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topic/마을)](/topic/하회마을)에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마을공동체 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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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조정현 |
정의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topic/마을)](/topic/하회마을)에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마을공동체 제의. | 정의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topic/마을)](/topic/하회마을)에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마을공동체 제의. | 내용 | 하회동의 [서낭신](/topic/서낭신)은 여서낭신이며 무진생서낭[戊辰生城隍]님으로 불린다. 서낭제의 평상제는 동제라고 부르지만 3년이나 5년, 10년마다 조건이 갖추어지고, 신탁(神託)이 내리면 지내게 되는 별신굿이 있다. 이는 동제와 별신굿의 이중 구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별신굿은 매년 지내는 동제와 맞물리면서 몇 년 간격으로 이루어진다. 서낭신의 친정은 월애(풍천면 임금동)이며, 외가는 갈밭(풍천면 갈전동)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노인 이창희에 따르면 별신굿은 민산주(閔山主) 때에는 지내지 않았고, 다음 대인 김산주(金山主) 때에는 갑자년(甲子年, 1924)에 지냈으며, 박산주(朴山主) 때에는 신(神)의 회갑해인 무진년(戊辰年, 1928) 에 지냈고, 현재의 김돌이(金乭伊) 산주(山主)는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별신굿은 무진년에 마지막으로 지내고 중단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회동의 별신굿은 기능으로 보아 [마을](/topic/마을)굿으로서의 서낭신에 대한 대제이며, 별신굿놀이는 오신행사(娛神行事)로서 별신굿의 부분에 속한다. 하회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서낭당](/topic/서낭당), 국신당, 삼신당에 동제(당제)를 지낸다. 서낭당제를 지낼 때 산주가 서낭신에게 고하는 글을 읽는다. 이 제문에는 [하회마을](/topic/하회마을)에 터를 잡은 내력, 현재 마을의 상황, 서낭신에게 바라는 내용이 두루 담겨 있다. 유세차 갑자 정월 병인삭 십오일 경진 하회 동민 일동은 성심으로 동심합역하야 근구 주과 포어하야 벽대 경고우 무진생 성황님 전하오니 복원 성황님은 불수 지찬이라도 만반진수 생각하시고 반가이 [흠향](/topic/흠향)하시옵기 엎드려 천만 축원하옵니다. 복원 성황님께서는 오랫동안 저희들이 성황님의 하늘 같은 덕택을 입사와 오늘까지 무사 태평하옵게 지내오니 하해같아온 은혜를 어찌 만분지 일이라도 갚사오리까만은 성황님 하늘 같은 은덕으로 금년에 새로 만만복록을 입사옵기 바라옵고 오늘날 저희들이 소소한 정성을 드리오니 복원 성황님은 아무쪼록 남북이 통일되며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돌아와서 여러 사람들이 안락 태평하게 하시옵기 천만 복출하옵고 더구나 우리 하회일동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한 사람이라도 치폐없이 무사 태평하게 하여 주시옵기 천만 복축 복망하옵니다. 금년 일 년 내에 어느 가정이라도 전부 한 가정같이 무사 태평하여 전 가정이 일 년 내에 만병이 없이 평안하게 하시옵고 재수대통하고 흉한 악운은 멀리 가고 좋은 복록과 즐거운 경사 돌아오게 하시옵고 집에 있을 때는 한 가정이 화락하고 출입하거든 만사 절로 잘 되어서 몸이 편하고 운수대통하게 하여 주시옵고 어려운 사람 부자 되게 하시옵고 자손 없는 사람 옥동자가 많이 나게 하여 주시옵고 멀리 나간 자손들 수이 무사 편안하게 돌아와서 부모형제 숙질간 즐거이 상봉하게 하여 주시옵고 천만 [가지](/topic/가지)가 모두 잘되어서 운수 불길하든 사람들도 만사가 절로 순하게 펴어서 잘되게 하여 주시옵고 농사 짓는 사람은 풍년되어 일 년에 천만 석씩 쌓아 놓게하여 주시고 상업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천만 금씩 생기도록 하여 주시고 국가공무에 힘쓴 사람 공중사업에 힘쓴 사람 개인 직업에 힘쓴 사람 모두가 일년 삼백육십 일에 병 없고 재수대통하여 만복이 절로 돌아와서 한시라도 근심걱정 없이 하여 주시옵기 천만 번 엎드려 받자옵고 억만 번 정성껏 비나이다. 