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소재한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의 [영정](/topic/영정)을 모신 [사당](/topic/사당). 영월군의 고을신앙 처소로 기능하는 동시에 영월읍 영흥11리 [마을](/topic/마을)서낭당으로 신앙되고 있다. 1977년 11월 28일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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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황루시 |
정의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소재한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의 [영정](/topic/영정)을 모신 [사당](/topic/사당). 영월군의 고을신앙 처소로 기능하는 동시에 영월읍 영흥11리 [마을](/topic/마을)서낭당으로 신앙되고 있다. 1977년 11월 28일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소재한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의 [영정](/topic/영정)을 모신 [사당](/topic/사당). 영월군의 고을신앙 처소로 기능하는 동시에 영월읍 영흥11리 [마을](/topic/마을)서낭당으로 신앙되고 있다. 1977년 11월 28일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현재 영모전 내부 중앙에 모신 [영정](/topic/영정)에는 충신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 ‘단종대왕지신위’라고 쓰인 [위패](/topic/위패)를 모셨다. 왼쪽에는 ‘충신 한성부윤 우천추선생 신위’를 모셨고 벽에 ‘영모전 유래기 부 추익한 사적’을 나무에 새긴 [편액](/topic/편액)을 걸어 놓았다. 그렇지만 조선 영모전은 읍치 성황사로 기능하였다. 『명고선생문집』에 따르면 향리와 백성들이 단옷날 호장이 중심이 되어 무당을 데리고 이틀 동안 굿을 했다고 한다. [사당](/topic/사당)을 지키는 사람은 삼년에 한 번 [모자](/topic/모자)와 허리띠와 [신발](/topic/신발)과 홀을 갖추어 무당과 함께 나무인형 앞에 나아가 종이돈을 잡고 신을 맞이하여 수령의 안장을 지운 말을 빌려 타고 온 읍을 돌아다녔다. 그런 뒤 관청에 돌아와 정좌하면 또 성찬을 차려 잔치를 베풀었으며 발고하는 날에는 [제관](/topic/제관)이 신의 위판을 받들지 않고 나무인형 앞에서 일을 행하였다고 한다. 경오년(1750)에 부사 정간이 “성황사의 차례가 국가의 [사전](/topic/사전)에 정해져 있는데 위판은 있으되 사용하지 않고 음사에서 일을 행하니 상도를 어기고 예의를 어김이 심하다고 생각하였다”며 토지신에게 사유를 고하고 제단을 쌓고 주신을 받들어 일을 행하는 것을 항식으로 정하고, 향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음사를 부의 서쪽 외진 곳에 옮기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까지 영모전에서 올리는 제향은 두 종류가 있었다. 먼저 단종이 승하한 음력 10월 24일에 올리는 기신제가 있다. 이 제향은 원래 읍치성황제의 기능이 변모된 것으로 보인다. 영월읍장이 [초헌](/topic/초헌)관이 되어 모시다가 지방자치시대가 시작된 1995년부터 영월군수가 초헌관직을 맡았다. 그러나 2008년부터 장릉 경내 정자각으로 옮김으로써 더 이상 영모전에서는 기신제를 지내지 않는다. 현재 영모전에서 전승되는 제사는 정월 초이튿날에 영흥11리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 서낭제이다. 이 서낭제는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한 관풍헌(觀風軒)을 중심으로 주변의 영흥 4리, 2리, 7리, 9리, 10리 주민들도 함께 참여한다. [마을](/topic/마을)에서는 먼저 당주를 선정하여 제물을 준비한다. 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날 영모전과 당주 집 앞을 청소하고 [황토](/topic/황토)를 뿌린다. 제사를 지낼 때 영모전으로 올라가는 [계단](/topic/계단)에 짚을 태워 부정을 가신다. 초헌관은 영흥11리 이장, [아헌](/topic/아헌)관은 군수 또는 대행자, [종헌](/topic/종헌)은 다른 마을에서 참석한 이장 가운데 선정한다. 서낭제의 내용을 보면 먼저 산신제를 지낸 다음 대왕제를 지낸다. 산신제는 정면 왼쪽에 제물을 진설하고 지낸다. 위패는 따로 모시지 않는다. 산신제를 지내는 이유는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고사](/topic/고사)에 근거한다고 한다. 이어서 대왕제를 위한 제물을 진설하고 [헌작](/topic/헌작), 재배, [독축](/topic/독축) 순으로 제사를 지낸다. 