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신부가 처음으로 시가(媤家)로 가는 [신행](/topic/신행)(新行)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피해야 하는 방위와 관련된 살(煞)의 일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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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Cnt | 0 |
wkorname | 김효경 |
정의 | 신부가 처음으로 시가(媤家)로 가는 [신행](/topic/신행)(新行)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피해야 하는 방위와 관련된 살(煞)의 일종. | 정의 | 신부가 처음으로 시가(媤家)로 가는 [신행](/topic/신행)(新行)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피해야 하는 방위와 관련된 살(煞)의 일종. | 내용 | 비가시적(非可視的) 살(煞)의 일종인 [옥녀살](/topic/옥녀살)은 ‘옥녀각시’, ‘옥녀각시살’ 등으로 불린다. 신부의 첫 [신행](/topic/신행)이라는 시간과 신행하는 길의 방향이 어디인가와 연관하여 피해야 하는 방위이므로 새신부를 상징하는 ‘각시’라는 용어가 붙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옥녀살이 옥녀각시로 표현되면서 그 내용도 상이해진다. 옥녀살이 신행하는 달과 관련되는 것에 반해서 옥녀각시는 신행하는 날과 관련된다. 한 사례로 충남 청양군의 한 [지관](/topic/지관)(地官)은 신행하는 날짜와 관련해 옥녀각시의 존재를 파악한다. 옥녀살이 12달을 4등분하여 석 달씩 살이 해당 방위를 공유하도록 했다면, 옥녀각시는 한 달의 세부 단위인 10일을 5등분하여 4방위에 각기 2일을 배당하고 나머지 2일은 무탈한 날로 간주한다. 1일과 2일에는 동쪽, 3일과 4일에는 남쪽, 5일과 6일에는 서쪽, 7일과 8일에는 북쪽에, 9일과 10일에는 승천(昇天)하기 때문에 옥녀각시가 없다.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언급되는 또 다른 비인격적인 힘인 ‘손’과 동일한 성향으로 볼 수 있다. 날짜의 변화에 따라 해당 방위에서 일을 하면 탈이 난다는 손이 신행일에만 옥녀각시로 표현된 셈이다. 그러나 옥녀각시는 일상 속의 손과 달리 특별한 의례 상황과 결부된 것이므로 옥녀살의 일종이라 하겠다. 옥녀각시는 옥녀살의 다른 표현이지만 그 변화 안에는 옥녀살에 대한 민중의 정서가 포함되어 있다. 옥녀살은 신행하는 달의 방향만을 가리도록 되어 있다. 불길한 방위는 피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옥녀각시는 그날의 방위를 피했다 하더라도 그 방위가 어디인가에 따라 시가(媤家)와 친정, 심지어는 새색시 본인의 미래도 예견한다. 옥녀살이 단순히 액을 막기 위한 피방(避方)이라면 옥녀각시는 피방인 동시에 그 방향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는 전조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다. 신행 가는 신부가 옥녀각시를 ‘등에 지고 오는지’, ‘품에 안거나 이마에 끼고 오는지’, ‘옆에 끼고 오는지’에 따라 시집과 친정의 행·불행이 좌우된다. 옥녀각시를 등에 지고 오면 친정이 불행해진다. 이런 경우 곧바로 시댁으로 향하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곳을 들려 빙 돌아서 간다. 예를 들어 친정이 논산이고 시가가 공주인데 옥녀각시를 등에 지고 간다면, 곧장 공주로 들어[가지](/topic/가지) 못하고 금산이나 대전 등지로 돌아가야 한다. 이 경우에는 반나절이면 될 거리를 하루 내내 돌아서 간다. 옥녀각시를 등에 지고 갈 경우에는 친정에 변고가 생긴다. 친정 재산의 일부를 잃거나 식구 중 한 명을 잃게 된다. 딸이 시집간 직후 곧 논 한 [마지기](/topic/마지기)를 잃기도 했고,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가 옥녀각시를 안거나 이마에 끼고 가면 시집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 혹시라도 시집온 후 집안에 탈이 발생하면 신부 탓을 했다. 