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성호리 제각 창건기

한국무속신앙사전
홍성군 결성면 성호리에서 1908년(융희 2)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각(五方祭閣)을 창건하면서 그 시말을 기록한 [현판](/topic/현판).
definition
홍성군 결성면 성호리에서 1908년(융희 2)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각(五方祭閣)을 창건하면서 그 시말을 기록한 [현판](/topic/현판).
mp3Cnt
0
wkorname
이해준
정의홍성군 결성면 성호리에서 1908년(융희 2)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각(五方祭閣)을 창건하면서 그 시말을 기록한 [현판](/topic/현판).
정의홍성군 결성면 성호리에서 1908년(융희 2)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각(五方祭閣)을 창건하면서 그 시말을 기록한 [현판](/topic/현판).
내용성호리에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당제가 지속되다가 18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동제가 성립되는데, 정월 초하룻날 자시에 거행되는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五方祭)가 그것이다. 성호신당에서 거행되었던 당제가 고깃배를 부리는 어민들이 주축이 되는 의례였다면, 오방제는 [마을](/topic/마을)의 전 구성원들이 동참하는 명실상부한 대동제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오방제각은 성호포구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뒤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제각은 1908년 10월 13일 성호리의 존위(尊位) 맹학수(孟學洙)가 발기하여 새로 지은 것인데, 동계장 김용후(金溶珝)가 기록한 「제각창건기」에 의하면 오방제각은 원래 백 수십 년 동안 제단만 조성되어 있어서 [화주](/topic/화주)가 미리 제장으로 올라가서 천막을 치고 오방제를 지냈다고 한다.

즉 당집이 없으므로 오방제를 지낼 때 날씨가 좋지 않으면 정성을 다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제각을 짓게 된 것이다. 당시 오방제각의 창건에 소요된 비용은 동계(洞契) 의연금 800량과 이사(里社)에서 보조한 100량이었으며, 자금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초가로 [지붕](/topic/지붕)을 했다가 2년 뒤인 1910년에 [기와](/topic/기와)로 교체하였다. 「제각창건기」에 성호리에서 오방제가 유래된 시기는 백수십 년 전의 일이라고 했으므로 18세기 중후반에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의 형성과 함께 지속되어 온 정월대보름 당제는 어촌이라는 생활터전 위에 성립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오방신장(五方神將)을 주신격으로 하는 오방제를 수용한 까닭은 어민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새로운 마을신이 필요했다는 방증이다. 이제 당제만으로는 성호리 주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가 어렵게 되었고, 변화된 환경에 조응하는 새로운 마을신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각창건기」는 이러한 동제의 변화배경을 상세히 전하고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 성호리 마을변천사와 관련하여 추론이 가능한데, 18세기 후반 성호리에서는 1795년 향약이 창설되어 구성원을 상계․부계․하계원으로 구분하는 등 유교적인 질서와 교화가 한층 강조되었다. 이러한 향촌의 분위기는 17세기 초 성호리로 입향한 김녕 김씨와 순창 맹씨 등이 족세를 떨치는 시기와 맞물려 있는데, 당시 이들 가계는 향약 구성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들은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함으로써 경제력을 바탕으로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은 최고조에 달했으며, 이들이 오방제 수용과 향약 창설 등에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내용성호리에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당제가 지속되다가 18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동제가 성립되는데, 정월 초하룻날 자시에 거행되는 [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五方祭)가 그것이다. 성호신당에서 거행되었던 당제가 고깃배를 부리는 어민들이 주축이 되는 의례였다면, 오방제는 [마을](/topic/마을)의 전 구성원들이 동참하는 명실상부한 대동제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오방제각은 성호포구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뒤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제각은 1908년 10월 13일 성호리의 존위(尊位) 맹학수(孟學洙)가 발기하여 새로 지은 것인데, 동계장 김용후(金溶珝)가 기록한 「제각창건기」에 의하면 오방제각은 원래 백 수십 년 동안 제단만 조성되어 있어서 [화주](/topic/화주)가 미리 제장으로 올라가서 천막을 치고 오방제를 지냈다고 한다.

즉 당집이 없으므로 오방제를 지낼 때 날씨가 좋지 않으면 정성을 다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제각을 짓게 된 것이다. 당시 오방제각의 창건에 소요된 비용은 동계(洞契) 의연금 800량과 이사(里社)에서 보조한 100량이었으며, 자금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초가로 [지붕](/topic/지붕)을 했다가 2년 뒤인 1910년에 [기와](/topic/기와)로 교체하였다. 「제각창건기」에 성호리에서 오방제가 유래된 시기는 백수십 년 전의 일이라고 했으므로 18세기 중후반에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의 형성과 함께 지속되어 온 정월대보름 당제는 어촌이라는 생활터전 위에 성립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오방신장(五方神將)을 주신격으로 하는 오방제를 수용한 까닭은 어민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새로운 마을신이 필요했다는 방증이다. 이제 당제만으로는 성호리 주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가 어렵게 되었고, 변화된 환경에 조응하는 새로운 마을신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각창건기」는 이러한 동제의 변화배경을 상세히 전하고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 성호리 마을변천사와 관련하여 추론이 가능한데, 18세기 후반 성호리에서는 1795년 향약이 창설되어 구성원을 상계․부계․하계원으로 구분하는 등 유교적인 질서와 교화가 한층 강조되었다. 이러한 향촌의 분위기는 17세기 초 성호리로 입향한 김녕 김씨와 순창 맹씨 등이 족세를 떨치는 시기와 맞물려 있는데, 당시 이들 가계는 향약 구성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들은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함으로써 경제력을 바탕으로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은 최고조에 달했으며, 이들이 오방제 수용과 향약 창설 등에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의의[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는 우리나라의 동제에서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명칭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충남 홍성․예산․금산 등 극히 일부 지역에서 전승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중에서 성호리 오방제는 기록으로 성립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최초의 사례이다. 그런 점에서 성호리 「제각창건기」는 조선 후기 서해안 동제의 전승양상을 포착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록물이다. 이와 더불어 [마을](/topic/마을)의 주도세력에 따라 새로운 신격이 수용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성호향약좌목, 18․19세기 [농민](/topic/농민)층 분화와 향촌중인 (정승모, 대동문화연구 5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5)
조선 후기 홍성 성호리 동제의 성립과 신격의 변화 (강성복, 지방사와 지방문화 10-2호, 역사문화학회, 2007)
조선 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의의[오[방제](/topic/방제)](/topic/오방제)는 우리나라의 동제에서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명칭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충남 홍성․예산․금산 등 극히 일부 지역에서 전승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중에서 성호리 오방제는 기록으로 성립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최초의 사례이다. 그런 점에서 성호리 「제각창건기」는 조선 후기 서해안 동제의 전승양상을 포착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록물이다. 이와 더불어 [마을](/topic/마을)의 주도세력에 따라 새로운 신격이 수용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성호향약좌목, 18․19세기 [농민](/topic/농민)층 분화와 향촌중인 (정승모, 대동문화연구 5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5)
조선 후기 홍성 성호리 동제의 성립과 신격의 변화 (강성복, 지방사와 지방문화 10-2호, 역사문화학회, 2007)
조선 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