산신제에서는 이배를 하지만 단종 신위를 모시는 대왕제는 사배하고 산신축과 대왕축을 고한다. 대왕제가 끝난 뒤 잡귀를 풀어 먹이는 고[수레](/topic/수레)를 한 다음 마을의 안녕과 주민을 위해 소지를 올린다. 마을소지, 이장소지에 이어 각 반장이 가구별로 소지를 올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제물은 산신제와 대왕제가 거의 같다. 산신시루, 대왕시루를 각각 찌고 메도 각각 올린다. 쇠고기산적․채탕․육탕․어탕의 3탕을 올리고 나서 [메밀](/topic/메밀)전, 두부전, 조기와 포, 채소로 고사리와 도라지를 준비한다. 술은 청주를 쓴다. 다만 대왕제를 지낼 때에는 단일왕이라고 하여 과일을 하나씩만 올리고, 산신제에는 생돼지고기를 올리는 것이 다르다. 제수 비용은 마을공동기금으로 하되 개인 찬조도 받는다. 제수장을 볼 때에는 값을 흥정하거나 깎지 않는다. 제물은 당주집에서만 만든다. 제사가 끝나면 당주집으로 와서 마을잔치를 하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며, 마을회의를 하여 단합을 도모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영모전은 영월군청에서 관리한다. 최근 영모전은 영월 지역 무속신앙의 중심처로 보인다. 태백산 산신이 된 단종을 모시는 무당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월 단종제 가운데 지역의 무녀들이 단종대왕굿을 한다. 이때에는 반드시 먼저 영모전을 찾아가 대왕신을 모셔온다. | 참고문헌 | 성황당과 성황제 (한국종교사연구회, 민속원, 1998) 영월문화재대관 (영월문화원, 2006) | 내용 | 현재 영모전 내부 중앙에 모신 [영정](/topic/영정)에는 충신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 ‘단종대왕지신위’라고 쓰인 [위패](/topic/위패)를 모셨다. 왼쪽에는 ‘충신 한성부윤 우천추선생 신위’를 모셨고 벽에 ‘영모전 유래기 부 추익한 사적’을 나무에 새긴 [편액](/topic/편액)을 걸어 놓았다. 그렇지만 조선 영모전은 읍치 성황사로 기능하였다. 『명고선생문집』에 따르면 향리와 백성들이 단옷날 호장이 중심이 되어 무당을 데리고 이틀 동안 굿을 했다고 한다. [사당](/topic/사당)을 지키는 사람은 삼년에 한 번 [모자](/topic/모자)와 허리띠와 [신발](/topic/신발)과 홀을 갖추어 무당과 함께 나무인형 앞에 나아가 종이돈을 잡고 신을 맞이하여 수령의 안장을 지운 말을 빌려 타고 온 읍을 돌아다녔다. 그런 뒤 관청에 돌아와 정좌하면 또 성찬을 차려 잔치를 베풀었으며 발고하는 날에는 [제관](/topic/제관)이 신의 위판을 받들지 않고 나무인형 앞에서 일을 행하였다고 한다. 경오년(1750)에 부사 정간이 “성황사의 차례가 국가의 [사전](/topic/사전)에 정해져 있는데 위판은 있으되 사용하지 않고 음사에서 일을 행하니 상도를 어기고 예의를 어김이 심하다고 생각하였다”며 토지신에게 사유를 고하고 제단을 쌓고 주신을 받들어 일을 행하는 것을 항식으로 정하고, 향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음사를 부의 서쪽 외진 곳에 옮기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까지 영모전에서 올리는 제향은 두 종류가 있었다. 먼저 단종이 승하한 음력 10월 24일에 올리는 기신제가 있다. 이 제향은 원래 읍치성황제의 기능이 변모된 것으로 보인다. 영월읍장이 [초헌](/topic/초헌)관이 되어 모시다가 지방자치시대가 시작된 1995년부터 영월군수가 초헌관직을 맡았다. 그러나 2008년부터 장릉 경내 정자각으로 옮김으로써 더 이상 영모전에서는 기신제를 지내지 않는다. 현재 영모전에서 전승되는 제사는 정월 초이튿날에 영흥11리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 서낭제이다. 이 서낭제는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한 관풍헌(觀風軒)을 중심으로 주변의 영흥 4리, 2리, 7리, 9리, 10리 주민들도 함께 참여한다. [마을](/topic/마을)에서는 먼저 당주를 선정하여 제물을 준비한다. 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날 영모전과 당주 집 앞을 청소하고 [황토](/topic/황토)를 뿌린다. 제사를 지낼 때 영모전으로 올라가는 [계단](/topic/계단)에 짚을 태워 부정을 가신다. 초헌관은 영흥11리 이장, [아헌](/topic/아헌)관은 군수 또는 대행자, [종헌](/topic/종헌)은 다른 마을에서 참석한 이장 가운데 선정한다. 서낭제의 내용을 보면 먼저 산신제를 지낸 다음 대왕제를 지낸다. 산신제는 정면 왼쪽에 제물을 진설하고 지낸다. 위패는 따로 모시지 않는다. 산신제를 지내는 이유는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고사](/topic/고사)에 근거한다고 한다. 이어서 대왕제를 위한 제물을 진설하고 [헌작](/topic/헌작), 재배, [독축](/topic/독축) 순으로 제사를 지낸다. 산신제에서는 이배를 하지만 단종 신위를 모시는 대왕제는 사배하고 산신축과 대왕축을 고한다. 