이때 ‘옥녀각시를 앞으로 품고 왔네’, ‘이마에 붙이고 왔네’ 하며 신부를 닦달하여 시집살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때문에 옥녀각시가 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충남 보령시의 한 [마을](/topic/마을)에서는 미리 액막이를 하기도 한다. 친정에서 팥 [주머니](/topic/주머니) 두 개를 만들어 주면 시댁 [대문](/topic/대문)에 들어서기 전에 이것을 대문에 던지기도 한다. 한편 신부가 옥녀각시를 양쪽 옆구리에 끼고 오면 그다지 흉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간혹 왼쪽에 끼고 오면 신부의 건강이 나빠지고, 오른쪽에 끼고 오면 새댁이 건강하게 잘 산다고도 한다. 이처럼 옆구리에 끼고 오는 것을 선호했기에 이런 경우 시댁에 들어갈 때도 대문을 통과하지 않고 집의 울타리를 뜯고 옆걸음으로 들어가게 하기도 한다. 옆에 대한 선호가 각별하다 보니 모든 것을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하게 한 것이다. 옥녀살이 옥녀각시가 되면서 동남서북이라는 방위 개념이 옥녀각시의 등, 품, 왼쪽과 오른쪽 옆구리 등 신체 일부를 지칭하게 되었다. 살(煞)이 의인화(擬人化)되면서 방위도 그에 맞게 의인화된 셈이다. 이때 방위의 기준은 친정에서 시집으로 향하도록 선 것으로, 시가에서 볼 때를 기준으로 한다. ‘등=친정’, ‘품 혹은 이마=시집’이라는 등식은 시가가 옥녀각시를 바라보는 기준임을 의미한다. 어느 곳에서든 절대방위는 존재한다. 그러나 방위에 대한 이해를 용이하도록 하는 것이 품, 이마, 옆구리 등의 상징성이다. 이는 한 사람의 창작물이라기보다 오랜 기간 옥녀살을 옥녀각시로 인식하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민중의 소박한 인식체계라고 할 수 있다. 때에 따라 달라지는 절대방위와 관련된 옥녀살을 옥녀각시의 신체 구조로 이해하게 되면서 쉽게 각인되고 전승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옥녀각시의 이러한 관행은 새댁이 시집오는 첫날 닿게 되는 주당(周堂)과 뒤섞이기도 한다. 주당이 대문에 닿으면 신부는 대문을 피해 들어가야 하는데, 이때 흔히 울타리를 뚫고 들어간다. 주당과 옥녀각시가 발생하는 시점이 동일하기에 개념이 혼재된 것이다. 일단 집안으로 들어간 새댁은 혹시라도 불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손이 없는 방위에 앉힌다. 이는 옥녀각시와는 무관한 것임에도 때로는 신부가 옥녀각시를 끼고 왔기에 [아랫목](/topic/아랫목)이 아니라 [윗목](/topic/윗목)에 앉힌다는 증언을 하기도 한다. 신행의 모든 순간이 주당 혹은 옥녀각시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댁이 시가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은 시집식구에게나 새댁에게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그 순간에 발생할지 모를 불길한 운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최대한 노력한다. 이러한 관념이 옥녀각시, 옥녀살, 주당, 손 없는 방위 등을 철저히 따르게 하는 기제가 된 것이다. 간혹 충남지역에서는 옥녀각시에 대한 믿음이 확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사](/topic/이사)하는 방위와 관련하여 옥녀각시가 부각되기도 한다. 옥녀살과 마찬가지로 옥녀각시도 석 달마다 동서남북의 순으로 옮겨간다. 옥녀각시가 없는 방위로 이사 가면 집안에 우환이 들끓기 때문에 역시 피한다. 이외에 처녀로 죽은 딸의 혼을 옥녀각시라 하여 집안에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비운의 조상의 일종인 왕신의 다른 형태일 뿐 방위개념과는 무관하다. | 내용 | 비가시적(非可視的) 살(煞)의 일종인 [옥녀살](/topic/옥녀살)은 ‘옥녀각시’, ‘옥녀각시살’ 등으로 불린다. 신부의 첫 [신행](/topic/신행)이라는 시간과 신행하는 길의 방향이 어디인가와 연관하여 피해야 하는 방위이므로 새신부를 상징하는 ‘각시’라는 용어가 붙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옥녀살이 옥녀각시로 표현되면서 그 내용도 상이해진다. 옥녀살이 신행하는 달과 관련되는 것에 반해서 옥녀각시는 신행하는 날과 관련된다. 한 사례로 충남 청양군의 한 [지관](/topic/지관)(地官)은 신행하는 날짜와 관련해 옥녀각시의 존재를 파악한다. 