어간다. 주변 마을은 성저리를 ‘형님마을’, ‘어른마을’등으로 부른다.

오후 1~2시가 되면 다른 마을 농기들이 모두 굴 앞에 모여 함께 세배를 올린다. 이것은 굴에서 희생당한 영혼을 달래 주는 의미라고 한다. 성저리의 농기를 필두로 참가한 마을전체의 농기가 상쇠의 인사굿 가락을 신호로 굴을 향해 45도 각도로 깍듯이 절을 올린다. 그런 뒤 각 마을의 농기는 자기 마을의 풍물패 쪽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성저리를 제외한 마을끼리는 농기들이 맞닥뜨릴 때마다 기(氣)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승리한 편에서는 더욱 기세가 등등하지만 패한 마을에서는 풀이 죽어서 분함을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싸움이 너무 심하게 벌어진 때에는 주관 마을인 성저리 사람들이 중지하도록 말리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도중에 싸움을 계속하기도 했다고 한다.

기세배는 하루 만에 끝난다. 오후 5시쯤 해가 뉘엿뉘엿해 질 무렵에 모든 마을 참가자들은 농기와 풍물패를 앞세우고 자기 마을로 돌아간다. 이때 농기가 찢기거나 부러진 마을의 경우 “허리춤에 꽹매기만 달랑달랑 매고 간다”는 말과 같이 풍물을 제대로 울리지도 못하고 의기소침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또한 돌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술에 취해 있기도 하며, 자기 마을로 돌아간 뒤에도 술을 마시면서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성저리의 기세배는 1940년까지 행해지다가 중단되었다.

모산굴 고유제 축문(1993년)은 다음과 같다.

축 성저동굴 고유제

維歲次(癸酉)十月(乙亥)朔二十一日(乙未)
洞民代行 (李相大) 敢昭告于 祝官 (南太熙)
癸酉年十月二十一日 吉辰日에 감히 동굴영혼 전(前)에 엄숙히 고유제를 올립니다.
근 십여 년 전에는 동리 선인(先人)들께서 임진란시 동 굴에 화를 당한 원혼신령님전에 위령제를 올리었으나 세상 변천으로 관의 중지를 당하고 이때까지 배알하지못하여 심히 죄송하옵기로 동굴 주변을 단장하고 세세년년(歲歲年年) 정성으로 봉공하겠습니다.
자애하시고 현명하신 영혼신님께옵서 무지한 동민들을 관대히 용서하옵시고 오늘에 변변치 못한 한 시루 백편과 [주과포](/topic/주과포)로 제수를 하였사오니 이 정성을 쾌히 받아주시옵기를 경망하며 재배하옵니이다.
현명하신 영혼신님께서 미련한 인간들을 갈지 마시고 항상 이 못난 인생들을 고루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복망하옵나이다.
더하여 영혼신님께옵서 전 동민들에게 올바른 의사와 지혜를 깨우쳐 주셔서 가가호호마다 무사하고 평화롭고 다행이 충만하도록 하여 주심을 간절히 빌고 비나이다.
또 동민들은 농사를 제일로 하온데 오곡잡곡이 풍성하고 각종 특수작물 가축산 상업 공업 광업 등등을 하는 동민들 중에서 각리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성공하도록 돌보아 주시고 내내 전 동민들이 상부상조 하며 화목하고 인정 있고 다행다복하옵기를 진심으로 복망하나이다.
끝으로 오늘 정성을 모은 제수로 위령제를 쾌히 받아주시고 많이 헌향하옵시고영혼신님의 천만년 명복을 경망하옵고 전 동민들을 대(代)하여 공손히 재배하나이다.
참고문헌문경 모산굴 [기세배](/topic/기세배) 조사보고 (안태현, 문경 모산굴 기세배, 문경세재박물관, 2000)
역사‘모산굴’은 [마을](/topic/마을)과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피신해 있다가 모두 질식사했다고 전하는 곳이다. 당시에 사람이 굴 밖에 빨래한 옷을 널어 둔 것을 발견한 왜놈들이 독 있는 나무에 불을 지펴 굴 안에있던 사람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마을에서 흉한 일이 자주 발생하였고, 이 굴의 뭇 귀신을 위로하는 [위령제](/topic/위령제)를 지내면 괜찮아질 것이라는무당의 점괘대로 하였더니 흉한 일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매년 ‘귀신 달군 날’에 위령제를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밑마을의 위령제였지만 이 굴에서 제의를 잘 지내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 인근 마을에서 사람들이 풍물패와 함께 동제를 행한 이튿날인 정월 열엿샛날에 이 굴에 찾아와서 [기세배](/topic/기세배)를 올린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마을에 우환이 잦아서 1993년에 복원하여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 마을은 동제에서 행하는 대동놀이로 더 유명한 곳이다. ‘기세배’, ‘성밑 굴 빌기’, ‘[귀신달구기](/topic/귀신달구기)’, ‘[기싸움](/topic/기싸움)’, ‘모살굴별신놀이’ 등의 이름으로 전승되어 온 대동놀이는 당시 이 일대에서 행해진 일련의 행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이 행사에는 가은읍내뿐만 아니라 도보로 20㎞ 이상 떨어진 상주 일대 마을까지 참여하였다.
역사‘모산굴’은 [마을](/topic/마을)과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피신해 있다가 모두 질식사했다고 전하는 곳이다. 당시에 사람이 굴 밖에 빨래한 옷을 널어 둔 것을 발견한 왜놈들이 독 있는 나무에 불을 지펴 굴 안에있던 사람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마을에서 흉한 일이 자주 발생하였고, 이 굴의 뭇 귀신을 위로하는 [위령제](/topic/위령제)를 지내면 괜찮아질 것이라는무당의 점괘대로 하였더니 흉한 일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매년 ‘귀신 달군 날’에 위령제를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밑마을의 위령제였지만 이 굴에서 제의를 잘 지내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 인근 마을에서 사람들이 풍물패와 함께 동제를 행한 이튿날인 정월 열엿샛날에 이 굴에 찾아와서 [기세배](/topic/기세배)를 올린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마을에 우환이 잦아서 1993년에 복원하여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 마을은 동제에서 행하는 대동놀이로 더 유명한 곳이다. ‘기세배’, ‘성밑 굴 빌기’, ‘[귀신달구기](/topic/귀신달구기)’, ‘[기싸움](/topic/기싸움)’, ‘모살굴별신놀이’ 등의 이름으로 전승되어 온 대동놀이는 당시 이 일대에서 행해진 일련의 행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이 행사에는 가은읍내뿐만 아니라 도보로 20㎞ 이상 떨어진 상주 일대 마을까지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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