복원 복축 성황님께서는 국태민안하고 시화세풍되며 우마육축이 번성하고 병든 사람이 절로 낫고 안 된 세상 멀리 가고 착한 사람 모여들고 악한 사람 착하게 되어 우리 하회일동 여러 천만 사람들이 금년 일 년 내에 만복이 절로 오고 천만 가지 근심걱정 봄눈 녹듯 없어져서 일 년 동안 여러 사람 태평화락하고 자손번창하고 부귀영화로내내 지내게 하여 주시옵기를 엎드려 바라옵고 대강원정 드리오니 밝으신 성황님은 굽어살피시고 서사 흠향하옵소서. 무자년 정월 보름날 부락 대표 김종흥. 찬과 술과 정결한 어가로 제물을 차려놓고 무진생서낭님 신령님께 고하나이다. 천하만물지중 유인이 최기라 하였고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만수무강 행복을 누리도록 천지신명에게 바라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라 할 수 있다. 조물주는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크게는 사회를 꾸리고 적게는 한 부락을 조성하여 집단적으로 터전을 만들어 주셨다. 우리 부락도 전서공이 터를 잡아 육백여년 동안을 훌륭하신 조상님의 얼을 계승해오고 있으며 부락의 안녕과 발전은 무진생성황님께서 수호감사 주신 덕택으로 육백여년 긴 세월 동안 무사태평의 영예를 이루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하회부락으로 만들어 주셨다. 백이십호의 전 부락인은 무진생성황신령님께 고개 숙여 빕니다. 천만년 내내 동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연년풍년이 들게 하여 주시고 객지에 나가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백만장자가 되게 해주시며 부락에 사는 남녀노소는 모두 건강하며 재수대통하게 해 주시며 120여 부락인은 상부상조 정신으로 융화단결 하여 이리 번창하게 해주시며 주기적으로 유행 질병을 [사전](/topic/사전)에 방지해 주시고 부락인의 생명수인 수도업무를 만년이 가도록 청결하게 하여 오염이 없게 해 주시옵소서. 끝으로 보잘것없는 제수이오나 정성들여 올리는 제수이오니 만반진수로 생각하시고 반가이 흠향하시기를 축원하옵니다. 상향. 동제 축문은 서낭신과 마을 사람들의 유기적 관계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나라와 마을, 가정 차원의 문제들이 두루 제기되고 순서대로 마[무리](/topic/무리)되고 있다. 1983년 동제 축문과2008년 동제 축문을 잘 살펴보면 당시 사회적 상황과 주민들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축문에는 동제를 주관하는 산주에 관한 부분과 전통마을의 주민으로서 느끼는 자부심, 농촌마을로서 겪는 인구 유출 등 사회적 상황이 드러난다. 그리고 주민들은 서낭신에게 풍요다산(豊饒多産), 제액초복(除厄招福),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소망하고 있다. 두 자료는 모두 현장에서 조사된 것으로 주민이 직접 작성하고 순수 한글로 쓰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회마을에서는 모두 세 곳의 당(堂)을 모신다. 화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서낭당, 마을 동쪽 당말개에 자리 잡은 국신당, 마을 한가운데의 삼신당이 바로 하회사람들이 섬기는 당이다. 원래 하회에는 다섯 곳의 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옛날에는 서낭당, 국신당, 삼신당을 비롯해 큰 고개와 작은 고개의 성황당을 함께 섬겼다고 한다. 하지만 도로를 넓히면서 큰 고개의 성황당이 훼손되고 작은 고개로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면서 큰 고개와 작은 고개의 성황당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topic/지게) 되었다. 정월대보름날 새벽 6시가 되면 주민들이 마을 어귀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주민들은 서낭당으로 올라간다. 서낭당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해 둔다.