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매달기

한국무속신앙사전
악귀나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의 범접을 막고 재액과 질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당산이나 집의 [대문](/topic/대문)에 호랑이, 말, 소 등의 뼈를 걸어두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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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나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의 범접을 막고 재액과 질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당산이나 집의 [대문](/topic/대문)에 호랑이, 말, 소 등의 뼈를 걸어두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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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악귀나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의 범접을 막고 재액과 질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당산이나 집의 [대문](/topic/대문)에 호랑이, 말, 소 등의 뼈를 걸어두는 일.
정의악귀나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의 범접을 막고 재액과 질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당산이나 집의 [대문](/topic/대문)에 호랑이, 말, 소 등의 뼈를 걸어두는 일.
내용벽사를 위해 당산나무나 집의 [대문](/topic/대문)에다 새끼줄을 치고 뼈를 매달아 두기 때문에 ‘뼈’에다 ‘매달다’의 명사형인 ‘매달기’를 붙여 ‘뼈+매달기’라고 했고, 뼈를 걸어둔다고 해서 같은 원리로 ‘뼈+걸기’라고도 했다. 주로 신년 벽두나 동제를 지내고 나서 행한다. 대문에‘용(龍)’이나 ‘호(虎)’ 글자를 붙이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의 운조루(중요민속자료 제8호)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 대갓집이다. 이 큰 집의 대문에다 짐승의 뼈를 매단 것은 행여 집안으로 침범할지도 모르는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은 물론 재액, 병마, 도둑의 방지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나쁜 것들은 독해서 잘 물러[가지](/topic/가지) 않기 때문에 좀 더 겁을 주기 위해 소의 [코뚜레](/topic/코뚜레)까지 동원하기도 한다. 이는 물러가지 않으면 소처럼 코뚜레를 꿰어 끌고 다니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전남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의 경우 [마을](/topic/마을) 어귀에 서서 마을을 지키는 장승의 몸체에 소의 피를 뿌리고, 소의 튼튼한 이빨이 붙은 턱뼈를 장승의 목에 매달아 놓았다. 이것은 접근하는 나쁜 세력에게 위협을 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피를 보면 누구나 무섭고 불길하게 생각할 것이고, 소의 날카로운 이빨을 보고 물리면 큰일 치를 것이라는 겁을 먹기에 충분하다. 또 너도 잘못하여 잡히면 이처럼 피를 보게 되고 살을 발려 뼈다귀만 남아 길가에 서 있는 장승의 목에 매달리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니 다분히 위협적이고 겁을 줄 만한 것이다.

경남 사천시 [화전](/topic/화전)의 경우 동제를 마치면 말의 머리를 당산에 묻는다. 이것은 말이 도깨비 같은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힘이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민간속신에서 도깨비나 잡귀잡신들이 특히 말의 피, 머리, 뼈 등을 무서워하여 범접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데서 비롯된 처방인 것으로 보인다.
내용벽사를 위해 당산나무나 집의 [대문](/topic/대문)에다 새끼줄을 치고 뼈를 매달아 두기 때문에 ‘뼈’에다 ‘매달다’의 명사형인 ‘매달기’를 붙여 ‘뼈+매달기’라고 했고, 뼈를 걸어둔다고 해서 같은 원리로 ‘뼈+걸기’라고도 했다. 주로 신년 벽두나 동제를 지내고 나서 행한다. 대문에‘용(龍)’이나 ‘호(虎)’ 글자를 붙이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의 운조루(중요민속자료 제8호)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 대갓집이다. 이 큰 집의 대문에다 짐승의 뼈를 매단 것은 행여 집안으로 침범할지도 모르는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은 물론 재액, 병마, 도둑의 방지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나쁜 것들은 독해서 잘 물러[가지](/topic/가지) 않기 때문에 좀 더 겁을 주기 위해 소의 [코뚜레](/topic/코뚜레)까지 동원하기도 한다. 이는 물러가지 않으면 소처럼 코뚜레를 꿰어 끌고 다니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전남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의 경우 [마을](/topic/마을) 어귀에 서서 마을을 지키는 장승의 몸체에 소의 피를 뿌리고, 소의 튼튼한 이빨이 붙은 턱뼈를 장승의 목에 매달아 놓았다. 이것은 접근하는 나쁜 세력에게 위협을 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피를 보면 누구나 무섭고 불길하게 생각할 것이고, 소의 날카로운 이빨을 보고 물리면 큰일 치를 것이라는 겁을 먹기에 충분하다. 또 너도 잘못하여 잡히면 이처럼 피를 보게 되고 살을 발려 뼈다귀만 남아 길가에 서 있는 장승의 목에 매달리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니 다분히 위협적이고 겁을 줄 만한 것이다.

