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서울 자하문 밖 종로구 부암동에서 전승되는 [마을](/topic/마을) 제사. 인왕산 산신을 제사 대상으로 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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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오문선 |
정의 | 서울 자하문 밖 종로구 부암동에서 전승되는 [마을](/topic/마을) 제사. 인왕산 산신을 제사 대상으로 삼고 있다. | 정의 | 서울 자하문 밖 종로구 부암동에서 전승되는 [마을](/topic/마을) 제사. 인왕산 산신을 제사 대상으로 삼고 있다. | 내용 | 개발되기 이전 부암동(付岩洞)은 무계동(武溪洞), 백석동(白石洞), 부암동(付岩洞), 삼계동(三溪洞) 등의 자연[마을](/topic/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일대는 능금 외에도 앵두, 살구, [자두](/topic/자두), [복숭아](/topic/복숭아)가 많이 났다. 부암(付岩)이란 이름은 붙임바위가 있던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부암동은 붙임바위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부암동의 마을 제사는 천신제(天神祭)와 산신제(山神祭)로 구성되어 이중적인 구조를 보인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천신제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편이며, 제의명칭을산신제로만 부르고 있다. 부암동산제당은 부암동 353[번지](/topic/번지)에 있으며 인왕산에 속해 있다. 부암동 주민센터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현진건 집터와 윤응렬 집터를 지나 150m 정도 거리에 자리한다. 산제당은 대지 200㎡에 제단과 제기보관소 및 향나무로 된 신목(神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제당 입구 왼쪽에 있는 [계단](/topic/계단)을 올라가면 네모난 큰 돌을 축대식으로 쌓고 그 위에 시멘트로 발라 조성한 제단이 있다. 상단이 천제단(天祭壇), 하단이 산제단(山祭壇)이다. 상단인 천제단의 높이가 더 낮다. 제단 아래쪽의 제기보관소 안에는 산신제를 지내기 위한 제기와 산제당의 유래를 적은 [현판](/topic/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제기보관소 뒤에 [굴뚝](/topic/굴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안에서 조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기보관소 오른쪽에는 [우물](/topic/우물)이 있었으나 이를 메우고 조리를 위한 화덕을 만들었다. 2005년에는 종로구의 예산으로 산제당을 보수하였다. 벽체와[지붕](/topic/지붕) 등 노후한 시설을 전면적으로 교체하였다. 부암동산신제의 제일은 음력 팔월 초하룻날이다. 서울지역은 음력 팔월 초하룻날을 제일로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부암동산신제를 비롯해 인근 지역의 홍지동 산신제, 백사실 산신제, 삼지동산신제 등은 제일을 음력 팔월 초하룻날로 삼고 있다. 제일을 음력 팔월 초하룻날로 삼는 것은 부암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 산신제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산제참고서』에 따르면 부암동산신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주(祭主)를 비롯하여 소임(所任), 영위(領位) 등 준비위원인 임원을 선정한다. 제주는 여러 임원 또는 임원 외의고령자 가운데 다섯 명을 [제관](/topic/제관)으로 뽑아 제의를 주관하고 소지를 올리는 역할을 했다. 10명 이내로 뽑힌 소임들은 제사를 계획하고 제비를 추렴하여 제물을 준비하는 역할을맡았다. 영위는 소임 가운데에서 선정되며, 임원을 대표한다. 현재는 마을토박이 가운데 50대 연령층을 중심으로 한 운영위원들이 제사를 준비하고 있다. 2003년까지 마을의토박이 가운데 70대 이상의 남자들이 주관해 왔으나 2004년부터는 50대의 토박이들로 세대교체가 되었다. 