옥녀살이 12달을 4등분하여 석 달씩 살이 해당 방위를 공유하도록 했다면, 옥녀각시는 한 달의 세부 단위인 10일을 5등분하여 4방위에 각기 2일을 배당하고 나머지 2일은 무탈한 날로 간주한다. 1일과 2일에는 동쪽, 3일과 4일에는 남쪽, 5일과 6일에는 서쪽, 7일과 8일에는 북쪽에, 9일과 10일에는 승천(昇天)하기 때문에 옥녀각시가 없다.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언급되는 또 다른 비인격적인 힘인 ‘손’과 동일한 성향으로 볼 수 있다. 날짜의 변화에 따라 해당 방위에서 일을 하면 탈이 난다는 손이 신행일에만 옥녀각시로 표현된 셈이다. 그러나 옥녀각시는 일상 속의 손과 달리 특별한 의례 상황과 결부된 것이므로 옥녀살의 일종이라 하겠다. 옥녀각시는 옥녀살의 다른 표현이지만 그 변화 안에는 옥녀살에 대한 민중의 정서가 포함되어 있다. 옥녀살은 신행하는 달의 방향만을 가리도록 되어 있다. 불길한 방위는 피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옥녀각시는 그날의 방위를 피했다 하더라도 그 방위가 어디인가에 따라 시가(媤家)와 친정, 심지어는 새색시 본인의 미래도 예견한다. 옥녀살이 단순히 액을 막기 위한 피방(避方)이라면 옥녀각시는 피방인 동시에 그 방향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는 전조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다. 신행 가는 신부가 옥녀각시를 ‘등에 지고 오는지’, ‘품에 안거나 이마에 끼고 오는지’, ‘옆에 끼고 오는지’에 따라 시집과 친정의 행·불행이 좌우된다. 옥녀각시를 등에 지고 오면 친정이 불행해진다. 이런 경우 곧바로 시댁으로 향하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곳을 들려 빙 돌아서 간다. 예를 들어 친정이 논산이고 시가가 공주인데 옥녀각시를 등에 지고 간다면, 곧장 공주로 들어[가지](/topic/가지) 못하고 금산이나 대전 등지로 돌아가야 한다. 이 경우에는 반나절이면 될 거리를 하루 내내 돌아서 간다. 옥녀각시를 등에 지고 갈 경우에는 친정에 변고가 생긴다. 친정 재산의 일부를 잃거나 식구 중 한 명을 잃게 된다. 딸이 시집간 직후 곧 논 한 [마지기](/topic/마지기)를 잃기도 했고,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가 옥녀각시를 안거나 이마에 끼고 가면 시집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 혹시라도 시집온 후 집안에 탈이 발생하면 신부 탓을 했다. 이때 ‘옥녀각시를 앞으로 품고 왔네’, ‘이마에 붙이고 왔네’ 하며 신부를 닦달하여 시집살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때문에 옥녀각시가 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충남 보령시의 한 [마을](/topic/마을)에서는 미리 액막이를 하기도 한다. 친정에서 팥 [주머니](/topic/주머니) 두 개를 만들어 주면 시댁 [대문](/topic/대문)에 들어서기 전에 이것을 대문에 던지기도 한다. 한편 신부가 옥녀각시를 양쪽 옆구리에 끼고 오면 그다지 흉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간혹 왼쪽에 끼고 오면 신부의 건강이 나빠지고, 오른쪽에 끼고 오면 새댁이 건강하게 잘 산다고도 한다. 이처럼 옆구리에 끼고 오는 것을 선호했기에 이런 경우 시댁에 들어갈 때도 대문을 통과하지 않고 집의 울타리를 뜯고 옆걸음으로 들어가게 하기도 한다. 옆에 대한 선호가 각별하다 보니 모든 것을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하게 한 것이다. 옥녀살이 옥녀각시가 되면서 동남서북이라는 방위 개념이 옥녀각시의 등, 품, 왼쪽과 오른쪽 옆구리 등 신체 일부를 지칭하게 되었다. 살(煞)이 의인화(擬人化)되면서 방위도 그에 맞게 의인화된 셈이다. 이때 방위의 기준은 친정에서 시집으로 향하도록 선 것으로, 시가에서 볼 때를 기준으로 한다. ‘등=친정’, ‘품 혹은 이마=시집’이라는 등식은 시가가 옥녀각시를 바라보는 기준임을 의미한다. 어느 곳에서든 절대방위는 존재한다. 그러나 방위에 대한 이해를 용이하도록 하는 것이 품, 이마, 옆구리 등의 상징성이다. 이는 한 사람의 창작물이라기보다 오랜 기간 옥녀살을 옥녀각시로 인식하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민중의 소박한 인식체계라고 할 수 있다. 