경남 사천시 [화전](/topic/화전)의 경우 동제를 마치면 말의 머리를 당산에 묻는다. 이것은 말이 도깨비 같은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힘이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민간속신에서 도깨비나 잡귀잡신들이 특히 말의 피, 머리, 뼈 등을 무서워하여 범접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데서 비롯된 처방인 것으로 보인다.
지역사례현재 뼈 매달기 민간신앙이 전래되고 있는 곳은 경남 남해 지역, 전남의 진도와 구례, 충청도의 일부 지역이다. 당산제를 지내고 쇠뼈를 당산나무에 매다는 곳은 남해 지역이집중적으로 많다. 상대적으로 논이 적어 쌀밥을 귀하게 여기는 이 지역에서 동제를 지내고 묻은 밥을 보호하려면 쇠뼈를 매달아 다른 세력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전남 구례군 운조루의 경우 [대문](/topic/대문)의 [처마](/topic/처마) 아래 중간 도리에 짐승의 뼈를 매달았다. 뼈를 두 곳으로 나누어 왼쪽에 넓적뼈 1개, 오른쪽에 2개를 매달았다. 오른쪽에는 소의 [코뚜레](/topic/코뚜레) 1개를 먼저 걸고 그 아래에다 끈으로 뼈를 묶어 매달아 놓았다. 이 집을 지은 선조 유이주(柳爾冑, 1726~1797)가 평북병마절도사로 부임할 때 만난 호랑이를 채찍으로 때려잡아 [호피](/topic/호피)는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호랑이 뼈 몇 개를 대문에 매달았다는 전설도 있다.

자고로 민간에서는 호랑이 뼈는 만병통치약으로 쓰이기도 하고 대문에 걸면 잡귀의 범접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탐내는 사람이 많아 도둑을 맞기도 했다. 운조루도 대문에 호랑이의 뼈를 달았다가 잃었다. 그러다가 잡귀와 도깨비를 쫓는 데 주력을 지녔다는 말의 뼈를 구해 매달았다가 지금은 그것도 여의치 않아 소의 뼈를 달아 놓았다.

전남 진도군 군내면 덕병[마을](/topic/마을)에 2기의 돌장승이 마을 어귀에 서 있고 그 장승들의 목에 쇠뼈가 매달려 있다. 이것도 혹시나 닥칠지도 모르는 재액을 [사전](/topic/사전)에 방지코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진도의 서북쪽에 있는 덕병마을은 육지로부터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하여 사람의 출입이 빈번하고 바람이나 조수도 이쪽으로 치밀려오기 때문에나쁜 기운이 쉽게 범접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마을 서북쪽 당막개 바닷가 쪽에 있는 ‘진살등(鎭殺嶝)’이란 야트막한 둔덕(지금은 정지작업으로 거의 평지가 되었음)에언제인지 모르지만 한 쌍의 돌장승을 세웠다고 한다.‘진살등’은 범접한 나쁜 살기가 있으면 이곳 언덕에서 진압하여 박살낸다는 의미다. 남장승에는 대[장군](/topic/장군), 여장승에는 진살등이라 새겨 놓았다.