『산제참고서』에는 제비의 추렴에 관한 내용도 등장한다. 이 내용에 따르면 논밭 매매나 [가축](/topic/가축)의 매매 시에도 일정한 [수수](/topic/수수)료를 부과하였다가 제비로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제비를 동네의 유지 및 일반 주민들이 얼마씩 내어 충당하고 있다. 『산제참고서』에 소개된 부암동산신제의 절차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제사의 절차와 조금 차이가 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천제단에 불을 밝힌 뒤 동서남북과 중앙 순으로 [오방신장기](/topic/오방신장기)를 [가지](/topic/가지)고 오방의 [장군](/topic/장군)을 초청한 다음 제주 올리기, [축문](/topic/축문) 읽기, 유식(侑食) 세번, 절 네 번, 술 세 번씩 올리기, 숭늉 올리기 등으로 진행되었다. 산제단에 지내는 제사도 오방기를 이용해 오방의 장군을 초청하는 절차를 제외하고 천제단의 제사 절차와 동일하다. 이와 관련된 부분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一 천신제를 먼저 지내되 제단 좌우에 촛불을 밝히고 동서남북중앙의 순으로 기(旗) 하나씩 그 방향으로 두르며 장군을 초청함(예동편으로 청색기를 흔들면서 청제장군 세 번씩 초청함). 다음에 제주를 부어 놓고 제축문을 읽음. 다음에 수저를 세 번씩 구르며 적당히 제물에 옮기어 놓고 사배(四拜)를 하면서 삼배주(三拜酒)를 올림. 숭늉을 올리는것은 일반과 같음. 一 산신제를 지낼 때 다른 것은 삼배하는 것뿐이다. 천제단과 산제단 제사가 끝나면 제관들이 집안의 재수를 빌면서 소지를 올렸다. 이후 물 섞인 그릇에 모든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넣고 고[수레](/topic/수레)를 하면서 축원하는 것으로 모든제사를 마쳤다. 현재 부암동의 마을제사는 강신(降神)-[초헌](/topic/초헌)(初獻)-[독축](/topic/독축)(讀祝)-[아헌](/topic/아헌)(亞獻)-[종헌](/topic/종헌)(終獻)의 순으로 진행되는 천신제를 먼저 지내고, 동일한 절차로 산신제를 지낸다. 1960년대 이전과 비교하면 절차의 일부분에 변화가 있다. 오방기로 오방신을 강림시키는 절차가 사라진 것이다. 『산제참고서』의 [진설도](/topic/진설도)(陳設圖)에 따르면 천제단의 제물은 백설기, 대구, [새옹](/topic/새옹)메, 전병, 쇠머리, 사족(四足), 식혜, 포, 소적, 육탕, 채소, 튀각, 빈[사과](/topic/사과), 산자, [대추](/topic/대추), 밤,배 등이다. 산제단의 제물은 천제단과 같으나 쇠머리 대신 돼지머리와 양지머리를 올리고, 육탕 대신에 소탕·두부 등을 올렸다. 그러나 현재 산신제의 제물 차림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부암동의 개발이 진행되면서 외지인이 늘어나자 멀리 동[대문](/topic/대문) 밖이나 경기도 의정부, 고양의 우시장에까지 가서 소를정성스럽게 골라 제물로 올리기가 버거워졌다. 해마다 제물로 마련한 소 한 마리와 돼지 두 마리는 머리와 다리를 올리는 것으로 간소화되었고, 제물을 집집마다 골고루 나눠주는 풍습도 지금은 끊겼다. 한편 부암동산신제에 여자는 참여하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은 부암동이 자리한 인왕산이 남신(男神)이기 때문에 여자는 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 부암동산신제에는 제주, 소임,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시의원과 동 주민센터 관계자 등도 참여하고 있다. | 참고문헌 | 인왕산 산신에게 지내는 부암동 [마을](/topic/마을)제사 (기록영화, 서울역사박물관, 2005) | 내용 | 개발되기 이전 부암동(付岩洞)은 무계동(武溪洞), 백석동(白石洞), 부암동(付岩洞), 삼계동(三溪洞) 등의 자연[마을](/topic/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일대는 능금 외에도 앵두, 살구, [자두](/topic/자두), [복숭아](/topic/복숭아)가 많이 났다. 