대왕제가 끝난 뒤 잡귀를 풀어 먹이는 고[수레](/topic/수레)를 한 다음 마을의 안녕과 주민을 위해 소지를 올린다. 마을소지, 이장소지에 이어 각 반장이 가구별로 소지를 올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제물은 산신제와 대왕제가 거의 같다. 산신시루, 대왕시루를 각각 찌고 메도 각각 올린다. 쇠고기산적․채탕․육탕․어탕의 3탕을 올리고 나서 [메밀](/topic/메밀)전, 두부전, 조기와 포, 채소로 고사리와 도라지를 준비한다. 술은 청주를 쓴다. 다만 대왕제를 지낼 때에는 단일왕이라고 하여 과일을 하나씩만 올리고, 산신제에는 생돼지고기를 올리는 것이 다르다. 제수 비용은 마을공동기금으로 하되 개인 찬조도 받는다. 제수장을 볼 때에는 값을 흥정하거나 깎지 않는다. 제물은 당주집에서만 만든다. 제사가 끝나면 당주집으로 와서 마을잔치를 하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며, 마을회의를 하여 단합을 도모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영모전은 영월군청에서 관리한다. 최근 영모전은 영월 지역 무속신앙의 중심처로 보인다. 태백산 산신이 된 단종을 모시는 무당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월 단종제 가운데 지역의 무녀들이 단종대왕굿을 한다. 이때에는 반드시 먼저 영모전을 찾아가 대왕신을 모셔온다. | 참고문헌 | 성황당과 성황제 (한국종교사연구회, 민속원, 1998) 영월문화재대관 (영월문화원, 2006) | 역사 | 영모전은 원래 영월의 읍치 성황사로, 성황신을 모시던 곳이다.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성황사가 군 북쪽 3리에 있었다는 기록과 지금 영모전의 위치와 일치한다. 1871년에 간행된 『관동읍지(關東邑誌)』에도 성황사의 기록이 있고, 경오년(1750)에 부사 정간(鄭幹)이 영월성황사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명고선생문집(鳴皐先生文集)』 권 6 에 보인다. 이에 따르면 성황사는 본래 제단과 [담장](/topic/담장)이 없이 다만 세 칸짜리 집을 얽어 만들고 여기에 목상(나무인형)을 만들어 안치했다고 한다. 영월성황사는 1792년(정조 16)에 개축한 이후 목상을 모시고 읍치 성황사로서의 전통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27년에 이규진이 목상을 불태우고 단종이 백마를 타고 날아가며 충신 추익한(秋益漢)이 단종을 모시는 [영정](/topic/영정)을 [봉안](/topic/봉안)하였다. 이 영정은 한성부윤을 지내고 낙향해 있던 추익한이 영월로 유배간 단종에게 산머루와 다래를 진상하면서 위로했다는 [고사](/topic/고사)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윤용구가 ‘영모전’이라는 이름을 붙여 [편액](/topic/편액)을 달았다. 이 영정은 6․25전쟁으로 훼손되었으며, 그 후 영월군이 김기창 화백에게 같은 주제로 의뢰하여 그린 단종과 추익한의 그림을 모시고 있다. 1989년에 외부공사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 역사 | 영모전은 원래 영월의 읍치 성황사로, 성황신을 모시던 곳이다.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성황사가 군 북쪽 3리에 있었다는 기록과 지금 영모전의 위치와 일치한다. 1871년에 간행된 『관동읍지(關東邑誌)』에도 성황사의 기록이 있고, 경오년(1750)에 부사 정간(鄭幹)이 영월성황사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명고선생문집(鳴皐先生文集)』 권 6 에 보인다. 이에 따르면 성황사는 본래 제단과 [담장](/topic/담장)이 없이 다만 세 칸짜리 집을 얽어 만들고 여기에 목상(나무인형)을 만들어 안치했다고 한다. 영월성황사는 1792년(정조 16)에 개축한 이후 목상을 모시고 읍치 성황사로서의 전통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27년에 이규진이 목상을 불태우고 단종이 백마를 타고 날아가며 충신 추익한(秋益漢)이 단종을 모시는 [영정](/topic/영정)을 [봉안](/topic/봉안)하였다. 이 영정은 한성부윤을 지내고 낙향해 있던 추익한이 영월로 유배간 단종에게 산머루와 다래를 진상하면서 위로했다는 [고사](/topic/고사)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윤용구가 ‘영모전’이라는 이름을 붙여 [편액](/topic/편액)을 달았다. 이 영정은 6․25전쟁으로 훼손되었으며, 그 후 영월군이 김기창 화백에게 같은 주제로 의뢰하여 그린 단종과 추익한의 그림을 모시고 있다. 1989년에 외부공사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 형태 | 영모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5량 구조로 된 목조 [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외벌대의 자연석 [기단](/topic/기단)에 자연석 [초석](/topic/초석)을 사용했고, 그 위에 각[기둥](/topic/기둥)을 세웠다. 