때에 따라 달라지는 절대방위와 관련된 옥녀살을 옥녀각시의 신체 구조로 이해하게 되면서 쉽게 각인되고 전승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옥녀각시의 이러한 관행은 새댁이 시집오는 첫날 닿게 되는 주당(周堂)과 뒤섞이기도 한다. 주당이 대문에 닿으면 신부는 대문을 피해 들어가야 하는데, 이때 흔히 울타리를 뚫고 들어간다. 주당과 옥녀각시가 발생하는 시점이 동일하기에 개념이 혼재된 것이다. 일단 집안으로 들어간 새댁은 혹시라도 불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손이 없는 방위에 앉힌다. 이는 옥녀각시와는 무관한 것임에도 때로는 신부가 옥녀각시를 끼고 왔기에 [아랫목](/topic/아랫목)이 아니라 [윗목](/topic/윗목)에 앉힌다는 증언을 하기도 한다. 신행의 모든 순간이 주당 혹은 옥녀각시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댁이 시가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은 시집식구에게나 새댁에게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그 순간에 발생할지 모를 불길한 운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최대한 노력한다. 이러한 관념이 옥녀각시, 옥녀살, 주당, 손 없는 방위 등을 철저히 따르게 하는 기제가 된 것이다. 간혹 충남지역에서는 옥녀각시에 대한 믿음이 확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사](/topic/이사)하는 방위와 관련하여 옥녀각시가 부각되기도 한다. 옥녀살과 마찬가지로 옥녀각시도 석 달마다 동서남북의 순으로 옮겨간다. 옥녀각시가 없는 방위로 이사 가면 집안에 우환이 들끓기 때문에 역시 피한다. 이외에 처녀로 죽은 딸의 혼을 옥녀각시라 하여 집안에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비운의 조상의 일종인 왕신의 다른 형태일 뿐 방위개념과는 무관하다. | 역사 | 조선 후기에 관과 민에서 두루 사용된 『[천기대요](/topic/천기대요)(天機大要)』의 방서(方書)에는 [옥녀살](/topic/옥녀살)(玉女煞)이라 하여 월(月)에 따라 닿는 방위로 보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기록에 의거하지는 않지만 [신행](/topic/신행)일에 따라 피해야 하는 방위로 보기도 한다. 옥녀살이 신행하는 방위에 국한된 관념인 데 반해, 옥녀각시는 신행하는 방위뿐만 아니라 새신부를 비롯하여 친정과 시가의 미래운명을 예견하는 전조(前兆)로도 활용된다. 신행이라는 특별한 의례의 시간과 공간에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여 관리함으로써 삶을 예견하고,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민간 주술적인 관념이다. 옥녀각시는 민간에서 유행하던 살의 일종이므로 그에 관한 역사적 실체는 찾기가 어렵다. 옥녀(玉女)는 도교에 나오는 신녀(神女)의 하나로, 몸과 마음이 깨끗한 여자를 지칭한다. 이러한 옥녀가 시집을 가게 되면서 각시라는 수식어가 첨가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 덕흥리 벽화고분에 도교의 여러 신령과 함께 등장한다. 옥녀는 도교의 신녀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간에서 산신으로 혹은 창조설화속의 거인(巨人)으로 등장한다. 인근에서 가장 높고 깊은 굴이나, 특별한 형상을 지닌 지형지세에 대한 [풍수](/topic/풍수)인식체계의 하나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곳저곳에 위치한 [옥녀봉](/topic/옥녀봉)(玉女峯) 전설은 옥녀의 신비함이 극화된 것으로, 민간에서 옥녀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옥녀각시는 이러한 옥녀에 대한 관념의 한 분파일 것이다. 옥녀살은 시집가는 신부의 첫길인 신행(新行)에 피해야 하는 방위로 계절에 따라 다음과 같이 순환한다. 춘삼월(春三月) 동방(東方, 寅卯辰) 하삼월(夏三月) 남방(南方, 巳午未) 추삼월(秋三月) 서방(西方, 申酉戌) 동삼월(冬三月) 북방(北方, 亥子丑) 12달을 사시(四時)로 나누어 각기 3개월씩 흉한 방위에 옥녀살이 머문다. 봄에는 동방, 여름에는 남방, 가을에는 서방, 겨울에는 북방에 있다. 이 방위만을 피하면 옥녀살은 피할 수 있다. 