부암(付岩)이란 이름은 붙임바위가 있던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부암동은 붙임바위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부암동의 마을 제사는 천신제(天神祭)와 산신제(山神祭)로 구성되어 이중적인 구조를 보인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천신제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편이며, 제의명칭을산신제로만 부르고 있다. 부암동산제당은 부암동 353[번지](/topic/번지)에 있으며 인왕산에 속해 있다. 부암동 주민센터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현진건 집터와 윤응렬 집터를 지나 150m 정도 거리에 자리한다. 산제당은 대지 200㎡에 제단과 제기보관소 및 향나무로 된 신목(神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제당 입구 왼쪽에 있는 [계단](/topic/계단)을 올라가면 네모난 큰 돌을 축대식으로 쌓고 그 위에 시멘트로 발라 조성한 제단이 있다. 상단이 천제단(天祭壇), 하단이 산제단(山祭壇)이다. 상단인 천제단의 높이가 더 낮다. 제단 아래쪽의 제기보관소 안에는 산신제를 지내기 위한 제기와 산제당의 유래를 적은 [현판](/topic/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제기보관소 뒤에 [굴뚝](/topic/굴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안에서 조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기보관소 오른쪽에는 [우물](/topic/우물)이 있었으나 이를 메우고 조리를 위한 화덕을 만들었다. 2005년에는 종로구의 예산으로 산제당을 보수하였다. 벽체와[지붕](/topic/지붕) 등 노후한 시설을 전면적으로 교체하였다. 부암동산신제의 제일은 음력 팔월 초하룻날이다. 서울지역은 음력 팔월 초하룻날을 제일로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부암동산신제를 비롯해 인근 지역의 홍지동 산신제, 백사실 산신제, 삼지동산신제 등은 제일을 음력 팔월 초하룻날로 삼고 있다. 제일을 음력 팔월 초하룻날로 삼는 것은 부암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 산신제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산제참고서』에 따르면 부암동산신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주(祭主)를 비롯하여 소임(所任), 영위(領位) 등 준비위원인 임원을 선정한다. 제주는 여러 임원 또는 임원 외의고령자 가운데 다섯 명을 [제관](/topic/제관)으로 뽑아 제의를 주관하고 소지를 올리는 역할을 했다. 10명 이내로 뽑힌 소임들은 제사를 계획하고 제비를 추렴하여 제물을 준비하는 역할을맡았다. 영위는 소임 가운데에서 선정되며, 임원을 대표한다. 현재는 마을토박이 가운데 50대 연령층을 중심으로 한 운영위원들이 제사를 준비하고 있다. 2003년까지 마을의토박이 가운데 70대 이상의 남자들이 주관해 왔으나 2004년부터는 50대의 토박이들로 세대교체가 되었다. 『산제참고서』에는 제비의 추렴에 관한 내용도 등장한다. 이 내용에 따르면 논밭 매매나 [가축](/topic/가축)의 매매 시에도 일정한 [수수](/topic/수수)료를 부과하였다가 제비로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제비를 동네의 유지 및 일반 주민들이 얼마씩 내어 충당하고 있다. 『산제참고서』에 소개된 부암동산신제의 절차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제사의 절차와 조금 차이가 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천제단에 불을 밝힌 뒤 동서남북과 중앙 순으로 [오방신장기](/topic/오방신장기)를 [가지](/topic/가지)고 오방의 [장군](/topic/장군)을 초청한 다음 제주 올리기, [축문](/topic/축문) 읽기, 유식(侑食) 세번, 절 네 번, 술 세 번씩 올리기, 숭늉 올리기 등으로 진행되었다. 산제단에 지내는 제사도 오방기를 이용해 오방의 장군을 초청하는 절차를 제외하고 천제단의 제사 절차와 동일하다. 이와 관련된 부분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一 천신제를 먼저 지내되 제단 좌우에 촛불을 밝히고 동서남북중앙의 순으로 기(旗) 하나씩 그 방향으로 두르며 장군을 초청함(예동편으로 청색기를 흔들면서 청제장군 세 번씩 초청함). 