역사가 오래된 이 마을은 2010년 현재 100가구의 200명 남짓 되는 주민들이 농사와 어업을 [생업](/topic/생업)으로 서로 도우며 살고 있다. 오래전부터 마을의 안녕을 위해 진살등에 한 쌍의돌장승을 세워 놓고 해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이면 동제당에 제사를 지낸다. 마을 사람들은 저녁때 장승 앞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풍물에 취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예전에는 소를잡아 동제와 장승제를 성대하게 지냈다. 요새는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쇠머리는 올린다. 이곳에서 소를 잡아 장승제사를 지낼 때에는 소의 피를 장승의 몸에 뿌리고 소의 크고 우람한 아래턱뼈를 왼새끼줄로 묶어 장승의 목에 매달아 둔다. 소의 피를 뿌리는 것은 도깨비나 짐승의 접근을 막고자 하는 의도이고, 이빨이 달린 턱뼈를 매달아 두는 것은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이나 나쁜 재액의 근접을 막으려는 의미에서이다. 장승제를 지내고 나서는 장승 앞에 짚불을 지펴서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이 불을 타넘는다. 이를 ‘불넘기’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한 해의 액운을 쫓게 된다고 한다.

이 마을의 돌장승은 역사가 오래되어 고색창연하고, 생김새가 좋아서 예술적으로 뛰어난 조각으로 여겼다. 1988년 남도문화제 최우수상 수상으로 마을과 함께 석장승도 유명해졌다가 1989년에 잃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게 밴 이 장승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찾지 못했다. 지금의 장승은 199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진도 덕병마을의 바로 이웃마을인 세등리에도 쇠뼈를 매단 짐대가 있다. 이곳에는 장승은 없고 짐대만 서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밤에 [미륵바위](/topic/미륵바위)를 모신 마을의 제당에 가서 일명 별신제라 부르는 동제를 지내고, 다음에 [짐대제](/topic/짐대제)를 지낸다. 특이한 것은 미리 뽑힌 [제관](/topic/제관)들은 금기를 지키기 위해 열사흗날에 집에서 나와 동제당 근방에 짚으로 가설한 ‘마람’이란 거처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제사 준비는 이장이 한다. 제물에는 [주과포](/topic/주과포)혜와 쇠머리를 반드시 준비한다. 이곳에서는 짐대제를 거리에서 지낸다고 하여 [거리제](/topic/거리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짐대 앞에 제물을 진설하기에 앞서 짐대를 내려 짐대의 윗부분에 [한지](/topic/한지)를 묶고, 그 아래에 소의 턱뼈를 매달며, 짐대의 아랫부분에도 한지를 묶어 둔다. 그리고 짐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 서 있는 당산나무에 새끼줄로 고정시킨다. 그러고 나서 짐대에 제사를 지낸다. 이 마을에서는 과거 [새마을운동](/topic/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의 3년 동안 말고는 제사가 중단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마을에서 발생하는 불상사(제사를 지내지 않는 동안 11명이 죽음)를 없애고 풍년이 들어잘살기를 바라는 뜻에서라고 한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대지포마을에서는 동제를 지내고 당산나무에 큼직한 소의 넓적다리뼈를 매단다. 대지포는 물건리에서 미조리로 가는 국도의 중간 지점의 바닷가에30여 가구가 있는 포구 마을이다. 도로에서 해안가로 약 40m 거리에 마을이 있고, 그 중간에 당산이 있다. 수령 약 300년의 느티나무 당산목과 그 아래 큰 [밥무덤](/topic/밥무덤)이 만들어져있다. 반원형을 이루는 당산은 크기가 직경이 약 12m이다. 비교적 넓은 편인 당산의 왼쪽 부분에 당산목이 서 있고, 둘레에는 야트막한 [돌담](/topic/돌담)이 있다. 음력 10월 15일에 제수를 많이 마련하여 당산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낸 뒤 밥무덤에 메를 묻고 나서 소의 넓적다리뼈 두 개를 당산나무에 매단다. 쇠뼈를 매다는 것은 잡귀잡신의 범접을 막고, 마을에재난이 없고 고기가 많이 잡히기를바라는 뜻에서 행하는 주술적 행위이다.