얼마 뒤에 산주와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원이 제물을 지고 올라온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직접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놀았기 때문에 보존회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별신굿이 사라지고 탈놀이가 복원되면서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라는 것이 생겼다. 동제에 참여하는 주민이 줄게 되면서 보존회원들이 당제에도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존회원이 짊어지고 온 제물을 차리는 동안에도 주민들이 한두 명씩 모여든다. 제물로는 백설기, 흰메, 세 가지 채소, 탕국, 익히지 않은 어물, 과일을 올린다. 제물이 모두 준비되면 산주가 당 안으로 들어가서 기름 종지에 불을 밝히고 향을 사른 다음 [제관](/topic/제관) 모두 절을 올린다. 그런 다음 산주가 술을 올리고 절을 하고 나서 축문(祝文)을 읽는다.축문을 다 읽으면 모두 절을 하고 산주가 마을을 대표해서 소지를 올린다. 보통 소지가 타면서 하늘 위로 솟아오르면 좋다고 여긴다. 산주가 소지를 올린 뒤에 개인적으로 당안으로 들어가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리면 서낭당제가 일단 마무리된다. 제를 마친 제관들은 모두 모여 [음복](/topic/음복)(飮福)한다. 음복은 제사를 마치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제수나 제주를 먹는 것을 말한다. 제사 음식을 먹으면 복을 얻는다고 여긴다. 제관들이 음복을 마치기 전에 산주는 서둘러 국신당으로 간다. 산주는 국신당과 삼신당제를 주관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때 산주와 함께 제관이 하나둘 따라나선다. 산주를 따라간 제관들은 [명주](/topic/명주)실을 감은 명태포를 제단에 올리고 제를 지낸다. 향을 사르고 절을 한 다음 술을 올리고 다시 절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 서낭당제처럼 축문을 읽거나 소지를 올리지 않는다. 국신당제가 끝삼신당으로 향한다. 삼신당제는 국신당제와 같은 제물을 차리고 절차도 같다. 삼신당제를 마치면 산주와 제관의 제의가 모두 끝난다. 동제(당제)가 모두 끝나면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인다. 젊은 부녀자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나이 많은 남자 어르신들이 방에 모여 동회(洞會)를 연다.동회에서는 지난해 마을에서 있은 일을 보고하고 올해 있을 대소사를 의논한다. 이날은 남녀노소 모두 모여 음식을 먹고 즐겁게 논다. 하회에서 이루어지는 정월대보름날의 동제는 네 차례의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먼저 1960년대부터 사월초파일의 동제가 없어지면서 공동체 제의의 축소가 이루어졌다. 동제에소요되는 비용 지원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전까지 풍산 류씨 [문중](/topic/문중)에서 주로 내던 동제의 비용을 1970년대부터는 마을공동체 전체가 갹출해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는 아예 동민이 갹출하지 않고 마을기금으로 비용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 변화는 풍산 류씨들의 참여이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없어지고 마을공동체의 성원으로서다 함께 공동체를 위한 제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변화는 탈놀이보존회 회원들의 참여이다. 탈놀이보존회 회원들은 동제 비용을 위해 부조를 하였고, 하회마을 사람들이 전승하지 못한 탈놀이를 전승함으로써 하회별신굿의 전통 기반에 편입하였다. 