옥녀각시는 옥녀살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신행하는 방위에 존재하는 살의 일종으로 충남 지역에서만 특별하게 나타나는 특이성이 있다. 그중에서도 청양, 예산, 당진, 공주 지역에 국한되어 나타난다. 옥녀살이 옥녀각시로 변화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둘이 관련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옥녀살이나 옥녀각시 모두 첫길을 떠나는 신부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 피해야 하는 방위라는 공통된 특성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이 어떠한 연관성속에서 다른 속성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역사 | 조선 후기에 관과 민에서 두루 사용된 『[천기대요](/topic/천기대요)(天機大要)』의 방서(方書)에는 [옥녀살](/topic/옥녀살)(玉女煞)이라 하여 월(月)에 따라 닿는 방위로 보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기록에 의거하지는 않지만 [신행](/topic/신행)일에 따라 피해야 하는 방위로 보기도 한다. 옥녀살이 신행하는 방위에 국한된 관념인 데 반해, 옥녀각시는 신행하는 방위뿐만 아니라 새신부를 비롯하여 친정과 시가의 미래운명을 예견하는 전조(前兆)로도 활용된다. 신행이라는 특별한 의례의 시간과 공간에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여 관리함으로써 삶을 예견하고,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민간 주술적인 관념이다. 옥녀각시는 민간에서 유행하던 살의 일종이므로 그에 관한 역사적 실체는 찾기가 어렵다. 옥녀(玉女)는 도교에 나오는 신녀(神女)의 하나로, 몸과 마음이 깨끗한 여자를 지칭한다. 이러한 옥녀가 시집을 가게 되면서 각시라는 수식어가 첨가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 덕흥리 벽화고분에 도교의 여러 신령과 함께 등장한다. 옥녀는 도교의 신녀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간에서 산신으로 혹은 창조설화속의 거인(巨人)으로 등장한다. 인근에서 가장 높고 깊은 굴이나, 특별한 형상을 지닌 지형지세에 대한 [풍수](/topic/풍수)인식체계의 하나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곳저곳에 위치한 [옥녀봉](/topic/옥녀봉)(玉女峯) 전설은 옥녀의 신비함이 극화된 것으로, 민간에서 옥녀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옥녀각시는 이러한 옥녀에 대한 관념의 한 분파일 것이다. 옥녀살은 시집가는 신부의 첫길인 신행(新行)에 피해야 하는 방위로 계절에 따라 다음과 같이 순환한다. 춘삼월(春三月) 동방(東方, 寅卯辰) 하삼월(夏三月) 남방(南方, 巳午未) 추삼월(秋三月) 서방(西方, 申酉戌) 동삼월(冬三月) 북방(北方, 亥子丑) 12달을 사시(四時)로 나누어 각기 3개월씩 흉한 방위에 옥녀살이 머문다. 봄에는 동방, 여름에는 남방, 가을에는 서방, 겨울에는 북방에 있다. 이 방위만을 피하면 옥녀살은 피할 수 있다. 옥녀각시는 옥녀살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신행하는 방위에 존재하는 살의 일종으로 충남 지역에서만 특별하게 나타나는 특이성이 있다. 그중에서도 청양, 예산, 당진, 공주 지역에 국한되어 나타난다. 옥녀살이 옥녀각시로 변화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둘이 관련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옥녀살이나 옥녀각시 모두 첫길을 떠나는 신부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 피해야 하는 방위라는 공통된 특성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이 어떠한 연관성속에서 다른 속성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지역사례 | 지금까지 옥녀각시에 대한 보고는 충남지역에 집중되었다. 또한 청양군의 칠갑산 부근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홍성, 보령, 서천, 금산, 공주 등에서도 두루 확인된다. 