경남 남해에서는 이와 같이 동제를 지내고 쇠뼈를 매다는 지역이 더러 있다. 남해군 삼동면 봉화리 내산, 상주면 금포, 상주, 남해읍 서변리 등지이다. 쇠뼈를 매다는 대신 동제를 지낸 뒤 제단 앞에서 쇠뼈를 불에 태우는 곳도 있다. 남해군 서면 노구리 노구마을이 그곳이다. 이는 뼈를 태우는 고약한 냄새를 맡고 악귀나 잡귀잡신이 멀리 달아나라는 이유에서이다. 쇠뼈는 아니지만 닭을 한 마리 잡아 털을 뽑아서 나무에다 매달아 두는 마을이 있다.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수곡마을이다. 동제를 지내고 나서 이렇게 하는데에는 잡귀잡신이나 역신이 이 마을에 함부로 침입하면 이 닭처럼 털이 뽑혀 죽는다는 위협의 뜻이 숨어 있다. 요새는 닭 매달기를 하지 않는다.

대전시 중구 금동에도 거리제를 마치고 당산나무에 소의 턱뼈를 매달아 놓는다. 쇠머리의 절반은 산제당에 바치고, 나머지 반은 턱뼈를 발라 당산나무에 줄을 쳐서 매달아 둔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서는 마을 어귀 양쪽에 목간을 세우고 그 사이를 [금줄](/topic/금줄)로 연결시켜 짐승의 뼈를 매단다. 이 뼈가 어떤 짐승의 것인지 구체적으로 적시되지 않았지만 쇠뼈일 가능성이 높다.

짐승의 뼈를 매다는 대신 그 뼈를 땅에 묻는 곳이 있다. 경남 사천시 사남면 [화전](/topic/화전)리 화전마을에서는 마을의 액운을 없애고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말의 머리를 당산 근방에 [매장](/topic/매장)했다는데, 지금은 하지 않는다. 말의 머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행위 자체가 끔찍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경남해안 및 도서지방의 민속문화 조사연구 (강용권, 동아대학교, 1972)
남해안의 민속신앙 (하종갑, 우석, 1984)
여보게 김서방 (최래옥, 미완, 1987)
벅수와 장승 (김두하, 집문당, 1990)
도깨비 날개를 달다 (김열규, 춘추사, 1991)
전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6)
지역사례현재 뼈 매달기 민간신앙이 전래되고 있는 곳은 경남 남해 지역, 전남의 진도와 구례, 충청도의 일부 지역이다. 당산제를 지내고 쇠뼈를 당산나무에 매다는 곳은 남해 지역이집중적으로 많다. 상대적으로 논이 적어 쌀밥을 귀하게 여기는 이 지역에서 동제를 지내고 묻은 밥을 보호하려면 쇠뼈를 매달아 다른 세력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전남 구례군 운조루의 경우 [대문](/topic/대문)의 [처마](/topic/처마) 아래 중간 도리에 짐승의 뼈를 매달았다. 뼈를 두 곳으로 나누어 왼쪽에 넓적뼈 1개, 오른쪽에 2개를 매달았다. 오른쪽에는 소의 [코뚜레](/topic/코뚜레) 1개를 먼저 걸고 그 아래에다 끈으로 뼈를 묶어 매달아 놓았다. 이 집을 지은 선조 유이주(柳爾冑, 1726~1797)가 평북병마절도사로 부임할 때 만난 호랑이를 채찍으로 때려잡아 [호피](/topic/호피)는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호랑이 뼈 몇 개를 대문에 매달았다는 전설도 있다.