변화 과정에서 탈놀이보존회 회원들은 초기에 아주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또한 외지인들에 대한 배타가 심한 고립된 마을이다 보니 하회 사람들과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내의 동신에 대한 신앙심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이것의 전승을 돕는 탈놀이보존회의 참여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마을 대표 10여 명과탈놀이보존회 회원 10여 명이 참여하여 동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1970년대까지 다른 성씨들만이 지내던 동제에 1980년대부터는 마을의 이장과 하회마을보존회 대표 등이 참여하게 되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탈춤](/topic/탈춤)보존회 회원들도 동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당시의 사회ㆍ문화적 상황과 맥을 함께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양반 문화나 유교적 문화 형태가 구시대의 것으로 인식되는 것과 동시에 국가정체성 또는 지역 정체성의 중요한 기제로 민속문화가 주목받게 되면서 하회의 류씨들도 더욱 적극적인 전통문화 전승의 주체로 나서게 된 것이다. | 참고문헌 | 씨족부락의 구조연구 (김택규, 일조각, 1979) [하회[마을](/topic/마을)](/topic/하회마을)조사보고서 (경상북도, 1979) 안동하회별신굿 (성병희, 경북예악지, 1989) [하회탈](/topic/하회탈)놀이의 의미변화 (류정아,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민속마을 하회여행 (임재해, 밀알, 1994) 영남 지방의 동제와 탈놀이 (박진태, 태학사, 1996) 하회탈춤 전통의 재창조와 안동문화의 이미지 변화 (조정현, 비교민속학 29, 비교민속학회, 2005) 마을공동체신앙과 생태민속-하회별신굿의 생태민속학적해석 (조정현, 비교민속학 41, 비교민속학회, 2010) | 내용 | 하회동의 [서낭신](/topic/서낭신)은 여서낭신이며 무진생서낭[戊辰生城隍]님으로 불린다. 서낭제의 평상제는 동제라고 부르지만 3년이나 5년, 10년마다 조건이 갖추어지고, 신탁(神託)이 내리면 지내게 되는 별신굿이 있다. 이는 동제와 별신굿의 이중 구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별신굿은 매년 지내는 동제와 맞물리면서 몇 년 간격으로 이루어진다. 서낭신의 친정은 월애(풍천면 임금동)이며, 외가는 갈밭(풍천면 갈전동)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노인 이창희에 따르면 별신굿은 민산주(閔山主) 때에는 지내지 않았고, 다음 대인 김산주(金山主) 때에는 갑자년(甲子年, 1924)에 지냈으며, 박산주(朴山主) 때에는 신(神)의 회갑해인 무진년(戊辰年, 1928) 에 지냈고, 현재의 김돌이(金乭伊) 산주(山主)는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별신굿은 무진년에 마지막으로 지내고 중단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회동의 별신굿은 기능으로 보아 [마을](/topic/마을)굿으로서의 서낭신에 대한 대제이며, 별신굿놀이는 오신행사(娛神行事)로서 별신굿의 부분에 속한다. 하회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서낭당](/topic/서낭당), 국신당, 삼신당에 동제(당제)를 지낸다. 서낭당제를 지낼 때 산주가 서낭신에게 고하는 글을 읽는다. 이 제문에는 [하회마을](/topic/하회마을)에 터를 잡은 내력, 현재 마을의 상황, 서낭신에게 바라는 내용이 두루 담겨 있다. 유세차 갑자 정월 병인삭 십오일 경진 하회 동민 일동은 성심으로 동심합역하야 근구 주과 포어하야 벽대 경고우 무진생 성황님 전하오니 복원 성황님은 불수 지찬이라도 만반진수 생각하시고 반가이 [흠향](/topic/흠향)하시옵기 엎드려 천만 축원하옵니다. 복원 성황님께서는 오랫동안 저희들이 성황님의 하늘 같은 덕택을 입사와 오늘까지 무사 태평하옵게 지내오니 하해같아온 은혜를 어찌 만분지 일이라도 갚사오리까만은 성황님 하늘 같은 은덕으로 금년에 새로 만만복록을 입사옵기 바라옵고 오늘날 저희들이 소소한 정성을 드리오니 복원 성황님은 아무쪼록 남북이 통일되며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돌아와서 여러 사람들이 안락 태평하게 하시옵기 천만 복출하옵고 더구나 우리 하회일동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한 사람이라도 치폐없이 무사 태평하게 하여 주시옵기 천만 복축 복망하옵니다. 