벽의 정면은 트여있고, 측면과 배면은 막혀 있다. 중인방을 기준으로 벽의 아래는 자연석을 쌓은 화방벽으로 하고, 위는 홍[살창](/topic/살창)으로 되어 있다. 내부 가구는 3변분작의 5량 구조이다. 정면과 배면에 각각 퇴보를 설치하고, 고주 없이 평주를 설치하여 대보를 걸어 맞보 형태의 가구 구조로 되어 있다. 대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치게 하였다. 측면에는 충량을 측면 기둥에서 대보 위로 걸었으며 그 위에 동자주를 설치하여 외기 중도리를 받치고 있다. 내부는 한식 [우물](/topic/우물)[마루](/topic/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간막이 도리를 이용하여 가운데 1.5칸을 [감실](/topic/감실)로 구획하여 놓았다. 감실의 상부는 트여 있다. 감실의 내부는 가운데에 [제상](/topic/제상)이 놓여 있고 절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으며, 배면 쪽 [툇간](/topic/툇간)에 [영정](/topic/영정)이 있다. 감실 내부 [천장](/topic/천장)만을 평[반자](/topic/반자)를 설치하였으며, 나머지 부분의 천장은 연목을 그대로 노출시킨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지붕](/topic/지붕)은 [부연](/topic/부연) 없이 연목만을 설치한 홑[처마](/topic/처마)로 되어있고, 형태는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이다. 처마 부분과 함각지부의 날개 [기와](/topic/기와)는 와구토를 사용하여 [치장](/topic/치장)하였다. | 형태 | 영모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5량 구조로 된 목조 [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외벌대의 자연석 [기단](/topic/기단)에 자연석 [초석](/topic/초석)을 사용했고, 그 위에 각[기둥](/topic/기둥)을 세웠다. 벽의 정면은 트여있고, 측면과 배면은 막혀 있다. 중인방을 기준으로 벽의 아래는 자연석을 쌓은 화방벽으로 하고, 위는 홍[살창](/topic/살창)으로 되어 있다. 내부 가구는 3변분작의 5량 구조이다. 정면과 배면에 각각 퇴보를 설치하고, 고주 없이 평주를 설치하여 대보를 걸어 맞보 형태의 가구 구조로 되어 있다. 대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치게 하였다. 측면에는 충량을 측면 기둥에서 대보 위로 걸었으며 그 위에 동자주를 설치하여 외기 중도리를 받치고 있다. 내부는 한식 [우물](/topic/우물)[마루](/topic/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간막이 도리를 이용하여 가운데 1.5칸을 [감실](/topic/감실)로 구획하여 놓았다. 감실의 상부는 트여 있다. 감실의 내부는 가운데에 [제상](/topic/제상)이 놓여 있고 절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으며, 배면 쪽 [툇간](/topic/툇간)에 [영정](/topic/영정)이 있다. 감실 내부 [천장](/topic/천장)만을 평[반자](/topic/반자)를 설치하였으며, 나머지 부분의 천장은 연목을 그대로 노출시킨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지붕](/topic/지붕)은 [부연](/topic/부연) 없이 연목만을 설치한 홑[처마](/topic/처마)로 되어있고, 형태는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이다. 처마 부분과 함각지부의 날개 [기와](/topic/기와)는 와구토를 사용하여 [치장](/topic/치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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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 우리전통예인 백사람 | 이규원 | 1995 | WHAEUM레코드 | 허용업 민속음악 기악독주집 | 허용업 | 1996 | 구리시·구리문화원 | 구리문화재대관 | 1998 | 돌꽃컴퍼니 | 객석 42호 | 2001 | 깊은샘 | 경서도 명인명창 | 정범태 | 2005 |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허용업의 해금풍류연구 | 송주현 | 2007 |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대풍류의 음악적 분석-허용업의 피리가락을 중심으로 | 김태훈 |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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