자고로 민간에서는 호랑이 뼈는 만병통치약으로 쓰이기도 하고 대문에 걸면 잡귀의 범접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탐내는 사람이 많아 도둑을 맞기도 했다. 운조루도 대문에 호랑이의 뼈를 달았다가 잃었다. 그러다가 잡귀와 도깨비를 쫓는 데 주력을 지녔다는 말의 뼈를 구해 매달았다가 지금은 그것도 여의치 않아 소의 뼈를 달아 놓았다.

전남 진도군 군내면 덕병[마을](/topic/마을)에 2기의 돌장승이 마을 어귀에 서 있고 그 장승들의 목에 쇠뼈가 매달려 있다. 이것도 혹시나 닥칠지도 모르는 재액을 [사전](/topic/사전)에 방지코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진도의 서북쪽에 있는 덕병마을은 육지로부터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하여 사람의 출입이 빈번하고 바람이나 조수도 이쪽으로 치밀려오기 때문에나쁜 기운이 쉽게 범접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마을 서북쪽 당막개 바닷가 쪽에 있는 ‘진살등(鎭殺嶝)’이란 야트막한 둔덕(지금은 정지작업으로 거의 평지가 되었음)에언제인지 모르지만 한 쌍의 돌장승을 세웠다고 한다.‘진살등’은 범접한 나쁜 살기가 있으면 이곳 언덕에서 진압하여 박살낸다는 의미다. 남장승에는 대[장군](/topic/장군), 여장승에는 진살등이라 새겨 놓았다.

역사가 오래된 이 마을은 2010년 현재 100가구의 200명 남짓 되는 주민들이 농사와 어업을 [생업](/topic/생업)으로 서로 도우며 살고 있다. 오래전부터 마을의 안녕을 위해 진살등에 한 쌍의돌장승을 세워 놓고 해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이면 동제당에 제사를 지낸다. 마을 사람들은 저녁때 장승 앞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풍물에 취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예전에는 소를잡아 동제와 장승제를 성대하게 지냈다. 요새는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쇠머리는 올린다. 이곳에서 소를 잡아 장승제사를 지낼 때에는 소의 피를 장승의 몸에 뿌리고 소의 크고 우람한 아래턱뼈를 왼새끼줄로 묶어 장승의 목에 매달아 둔다. 소의 피를 뿌리는 것은 도깨비나 짐승의 접근을 막고자 하는 의도이고, 이빨이 달린 턱뼈를 매달아 두는 것은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이나 나쁜 재액의 근접을 막으려는 의미에서이다. 장승제를 지내고 나서는 장승 앞에 짚불을 지펴서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이 불을 타넘는다. 이를 ‘불넘기’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한 해의 액운을 쫓게 된다고 한다.