금년 일 년 내에 어느 가정이라도 전부 한 가정같이 무사 태평하여 전 가정이 일 년 내에 만병이 없이 평안하게 하시옵고 재수대통하고 흉한 악운은 멀리 가고 좋은 복록과 즐거운 경사 돌아오게 하시옵고 집에 있을 때는 한 가정이 화락하고 출입하거든 만사 절로 잘 되어서 몸이 편하고 운수대통하게 하여 주시옵고 어려운 사람 부자 되게 하시옵고 자손 없는 사람 옥동자가 많이 나게 하여 주시옵고 멀리 나간 자손들 수이 무사 편안하게 돌아와서 부모형제 숙질간 즐거이 상봉하게 하여 주시옵고 천만 [가지](/topic/가지)가 모두 잘되어서 운수 불길하든 사람들도 만사가 절로 순하게 펴어서 잘되게 하여 주시옵고 농사 짓는 사람은 풍년되어 일 년에 천만 석씩 쌓아 놓게하여 주시고 상업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천만 금씩 생기도록 하여 주시고 국가공무에 힘쓴 사람 공중사업에 힘쓴 사람 개인 직업에 힘쓴 사람 모두가 일년 삼백육십 일에 병 없고 재수대통하여 만복이 절로 돌아와서 한시라도 근심걱정 없이 하여 주시옵기 천만 번 엎드려 받자옵고 억만 번 정성껏 비나이다. 복원 복축 성황님께서는 국태민안하고 시화세풍되며 우마육축이 번성하고 병든 사람이 절로 낫고 안 된 세상 멀리 가고 착한 사람 모여들고 악한 사람 착하게 되어 우리 하회일동 여러 천만 사람들이 금년 일 년 내에 만복이 절로 오고 천만 가지 근심걱정 봄눈 녹듯 없어져서 일 년 동안 여러 사람 태평화락하고 자손번창하고 부귀영화로내내 지내게 하여 주시옵기를 엎드려 바라옵고 대강원정 드리오니 밝으신 성황님은 굽어살피시고 서사 흠향하옵소서. 무자년 정월 보름날 부락 대표 김종흥. 찬과 술과 정결한 어가로 제물을 차려놓고 무진생서낭님 신령님께 고하나이다. 천하만물지중 유인이 최기라 하였고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만수무강 행복을 누리도록 천지신명에게 바라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라 할 수 있다. 조물주는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크게는 사회를 꾸리고 적게는 한 부락을 조성하여 집단적으로 터전을 만들어 주셨다. 우리 부락도 전서공이 터를 잡아 육백여년 동안을 훌륭하신 조상님의 얼을 계승해오고 있으며 부락의 안녕과 발전은 무진생성황님께서 수호감사 주신 덕택으로 육백여년 긴 세월 동안 무사태평의 영예를 이루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하회부락으로 만들어 주셨다. 백이십호의 전 부락인은 무진생성황신령님께 고개 숙여 빕니다. 천만년 내내 동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연년풍년이 들게 하여 주시고 객지에 나가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백만장자가 되게 해주시며 부락에 사는 남녀노소는 모두 건강하며 재수대통하게 해 주시며 120여 부락인은 상부상조 정신으로 융화단결 하여 이리 번창하게 해주시며 주기적으로 유행 질병을 [사전](/topic/사전)에 방지해 주시고 부락인의 생명수인 수도업무를 만년이 가도록 청결하게 하여 오염이 없게 해 주시옵소서. 끝으로 보잘것없는 제수이오나 정성들여 올리는 제수이오니 만반진수로 생각하시고 반가이 흠향하시기를 축원하옵니다. 상향. 동제 축문은 서낭신과 마을 사람들의 유기적 관계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나라와 마을, 가정 차원의 문제들이 두루 제기되고 순서대로 마[무리](/topic/무리)되고 있다. 1983년 동제 축문과2008년 동제 축문을 잘 살펴보면 당시 사회적 상황과 주민들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축문에는 동제를 주관하는 산주에 관한 부분과 전통마을의 주민으로서 느끼는 자부심, 농촌마을로서 겪는 인구 유출 등 사회적 상황이 드러난다. 그리고 주민들은 서낭신에게 풍요다산(豊饒多産), 제액초복(除厄招福),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소망하고 있다. 두 자료는 모두 현장에서 조사된 것으로 주민이 직접 작성하고 순수 한글로 쓰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회마을에서는 모두 세 곳의 당(堂)을 모신다. 화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서낭당, 마을 동쪽 당말개에 자리 잡은 국신당, 마을 한가운데의 삼신당이 바로 하회사람들이 섬기는 당이다. 원래 하회에는 다섯 곳의 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옛날에는 서낭당, 국신당, 삼신당을 비롯해 큰 고개와 작은 고개의 성황당을 함께 섬겼다고 한다. 