다음에 제주를 부어 놓고 제축문을 읽음. 다음에 수저를 세 번씩 구르며 적당히 제물에 옮기어 놓고 사배(四拜)를 하면서 삼배주(三拜酒)를 올림. 숭늉을 올리는것은 일반과 같음. 一 산신제를 지낼 때 다른 것은 삼배하는 것뿐이다. 천제단과 산제단 제사가 끝나면 제관들이 집안의 재수를 빌면서 소지를 올렸다. 이후 물 섞인 그릇에 모든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넣고 고[수레](/topic/수레)를 하면서 축원하는 것으로 모든제사를 마쳤다. 현재 부암동의 마을제사는 강신(降神)-[초헌](/topic/초헌)(初獻)-[독축](/topic/독축)(讀祝)-[아헌](/topic/아헌)(亞獻)-[종헌](/topic/종헌)(終獻)의 순으로 진행되는 천신제를 먼저 지내고, 동일한 절차로 산신제를 지낸다. 1960년대 이전과 비교하면 절차의 일부분에 변화가 있다. 오방기로 오방신을 강림시키는 절차가 사라진 것이다. 『산제참고서』의 [진설도](/topic/진설도)(陳設圖)에 따르면 천제단의 제물은 백설기, 대구, [새옹](/topic/새옹)메, 전병, 쇠머리, 사족(四足), 식혜, 포, 소적, 육탕, 채소, 튀각, 빈[사과](/topic/사과), 산자, [대추](/topic/대추), 밤,배 등이다. 산제단의 제물은 천제단과 같으나 쇠머리 대신 돼지머리와 양지머리를 올리고, 육탕 대신에 소탕·두부 등을 올렸다. 그러나 현재 산신제의 제물 차림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부암동의 개발이 진행되면서 외지인이 늘어나자 멀리 동[대문](/topic/대문) 밖이나 경기도 의정부, 고양의 우시장에까지 가서 소를정성스럽게 골라 제물로 올리기가 버거워졌다. 해마다 제물로 마련한 소 한 마리와 돼지 두 마리는 머리와 다리를 올리는 것으로 간소화되었고, 제물을 집집마다 골고루 나눠주는 풍습도 지금은 끊겼다. 한편 부암동산신제에 여자는 참여하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은 부암동이 자리한 인왕산이 남신(男神)이기 때문에 여자는 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 부암동산신제에는 제주, 소임,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시의원과 동 주민센터 관계자 등도 참여하고 있다. | 참고문헌 | 인왕산 산신에게 지내는 부암동 [마을](/topic/마을)제사 (기록영화, 서울역사박물관, 2005) | 역사 | 1980년에 작성된 필사본 『산제참고서(山祭參考書)』에 따르면 부암동의 산제당이 건립된 것은 1670년쯤이다.『 산제참고서』는 부암동 [마을](/topic/마을) 제사의 유래, 제비(祭費), [축문](/topic/축문),[제관](/topic/제관), 제사절차, [제물](/topic/제물)진설, 제당의 보수와 마을 사람들의 참여 등을 기록한 11쪽짜리 필사본으로, 부암동산신제의 연혁과 제사절차 및 제당 등에 대해 전하고 있다. 1977년에내린 큰 비로 인해 산제당의 오래된 제기보관소 건물이 붕괴되었으며, 1978년에 마을 주민들이 추렴하여 이를 다시 세웠다. 현재 산제당은 부암동 동장의 명의로 등기되어 있다. | 역사 | 1980년에 작성된 필사본 『산제참고서(山祭參考書)』에 따르면 부암동의 산제당이 건립된 것은 1670년쯤이다.『 산제참고서』는 부암동 [마을](/topic/마을) 제사의 유래, 제비(祭費), [축문](/topic/축문),[제관](/topic/제관), 제사절차, [제물](/topic/제물)진설, 제당의 보수와 마을 사람들의 참여 등을 기록한 11쪽짜리 필사본으로, 부암동산신제의 연혁과 제사절차 및 제당 등에 대해 전하고 있다. 1977년에내린 큰 비로 인해 산제당의 오래된 제기보관소 건물이 붕괴되었으며, 1978년에 마을 주민들이 추렴하여 이를 다시 세웠다. 현재 산제당은 부암동 동장의 명의로 등기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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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 큰무당 우옥주 유품 | 1995 | 한국무속학회 | 황해도굿에 쓰이는 종이 신화와 신구의 종류, 형식, 상징성 고찰 | 양종승 |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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