이외의 지역에서도 확인될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아직까지는 보고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선굿보다 양반굿이라 하여 앉은굿이 유행하는 지역인 동시에 조선 후기에는 유림 세력이 강했다. 옥녀각시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지역사회의 토대 속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신행](/topic/신행)과 관련한 주당은 전국적으로 두루 확인되지만 옥녀각시가 충남지역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앉은굿의 전통 속에서 다양한 방서의 유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독경쟁이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들에 의해 방서 속의 [옥녀살](/topic/옥녀살)이 언급되면서 강하게 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정감록을 비롯하여 동학, 천주교 등 민중종교가 크게 유행했음을 고려할 때 앉은굿 전통과 민중의 정서가 만들어 낸 민중 신앙관념으로 보인다. 옥녀각시에 대한 이해는 지역적인 차이가 없이 대동소이하다. 충남 홍성에서는 신부가 신행할 때 옥녀각시를 옆구리에 끼고 들어오면 그 집안이 부자가 되고, 반면에 등에 지거나 가슴에 품고 오면 집안이 망한다고 한다. 충남 보령에서는 옥녀각시를 옆에 끼고 오거나 등에 지고 오면 신부에게 좋지만, 머리에 이고 오거나 이마에 붙이고 오면 신부에게 좋지 않다고 여긴다. | 지역사례 | 지금까지 옥녀각시에 대한 보고는 충남지역에 집중되었다. 또한 청양군의 칠갑산 부근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홍성, 보령, 서천, 금산, 공주 등에서도 두루 확인된다. 이외의 지역에서도 확인될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아직까지는 보고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선굿보다 양반굿이라 하여 앉은굿이 유행하는 지역인 동시에 조선 후기에는 유림 세력이 강했다. 옥녀각시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지역사회의 토대 속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신행](/topic/신행)과 관련한 주당은 전국적으로 두루 확인되지만 옥녀각시가 충남지역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앉은굿의 전통 속에서 다양한 방서의 유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독경쟁이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들에 의해 방서 속의 [옥녀살](/topic/옥녀살)이 언급되면서 강하게 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정감록을 비롯하여 동학, 천주교 등 민중종교가 크게 유행했음을 고려할 때 앉은굿 전통과 민중의 정서가 만들어 낸 민중 신앙관념으로 보인다. 옥녀각시에 대한 이해는 지역적인 차이가 없이 대동소이하다. 충남 홍성에서는 신부가 신행할 때 옥녀각시를 옆구리에 끼고 들어오면 그 집안이 부자가 되고, 반면에 등에 지거나 가슴에 품고 오면 집안이 망한다고 한다. 충남 보령에서는 옥녀각시를 옆에 끼고 오거나 등에 지고 오면 신부에게 좋지만, 머리에 이고 오거나 이마에 붙이고 오면 신부에게 좋지 않다고 여긴다. | 의의 | 새댁이 처음 시집으로 옮겨가는 [신행](/topic/신행)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새로운 환경과 지위로 인해 혼란이 예견되는 순간이다. 이 혼란과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주술과 종교적 조치를 마련했고, 그중 하나가 옥녀각시이다. 옥녀각시는 [옥녀살](/topic/옥녀살)의 이칭(異稱)으로서 조선 후기 방서류에 신행하는 달에 있는 방위의 신이다. 악신의 하나로 그 방향으로 신행하게 되면 탈을 입는다. 때문에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가족 구성원과의 첫 만남에 낄 위험 요소를 제거하여 완전하고 안락한 삶을 만들기 위한 사회문화적 조치인 셈이다. 