하지만 도로를 넓히면서 큰 고개의 성황당이 훼손되고 작은 고개로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면서 큰 고개와 작은 고개의 성황당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topic/지게) 되었다. 정월대보름날 새벽 6시가 되면 주민들이 마을 어귀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주민들은 서낭당으로 올라간다. 서낭당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해 둔다.얼마 뒤에 산주와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원이 제물을 지고 올라온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직접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놀았기 때문에 보존회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별신굿이 사라지고 탈놀이가 복원되면서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라는 것이 생겼다. 동제에 참여하는 주민이 줄게 되면서 보존회원들이 당제에도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존회원이 짊어지고 온 제물을 차리는 동안에도 주민들이 한두 명씩 모여든다. 제물로는 백설기, 흰메, 세 가지 채소, 탕국, 익히지 않은 어물, 과일을 올린다. 제물이 모두 준비되면 산주가 당 안으로 들어가서 기름 종지에 불을 밝히고 향을 사른 다음 [제관](/topic/제관) 모두 절을 올린다. 그런 다음 산주가 술을 올리고 절을 하고 나서 축문(祝文)을 읽는다.축문을 다 읽으면 모두 절을 하고 산주가 마을을 대표해서 소지를 올린다. 보통 소지가 타면서 하늘 위로 솟아오르면 좋다고 여긴다. 산주가 소지를 올린 뒤에 개인적으로 당안으로 들어가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리면 서낭당제가 일단 마무리된다. 제를 마친 제관들은 모두 모여 [음복](/topic/음복)(飮福)한다. 음복은 제사를 마치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제수나 제주를 먹는 것을 말한다. 제사 음식을 먹으면 복을 얻는다고 여긴다. 제관들이 음복을 마치기 전에 산주는 서둘러 국신당으로 간다. 산주는 국신당과 삼신당제를 주관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때 산주와 함께 제관이 하나둘 따라나선다. 산주를 따라간 제관들은 [명주](/topic/명주)실을 감은 명태포를 제단에 올리고 제를 지낸다. 향을 사르고 절을 한 다음 술을 올리고 다시 절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 서낭당제처럼 축문을 읽거나 소지를 올리지 않는다. 국신당제가 끝삼신당으로 향한다. 삼신당제는 국신당제와 같은 제물을 차리고 절차도 같다. 삼신당제를 마치면 산주와 제관의 제의가 모두 끝난다. 동제(당제)가 모두 끝나면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인다. 젊은 부녀자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나이 많은 남자 어르신들이 방에 모여 동회(洞會)를 연다.동회에서는 지난해 마을에서 있은 일을 보고하고 올해 있을 대소사를 의논한다. 이날은 남녀노소 모두 모여 음식을 먹고 즐겁게 논다. 하회에서 이루어지는 정월대보름날의 동제는 네 차례의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먼저 1960년대부터 사월초파일의 동제가 없어지면서 공동체 제의의 축소가 이루어졌다. 동제에소요되는 비용 지원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전까지 풍산 류씨 [문중](/topic/문중)에서 주로 내던 동제의 비용을 1970년대부터는 마을공동체 전체가 갹출해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는 아예 동민이 갹출하지 않고 마을기금으로 비용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 변화는 풍산 류씨들의 참여이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없어지고 마을공동체의 성원으로서다 함께 공동체를 위한 제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변화는 탈놀이보존회 회원들의 참여이다. 