이 마을의 돌장승은 역사가 오래되어 고색창연하고, 생김새가 좋아서 예술적으로 뛰어난 조각으로 여겼다. 1988년 남도문화제 최우수상 수상으로 마을과 함께 석장승도 유명해졌다가 1989년에 잃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게 밴 이 장승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찾지 못했다. 지금의 장승은 199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진도 덕병마을의 바로 이웃마을인 세등리에도 쇠뼈를 매단 짐대가 있다. 이곳에는 장승은 없고 짐대만 서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밤에 [미륵바위](/topic/미륵바위)를 모신 마을의 제당에 가서 일명 별신제라 부르는 동제를 지내고, 다음에 [짐대제](/topic/짐대제)를 지낸다. 특이한 것은 미리 뽑힌 [제관](/topic/제관)들은 금기를 지키기 위해 열사흗날에 집에서 나와 동제당 근방에 짚으로 가설한 ‘마람’이란 거처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제사 준비는 이장이 한다. 제물에는 [주과포](/topic/주과포)혜와 쇠머리를 반드시 준비한다. 이곳에서는 짐대제를 거리에서 지낸다고 하여 [거리제](/topic/거리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짐대 앞에 제물을 진설하기에 앞서 짐대를 내려 짐대의 윗부분에 [한지](/topic/한지)를 묶고, 그 아래에 소의 턱뼈를 매달며, 짐대의 아랫부분에도 한지를 묶어 둔다. 그리고 짐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 서 있는 당산나무에 새끼줄로 고정시킨다. 그러고 나서 짐대에 제사를 지낸다. 이 마을에서는 과거 [새마을운동](/topic/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의 3년 동안 말고는 제사가 중단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마을에서 발생하는 불상사(제사를 지내지 않는 동안 11명이 죽음)를 없애고 풍년이 들어잘살기를 바라는 뜻에서라고 한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대지포마을에서는 동제를 지내고 당산나무에 큼직한 소의 넓적다리뼈를 매단다. 대지포는 물건리에서 미조리로 가는 국도의 중간 지점의 바닷가에30여 가구가 있는 포구 마을이다. 도로에서 해안가로 약 40m 거리에 마을이 있고, 그 중간에 당산이 있다. 수령 약 300년의 느티나무 당산목과 그 아래 큰 [밥무덤](/topic/밥무덤)이 만들어져있다. 반원형을 이루는 당산은 크기가 직경이 약 12m이다. 비교적 넓은 편인 당산의 왼쪽 부분에 당산목이 서 있고, 둘레에는 야트막한 [돌담](/topic/돌담)이 있다. 음력 10월 15일에 제수를 많이 마련하여 당산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낸 뒤 밥무덤에 메를 묻고 나서 소의 넓적다리뼈 두 개를 당산나무에 매단다. 쇠뼈를 매다는 것은 잡귀잡신의 범접을 막고, 마을에재난이 없고 고기가 많이 잡히기를바라는 뜻에서 행하는 주술적 행위이다.

경남 남해에서는 이와 같이 동제를 지내고 쇠뼈를 매다는 지역이 더러 있다. 남해군 삼동면 봉화리 내산, 상주면 금포, 상주, 남해읍 서변리 등지이다. 쇠뼈를 매다는 대신 동제를 지낸 뒤 제단 앞에서 쇠뼈를 불에 태우는 곳도 있다. 남해군 서면 노구리 노구마을이 그곳이다. 이는 뼈를 태우는 고약한 냄새를 맡고 악귀나 잡귀잡신이 멀리 달아나라는 이유에서이다. 쇠뼈는 아니지만 닭을 한 마리 잡아 털을 뽑아서 나무에다 매달아 두는 마을이 있다.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수곡마을이다. 동제를 지내고 나서 이렇게 하는데에는 잡귀잡신이나 역신이 이 마을에 함부로 침입하면 이 닭처럼 털이 뽑혀 죽는다는 위협의 뜻이 숨어 있다. 요새는 닭 매달기를 하지 않는다.

대전시 중구 금동에도 거리제를 마치고 당산나무에 소의 턱뼈를 매달아 놓는다. 쇠머리의 절반은 산제당에 바치고, 나머지 반은 턱뼈를 발라 당산나무에 줄을 쳐서 매달아 둔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서는 마을 어귀 양쪽에 목간을 세우고 그 사이를 [금줄](/topic/금줄)로 연결시켜 짐승의 뼈를 매단다. 이 뼈가 어떤 짐승의 것인지 구체적으로 적시되지 않았지만 쇠뼈일 가능성이 높다.

짐승의 뼈를 매다는 대신 그 뼈를 땅에 묻는 곳이 있다. 경남 사천시 사남면 [화전](/topic/화전)리 화전마을에서는 마을의 액운을 없애고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말의 머리를 당산 근방에 [매장](/topic/매장)했다는데, 지금은 하지 않는다. 말의 머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행위 자체가 끔찍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경남해안 및 도서지방의 민속문화 조사연구 (강용권, 동아대학교, 1972)
남해안의 민속신앙 (하종갑, 우석, 1984)
여보게 김서방 (최래옥, 미완, 1987)
벅수와 장승 (김두하, 집문당, 1990)
도깨비 날개를 달다 (김열규, 춘추사, 1991)
전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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