더불어 옥녀살을 옥녀각시라는 민간에서 이해하기 용이한 대상으로 의인화하고 방위 개념에서 탈피해 옥녀각시의 신체인 등, 품이나 이마, 옆구리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각인되는 효과를 크게 하였다. 의례적 불안함을 옥녀각시라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통제하고, 기운이 규범화됨으로써 예측이 가능한 시간과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즉 옥녀각시는 신부의 거주 공간 이동으로 야기될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한 고도의 주술적인 관념이 투영된 문화장치인 것이다. | 참고문헌 | 개정증보 [천기대요](/topic/천기대요) (명문당, 1970) 소라실장승제 (이필영·심우성·김효경, 공주문화원, 1998) 청양지방의 혼속에서 나타나는 옥녀각시 속신에 관한 연구 (김진영, 민속학연구 18, 국립민속박물관, 2006) 한국인의 [일생의례](/topic/일생의례)-충청남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서해와 금강이 만나 이룬 문화 (이해준, 충남역사발전연구원, 2009) | 의의 | 새댁이 처음 시집으로 옮겨가는 [신행](/topic/신행)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새로운 환경과 지위로 인해 혼란이 예견되는 순간이다. 이 혼란과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주술과 종교적 조치를 마련했고, 그중 하나가 옥녀각시이다. 옥녀각시는 [옥녀살](/topic/옥녀살)의 이칭(異稱)으로서 조선 후기 방서류에 신행하는 달에 있는 방위의 신이다. 악신의 하나로 그 방향으로 신행하게 되면 탈을 입는다. 때문에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가족 구성원과의 첫 만남에 낄 위험 요소를 제거하여 완전하고 안락한 삶을 만들기 위한 사회문화적 조치인 셈이다. 더불어 옥녀살을 옥녀각시라는 민간에서 이해하기 용이한 대상으로 의인화하고 방위 개념에서 탈피해 옥녀각시의 신체인 등, 품이나 이마, 옆구리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각인되는 효과를 크게 하였다. 의례적 불안함을 옥녀각시라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통제하고, 기운이 규범화됨으로써 예측이 가능한 시간과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즉 옥녀각시는 신부의 거주 공간 이동으로 야기될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한 고도의 주술적인 관념이 투영된 문화장치인 것이다. | 참고문헌 | 개정증보 [천기대요](/topic/천기대요) (명문당, 1970) 소라실장승제 (이필영·심우성·김효경, 공주문화원, 1998) 청양지방의 혼속에서 나타나는 옥녀각시 속신에 관한 연구 (김진영, 민속학연구 18, 국립민속박물관, 2006) 한국인의 [일생의례](/topic/일생의례)-충청남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서해와 금강이 만나 이룬 문화 (이해준, 충남역사발전연구원,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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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문화원 | 당진의 민간신앙 | 이인화 | 1996 | 충청남도·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 도서지 | 1997 | 국립민속박물관 | 한국의 마을제당 -충청남도편 | 1998 | 화산문화 | 서해안배연신굿 | 하효길 글·송봉화 사진 | 2002 | 충청남도 세시풍속 | 2002 | 도서출판신화 | 안섬풍어제 | 이인화 | 2003 | 당진문화원 | 당진풍어굿 | 박종익·송봉화 | 2003 | 한국민속학회 | 충남 당진군 송악면 고대리 안섬 당제의 실상과 활로 모색 | 박종익 | 2004 | 역사문화학회 | 조선후기 홍성 성호리 동제의 성립과 신격의 변화 | 강성복 |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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