탈놀이보존회 회원들은 동제 비용을 위해 부조를 하였고, 하회마을 사람들이 전승하지 못한 탈놀이를 전승함으로써 하회별신굿의 전통 기반에 편입하였다. 변화 과정에서 탈놀이보존회 회원들은 초기에 아주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또한 외지인들에 대한 배타가 심한 고립된 마을이다 보니 하회 사람들과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내의 동신에 대한 신앙심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이것의 전승을 돕는 탈놀이보존회의 참여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마을 대표 10여 명과탈놀이보존회 회원 10여 명이 참여하여 동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1970년대까지 다른 성씨들만이 지내던 동제에 1980년대부터는 마을의 이장과 하회마을보존회 대표 등이 참여하게 되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탈춤](/topic/탈춤)보존회 회원들도 동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당시의 사회ㆍ문화적 상황과 맥을 함께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양반 문화나 유교적 문화 형태가 구시대의 것으로 인식되는 것과 동시에 국가정체성 또는 지역 정체성의 중요한 기제로 민속문화가 주목받게 되면서 하회의 류씨들도 더욱 적극적인 전통문화 전승의 주체로 나서게 된 것이다. | 참고문헌 | 씨족부락의 구조연구 (김택규, 일조각, 1979) [하회[마을](/topic/마을)](/topic/하회마을)조사보고서 (경상북도, 1979) 안동하회별신굿 (성병희, 경북예악지, 1989) [하회탈](/topic/하회탈)놀이의 의미변화 (류정아,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민속마을 하회여행 (임재해, 밀알, 1994) 영남 지방의 동제와 탈놀이 (박진태, 태학사, 1996) 하회탈춤 전통의 재창조와 안동문화의 이미지 변화 (조정현, 비교민속학 29, 비교민속학회, 2005) 마을공동체신앙과 생태민속-하회별신굿의 생태민속학적해석 (조정현, 비교민속학 41, 비교민속학회, 2010) | 역사 | [하회[마을](/topic/마을)](/topic/하회마을)은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으로 행세해 왔다. 이 향언(鄕諺)은 고려시대의 절 터 및 즐비하게 밀집한 [기와집](/topic/기와집)들과 상응하여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허씨가 정주하고, 그 뒤 안씨와 조선시대 초기에 풍산 류씨(豊山 柳氏)의 동성(同姓) 마을이 이뤄졌음을 알려준다. 류씨는 원래 인근 지역 풍산에 대대로 살아 오던 호장(戶長) 집안이었으며, 고려 말엽에 하회로 이주하여 안씨와 인척 관계를 맺고(안씨가류씨의 외손이라고 한다) 안씨족이 쇠미해진 틈을 이용하여 지배세력으로 성장해 왔다고 한다. 하회마을은 낙동강 물줄기가 부용대의 높은 절벽과 한없이 넓은 백사장을 끼면서 마을의 동북, 남을 돌아 흐르는 [[산태](/topic/산태)극수태극](/topic/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절경 속에 물에 뜬 연꽃처럼[蓮花浮水形] 자리한 ‘길 끝에 고립된’ 마을이다. 길 끝의 마을이자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터였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큰 변란 없이 전통적인 문화를 잘 보존해 올 수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입암(立巖) 류중영(柳仲?, 1515~1573) 때에 벼슬길이 터져 관찰사에 이르렀고, 도학자로서 선비의 길을 걸은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과 임란 때의 영의정 서애(西厓) [류성룡](/topic/류성룡)(柳成龍,1542~1607)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고 17세기쯤에 동성 마을을 형성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의 성황신제는 평시에는 ‘동제(당제)’ 또는 ‘제사’라고 부르다가 5년 또는 10년마다 행하는 큰 대제(大祭)에서는 별신제라고 부른다. 신격은 ‘무진생성황님’이며, 17세의 처녀라고 한다. 국[사당](/topic/사당)과 본당, 삼신당 등 3당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성황신제는 전형적인 농촌형 동제이면서 유교적 형식을 띠고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는 경북지방의 전형적인 유교식 동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역사 | [하회[마을](/topic/마을)](/topic/하회마을)은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으로 행세해 왔다. 이 향언(鄕諺)은 고려시대의 절 터 및 즐비하게 밀집한 [기와집](/topic/기와집)들과 상응하여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허씨가 정주하고, 그 뒤 안씨와 조선시대 초기에 풍산 류씨(豊山 柳氏)의 동성(同姓) 마을이 이뤄졌음을 알려준다. 류씨는 원래 인근 지역 풍산에 대대로 살아 오던 호장(戶長) 집안이었으며, 고려 말엽에 하회로 이주하여 안씨와 인척 관계를 맺고(안씨가류씨의 외손이라고 한다) 안씨족이 쇠미해진 틈을 이용하여 지배세력으로 성장해 왔다고 한다. 하회마을은 낙동강 물줄기가 부용대의 높은 절벽과 한없이 넓은 백사장을 끼면서 마을의 동북, 남을 돌아 흐르는 [[산태](/topic/산태)극수태극](/topic/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절경 속에 물에 뜬 연꽃처럼[蓮花浮水形] 자리한 ‘길 끝에 고립된’ 마을이다. 길 끝의 마을이자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터였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큰 변란 없이 전통적인 문화를 잘 보존해 올 수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입암(立巖) 류중영(柳仲?, 1515~1573) 때에 벼슬길이 터져 관찰사에 이르렀고, 도학자로서 선비의 길을 걸은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과 임란 때의 영의정 서애(西厓) [류성룡](/topic/류성룡)(柳成龍,1542~1607)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고 17세기쯤에 동성 마을을 형성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의 성황신제는 평시에는 ‘동제(당제)’ 또는 ‘제사’라고 부르다가 5년 또는 10년마다 행하는 큰 대제(大祭)에서는 별신제라고 부른다. 신격은 ‘무진생성황님’이며, 17세의 처녀라고 한다. 국[사당](/topic/사당)과 본당, 삼신당 등 3당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성황신제는 전형적인 농촌형 동제이면서 유교적 형식을 띠고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는 경북지방의 전형적인 유교식 동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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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금화사 | 韓國の民間信仰-資料篇 | 장주근 | 1973 | 신구문화사 | 제주도무속자료사전 | 현용준 | 1980 | 동문선 | 조선무속의 연구 상 | 赤松智城ㆍ秋葉隆, 심우성 역 | 1991 | 민속원 | 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 | 진성기 | 1991 | 칠머리당굿보존회 | 제주도무속신화-열두본풀이자료집 | 문무병 | 1998 | 제주도ㆍ제주전통문화연구소 | 제주도 큰굿자료 | 문무병 | 2001 | 제주문화 | 풍속무음 | 제주문화 편집부 | 2002 |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 동복 정병춘댁 시왕맞이 | 강정식 외 | 2008 |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 이용옥 심방 본풀이 | 제주대 한국학협동과정 편 |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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